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34)
제 1034화
249화. 명왕족의 첫 출격(1)
킨젤로 신본부는 모든 지하 격납고를 개방한 채, 또 한 번 ‘이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단원들이 쉴 새 없이 짐을 옮기는 와중, 언제나처럼 부바르와 아이나스만이 중앙홀 구석에 앉아 키득거리고 있었다.
“하아…….”
비슈켈은 초췌한 얼굴로 손아귀에 묻은 머리카락들을 내려다보았다. 방금 무심코 이마를 쓸어넘기다 떨어진 머리카락인데 그 수가 심상치 않았다.
이제 그는 부바르와 아이나스가 부러울 지경이었다. 바멀 연합이 결국 최강 세력으로 우뚝 서서 항복을 권고한 지금, 저토록 해맑고 즐겁게 지낼 수 있다니.
‘저들의 머릿속엔 과연 무엇이 들어 있을까. 뇌일까, 아니면 그냥 푹신푹신한 반죽일까. 아마 후자일 테지.’
반죽의 형태를 상상한 비슈켈은 저도 모르게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넋이 나간 채 하하 웃는 비슈켈을 보며 곁에 있는 간부들은 측은한 마음을 느꼈다.
모두가 자신들의 신세를 측은하게 여기고 있기도 했다. 말이 좋아 이사지, 사실 지금 킨젤로는 도주해서 은신할 준비를 하는 셈이었다.
“비슈켈, 정신을 붙잡게.”
“아, 좋지 않은 모습을 보였습니다. 피롭스 님.”
“아닐세. 나도 걱정이긴 하니까. 대체 어디로 가야 한다는 말인가…….”
짐은 싸고 있지만, 사실 인세엔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비행함선이 흔해지면서 사실상 지상 대륙은 그 어떤 오지라 할지라도 금방 발견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지하세계는 얼마 전 진마계가 패퇴하며 끝장이 났다.
심지어 바멀 연합엔 기록 마법사가 존재했다. 지상이든 지하든 발레리아가 마음먹고 추적을 시작하면 반드시 잡힐 수밖에 없었다.
오늘은 1804년 5월 26일, ‘라프라로사 연설’이 끝난 바로 다음 날이다. 이제 킨젤로에게 남은 시간은 엿새뿐이었다. 항복할 것인지, 항전할 것인지, 도망칠 것인지. 그 안에 결단을 내려야 했다.
당연하게도, 킨젤로가 꿈꾼 미래는 이것이 아니었다.
처음 바멀 연합과 적명족의 전투를 유도하기로 결정했을 땐, 분명 시간을 많이 벌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이다.
그러나 전투는 누구도 예상치 못한 변수가 가득했고, 그 과정에 마족 3인방이 소환되며 킨젤로가 그럭저럭 이득을 취하는 듯 보이기도 했으나, 결국 채 한 달이 지나기도 전에 싸움은 끝났다.
양패구상, 어부지리 같은 아름다운 미래 따윈 오지 않았다. 라프라로사 해방이라는 최악의 결과만 남았을 뿐.
[거, 왜들 그렇게 죽상이야? 여차하면 심연으로 가자니까?]마족 3인방이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들은 라프라로사가 해방된 이후부터 미트라 대사막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대신 물리적 공격을 무시할 수 있는 능력은 사라졌다.
마족 3인방이 전성기 이상의 전투력을 되찾았다는 건 킨젤로에게 위안이 되는 대목이나, 그래도 라프라로사를 얻은 바멀 연합에는 비할 바가 아니었다.
“심연에선 망자만이 지낼 수 있지 않습니까, 스리비 님. 게다가 마녀의 허락을 받아야 하고…….”
[그렇지, 피롭스. 허락이 필요하지. 마녀가 그래서 이번에 오르갈을 부른 것 아니겠어? 그런데 망자만 거기서 살 수 있다는 건 틀렸어. 살아 있어도 마녀의 허락만 구하면 지낼 수 있거든.]현재 오르갈은 마녀 헬루람의 부름을 받아 심연으로 건너간 상태였다. ‘받아야 할 것과 줄 것’이 있다는 마녀의 전언이 있던 것이다.
