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257)
제 222화
80화. 베라딘의 기억
이동 관문을 빠져나온 건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후드에 가면을 써서 얼굴을 정확히 알아볼 수 없었다.
“베라딘이 아닌 것 같다.”
“내가 보기에도 그렇소.”
진과 단테가 말했다.
얼굴이 보이지 않더라도 체형이 전혀 달랐다. 이동 관문을 빠져나온 자는 오랫동안 단련한 무인의 몸을 하고 있었다.
게다가 허리에 장검까지 차고 있으니 베라딘일 리가 없었다.
-내 별장 주소야. 여기서 벌어지는 모든 일은 가문에서 절대 감시하지 않고, 관여하지도 않아.
-둘 다 집사한테 이름을 알려 아무 때나 찾아와도 문제없도록 조치를 해둘게.
베라딘이 이곳의 주소를 알려주며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 혹시 집사인가? 처음 여길 찾아왔을 때, 아무도 없었잖소.”
단테의 말대로 두 사람은 아직 ‘집사’라는 인물을 만나지 못했다. 별장에 찾아오니 아무도 없고, 문도 잠겨 있어서 대충 뜯어내고 들어와 사흘째 베라딘을 기다리고 있던 것이다.
“집사라고 보기엔 좀 강한 것 같은데.”
“그건 그렇소.”
가면의 시선이 부서진 대문에 닿았다.
쏴아아…….
파도 소리가 무심한 가운데, 가면은 한참 동안 뚫어져라 부서진 대문을 살폈다. 분명히 뭔가 못마땅한 기색이었고, 두 사람은 왠지 마음이 무거워졌다.
스릉!
이내 가면이 장검을 뽑아 들었다.
“침입자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어, 나가서 솔직하게 말해주는 게 좋지 않겠소?”
“만약 저 가면이 베라딘의 사람이 아니라면, 죽이거나 제압을 하는 게 맞지. 넌 몰라도 난 지금 잡히면 곤란한 처지라고.”
가면이 지플의 하수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진도 브라다만테를 뽑으며 뮬타의 룬을 발동시켰다. 단테는 잠시 갈팡질팡하다가 로브를 찢어 복면을 만들고 진의 뒤를 따랐다.
조심스레 복도로 나선 두 사람이 기운을 죽이며 자리를 잡았다. 각각 복도 왼쪽과 오른쪽 방 입구에 몸을 숨기는 모습.
곧 가면의 인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는 기운을 죽인 두 사람과 반대로, 살기등등한 기세로 복도를 걷고 있었다.
가면이 진이 있는 방 앞을 지나치려는 찰나.
숨어있던 진이 그를 덮쳤다. 진은 능숙하게 가면의 뒤를 잡은 채 목에 칼날을 겨눴고, 동시에 달려든 단테가 가면이 쥐고 있는 검을 떨궈냈다.
“소리 지르지 마라. 묻는 말에만 대답하면 살 수 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제압.
그러나 진은 묘한 위화감을 느끼고 있었다. 가면은 목에 칼날이 닿았는데도 평정심을 전혀 잃지 않은 분위기였다.
“넌 누구냐?”
가면은 대답하지 않았다.
“같은 질문을 다시 하게 만들지 마라. 마지막 기회다, 넌 누…….”
진이 재차 협박을 이어가려는 순간.
촤아아……!
돌연 가면의 몸이 사라졌다.
정확히는, 그의 몸을 이루고 있는 것이 ‘물’로 변했다. 때문에 그의 목에 검을 조이고 있던 진은 일순 자세가 흐트러졌고, 단테는 기겁하며 주위를 살폈다.
‘용이다!’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가면의 정체는 용, 그중에서도 물의 신 ‘이텔미온’의 용이라는 사실을.
인세에서 활동하는 8할 이상의 용은 지플과 함께하는 상황이었다. 그렇다면 지금 두 사람이 만난 수룡 역시, 지플의 하수인일 터.
물로 변한 수룡은 벌써 복도 끝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황급히 그 뒤를 쫓는 진과 단테. 진이 설명해주지 않더라도, 저 용이 도망치게 둬서는 안 된다는 것쯤 단테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의 걱정은 기우였다.
“이런 당돌한 놈들은 또 처음이로군. 베라딘이 관심을 가질 만해.”
어느새 수룡이 복도 끝에서 다시 인간의 모습을 형성한 채 어깨를 으쓱였다.
“그만 달려들어라, 침입자인 줄 알고 잡아 죽이려던 것일 뿐이니.”
진과 단테가 서로를 바라보았다.
“……용께서는 어쩐 일로 여길 오셨습니까? 베라딘이 보낸 것입니까?”
