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090)
제 1090화
255화. 켈리악 지플의 죽음, 그리고……(7)
“정말이면 좋겠다. 단지 꿈이 아니라, 진짜로 엘로나 경이 아직 그 괴물 안에 남아 있으면 좋겠어.”
“그럴 거다.”
“어차피 엘로나 경이나 나나 용서받을 수는 없겠지. 무슨 일이 있어도. 하지만 가끔은, 동료들 덕에 과분한 위로를 받는다. 그분과 나의 영혼은 타락한 적 없다는 사실을, 동료들은 알고 있으니까.”
진은 고개를 떨군 베라딘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단지 지플로 태어났기에, 어쩔 수 없이 지플이 되었기에, 그와 엘로나는 늘 죄인일 수밖에 없었다. 연합을 위해 싸우고 있는 지금 이 순간에도.
“괜히 우울한 소리를 지껄였군. 후우. 적들을 찾기까지 무엇을 할 것인지, 결정된 내용은 있냐?”
“아직 나도 제대로 갈피를 못 잡겠어. 일단 발레리아와 르엣 님의 기록 분석을 기다리면서, 마녀를 만나볼 생각이다.”
갈피를 못 잡겠다, 연합의 총수로서 그런 마음을 입 밖으로 내보일 수 있는 건 오로지 벗과 동료들뿐이었다.
이제는 세상 전체가 마신대와 말루기아라는 공포에 떨고 있었다. 제국이 하루아침에 멸망했으니, 세상엔 이제 안전한 지역 따윈 남아 있지 않다.
끊임없이 바멀 연합의 영토로 피난을 오던 세인들의 발걸음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33차원 켈리악의 등장으로 인해 전세가 지플 쪽으로 기울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었다. 단지 일반인들의 입장에선 모든 게 의미가 없다고 느껴질 뿐.
절망과 좌절, 세상은 유례없이 깊은 무기력 속으로 가라앉고 있었다. 바멀 연합에 기대는 마음들이, 조금씩 꺾여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마녀를 만나는 것 또한 기다려야 하는 일이지. 빌어먹을, 무엇 하나도 주도적으로 움직이기가 어려워.”
“함부로 움직이다가 적들이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세상을 또 쑥대밭으로 만들기 시작할까 봐?”
“그래. 시작부터 끌려다니는 느낌이야. 파고들 틈이 안 보여.”
“진.”
이번엔 베라딘이 진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과감하게 결단해라. 세상 전부의 목숨을 책임지고 있다는 압박감이 있을 테지만, 네가 굳어 있으면 굴러갈 것도 안 굴러간다.”
“……알았다.”
“어차피 끌려다녀서는 미래가 없어. 그리고 설령 우리가 지고 세상이 멸망한다고 한들, 그건 네 탓이 아니야.”
“베라딘 공의 말이 맞소.”
“뭐야, 단테. 너 왜 이렇게 빨리 돌아왔냐?”
진과 베라딘이 고개를 돌려 단테를 쳐다보았다. 그는 세수를 한 듯 얼굴이 깨끗했다.
“아주 잠깐만 혼자 있으면 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런데 막상 혼자 있어보니 자꾸 생각이 어두운 쪽으로만 향하더군. 나는 실패한 군주요. 따라서 제국이 멸망한 건 내 탓이지. 그러나 그대는 군주가 아니오, 진. 지더라도 그대 책임이 아니외다.”
회귀자이기 때문에 내 책임이다.
진은 발레리아의 경고가 떠올라 벗들에게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단테와 베라딘의 말에 묘한 위로를 받는 건 사실이었다.
“진, 나는 그대의 비밀을 어렴풋이 알고 있소.”
진의 눈동자가 커졌다.
-네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 그렇게 일러주셨소. 나와 그대 모두에게 하신 말씀이오. 우린 충분히 잘 해냈소. 어쩌면 그 이상 잘할 수 없던 정도였는지도 모르오. 단지 어쩔 수 없는 슬픔이 있을 뿐이오. 그러니, 이제 일어나지 않은 모든 일은 잊는 게 좋겠소.