킨젤로가 목적지도 없이 일단 짐만 싸두는 이유이기도 했다. 결정권자인 오르갈이 부재중이니까.
[마살룬이 생각하기에 마녀는 오르갈이 죽는 걸 싫어한다. 그렇기에 마녀의 비호 아래 살아남을 수도 있다. 바멀 연합에게 항복하지 않더라도.]“오, 그렇다면 단원들도.”
[그러나 너희는 마녀에게 특별한 존재들이 아니지. 오르갈만 살려주고, 너흰 어떻게 되건 살펴주지 않을 것이다.]그 말에 피롭스는 한숨을 내쉬었고, 비슈켈은 으득 이를 악물었다. 스리비는 생각해보니 그렇겠다며 맞장구를 쳤다.
“어차피 대업을 위해 킨젤로에 투신한 이후, 우린 마녀의 도움 같은 걸 기대하며 싸우지 않았습니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우린 길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우리 힘으로.”
“어머 오라버니 너무 멋져요!”
마르지엘라였다. 그녀는 연이은 폭주로 인해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는 여느 때처럼 장난기가 가득한 채 반짝거렸다.
“마르지엘라. 괜찮은 것이냐?”
“물론이죠, 오라버니. 몸이 이렇다 보니 이사에 도움이 될 수 없는 게 조금 속상하지만요.”
비슈켈이 이를 악물었다. 안타까운 마음을 억누를 수 없었다. 한 번만, 동생이 건강한 몸으로 살아가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오랜 소망이 악몽처럼 떠올랐다.
그러나 정작 마르지엘라 본인은 전혀 슬프거나 우울하지 않았다. 그녀가 씨익 미소를 지으며 비슈켈과 피롭스를 둘러보았다.
“피롭스 경,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단장님이 돌아오면 무엇이든 결정이 나겠죠. 어쩌면, 우리가 숨어서 살 필요가 없을지도 모르죠?”
“단장께서 바멀 연합에 항복을 택할 수도 있다는 말인가?”
“에이, 설마요. 진 경이 추구하는 방향이 우리 대업과 크게 일치하는 부분이 있긴 하지만, 결국 완전히 같지는 않으니까요. 단장님이라면 죽으면 죽었지 한 물이 되려고 하진 않을 거예요.”
[마치 너라면 항복을 할 수도 있다는 듯이 들리는구나.]“맞아요, 스리비 님!”
해맑은 대답에 스리비도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긴, 마녀가 오르갈에게 대단한 무언가를 주지 않으면 이제는 답이 없어. 여기 있는 전원은 시한부 신세라는 거다. 우리야 뭐 다시 심연으로 돌아가면 그만이지만, 마살룬 말대로 너흰 마녀에게 그냥 공기 같은 거니까. 혹은 그 이하일지도.]“차라리 예전처럼 지플과 동맹을 맺어야 하나…….”
부바르의 혼잣말에 단원들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지플이 가진 마신석의 힘이 너무 거대해졌으니, 그들에게 기대는 순간 쓰다 버릴 패나 시간을 벌기 위한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너무 걱정만 하면서 살지 말아요, 우리! 제 힘도 조금씩 깨어나고 있고, 통제할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이 힘을 이용해 진 경과 싸우고 싶지는 않지만, 우릴 끝까지 몰아붙인다면 어쩔 수 없겠죠.”
“……정말인가, 마르지엘라? 통제할 수 있다는 말인가?”
“아마도요, 피롭스 님. 물론 진 경이 말한 엿새보다는 시간이 더 필요해요. 그리고 다행히도, 시간을 벌어줄 사람들이 있는 것 같아요.”
“시간을 벌어줄 사람들?”
단원들의 시선이 마르지엘라에게 집중되었다.
“네, 아주 많죠.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 그리고 저희처럼 용서를 구하지 않을 사람들이 있잖아요.”
지플과 가네스토, 그리고 태양신교.
마르지엘라는 그중 태양신교에 주목하고 있었다. 최근 그녀 안에 ‘내재된’ 존재의 감각이 깨어난 탓에 그들이 어디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태양신교. 제 생각이 맞다면…… 그들은 곧 어리석은 선택을 할 거예요. 아주 무의미하고 어리석은 선택을. 그러니까 우린 이삿짐 잘 싸두고, 차분히 단장님을 기다리도록 하죠. 단장님께서 무엇이든 좋은 소식을 가져오길 기대하면서.”
