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417)
제 444화
121화. 배신(1)
대체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모두가 그런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세계 전쟁이라도 벌어지지 않는 한 절대로 부서지지 않을 것만 같던 비먼트 최고 무가의 본성이 이토록 무참히, 예고도 없이 부서지리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검황성을 무너뜨린 종자들은 미지의 힘을 이용해 이미 자리를 떠나기까지 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엔 용기사들까지 참전했으나 테러범들이 딱히 치명적인 피해를 입고 물러난 분위기도 아니었다.
문자 그대로 완패.
거의 폐허가 된 검황성 일대 곳곳에서 검은 연기만이 무심하게 피어오를 뿐이었다.
“……꼬마.”
“진 형제.”
무라칸과 린파가 진의 곁으로 다가왔다. 무라칸은 전투의 피로에 찌든 얼굴이었고, 린파는 처음 소환되었을 때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무라칸은 론과 더불어 필사적으로 함포와 단장의 공격을 막아냈으나, 린파는 전력을 펼칠 기회가 없었다.
휘청, 일순 진의 몸이 앞으로 기울자 린파가 그를 부축했다.
과거 가르문드를 소환했을 때도 그랬듯, 진은 이번에도 린파에게 미안한 마음을 느꼈다. 라프라로사로 돌아간 그녀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리라는 사실에서 비롯된 미안함이었다.
린파는 말하지 않아도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바깥세상… 많이 변했어. 장난감이… 그토록 대드는 건, 처음이야.”
“세상에 베락트 시드리커를 장난감이라 표현할 수 있는 건 형제들이 유일할 겁니다.”
“나는…… 돌아갈게. 할 일이, 많을 테니.”
“고맙습니다, 린파 형제.”
린파가 진의 머리칼을 헝클며 씨익 미소를 지었다.
그리곤 이내 무거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그 마족…… 낯이, 익어.”
“킨젤로의 단장을 말하는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린파.
“분명… 마주친 적 있어. 우리… 형제들과.”
그 말에 진이 흠칫하며 린파와 눈을 맞췄다.
“그게 무슨? 명왕족 형제들과 싸운 적이 있다는 겁니까?”
“그것까지는… 잘 모르겠어. 다만… 확실해. 마주쳤던 것은…….”
린파는 단장에 대해 떠올리려고 노력했으나 ‘만난 적이 있다’는 느낌만 확실할 뿐, 다른 것은 기억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킨젤로 단장, 내가 그놈하고 천 년 전에도 마주친 적이 있단 말이지……? 그냥 어디서 주워들은 것 좀 있는 마족인 줄 알았더니. 나와 뭔가 관계가 있는 마족이긴 한 모양이군.
불현듯 테마르의 두 번째 무덤을 나선 후 무라칸과 단장에 대해 대화를 나눈 순간이 떠올랐다.
수호자 사라가 지키던 기록 속에서 흑해의 탑을 찾은 무라칸과 다른 십대기사들, 그리고 테마르와 킨젤로 단장의 모습을 엿본 직후였다.
‘그땐 단지 무라칸이 기억에 문제가 있어 단장에 관한 걸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단장에 대한 기록 자체가 조작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라칸은 기록 속에서 천 년 전 단장과 상당히 잘 알고 지내는 듯 보였었고, 린파는 그를 보자마자 ‘알지만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단장에 대한 역사와 기록을 조작했다면, 그건 당연히 지플일 거다. 하지만 대체 왜?’
명확한 이유는 당장 알 수 없었다. 다만 너무나 간단하게 생각할 수 있는 문제였다.
‘위협이 되니까.’
단장이 보여준 권능과 힘은 천 년 전의 지플에게도 분명 위협적인 수준일 터였다.
그토록 불안정해 보였음에도 단신으로 검황성 전체를 압박하고, 론과 무라칸을 막아내며 아군 전력까지 실시간으로 계속 회복시키는 것을 모두가 똑똑히 본 것이다.
다들 직감하고 있었다.
킨젤로의 단장이 ‘완벽한’ 상태였다면 전투가 이쯤에서 끝나는 일은 없었으리라는 것을.
“조심해… 진 형제. 위험한… 놈이다.”
“알겠습니다.”
“다음에… 만나.”
프스스스…….
린파의 몸이 영기 입자로 변하며 서서히 흐릿해지고 있었다. 진은 사라져가는 린파의 모습을 바라보며 씁쓸한 듯 숨을 골랐다.
