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1129)
제 1129화
258화. 전 차원의 포식자(19)
심장이 뛰었다. 사실 추측보다는 제발 그렇기를 바라는 기대에 더 가까웠던 일이다.
진은 혹시 몰라 연신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폈다. 여전히 전장의 시간은 흐르지 않고 있었다. 계단을 오르기 시작한 자신과, 라프라로사 안에서 맥동하는 마력과 혼돈의 흐름만이 움직이고 있었다.
진은 발레리아를 끌어안았다. 또 뺨이 축축해졌다. 다른 세계의 발레리아는, 아마 진의 품에 있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수없이 괴로운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이 상황을 만들기 위해 많은 것들을 잊고 잃고 포기했을 것이다.
“발레리아. 다중세계라는 걸 처음 알았을 때, 나는 네게 내 비밀을 말하려고 했었지. 나는…… 한 번 죽었었어. 1808년에 아킨에서 죽었고 1780년 9월 9일, 내가 태어난 날로 회귀했지. 그런데 오늘은, 다시 갓난애가 됐던 그날보다도 많이 우는 것 같다.”
숨이 차서 말은 늦고, 자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상이 아득하다. 평소라면 발을 헛디딜 일도, 설령 떨어지더라도 죽을 일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얼마든지 죽을 수 있었다.
불현듯 공포가 엄습했다. 물론 죽음 따위가 무서운 게 아니다. 자칫하면 한순간에 모든 게 물거품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두려웠다. 처음으로 희망이 가까이에서 일렁이고 있었다.
“후욱, 하아아……!”
계단을 거의 다 올랐다. 진은 하늘 대신 흘러내릴 듯 빛나는 라프라로사의 하단부를 올려 보았다.
십여 개의 보조 입구가 개방된 상태였다. 부상자를 나르는 루시의 용들, 지상 지원을 나가려는 사람들, 침투하려고 기회를 엿보는 적들, 강하 대기 중인 이엘로와 마법 기사 부대들이 입구와 근처 상공에 어지러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진은 그중 함교로 가장 깊게 이어진 입구에 계단을 이어 안으로 들어섰다. 석상처럼 굳은 비전투 승무원들도 하나같이 필사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내가 회귀한 이유가 무엇인지는 정확히 몰라. 분명 솔더렛과 관련이 있을 테지만…… 그는 모든 걸 알고 있었을까?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을까. 그렇다면 좋겠다. 결국 이 끔찍한 싸움 끝에, 사실 구원이 예정된 미래가 있는 거지. 나는 그걸 실현하기 위한 패일 뿐인 거고.”
예정된 운명.
진은 수없이 운명을 초월하며 창성에 오른 인물이고, 창성이 되기 전에도 늘 그렇게 생각했었다. 운명보다 더 강한 건 사람의 의지라고, 투쟁심이라고. 어떤 초월적 존재도 감히 사람의, 세계의 운명을 뜻대로 정하고 농락할 수는 없으리라고.
그러나 지금은 처음으로 차라리 그럴 수 있기를 바라고 있었다. 결국 켈리악의 욕망 속에 전 차원이 가라앉게 되느니, 차라리 그게 나았다.
다만 몇 초가 지나기도 전에 울화가 치밀었다.
“내가 힘들긴 한 모양이다. 거지 같은 소리를 지껄였군. 솔더렛…… 솔더렛이 나를 되살리기까지 하면서 이 더럽고 잔인한 운명으로 처넣었다고? 그토록 치열하게 투쟁했는데, 세상에 다시 없을 세력을 만들었는데, 결국 우린 켈리악 한 놈에게 다 깨지고, 나는 지금 네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력한 신세라고? X랄하지 마!”
통로 벽을 붙잡고 무거운 몸을 이끌며, 진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러댔다.
솔더렛을, 세상을.
그리고 자신을 향한 울분이었다.
“미적미적 뭐 하고 있어 이 새끼야, 빨리 가자. 라프라로사는, 커. 더 빨리 가야 한다.”
초거대 공중요새다. 계단을 오르고 안으로 들어와 통로 몇 개를 지났다고 다가 아니었다.