진이 납검하며 목례하자 수룡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베라딘이 보낸 것이라고 봐야 하나. 내가 여기 집사거든. 그렇게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거라. 용이라고 집사를 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느냐?”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이상한 눈으로 본 적도 없고요.”
“그래? 그럼 됐어.”
수룡이 가면을 벗었다.
잔뜩 부풀어있는 근육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곱상한 얼굴이었다. 찰랑거리며 어깨까지 닿는 청색 머리카락 때문에 얼굴만 보면 여인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베라딘이 이텔미온의 계약자였다는 말인가?’
순간적으로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베라딘이 신의 계약자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도 9성으로만 알려졌을 뿐 계약자라는 사실이 밝혀진 적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텔미온의 계약자는 내 전생에 없었어.’
물론 전생의 진이 모든 걸 다 알고 있을 순 없었다. 그땐 칠색조 같은 정보 조직을 갖고 있지도 않았으므로 세간에 공개되지 않은 정보에 접근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무엇보다 베라딘이 계약자였다 한들, 생각해보면 놀라울 건 없었다. 지플은 가장 많은 계약자를 보유한 가문이고, 신과의 계약은 보통 ‘재능과 잠재력’으로 결정된다.
베라딘은 지플의 2세대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으니 계약자인 게 오히려 당연했다.
“내 이름은 투얀이다. 보아하니 너흰 진 룬칸델과 단테 하이란인 것 같군. 만나서 반갑구나.”
[투얀, 아무래도 침입자가 든 것 같은데!]진이 대답하기도 전에, 별안간 별장 바깥에 새로운 존재가 나타났다.
수룡을 투얀이라며 친근하게 부른 그 용은, 긴 목을 내려 머리만 복도 앞에 둔 채 큰 눈으로 두 사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베라딘이 말한 그 꼬마들 아니야?]“맞아, 피니아.”
[진 룬칸델과 단테 하이란이라고 했었나. 반갑다 얘들아! 한 번쯤 보고 싶었어.]피니아가 인간으로 변신하며 활짝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대지의 신 ‘릭타’의 지룡이었다.
이쯤 되면 진이라 할지라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단테는 아예 넋이 나간 채 진과 용들을 번갈아 쳐다보는 모습.
“베라딘 만나러 온 거야?”
피니아가 총총 앞으로 다가오며 물었다.
“그렇습니다.”
“아마 한 시간 내로 올 거야. 걔 올 때까지 우린 준비할 게 좀 있으니까, 응접실에서 쉬고 있어. 그나저나, 대문은 너희가 부순 거니?”
두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피니아가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부터는 입구 쪽 큰 바위 아래에 열쇠 있으니까, 왔을 때 우리나 베라딘이 없으면 그걸로 열어. 뭐라도 고장 나면 여기까지 재료 공수하는 게 꽤 피곤하거든.”
진과 단테는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투얀과 피니아는 더 이상 어떤 설명도 없이, 별장 옆에 있는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놀랍게도 청소 도구였다.
“뭐해? 응접실에 가 있으라니까.”
설마 베라딘이 오기 전에 청소를 하려는 건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단테 역시 마찬가지인지,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우, 우리도 돕겠습니다.”
“무슨 소리, 손님한테 허드렛일을 시킬 순 없는 노릇이지. 베라딘한테 혼나.”
투얀이 물을 형성해 바닥에 뿌리며 걸레질을 시작하자, 피니아가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다.
진과 단테는 결국 응접실에 앉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쩐지 마음이 무척 불편했다.
“……지금 용들이 청소를 하고 있는 것 맞소?”
두 용은 집사로서 베라딘이 도착하기 전에 별장을 깨끗하게 치워놓으려는 모양새였다.
“맞아. 뭐, 지플의 다른 하수인들이 아닌 게 다행이긴 하다만. 좀 당황스럽긴 하네.”
가만히 앉아 청소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단테는 내내 가시방석에 앉은 듯 안절부절못했고, 진은 둘 중 누가 베라딘의 수호룡일지에 대해 고민을 했다.
‘물? 대지? 어느 쪽이지?’
그리고 그 고민은 한 시간 뒤, 베라딘이 별장에 도착하자마자 해소가 되었다.
“친구들! 하하, 이렇게 다시 보니 너무 좋군. 마지막일 줄 알았는데 말이야, 내 수호룡들이 무례하게 군 건 아니지?”
수호룡들.
베라딘은 분명 용들을 그렇게 표현했고, 두 용은 고개를 숙이며 공손히 베라딘을 맞이했다.
여러모로 충격적인 광경이 이어진 셈이지만, 진은 더 이상 당황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두 신과 계약했든, 뭘 숨기고 있었든. 목숨을 걸고 지플에 반기를 들었던 사실은 변함이 없었다.