전황을 살펴보았다.
용기사를 비롯한 하이란의 검들이 잔해에 깔리거나 다친 이들을 살펴보았고, 함께 싸운 세력들은 각자의 병력을 수습하고 있었다.
베라딘은 여전히 엔야에게 업혀 있었고,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슈리가 단테를 안전하게 후송한 사실을 알렸다.
‘녀석들이 무사한 것만으로도 일단 최악의 상황은 다 피한 셈이다.’
난전이 한창일 때 그 두 사람을 구하러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이 진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뒷수습과 반격, 그건 진의 몫이 아니다.
“주군!”
용기사단장이 론의 옆으로 하강했다.
론은 입술 사이로 검붉은 피를 흘리며 주위를 살피고 있었다. 새삼, 그것조차 비현실적인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후우, 후…….
꽤 거리가 있는데도 론의 거친 숨결이 전해지는 듯했다. 산발이 된 머리칼과 온몸엔 크고 작은 상처가 가득함에도 여전히 그에게선 묘한 위엄이 느껴졌다.
론이 성큼성큼 진에게로 다가왔다.
그 대목에서 지켜보던 모든 무인들이 흠칫하며 눈동자를 끔뻑였다. 전투가 끝난 직후, 하이란의 권속들보다 룬칸델의 기수를 먼저 찾는 모양새이기 때문이었다.
눈동자들이 두 사람을 좇았다. 금방 진에게 가까워진 론은 입가의 피를 한 차례 닦아내고는, 대뜸 진의 오른팔을 붙잡았다.
척!
이어 론은 진의 오른팔을 하늘로 드높여주었다. 마치 어느 경기의 승자에게 경의를 보내는 그 모습처럼.
무인들에겐 테러에 이어 그 또한 충격적인 풍경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이들은 저도 모르게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으며 헛숨을 삼키기도 했다.
검황, 하이란의 가주가 테러 직후 룬칸델의 12기수를 치하하는 것은 그만큼 비현실적인 상황이었다.
진은 내심 얼떨떨했으나…… 아니, 사실 그 역시 양손으로 입을 가린 무인들처럼 헛숨을 삼킬 만큼 놀라운 마음이었으나. 최대한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했다.
물론 놀라운 것과 별개로 론이 어째서 가장 먼저 자신을 추켜세웠는지는 곧장 깨달았지만 말이다.
‘룬칸델을 막기 위함이다.’
테러로 검황성이 무너진 데다 론 하이란은 심각한 내상을 입었다.
맹수가 다른 맹수를 공격하기에 최적의 시기는, 상대가 부상을 입었을 때. 즉 하이란을 견제하려는 외부 세력들은 오늘 이후 한동안 최고의 기회를 얻게 되는 셈이다.
룬칸델은 말할 것도 없이 그중에서 가장 껄끄러운 세력이었다. 만일 룬칸델이 사태를 파악한 후 작정하고 달려들면 하이란은 그것을 막아낼 여력이 없었다.
기댈 곳은 황실과 지플뿐인데, 전자는 애초부터 용기사들을 묶어둘 정도로 하이란을 경계하는 세력이고, 지플은 함부로 손을 내밀기에 황실보다도 위험한 세력이었다.
그런 상황에 사실상 룬칸델의 ‘대표’로 연회에 참석한, 진을 가장 먼저 챙긴다면?
아무리 패도의 룬칸델이라 할지라도 훈훈한 분위기가 조성된 직후에(그것도 연회에 참가한 모든 세력이 지켜보았다) 하이란을 칠 수는 없는 것이다.
‘뭐, 론 경이 이렇게 하지 않으셨어도 룬칸델이 하이란을 칠 가능성은 낮긴 하지만…… 하이란이 고를 수 있는 것 중 이보다 더 효율적이고 안전한 수는 없어.’
어떤 면에선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그 혼잡한 사태가 끝난 직후에 이토록 날카로운 판단을 내렸다는 사실이. 그것도 오만한 마음을 갖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에 있는 세계 최고의 기사가 말이다.
“진 룬칸델, 검황성주 론 하이란은 이번 일에 대한 네 노고와 용기를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진이 생각지 못한 사실 한 가지는 이것이었다.
