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52)
제 1052화
251화. 대적자들(2)
오르갈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라고?]그는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기록창에 가까이 다가갔다. 기록 마법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지만, 직감적으로 이 기록창은 무언가 다르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설명하기 어려운 이질감이 전신을 찔러댔다.
[그걸…… 그걸 왜 이제야 말하냐!?]“사정은 알겠는데, 멍청한 소리 좀 그만해. 내가 너한테 이걸 말할 이유가 있겠어? 우린 적이었는데.”
당연히 동료들에게는 이미 이 기록창을 보여 준 적이 있지만, 별다른 맥락이나 단서를 찾을 수 없으니 집중적으로 분석할 내용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발레리아는 라프라로사 해방 이후 매일 적들의 동향을 살펴야 했으니 시간도 없었다.
“어쨌거나 정말 타 차원, 즉 다중세계가 존재한다면, 심지어 그 시작은 지플의 역사 조작이었다면. 그때마다 히스터가는 언제나 지플의 최대 골칫거리였겠지.”
히스터.
어떤 면에서, 지플은 룬칸델보다도 그 이름에 치를 떤다고 할 수 있었다. ‘역사 조작’이라는 자신들의 무기를 정면으로 받아칠 수 있는 가문이니 말이다.
“네 기억에 의하면, 다중세계의 역사는 언제나 큰 줄기가 비슷했어. 대부분 네가 일종의 구원자 역할을 맡았고, 진과 나만 없었을 뿐. 그렇다면 나와 선조들도, 너와 협력하지는 않은 채로 항상 지플에 대항했을 거다. 그리고 이 기록창은, 그 결과 중 하나겠지.”
오르갈은 전율하며 발레리아와 눈을 맞췄다.
-솔더렛은 매번 테마르를 선택했다. 내가 지금도 너를 선택했듯이. 무엇보다 그가 가진 힘은 나보다 크지 않아. 내가 인지하지 못한 걸,그가 나보다 먼저 알았을 것 같지는 않군.
-하지만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다면, 나보다 먼저 분화된 세계들을 알아보았을지도 모르지.
헬루람이 한 말이 떠올랐다.
머릿속에선 축적된 다중세계의 기억이 한꺼번에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그 수많은 세계에서 발레리아가 한 번도 나타나지 않은 건, 그저 자신이 만나지 못한 것일지도 몰랐다. 발레리아는 언제나 그의 인식 범위 밖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하지만 왜? 나는 언제나 지플의 가장 거대한 대항마였다. 어느 세계에서도 발레리아의 목적이 지플을 없애는 것이라면, 왜 내게 손을 뻗지 않은 것이지?’
어쩌면 헬루람이 늘 자신을 선택했듯이, 그리고 솔더렛은 늘 테마르를 선택했듯이.
발레리아는 늘 진을 선택했기 때문은 아닐까?
순간적으로 오르갈의 뇌리에 그런 생각이 스쳤다. 하지만 어떤 생각도, 결국엔 왜? 라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발레리아가 굳이 진 룬칸델만을 선택한 이유는 떠오르는 바가 전혀 없었다. 그 세계들에서, 언제나 최선의 대항마는 자신이었는데도.
[머리가…… 어지럽군. 그렇다면 다른 세계의 발레리아는 나와 손잡지 않은 이유가 무엇이냐?]“그 발레리아들은 나지만 내가 아니야. 그래도 추측해 보자면, 나는 언제나 숨어 지냈지. 그러다가 너와 접선을 시도하던 중 지플에게 발각되어 제거되었을 수도, 내가 태어나기 전에 우리 가문이 완전히 짓밟혔을 수도 있겠지. 그냥 너를 믿지 못했을 수도 있고.”
오르갈이 다중세계의 모든 역사를 훤히 꿰고 있는 건 아니다. 당연하게도 그가 기억하는 건, 어디까지나 ‘다른 세계의 오르갈들’이 직접 겪은 일들뿐이며, 그마저도 뚜렷하지 않은 부분이 많았다.