몸을 더 가볍게 하고 싶다. 그러나 발레리아만큼은 버릴 수 없었다. 죽었다고 할지라도 버릴 수 없었다. 진은 아까부터 더는 움직이지 않는 자신의 왼팔을 쳐다보았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이 판국에 이걸 왜 아직까지 달고 있는지.
“큽!”
그저 오른손으로 붙잡아 조금 힘을 주었을 뿐인데, 왼팔은 썩은 나무가 갈라지듯 뚝 떨어졌다. 추하악……! 검은 핏물이 한 바가지 쏟아지며 강렬한 현기증이 일었다.
정신을 붙잡고 봉인계 마법을 펼쳐 지혈을 끝내니, 오히려 몸이 확연히 가벼워졌다. 감각이 없던지라 고통조차 느껴지지 않아 팔이 아니라 독을 빼낸 것 같았다. 실제로 그 팔에 남은 켈리악의 마력은 극독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조차 의식할 수 없을 만큼 정신없는 전투가 이어지고 있었을 뿐.
“후, 운명이니 뭐니 개 같은 감상에 빠져 있으니 이걸 이제야 생각했지. 머리도 좀 도는 것 같네.”
진은 허리를 세우며 정면에 시선을 고정했다. 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닥에 떨어진 시커먼 자신의 왼팔은 쳐다보지도 않고 복도를 뛰었다.
왼팔과 함께 걱정거리 하나가 조금은 사라졌다.
내심, 진은 아메리스와 로키아가 작업을 끝낸 다음을 신경 쓰고 있었다. 자신은 걷기도 힘들 정도로 약하니, 로키아가 뒤통수를 치기 가장 좋은 순간은 바로 그때일 테니까.
하지만 이제는 설령 그런 일이 벌어져도 어느 정도는 싸울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유산은 내가 가진다. 놈을 끝장내고, 돌아가겠어. 남은 사람들끼리라도 돌아가서, 기억할 거다. 오늘 여기 누가 있었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와 함께한 사람들이 누구였는지.”
재생의 권능.
다시 달리기 시작하며, 진은 자신이 창성에 도달하며 얻은 권능을 떠올렸다.
이 전장에서, 그건 자신만이 가진 특별한 힘이 아니게 되었었다. 린파가 전사한 무렵부터는 연합원 모두가 재생의 권능에 공명하며 전장 전역에 찬란히 빛나는 파장이 일어나기 시작했었다.
-네가 가는 길에 놓인 죽음들은 너의 책임이 아닐 것이다. 너를 그렇게 만든 존재의 책임이라 할 수 있겠지. 그러나 네가 그 길의 끝에 도달할 때…… 어쩌면 너는 그렇게 많은 죽음에 짓눌리지 않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네가 창성이 되자마자 재생의 권능을 얻은 이유가 있을 것이야.
아율라가 남긴 그 말 때문일까.
진은 언젠가부터 내심 재생의 권능에 막연한 기대를 품어 왔다. 그 이후로 큰 전쟁이 있을 때면, 성국에서 그랬던 것처럼 늘 재생의 권능이 전장에 빛을 남기고는 했으니까.
혹시 그렇게 죽음 위에 재생의 권능으로 떠오른 빛들은, 언젠가 그들을 부활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마신대와 전쟁을 치르면서도 진은 그런 막연한 바람을 품었다. 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의 등 뒤에서 처참하게 쓰러진 사람들이, 자신이 구하지 못한 동료들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다고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껏 어떤 싸움에서도 한 번도 지워진 적 없는 재생의 빛은, 붉은 바다에 가려져 사라지고 말았다.
그 빛은 아무도 되살릴 수 없을 것이다. 그렇기에 진이 할 수 있는 일은, 적을 꺾고 살아남아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었다.
기억하고 그리워하고 잊지 않으려 애쓰고 사랑하는 것이었다.
저 멀리 함교 출입구가 보였다. 안으로 들어서자 르엣과 페이텔, 승무원들이 함교 너머를 바라보는 모습이 보였다. 밖에서 싸우는 이들도, 안에서 지원하는 이들도 하나같이 절박한 눈빛이었다.