또한 진 역시 그들에게 감추고 있는 게 많았다.
“그나저나 단테는 몰라도, 진도 여기 와 있을 줄은 몰랐는데. 수배된 와중 내 걱정을 해준 거냐? 감동스러워서 눈물이 다 날 것 같군. 이것 봐, 여기 내 눈. 촉촉해졌잖아.”
“머리는 좀 식었냐?”
“응, 덕분에. 그땐 내가 잠깐 돌았었어, 너 아니었으면 죽을 뻔했다. 아버지한테. 아, 실제로도 죽는 줄 알았지. 마력 역류가 어찌나 심했는지, 아직까지 두통이 있다고.”
베라딘이 애써 능청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세 사람이 잠시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용들이 차를 내왔다.
“진.”
“어.”
“계획은…… 있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베라딘의 눈빛에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다.
계획이 있냐고 물어본 것은, 자신이 진을 도울 수 있는 방법이 마땅치 않기 때문이었다.
금괴에 불을 지를 때처럼 앞뒤 생각 않고 반기를 들어봐야 소용이 없었다.
베라딘은 그래서 자신이 비참했다. 진은 자신을 구해줬으나, 자신은 진을 돕는 것조차 할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의 가문만 노리고 있어도 죽은 목숨이나 다름이 없건만, 룬칸델까지 눈에 불을 켜고 진을 찾고 있으니. 베라딘으로선 진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다.
“어울리지 않게 뭘 그리 심각한 얼굴이냐, 베라딘. 난 너처럼 앞뒤 안 재고 성질대로 하는 부류가 아니라서, 이미 살길은 다 만들어 놨다.”
“정말?”
“그러니까 그건 걱정 말고, 너한테 하나 제안하고 싶은 게 있다.”
“뭔데?”
“지플이라는 이름을 버려.”
컵!
단테가 머금고 있던 찻물을 뿜었다. 게다가 들고 있던 찻잔까지 떨궈 허벅지를 데었는데, 뜨겁다고 표현조차 못 했다.
진의 발언이 그만큼 충격적이기 때문이었다.
“난 차후 지플을 완전히 무너뜨릴 계획이다. 그리고 넌 그 이름과 어울리지 않아. 내 손에 죽은 네 형제들, 그리고 네 숙부는 모두 생체 실험을 비롯한 끔찍한 일들을 저지르고 있었다.”
“역시, 숙부님을 해한 것도 너였구나…….”
뮤론 지플의 죽음도 이제는 ‘바멀’ 즉, 진의 행각이란 사실이 세상에 밝혀진 상황이었다. 디노가 성국 사건에 대한 기사를 쓰며 콜론의 비극도 다시 알린 덕이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지?”
“뭘?”
“지플, 네 가문이 준비하고 있는 것.”
베라딘이 쓴웃음을 지었다.
“글쎄, 잘 모르겠어. 내가 어디까지 알고 있던 건지.”
“진지하게 묻는 거야.”
“나도 진지하게 대답한 거야, 진 룬칸델. 혹시 이런 걸 경험해본 적 있나? 일기를 적으려는데, 무심코 어제 쓴 일기를 확인하니 내 기억과 전혀 다른 내용이 적혀 있다거나…….”
“뭐?”
“내 기억이 조작되고 있다고. 누군가에 의해. 원래는 숙부님이 범인인 줄 알았거든, 그분이 돌아가신 후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으니까. 그런데 이걸 봐 봐.”
베라딘이 품에서 노트를 꺼내 펼쳐보였다.
그곳엔 1797년 12월 25일, 진이 정체를 공개한 다음 날의 일기가 적혀 있었다.
(1797년 12월 25일.
어제는 그 녀석이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가문의 판단에 신물이 나긴 했지만, 설마 그렇게까지 이성을 잃을 줄이야……. 녀석에게 맞은 턱이 아직도 얼얼하다.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녀석의 판단이 옳았어.
가문의 마법사들을 해했다면, 아버지께서 날 죽였을지도 모른다.
하마터면 녀석들과도 마지막이 될 뻔했다. 두 사람 다 무사해야 할 텐데.)
이름이 서술되진 않았으나 단테와 진을 가리키는 내용이었다.
“마력 역류 치료가 끝나자마자 쓴 일기다. 그런데, 추가 치료가 이어진 후 난 이 날에 대한 기억이 사라졌어. 심지어 금괴에 불을 지른 그 순간도 떠오르지 않아. 내가 여기 오자마자 너흴 보고 와 있을 줄 몰랐다고 말한 건, 이 일기와 기사들을 토대로 행동한 것일 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