검황성전이 끝나고 함께 론의 죽음을 기릴 때 단테가 했던 말.
그날, 단테는 론의 의지를 전달받아 어렴풋이 진의 회귀를 알게 되었다. 진은 그날을 떠올리며 단테와 눈을 맞췄다.
“어? 비밀? 너희 둘만 아는 거냐?”
“검황성전, 적들이 그때보다 더 강할 뿐 본질은 같소. 단지 어쩔 수 없는 일들이 있는 것이지. 그러니 움직이시오, 그대가 앞을 보아야 우리도 앞을 볼 수 있소.”
“나도 좀 알려주면 안 되냐?”
“실은 나도 잘 모르오. 비밀 같은 건 없소, 베라딘 공. 그냥 진을 위로하고자 한 말이오.”
“그…… 흠, 그래.”
베라딘은 차마 단테를 더 추궁할 수 없었다. 방금 제국이 멸망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가, 어떤 심정으로 서 있고, 어떤 심정으로 입을 열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다.
어쨌거나 베라딘으로서는 단테가 힘을 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감사한 일이었다.
“그래…… 앞을 봐야지.”
그렇게 대답한 순간, 별안간 진의 통신기가 울렸다.
{진 공자.}
“국왕 전하, 말씀하십시오.”
{지금, 티칸으로 로키아 가네스토가 찾아왔습니다. 아메리스 경에 의하면 분신이라고 하더군요. 공자와 루시 경을 만나야겠다고 합니다.}
“바로 가겠습니다.”
진은 즉시 붉은부엉이를 타고 티칸으로 복귀했다. 동료들은 로키아를 궁내로 들이지 않고 정원에 대기시켜두고 있었다.
“아, 왔군. 후손.”
“죄인은 죄인이군, 로키아 가네스토. 본체로 올 자신은 없었을 테지.”
그 말에 로키아는 후드를 벗으며 미소를 지었다.
후드에 가려져 있던 얼굴은, 이번엔 진이 알고 있는 얼굴이었다. 헤일린 룬칸델이 아니라 천 년 전 기록에서 본 로키아 가네스트 본인의 모습.
“미치지 않고서야 여길 본체로 올 이유가 있겠어? 죄인 취급은 좀 지겹네. 사태가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도 모르는 녀석들이.”
“잔뜩 화가 나 있군. 묘하게 예민해. 마신대의 수장과 말루기아의 등장은 네 계산에 없던 일인 모양이지.”
로키아가 진을 쳐다보았다.
켈리악과 말루기아의 등장은 실제로 로키아를 답답하게 만들고 있었다. 말루기아를 완벽하게 통제할 수 없으리라는 건 전부터 인지하고 있었으나, 설마 그녀가 이런 식으로 마신대를 빠르게 불러들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부정할 수가 없군. 그래, 마신대의 수장과 말루기아는 너무 빨리 부딪쳤어. 그리고 말루기아가 당하면, 이 세상은 마신대에 의해 폐기될 것이다.”
“태양신의 완전한 부활을 이룰 수 없게 되기 때문인가? 말루기아가 죽으면.”
“그래, 킨젤로 녀석들이 조잡한 꿈 능력으로 파악한 그 내용대로다. 켈리악은 이번 싸움으로 인해 큰 상처를 입었어. 머잖아 회복할 테지만, 그는 이제 말루기아를 죽이려고 할 것이다. 한 번 죽을 뻔하며 깨달았을 테지. 이 세계의 말루기아는 생포가 불가능하다는걸.”
말루기아가 소멸하면 당연히 킨젤로의 부활은 끝난다. 마신대가 이 차원을 남겨둘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물론 말루기아가 마신대의 본진들에도 피해를 주었으니, 이 차원을 폐기하는 일이 전처럼 빠르진 않겠지. 하지만 태양신 부활이라는 목적이 사라진 이상…….”
“로키아, 마치 마신대의 수장을 잘 아는 듯이 말하는구나.”