저주가 해제되고 있는 작업실은 함교에서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황을 살피러 끊임없이 승무원들이 오가던 모습이 그대로 정지되어 있으니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작업실에 가까워질수록 풍경이 급격히 변했다. 서릿발처럼 복도 전체에 얼음이 솟아 있었다. 냉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진은 복도 끝, 탈라리스의 뒷모습을 응시하며 내달렸다. 이제 마력과 혼기가 문 너머, 바로 앞에서 요동치고 있었다.
“탈라리스 님, 마지막까지 이렇게 신세만 지는군요. 돌아보면, 저는 세상에 다시 돌아와 갚을 수 없는 빚만 너무 많아진 것 같습니다. 후우, 후…….”
진은 그렇게 말하며 작업실 문에 기대어 바짝 귀를 붙였다. 작업실 안에 폭풍이 갇힌 듯 마력과 혼기가 맹렬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아메리스 님!”
쾅, 쾅! 문을 두들겨도 안에서 별다른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진은 재차 문을 두드리려다 뒤돌아 주저앉았다.
“아메리스 님과 로키아는 우리만 빼고 시간이 멈춘 걸 모르나 봅니다, 탈라리스 님. 하긴, 그만큼 집중하고 있었겠죠. 1초라도 빨리 저주를 풀어야 하니까. 방해하지 말고 기다려야 하는데, 잠깐 바보가 됐습니다.”
진은 몸에 묶인 발레리아의 자세를 고쳐 주었다. 꼭 어린애를 안은 듯한 모양새가 되었다.
그 순간 일순 눈앞이 캄캄해졌다.
“……허억!”
의식을 잃은 것이다. 진은 눈을 부릅뜨며 검을 그러쥐며 주위를 살폈다. 그가 의식을 잃은 건 겨우 2초에 불과하고,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진은 식은땀을 훔치며 다시 벽에 등을 기댔다. 벽 뒤에서 아메리스와 로키아가 일으킨 진동이 전해졌다.
“탈라리스 님이 옆에 있다고 생각하니, 긴장이 풀린 것 같습니다. 그런데…… 탈라리스 님. 잠깐만 눈 좀 붙여도 되겠습니까. 로키아가 다른 마음을 먹으면 베어야 하니, 아직 저주가 풀리려면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것 같으니, 또 유산에서도 얼마든지 싸움이 벌어질 수 있으니. 잠깐이라도 체력을 회복해야겠습니다…….”
눈이 감겼다. 고개를 떨구자 발레리아의 뺨이 얼굴에 닿았다. 온기라곤 남아 있지 않은 차갑고 딱딱한 뺨이지만, 진은 따뜻하다고 생각하며 잠에 빠졌다. 위로가 된다는 착각 따위는 없었다. 그냥 그렇게 생각될 뿐이었다.
“진!? 진! 언제 왔느냐, 정신이 들어? 나 좀 보아라, 팔이, 그 몸으로 대체 왜 여기에……! 신관! 신관을 불러라!”
다시 눈을 뜬 건 그로부터 1분이 지난 후였다.
정지되었던 세계가 다시 움직이고 있었다. 탈라리스는 급격히 늙어 버린 얼굴과 목소리로 소리치고 있었다.
“이 아이는, 발레리아? 정신 차리거라! 아니, 숨이…… 하, 어서……!”
“탈라리스 님.”
진은 차분히 자신의 어깨에 올려진 탈라리스의 팔을 붙잡았다. 탈라리스는 말을 멈추며 그와 눈을 맞췄다.
“탈라리스 님. 저주는, 다 풀린 겁니까?”
탈라리스도 내내 봉인에 전념하다 방금 눈을 뜬 참이었다. 그녀 또한 막 깨어났으니, 지난 12시간의 상황을 알지 못했다.
다만 탈라리스는 생각했다. 극심한 내상에 왼팔까지 잃은 진이, 죽은 발레리아와 함께 여기 있다는 건 그만한 이유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그래, 방금 끝났다. 마력과 혼기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더군. 그래서 봉인을 푼 것이야.”
덜컥, 치이이이……!
작업실의 문이 열렸다. 마력과 혼기가 중화되며 생긴 증기가 바깥으로 쏟아졌고, 아메리스와 로키아의 모습이 나타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