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367)
제 333화
111화. 흔적(8)
“염색이나 도와줘.”
발레리아가 아까 진에게 받은 염색약을 내밀었다.
“비먼트든 지플이든 마주쳤을 때 이 머리칼을 보여주고 싶지 않거든.”
진이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곤 뒤돌아 앉은 발레리아의 붉은 머리칼에 조금씩 염색약을 흘렸다.
검게 물들어가는 머리칼에서 윤기가 번졌다. 진의 손가락들이 그 사이를 부드럽게 지나치며 염색약을 흩었고, 왜인지 묘인족들은 입을 헤 벌린 채 그 모습을 쳐다보며 눈동자를 반짝였다.
‘쟤네 분위기가 묘하네?’
‘뭔가 그림이 괜찮네?’
묘인족들의 생각과 다르게 두 사람은 서로의 신체가 닿고 있는 것에 달리 감흥이 없었다.
발레리아는 순간적으로 어지러워진 마음을 다잡느라 바빴고, 진은 그녀의 몸이 정말로 괜찮은 수준까지 회복된 것인지 걱정될 뿐이었다.
“다 됐다.”
진이 검 닦는 헝겊으로 손에 묻은 염색약을 닦아냈다.
발레리아는 손거울로 슬쩍 염색된 제 머리칼을 살펴본 후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붉은색이 깔끔하게 감춰진 것이다.
[가자!]루루와 미루를 따라 통로로 들어섰다.
통로 내부는 안개가 낀 듯 흐릿하고 물속처럼 시야가 출렁였으나 이상하게도 걷는 동안 피로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기분 좋은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백 걸음을 걷기도 전에 통로를 빠져나왔다.
본래 단련된 무인의 달리기로도 꽤나 시간이 필요한 거리였으나, 묘인족의 통로는 간이 이동 관문이나 다름이 없었다.
[금방 도착했군, 루루. 자네들 능력은 언제 봐도 대단하단 말이지.] [그래도 통로를 만든 시간이 있었으니, 놈들 추적을 피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통로 밖은 온통 기묘하게 휘어있는 나무로 가득했다. 휘어있음에도 성채 대관의 중심 기둥에 빗대도 좋을 만큼 높고 굵은 나무들이었다.
빽빽하게 피어있는 나뭇잎 때문에 달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그래서 그 아래로 드넓게 펼쳐진 호수가 검은 기름처럼 보였다.
‘저 안에 테마르의 무덤이 감춰져 있는 건가.’
바다 깊은 곳에 두 번째 무덤을 봉인하고 있던 올망고가 떠올랐다. 쉴라도 호수 아래에 무덤으로 이어지는 매개를 감춰두고 있었다.
라, 라라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하는 쉴라.
무척 듣기 좋은 음성이었다. 귓속에서 설탕 알갱이들이 기분 좋은 진동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발레리아조차 저도 모르게 쉴라의 노랫소리에 일순 미소를 지을 지경.
쉴라의 자그마한 입에서 유리 가루처럼 빛나는 입자들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입자는 호수로 나아가 그 위를 떠다녔는데, 그것을 따라 물결이 바뀌는 모습이었다.
부드러운 소용돌이. 딱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현상이 눈앞에 펼쳐졌다. 작고 부드러운 소용돌이가 노랫소리에 맞춰 춤을 추듯 호수에 일렁였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마침내 별이 떠오르듯, 호수 표면 위로 유난히 빛나는 한 사물이 떠올랐다.
호리병이었다.
가왕주. 권력의 정점들이 이 숲을 훼손하지 않고 있는 가장 큰 이유, 완타라모의 존재 의의.
호리병이 찬찬히 쉴라의 곁으로 날아들었다. 그녀가 작은 몸으로 술병을 끌어안은 순간, 호수를 비추고 있던 빛의 입자들이 일제히 사라지며 다시 숲이 어둠으로 물들었다.
[받아라, 진 룬칸델.]공손히 가왕주를 받아들었다.
(가왕주 – 쉴 다미로)
가왕주엔 제작자나 받는 사람이 아닌, 해당 술을 빚고자 했던 사람의 이름이 붙는다.
