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43)
제 333화
106화. 기록자들(2)
‘그러고 보니 순혈 지플 특유의 하얀 머리였군.’
천 년 전의 지플, 그 시절의 마법사.
얼음 기둥 속 백발의 여인은 도저히 천 년 전의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젊은 모습이었다.
‘서른은 되었을까? 어려 보이는데.’
만빙의 절대적인 냉기에 얼어붙었기 때문인지 길고 새하얀 머리칼에 윤기가 가득했다.
감은 눈은 그저 잠든 것처럼 보여 금방이라도 빛나는 눈동자가 드러날 것 같았다.
입고 있는 로브는 작은 흠집 하나 없지만 질긴 가죽으로 만들어진 듯 보였고, 갇히기 직전까지도 꼭 쥐고 있던 지팡이는 화려한 장식 하나 없는 평범한 물건이었다.
그리고 무척 맑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해치는 건 물론이고, 작은 벌레조차 한 마리 죽이지 못할 것 같은 선한 인상.
이런 사람이 그 시절 세상을 주무르던 거악의 일원이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또한 어쩌다 이렇게 생생한 상태로 이 얼음 기둥에 갇히게 되었는지도.
여인은 금방이라도 얼음 기둥을 빠져나와 움직일 것 같았다.
“이자가 지플의 옛 마법사라고요?”
“그래. 천 년 전, 2대 비궁주께서 만빙의 힘을 이용해 이 마법사를 봉인하셨지.”
탈라리스가 얼음 기둥을 매만지며 말했다.
진은 그녀의 손등에 전에 없던 주름이 생긴 사실을 확인했는데, 그에 대해 따로 말을 하진 않았다.
“그건 조금 전에 말씀하신, 엔도르마 혈족이 맺은 서약 때문입니까?”
“그래. 너는 잘 알고 있을 테지. 대가 없는 힘은 없다는 것을.”
천 년의 계약자로서, 진은 그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한 번의 삶을 다시 얻고, 또래의 어떤 천재보다도 강한 힘과 잠재력을 갖게 된 것엔 무수한 희생과 책임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물론 탈라리스는 천 년의 계약자에 대한 내막을 모두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녀는 콜론에서 진이 홍인들을 구하는 모습을 보며 그가 그때 이미 ‘책임’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인간이라 여겨왔다.
“우리 엔도르마 혈족이 얻은 만빙의 힘도 마찬가지다. 인간이 갖기엔 지나친 힘을 얻은 대신, 세계의 이상 현상을 해결하는 일에 일조하라는 사명을 얻었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비궁이 중립을 지키는 건, 단순히 그들의 성향과 세력 때문이라고만 여겨왔는데. 그런 사명이 있었단 말인가?’
세상에 아는 이가 얼마 없는 이야기이기도 했다. 엔도르마 혈족이 ‘만빙’이라는 신검, 아니. 신과 맺은 약속은 일반적인 ‘계약자’들의 계약과는 조금 다른 성향을 띠고 있었다.
“이상 현상이라면, 어떤 것들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마녀 헬루람이 몰고 오는 재앙이 가장 대표적이지. 선대 비궁주들께서 그 여자를 막느라 고생을 많이 하셨다. 내 어머니께서도.”
“외인에게 너무 많은 것을 알려 주시는군요, 어머니.”
“외인이라니, 딸. 우리 사위가 어떻게 외인이야?”
“대체 아까부터 누구 마음대로 진을 사위라고 하시는 것인…….”
“흐응, 세인들은 대부분 모르지만 말이야. 내 어머니가 헬루람을 막지 않았다면, 세계 인구가 지금보다 수천만, 혹은 억대는 더 적었을 것이다.”
탈라리스가 시리스를 무시하며 말했다. 시리스는 한숨을 내쉬었고, 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녀의 말대로라면, 세상 사람들은 모두 비궁에 조금씩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백 년 전 벌어진 성국수호전. 그때도 비궁의 검들은 마족들의 땅에 침투해 고위 마족들을 죽여 인세의 평화에 큰 기여를 했었지.”
1대 비궁주가 만빙의 선택을 받은 이래, 비궁은 지난 천 년 동안 세상의 평화와 번영에 이루 말할 수 없이 큰 기여를 해왔다.