말을 끊은 진의 입가에 조소가 걸렸다.
“내가 겪은 그자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하지 않는 부류다. 그리고 태양신의 부활이 마신대의 목적이라면, 지금은 더더욱 절실해졌을 테지. 네 말대로 본진까지 타격을 받았으니, 복구할 수단이 필요할 것이다. 나는 그자가 말루기아를 포기할 것이라는 말에 동의할 수 없군. 또한, 우린 이런 이야길 나눌 사이가 아니다.”
“의외로구나, 후손. 지금 너는 세상의 멸망을 막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듣고 싶어 하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설령 내가 주는 정보라 할지라도.”
“이러나저러나 어차피 네 머릿속엔 우릴 이용할 생각밖에 없을 테지. 찾아온 목적은 그게 전부인가? 켈리악이 말루기아를 죽이고, 이 세계를 폐기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려주는 것? 그렇다면 썩 꺼지도록.”
로키아는 어깨를 으쓱이며 진을 쳐다보았다.
“아니, 목적은 따로 있다. 거래를 하고 싶군.”
“거래?”
“아, 마침 저기 오는군.”
막 궁을 빠져나온 루시가 정원에 다다르고 있었다. 로키아에 대한 분노를 다스리느라 늦게 나온 것이었다.
“로키아 가네스토…….”
“나를 원망하고 있군, 루시. 하지만 네 딸, 헤일린은 스스로 내게 왔어. 그리고 나는 지금 네가 간수하지 못한 딸애를 돌려주러 온 거지.”
“……뭐라고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지. 헤일린 룬칸델, 네 딸은 아직 살아 있다. 그 몸에 깃든 아락시온의 힘은 내가 분리하고 있어. 헤일린을 넘겨줄 테니, 테마르의 왼팔을 가져와.”
루시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동요하고 있었다. 로키아는 쐐기를 박으려는 듯 품에서 수정구를 꺼냈다. 그 속엔 잠이 든 헤일린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
헤일린이 루시의 곁을 떠난 건 그녀가 여덟 살일 때. 수정구 속 헤일린은 이십 대처럼 보일 만큼 자라 있었으나 루시는 바로 딸을 알아보았다.
“헤, 헤일린.”
“지금은 아락시온의 힘을 분리하느라 잠에 빠진 상태다. 그 힘이 다 분리되면 평범한 인간으로 돌아오는 것이지. 설마 멀쩡히 살아 있는 딸이, 죽은 연인의 왼팔만도 못하지는 않겠지?”
루시가 충격에 몸을 떠는 사이, 진은 로키아가 수세에 몰렸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솔더렛의 안배. 로키아는 흑해에 있을 그 안배에 집착하고 있다. 상황이 계산을 벗어난 만큼 안배에 더 빨리 닿아야 할 이유가 있을 테지. 테마르의 왼팔은, 그 일을 위해 필요한 것이 틀림없다.’
지난번에 피롭스와 아이나스의 꿈 능력으로 켈리악과 로키아의 거래를 확인했을 때까지, 진은 테마르의 왼팔이 가진 진짜 의미를 알지 못했다.
지금은 강렬한 직감이 찾아오고 있었다. 그 왼팔이 안배에 닿기 위한 핵심일 것이라고.
따라서 거래는 거절해야 했다. 루시에겐 큰 상처가 될 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내 진이 루시를 부르려는 순간, 그녀는 먼저 고개를 젓고 있었다.
“……거부합니다.”
“뭐라고?”
로키아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녀는 루시가 거래를 거부하는 결과를 아예 상정하지 않고 있었다.
“잊었나요? 로키아 가네스토. 헤일린, 그 아이의 정체가 무엇이었든, 나와 테마르에게 그 아이는 그때의 모든 이들처럼, 똑같이 룬칸델의 일원이었습니다. 살리든 죽이든, 마음대로 하세요. 그 아이가 나약해서 가문에 폐가 된다면, 나는 언제든 외면할 준비가 되어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