그래서 슈리에 관한 가왕주를 빚었을 때도 요정족이나 루나가 아니라 시론의 이름이 붙었던 것이다.
‘쉴 다미로……? 세 번째 무덤의 기록에서 본 르엣 다미로 율과 같은 이름을 쓰는군. 혈육인가.’
쉴 다미로는 세 번째 무덤의 기록 장치에서 확인한 이름이기도 했다.
-(797년 3월 3일, 룬칸델이 요정족에 관한 지플의 역사 조작을 기록하다. 797년 3월 4일, 요정족 다섯 사람 쉴 다미로, 베카 티쉬케, 뮬리아스 몬, 트리카 트레도스, 젠 마이누가 요정족들 사이에서 잊히다…….)
“세 번째 무덤의 기록 장치 속에서, 르엣 다미로 율이라는 이름을 보았습니다. 그분의 혈육이 빚어달라고 한 술인 것 같군요.”
[르엣 다미로 율……?]“아시는 이름입니까?”
쉴라가 뭔가 떠올리려는 듯 눈을 감았다.
[……기억나지 않는군. 다만, 율이라는 이름은 요정왕에게만 붙는 것이니, 그분은 요정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존재였겠구나.]마일라는 스스로를 요정이라 표현했으나, 쉴라는 줄곧 요정과 요정족의 후예를 구분해서 말하고 있었다.
[마시거라.]술병을 따려는 찰나, 진이 쉴라와 눈을 맞췄다.
“얼마나 걸립니까?”
[무엇이 말이냐?]“세 번째 무덤은 아무것도 모르고 들어갔다가 이틀이 훌쩍 지났었습니다. 이 가왕주를 마시면 시간이 얼마나 흐르는지 알고 싶군요.”
[그건 나도 알 수 없다.]“곧 추적자들이 도착할 겁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나가버리면 쉴라 님과 루루, 미루 님 셋이서만 그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는구나.]“아뇨, 쓸데없는 걱정이 아닙니다. 루루 님과 미루 님은 방금까지 통로를 만드느라 기력을 다 소진했고, 쉴라 님은 스스로의 전투력을 알지 못한다고 하셨죠.”
[여긴 나의 숲이다.]“숲을 통제하는 힘을 잃었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 할지라도, 설마 인간 몇 따위를 이 몸이 감당하지 못할 것 같더냐?]쉴라가 강한가, 강하지 않은가를 판단한다면, 진은 망설임 없이 후자를 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분명 한 종족의 왕다운 위엄을 품고 있으나, 강자들 특유의 위험한 냄새가 전혀 나지 않았다.
묘인족이라도 지치지 않은 상태라면 그들의 능력을 믿고 마음 편히 가왕주를 마셨을 것이다.
[정 걱정되면 저 아이를 두고 다녀오면 되지 않느냐?]“그건 안 됩니다. 약속한 것이 있습니다.”
[그럼 추적자들을 기다리겠다는 말이냐? 그러다 가왕주가 손상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자칫하면 적들에게 가왕주의 위치만 알려주고, 퇴각해야 할지도 모르지 않느냐.]“가왕주를 아예 바깥으로 가져가서 마시는 건 불가능하겠죠?”
[이 가왕주는 숲을 벗어나는 순간 술에 담긴 이야기가 사라진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다면 네게 당장 마시라고 했겠느냐.]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 것 같았습니다. 그럼에도 차라리 적들을 정리하고 가는 쪽이 여러모로 마음이 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최악의 경우엔 우리 모두 목숨을 부지하는 것조차 어려울 수 있다.]“아뇨, 그럴 리는 없습니다.”
[어째서 그렇게 자신하지?]“조금 전에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어차피 싸움은 숲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주지 않는 선에서만 이뤄져야 한다고. 제겐 한없이 유리한 싸움이 될 겁니다.”
[묘인족들과 함께 충분히 잘 숨을 수 있다.]“이것 보십시오. 처음엔 분명 인간 몇 따위는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다는 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지금은 숨겠다는 이야기가 먼저 나왔습니다. 쉴라 님은 그들을 상대할 힘을 갖고 있지 않습니다.”