[그럴 수 있겠군…….]“오르갈. 지금 중요한 건, 타 차원에 간섭할 수 있는 게 어쩌면 지플만은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이야.”
헬루람은 마신대가 모종의 방법을 통해 이 세계의 지플을 지원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그 결과가 바로 마신석이 최근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이고.
그러나 발레리아의 가설대로라면, 이 세계에 영향을 끼치는 타 차원의 존재는 마신대뿐만이 아니다.
“타 차원의 발레리아가 내가 이 기록창을 볼 수 있게 만든 시점이 궁금하긴 하네.”
[시점?]“이 메시지를 타 차원에서 실시간으로 나를 관찰하다 보낸 건지, 아니면 기록 마법으로 타 차원의 미래를 알아낸 후 보낸 건지 궁금하다는 뜻이야. 전자일 것 같기는 해. 이 세계의 미래를 다 알고 있다면, 굳이 기록창에 축하한다는 듯 서술하지 않았겠지.”
기록 마법의 끝은 단지 과거의 모든 일을 밝혀내는 게 아니라, 미래의 기록까지 확인하는 경지다. 다만 그 미래는 아즈 밀처럼 확정되지 않아서, 기록을 본 사람의 선택에 따라 결과가 바뀌게 된다.
발레리아가 아는 한, 그 영역을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히스터는 한 명도 없었다.
그녀가 찾아낸 가문 전승지들의 히스터 중에도 ‘미래 기록’을 자유자재로 확인하는 인물은 없었다. 전승지에 따르면 히스터들은 살아가며 우연히 미래 기록을 엿보는 순간을 축복이나 계시로 여겨 왔다.
그리고 발레리아도 그런 축복을 누린 순간이 있었다.
진이 1795년 중급 생도로서 마미트에서 임무를 수행하며 처음 발레리아를 찾았던 그 순간도, 1799년에 진과 발레리아가 마미트에서 만나게 된 그 순간도.
발레리아는 전승지에서 확인한 미래 기록을 통해 전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설마 그 꿈도. 다른 세계의 내가 보낸 메시지였던 건가?’
불현듯, 발레리아는 그녀가 10대 시절 가장 오랫동안 꿔 온 예지몽을 떠올렸다.
계속 그렇게 쓰러져 있을 건가?
꺼져.
한심하긴. 진, 당신 잘난 형제들이 좋아하겠어.
뭐야, 너. 내 이름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궁금한 게 남은 걸 보니 아직 세상에 미련이 있군. 따라와, 기껏 손을 내밀어 준 사람의 목에 칼을 겨눴던 건 용서해 줄게.
발레리아는 성국 사건으로 진의 정체가 만천하에 알려진 다음에야 그 꿈의 주인공이 진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마미트에서 진을 만나자마자 익숙한 듯 그의 이름을 불렀었고 말이다.
이내 발레리아의 생각은 혼카 섬의 기억으로 향했다. 말리엣 히스터의 전승지, 그곳에서 진과 해변을 걸으며 나눈 날이 떠올랐다.
그때 발레리아는 예지몽과 미래 기록에 대해 진에게 고백하며 이런 말을 했었다.
-나는 그 꿈과 미래의 기록들이 모두, 내 선조들이 남긴 안배이자 운명이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어. 아마 선조들이 본 미래의 기록엔, 내가 사명의 끝으로 향하려면 네가 필요하다는 내용이 있었겠지.
‘어쩌면 진에 대한 기록을 보고 안배를 남긴 건, 선조들이 아니라…… 다른 세계의 나였을 수도 있겠군.’
꿈도, 미래 기록도, 그리고 ‘진이 한 번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 준 기록도, 전부 타 차원의 발레리아가 알려 준 것일 수도 있는 것이다.
쉽사리 생각이 정리되지 않았다.