그 말엔 단지 론의 노회한 정치가 같은 마음뿐만이 아니라, 진심이 가득하다는 것. 론은 실제로 이번 사태에서 진이 해낸 역할을 최고로 높이 평가하고 있었다.
진은 대답 대신 가만히 고개를 숙여 보였다.
“또한, 하이란가는 테러에 휩쓸려 함께 싸워준 분들의 헌신에도 깊은 감사와…… 애도를 표하오. 너무 많은 이들이 테러에 희생되었소. 반드시, 어떤 형태로든 책임질 것을 약속하오.”
론이 고개를 숙이자 지켜보던 다른 무인들은 더 몸을 낮출 수밖에 없었다.
다시 고개를 든 무인들의 시선은 자연스레 진에게로 모여들었다.
론을 계속 바라보는 건 부담스러운 일인 데다, 얼마 전 검의 정원을 뒤흔들고 검황성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룬칸델의 12기수가 신기하게 느껴지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진은 그중에서 유독 빛나고 있는 라타 프로치의 눈동자가 부담스러워 시선을 돌렸고, 저쪽 구석에서 무르카에게 꾸중을 듣고 있는 제피린을 쳐다보았다.
‘악마룡이라.’
물론 아직 제피린이 악마룡이라는 확증은 없으나, 사태가 진정되면 속히 흑왕단장을 만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분간은 이곳에 있는 모두가 진상 조사를 위해 일단 하이란을 떠나지 못할 테니 말이다.
* * *
1799년 11월 10일, ‘검황성 테러’ 사건이 일어난 후 약 2주일이 흘렀다.
하이란은 물론이고 비먼트 전체가 아직 그날의 충격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지면으로만 소식을 접한 타지의 세인들도 마찬가지였다.
검황성은 여전히 반파된 모습 그대로였다.
아직까지 복원을 시작하지 않은 것이다. 권속들 대부분은 검황성 인근에 천막을 치고 생활했으며, 그 때문에 비먼트 본국 내 영토 중 오직 검황성만이 전쟁을 치르고 있는 듯 보였다.
실제로 검황성은 전쟁을 치르고 있었다.
아군이라 믿고 있던 이들을 상대로 말이다. 비먼트 황실은 하이란을 돕지 않았다.
돕지 않는 걸 넘어 이상할 정도로 킨젤로를 두둔했다. 테러의 주체와 그들이 하이란에 입힌 피해가 명확한데도 황실의 펜대들은 아직 킨젤로를 테러범이라 칭하지 않고 있었다.
그저 ‘불의의 사고’라는 모호한 표현만 쓰고 있을 뿐. 심지어 황실은 테러에 사용된 거대 마물과 생체 골렘들이 킨젤로의 것이라 확신할 수 없다는 입장까지 내비쳤다.
황실이 이토록 미적지근한 대처를 보일 것이라는 걸 예상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았다. 다만 현재의 태도를 보는 이들은 모두 같은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사건 이후 황실과 킨젤로, 그리고 지플 사이에 모종의 거래가 있었다고 말이다.
킨젤로뿐만이 아니라 지플 또한 베라딘을 데려간 이후 테러와 자신들은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입장을 취했고, 황실은 그것을 묵인하고 있는 것이다.
본래라면 킨젤로가 베라딘을 노린 정황이 있던 만큼, 지플은 하이란에 그에 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길들이기, 혹은 죽이기. 황실이 하이란을 대하는 방식은 그것들이었다.
이를테면 하이란은 황실에 배신당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후우…….”
검황성 지하실, 단테가 피곤에 찌든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검황성의 지하 공간들은 지상에 비하면 대체적으로 온전한 상태였다.
진이 단테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 녀석을 만나는 게 불안하냐, 단테.”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오.”
“녀석의 일기장이 여전히 불가침의 영역이기를 빌어보자고.”
툭, 툭, 툭.
어둠 저편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곧 로브를 뒤집어쓴 한 사람과 그를 인도해온 기사들이 보였다.
베라딘이었다.
단테가 손짓하자 기사들이 물러났고, 베라딘은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냈다. 휑한 지하실 가운데 세 사람의 그림자가 짙게 일렁이고 있었다.
단테는 정말 반가운 이를 만났을 때의 해맑으면서도 정중한 특유의 인사를 건네지 않았고, 베라딘도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한동안 무거운 침묵이 감도는 가운데, 먼저 입을 연 것은 베라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