[……설령 그들이 날 붙잡더라도, 당장 죽이지는 않을 것이다.]“그렇다면 쉴라 님과 묘인족들이 잡힐 경우, 전 인질극에 시달리겠군요. 그게 과연 제게 좋은 결과일까요?”
더 이상 묘인족과 쉴라를 희생시키고 싶지 않다.
진은 그런 마음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있었다. 대장급만 아니라면, 친위대와 특임대의 누가 찾아오더라도 제압할 수 있다고 말이다.
‘설령 대장급이 오더라도, 스승이 있으니 해볼 만한 싸움이다. 아니, 절대적으로 유리한 싸움으로 흘러갈 것이다.’
쉴라로서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루루, 미루. 자네들이 좀 설득해보게.] [음…….]루루와 미루가 말을 고르는 사이.
호수 뒤편에서부터 그들의 고민을 덜어줄 기척이 느껴졌다.
“아무래도 제 판단이 옳았던 것 같군요.”
스릉…….
진이 찬찬히 브라다만테를 꺼내며 말했다.
발레리아도 지팡이를 쥔 손아귀에 힘을 주며 호수 뒤편을 살폈다.
지플이 도착하기까지 예상했던 시간은 아직 조금 여유가 있었다.
쉴라의 예상대로 배신자는 마일라 하나가 아니었다. 비먼트가 그들보다 더 빨리 찾아온 것이다. 애초에 완타라모 숲은 비먼트의 영토니 당연한 결과였다.
‘어차피 이쪽이 깔끔해. 모두 제거하고, 추가 지원이 오기 전에 무덤에 입장하는 게 낫다.’
추적자를 전부 제거하고 입장하지 않으면, 무덤 내부에서 가슴을 졸이느라 정신이 없을 터였다.
“물러나 계십시오.”
[쉴라 님, 진의 말을 따르는 게 좋겠습니다. 이미 이렇게 되었으니 최대한 짐이 되지 않는 쪽으로 행동해야 합니다.]쉴라가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다.]진이 다시 쉴라에게 가왕주를 건넸다. 전투 도중 훼손되지 않도록.
‘갑옷 개방.’
발동어를 외자 브라다만테에서 영기가 흘러나와 진의 몸을 감쌌다.
망토는 떼어서 쉴라와 묘인족들에게 주었다. 피콘이 이럴 때 쓰라고 넣어준 기능.
[조심해라.]“걱정 마십시오.”
쉴라와 묘인족들이 물러가자 사위를 밝히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일행이 서 있던 자리가 다시 칠흑으로 물들었다.
고요했다.
자그마한 발소리 하나 없이 서늘한 바람만이 수풀 사이를 가로지르고 있었으나, 진과 적들은 그 속에 희미하게 섞인 서로의 기운을 읽어내고 있었다.
심안의 감각을 극한까지 끌어올린 결과, 진은 머잖아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대장급은 없다.’
가장 걱정했던 문제가 사라진 순간.
진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고, 검신을 감싼 영기가 사납게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숲의 어둠 때문에 그 모습이 도드라지지는 않았다.
‘아리아.’
진이 속삭여 발레리아를 불렀다.
‘왜?’
‘넌 나서지 말고, 마력을 더 가다듬어라.’
그녀는 지플과의 싸움을 위해 힘을 아껴두는 게 더 좋을 것 같았다.
발레리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과 적들 사이의 거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
비먼트의 무인들은 아직 서로의 공격권에 들어서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중이었다.
이미 요정족 후예 배신자에게 숲을 찾은 자가 ‘진 룬칸델’이라는 정보를 얻었으니, 그들이 파악하고 있는 진 룬칸델이라면 이 거리에서 자신들에게 유효타를 날릴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크나큰 착각이었다.
‘여섯이로군.’
스걱-!
“큽!”
비먼트의 무인들 사이로 난데없이 선혈이 튀었다.
영기에 물든 검은 칼날이 그 목과 바람을 가른 소리, 그리고 진이 보법을 밟은 소리조차 없었다.
다만 툭, 차가운 바닥에 목이 떨어지는 소름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다섯.’
무인들이 반사적으로 흩어지며 오러로 물든 칼날을 빛냈고, 진은 어느새 두 번째 목표의 뒤에 서서 그의 목으로 브라다만테를 들이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