* * *
흑해 심부, 5왕의 영역.
흑해와는 어울리지 않는, 한 마리의 까마귀가 검고 탁한 하늘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하늘은 마치 깨진 유리처럼 날카로운 균열이 가득해서, 당장이라도 무너져 내릴 것 같았다.
‘형제들이여…….’
까마귀의 이름은 니르간드.
이제 둘밖에 남지 않은 흑해 5왕 중 하나, 근원석의 네 번째 조각. 그는 앞서 사망한 글리엑과 키알, 스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도망치고 있었다.
‘시론 룬칸델. 대체 어떻게 그 모든 운명을 초월한 것인가. 그가 가진 힘은 이미 다 닳아 없어졌어야 하건만, 어째서 전보다도 더 강해졌다는 말인가. 정녕 영속적인 초월을 이뤘다는 것이냐……!’
스가 시론의 검 앞에 허무하게 스러지며 고뇌했듯이, 그 역시 시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를 통해 형제들과 하나가 되고자 한 꿈은 물거품처럼 사라졌고, 그 대신에 남은 건 소멸의 위협뿐이었다.
흑해의 5왕들은 시론의 힘 없이 하나가 될 수 없다. 설령 가장 강한 조각인 ‘모르가니엘’이 이 영역 어딘가에 자리를 잡고 있더라도, 그들은 서로를 도울 수 없었다.
[가아악…….]돌연 니르간드의 날개가 꺾였다.
열흘 전 시론의 검에 베인 까닭이었다. 지난 열흘 동안, 니르간드는 시론과 총 세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도망쳤다.
잡히는 건 시간문제다. 꼬리를 잡힐 때마다 상처가 하나씩 늘어가고 있으니, 이대로라면 며칠 내에 소멸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은 5왕의 영역을 벗어날 수조차 없다. 회복해서 제약을 풀 만큼의 시간을 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백만 걸음은 떨어져 있을 터인데, 시론의 칼날이 등 뒤에서 차갑게 일렁이는 것 같았다. 창성을 초월한 그는 니르간드조차 감히 대적할 수 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앞서 스가 그토록 쉽게 당한 사실을, 보자마자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모르가니엘, 형제여. 그대는 시론이 재앙이 된 사실을 알고 있는가? 그래서 움직이고 있는가, 아니면 나처럼 비참하게 도망치고 있는가. 숨고 있는가.’
이내 무거운 몸을 일으켜 다시 날개를 펼치려는 찰나.
니르간드는 갑자기 시론이 가까워진 사실을 깨달았다. 느닷없이 앞쪽에 펼쳐진 어둠 사이로 거대한 힘이 쏟아지고 있었다.
시론이라면 답이 없다. 그러나 시론이 창성을 초월했다고 한들, 갑자기 5왕의 영역에서 공간 이동까지 할 수는 없었다.
니르간드는 다시 한 번 침착하게 기운을 읽었다.
‘시론이 아니다. 창성에 다다른…… 다른 필멸자일 뿐.’
니르간드는 몇 초쯤 고민한 후 앞으로 날갯짓을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흑해 5왕에선 볼 수 없던 새하얀 빛이 일렁였다.
니르간드로서는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따뜻한 기운이었다. 가만히 그 빛을 들여다보니 설명할 길 없이 마음이 편해지고 있었다. 마치 오랜만에 고향의 불빛을 마주한 것처럼.
그 빛 속에서 두 사람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태양신교 대사제 루크, 그리고 무녀 산나였다.
“안녕하세요, 흑해의 왕 니르간드 님. 이렇게 갑자기 인사를 드리게 되네요. 저는 태양신교의 무녀, 산나라고 합니다.”
산나가 고개를 숙이며 먼저 입을 열었다. 옆에 선 루크에게선 이제 지난번 진에게 당한 상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고 이쪽은 우리 대사제 루크 님이시지요.”
[……태양신교?]“우리, 처지가 비슷한 것 같은데. 함께 태양신에 대해 공부하는 게 어떨까요? 저희에게도, 니르간드 님께도 많은 도움이 될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