그러나 한 가지 사실만은 계속 선명해졌다. 히스터가와 발레리아는, 지플이라는 거악을 처단하기 위한 열쇠로 오직 진 룬칸델만을 선택했다는 것.
자연스레 발레리아의 시선이 진에게 닿았다.
진은 죄책감에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다중세계의 진실을 들으며 회귀자로서의 부채감에 휩싸이고 있었다.
왠지 그 세계들에서 자신은 발레리아를 만나서도 폐인처럼 지내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자신은 오르갈과 함께 싸운 적이 없고, 발레리아가 지금처럼 활약하지 못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발레리아는, 돌연 뚜벅뚜벅 걸어서 그에게 다가갔다.
복잡한 진실 때문에 혼란에 빠져 있던 오르갈과 동료들이 흠칫하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발레리아는 순식간에 진과 얼굴이 닿을 듯 마주 섰고, 진도 예상치 못한 듯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아씨, 저거 왜 저래. 야! 빨간 머리! 안 떨어져? 내가 지금 안 그래도 머리가 터질 것 같거든?”
“진.”
“응?”
“나는 십대 때 세상을 등지고 히스터로서의 사명만으로 살았어. 그러다 너를 만났고, 너를 선택했고, 너의 세계로 들어갔지. 덕분에 난 산드라처럼 시끄럽고 성가신 녀석도 동료로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변했어.”
[……뭐냐, 갑자기 흥미진진하군. 세계의 끔찍한 진실이 드러난 마당에 갑자기 사랑인가?]오르갈에겐 루나가 눈치를 주었고, 헤도는 욕설을 쏟아 내려는 산드라의 입을 틀어막았다.
“그리고 모든 발레리아는 분명 너를 선택했어. 그리고 너를 선택한 걸 후회하지 않았을 거야. 그 수많은 세계가 멸망하거나 지플에게 귀속되었어도, 다른 세계의 발레리아들은 한 번도 네게 실망한 적이 없어.”
물론 발레리아는 그런 기록을 본 적이 없다.
그러나 확신할 수 있었다. 자신의 마음은, 기록 마법이 아니어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이 세계도 결국 그런 최후를 맞이할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때도 나는 여전히 그렇게 생각할 거야. 너와 함께한 건, 내 모든 삶에서 가장 잘한 일이었다고.”
[와, 이 정도면 거의 공개 고백 아닌, 읍, 읍.]“좀 닥쳐 오르갈. 중요한 순간이다.”
“읍읍 읍읍읍 읍읍으읍 헤도, 놔라! 죽어! 읍!”
산드라 한 사람만 빼고는 사실 발레리아의 갑작스러운 언행에 가슴이 두근거리고 있었다. 특히 엔야는 얼굴이 새빨개진 채 쉴 새 없이 눈동자를 굴렸다.
‘으아아, 이게 무슨 횡재야! 어떻게 해 진 공자! 어떻게 받을 거야!’
다들 엔야만큼이나 진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발레리아 본인은 대답을 듣고자 한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이 세계에선 아직 우리가 진 것도 아니잖아? 나는 잠시 머리 식히러 바람 좀 쐬고 올게. 어차피 오르갈에게 중요한 이야긴 다 들은 것 같으니까.”
발레리아가 유유히 자리를 떠났다.
“아니! 진 공자, 가만히 있을 거예요? 따라가야죠! 팬클럽 회장으로서 지금 이 태도는 아주 실망이에요!”
“하긴 우리 꼬마가 연애를 안 하긴 안 했어, 이야. 이럴 때 그냥 입 닫고 가만히 있어 버리네. 아, 너 혹시 역사쟁이가 별로냐? 성에 안 차?”
“읍으읍! 으읍!”
진은 현기증을 느끼며 동료들을 바라보았다.
“다들 진정하세요. 제가 아니라 여러분 때문에 발레리아가 민망하겠습니다. 일단 회의부터 끝내도록 하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