탈라리스 본인 또한 젊은 시절부터 지금까지 ‘이상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큰 희생을 치렀고, 치르고 있는 중이고 말이다.
“이 여자도 그런 이상 현상 중 하나였다더군.”
진이 다시 얼음 기둥 속 여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내가 수많은 애인들을 사귀면서 느낀 건데 말이다. 역시 사람은 겉만 봐서는 알 수가 없어. 겉보기엔 쭉정이 같은 놈이 어마어마한 터프가이일 때도 있었고, 그 반대도 많았지. 이 여자는 겉으로만 봐선, 개미 한 마리 못 죽일 인상이지?”
“그렇게 보이긴 합니다.”
“외세의 침략 때문에 자세한 기록은 유실되었지만, 비궁 서고에 남아있는 기록만으로도 이 여자는 헬루람에 준하는 악마였다.”
문득 진의 머릿속에 얼마 전 세 번째 무덤의 기록 장치에서 확인한 한 여자의 이름이 떠올랐다.
-어떻게 됐어? 사라, 적들의 탑을 다 부수고 온 거냐?
-아니, 안 되겠더라. 엘로나 같은 마법사가 또 있었다면 믿을 수 있겠냐? 실더레이. 얼마나 끔찍하던지, 한 오십 개쯤 때려 부수다가 포기하고 돌아오는 길이다.
-뭐, 저, 정말이냐……!?
-또 속냐, 실더레이. 크하하! 속을 걸 속아라. 매번 이렇게 쉽게 속으니 내가 장난을 그만둘 수가 없잖아.
-뭐? 거짓말이라고? 또?
-그래. 그런 미친 괴물이 세상에 또 있겠냐, 응? 하여간 멍청해서 귀여운 맛이 있다니까.
엘로나 지플.
그 시절 룬칸델의 십대기사들조차 미친 괴물이라고 표현하며 치를 떨고, ‘비슷한 마법사가 또 있다’는 농담조차 실더레이를 대번에 움츠러들게 만드는 이름.
“이름은 엘로나 지플, 순혈 지플이긴 한데 가주였던 적은 없다. 이름 외엔 알려진 정보가 단 하나도 없지. 이상할 정도로 기록이 없는 여자야. 하지만 2대 비궁주께서 만빙에 남긴 단서에 의하면…….”
대륙을 통째로 지우는 마법사였다고 한다.
탈라리스가 뒷말을 이으며 얼음 기둥에 만빙의 힘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기둥이 빛을 발하며 곳곳에 몇 개의 ‘화면’이 떠올랐다.
‘기록 장치? 영상!?’
흠칫하며 기둥을 살피는 진.
솔더렛이 남긴 기록 장치와 달리, 얼음 기둥에서 떠오른 것은 영상이 아닌, 그림처럼 정지된 화면이었다.
그 화면들 속엔 당시의 엘로나 지플이 전투를 펼치는 광경, 혹은 그녀가 휩쓸고 지나간 전장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영상이 아닌 정지 화면일 뿐인데도, 진은 일순 엘로나의 모습에 압도되는 기분을 느껴야만 했다.
지팡이를 뻗은 엘로나, 무너진 산맥, 그녀에게 대항하기 위해 모인 수만 명의 인간들…….
그다음 순간으로 보이는 화면 속엔, 한 사람도 살아있는 사람이 없이 뼈와 살, 강을 이루고 있는 무수한 핏방울만이 보였다. 엘로나는 옷깃 하나 상하지 않았고 말이다.
“아마 2대 비궁주께서도 이 여자를 죽이는 게 불가능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간신히 만빙을 이용해 봉인한 모양이더군.”
“그럼 이 엘로나 지플이라는 인간은, 아직 살아있는 겁니까?”
“기록이 좀 유실되었다곤 하나, 이 여인을 죽였다는 기록은 처음부터 없었다고 전해 듣기는 했다. 이 여자의 시간은 그저 얼어붙어 있는 것일 뿐이다.”
순간적으로 뒷골이 싸해지고 등허리에 소름이 돋았다.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봉인만 되었을 뿐, 살아있단 말인가.’
지금이라도 죽일 수는 없을 것이다.
가능했다면 탈라리스를 포함한 이전 세대의 비궁주들이 엘로나를 가만히 내버려뒀을 리는 없으니까.
그리고 한 가지 납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이만한 마법사에 대한 기록이 왜 이렇게 적은 거지? 심지어 비궁에만 기록이 남아있을 뿐. 다른 역사서엔 이름조차 없을 확률이 높다.’
기록 장치 속 십대기사들의 표현에, 2대 비궁주가 엘로나를 봉인하며 남긴 흔적들에 의하면.
엘로나 지플은 의심할 바 없이 지플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였다. 만약 아니었더라도, 최강을 거론할 때면 반드시 이름이 나와야 했다.
그런데 진은 전생에서 한창 마법을 탐구할 때도 엘로나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사람들도 역사상 최강의 마법사를 거론할 때, 엘로나가 아닌 리올 지플의 이름을 꺼냈고 말이다.
말하자면 그녀는 잊힌 인간이었다.
첸미처럼, 혹은 옛 룬칸델처럼, 지플에게 지워진 수많은 사람들처럼.
‘지플이 지운 건가?’
곧장 떠오르는 건 당연히 지플의 역사 조작이었다.
하지만 대체 왜?
엘로나 지플은 당시 지플의 최대 전력이었다. 솔더렛의 기록 장치에서 확인한 바로도 ‘가주 이상’, ‘전체 전력의 5할’이라는 표현들이 있던 것이다.
‘엘로나 지플이 일으킨 재앙의 흔적을 지워야 했나? 아니면, 그녀의 힘이 너무나 강하고, 통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테마르의 역사를 조작하려고 했다는 걸 보면, 그런 느낌은 아니었는데.’
아니면 뭔가 사고가 있던 건가, 지플 역시 당시의 룬칸델을 꺾으며 분명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으니.
순식간에 온갖 가정이 떠오르는 와중, 탈라리스가 입을 열었다.
“비궁은 천 년 동안 지플로부터 이 여자를 숨기고 있다.”
탈라리스는 그야말로 비궁의 가장 큰 비밀 중 하나를 진에게 알려준 셈이었다.
지플로부터 엘로나의 존재를 숨기는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그들에게 발각되면, 이 여자가 다시 활동할 수 있다는 말씀이시군요.”
“상상하고 싶지 않은 미래지. 안 그래도 독주 중인 지플에 이런 괴물이 추가되면, 균형 따윈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확실히 그랬다.
룬칸델은 유일한 창성기사 시론을 보유하고도 지플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었다. 비먼트나 킨젤로, 비궁 등의 다른 세력들은 둘 사이의 균형이 무너지면 자연스레 승자 쪽에 흡수되거나 멸망할 운명이었다.
물론 엘로나가 더 이상 지플을 위해 싸우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건 희망사항일 뿐, 한없이 가능성이 낮은 이야기였다.
“내 네게 비궁의 비밀을 알려준 것은, 네가 룬칸델 초대 가주의 무덤들을 찾으며 그때의 비사를 엿보고 있기 때문이다.”
탈라리스는 진이 그 과정에 엘로나를 ‘죽일 수 있는’ 단서를 찾을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지플이 벌이고 있는 역사 조작이라는 이상 현상을 억제할 수 있는 방법도.
또한, 탈라리스는 다급했다.
진은 그녀에게서 그런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최근 들어 만빙의 봉인이 약해지고 있다.”
그 말에 다시금, 진이 탈라리스의 손등을 쳐다보았다.
전에 없던 주름. 나이를 생각하면 주름이 있는 쪽이 당연히 자연스러운 일이나, 극의를 깨우친 무인들이 대개 그렇듯 그녀는 지금껏 노화를 상당히 억제해왔었다.
게다가 엔도르마 혈족은 만빙의 힘 때문에 특히 더 노화에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녀의 손등에 주름이 도드라진 것은, 엘로나를 억제하고 있는 만빙의 힘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자신의 몸을 최고로 유지하기도 버거운 지경이 된 것이다.
“그럼, 시간이 얼마나 남은…….”
진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파직……! 쩍!
얼음 기둥 한가운데 균열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