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443)
제 444화
127화. 흑왕단으로(5)
복도에서 마주친 흑기사가 떠올랐다.
‘응접실 입구에서 놈은 분명 아침에 흑왕단장을 다시 만나기로 했다.’
일반적인 경우라면 의뢰 계약서를 작성한 후 적당히 사교적인 시간을 갖는 과정이라 생각하겠으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흑기사였다.
‘거래가 성사된 상태라면, 흑기사쯤 되는 인물이 여기서 노닥거리고 있을 리는 없다. 그따위로 한가한 자리가 아니야.’
확신할 수 있었다. 발카스는 흑기사가 가져온 조슈아의 의뢰를 아직 맡지 않았다고.
그럼에도 흑왕단이 진의 의뢰를 받지 않을 이유는 충분히 많았다.
현 세계정세에서 진 룬칸델이라는 인물은 독이 든 성배와 같다.
함부로 마셨다간 높은 확률로 진짜배기 ‘최고 권력자’들과 척을 지게 되는 것이다.
진이 초신성 중의 초신성이라곤 하나, 과연 지배자들의 견고한 성벽을 허물 수 있을지는 미지수였다.
아니, 진과 가깝거나, 제대로 아는 사람이 아니라면 아무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세인들은 대부분 언젠가 결국 부서지거나 더 거대한 별에 흡수되는 것이 진의 미래라고 여겼다.
진이 지금껏 이룬 업적과 성과가 아무리 빛난다 한들, 기적은 언젠가 끝이 나는 법이니 말이다.
세상의 대다수를 이루는 범인들은 계속되는 기적을 상상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었다.
여전히 세간에선 검의 정원의 다음 주인을 ‘조슈아 룬칸델’이라 여겼고, 그 인식은 범인의 범주를 한참 넘어선 발카스 크란 같은 인물에게도 똑같이 적용되고는 했다.
‘괜히 내 의뢰를 맡았다가 조슈아의 원한을 사는 게 싫은 모양이군.’
조슈아뿐만이 아니다.
‘성국 사건’으로 진은 지플에게도 씻을 수 없는 오점을 새겨줬고, 최근엔 비먼트의 황실과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황제가 진을 만난 후 하사한 것이 고작 금이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황제는 진과의 만남을 비먼트 내 소식지들이 1면에 다루지 못하도록 지시까지 내렸다. 중한 사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진은 룬칸델의 차기 가주와도, 지플과도, 비먼트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다. 잘못 엮였다가 무슨 험한 꼴을 당해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
발카스는 이 모든 이유를 단지 ‘한발 늦었다’는 한마디로 말했다. 상대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며 확실한 거절 의사를 표했다.
조슈아 역시 ‘진을 돕지 말라’는 직접적인 요구를 들먹이며 발카스의 자존심을 건들지 않았다. 그저 흑기사를 이곳에 보낸 행위만으로 은근히 경고한 것이다.
두 사람 다 굵직하고 노회한 권력자들다운 처세를 보여주고 있었다.
‘그런 와중 나 혼자 막무가내일 수는 없지.’
조금 짜증이 치밀었으나 기회를 엿보아야 했다. 이럴 때 거절에 불복하는 건 하수의 방식인 데다 악영향만 끼쳤다.
발카스의 마음을 돌리려거든 확실한 패가 하나 있어야 했다. 그가 그 모든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진의 잠정적 아군이 되어줄. ‘티칸 보호’는 단순 의뢰라고 볼 수 없으니 말이다.
지금으로서는 그런 패가 없었다.
진은 발카스 크란이라는 인물에 대해 아직 잘 모르고, 그 역시 그다지 협조적이지는 않으니 앞으로도 빠른 시일 내에 그런 패가 생길 가능성은 낮았다.
제피린.
그 흑왕단의 사고뭉치가 악마룡일지도 모른다는, 그런 정보가 있기는 하나 그다지 가치는 없었다.
확신이 없는 상태로 그녀를 조사하다 무고하다는 결과라도 나오면 오히려 심각한 역효과만 불러일으킬 터였다.
‘흑왕단은 조금 더 세력을 키우고, 조슈아와 지플의 민낯이 샅샅이 밝혀진 다음에나 포섭을 시도해야 하나.’
빠르게 결론에 다다랐다.
애초에 아주 큰 기대를 하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진 역시 자신의 배경이 어떠한지는 잘 알고 있으니까.
물론 진은 자신이 있었다.
머잖은 미래에는 흑왕단이 먼저 자신을 찾아오거나, 오늘 이야기를 더 진전시키지 않은 걸 후회하는 날이 올 것이라고.
‘가이파 군도의 대용병 아멜라를 찾아가봐야겠군. 흑기사가 여기 온 걸 보아하니, 놈은 아멜라에게도 이미 사람을 보내놨을 거다.’
조슈아로서는 실로 오랜만에 진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주는 셈이었다.
치명적인 타격은 아니지만, 발바닥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거슬릴 정도는 되었다.
흑왕단과 대용병이라는 수단이 모두 사라지면 티칸을 지키는 일은 비궁에만 지나치게 의지하게 될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한발 늦었다라,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자 발카스가 미간을 좁혔다.
“호오, 의외로 순순하게 물러나는군.”
“발카스 경께 전해진 저에 대한 소문이 그리 좋지 않은 모양이로군요. 의외라는 수식을 붙여주시는 걸 보니.”
“뭐, 그런 건 아니네만. 원하는 건 뭐든 이루어낸다…… 그런 이야기가 많아서 해본 말일세. 특히 3군 녀석들이 자네를 좋아하는 분위기거든.”
꼴꼴꼴…….
발카스가 서랍에서 잔을 꺼내 술을 따르며 말했다.
서로 일 얘기는 할 필요가 없으니 술이나 가볍게 마시자는 의미. 발카스는 나름대로 호감을 표시하고 있었다.
비록 의뢰는 받을 수 없으나 진이라는 인물 자체가 싫은 건 아니었다. 발카스는 오히려 진이 12가 아니라 2기수였다면 언제든 손을 잡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감사합니다, 발카스 경.”
“흑룡께서도 한 잔 하시겠습니까? 좋은 술입니다.”
“어, 줘봐라.”
세 사람의 잔이 가볍게 부딪히며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진은 이 상황이 썩 나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의뢰는 말을 꺼내기도 전에 어그러졌으니, 그와 대화 한 마디 나누지 못하고 돌아갔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우리 용병대와 연이 좀 있는 용들이 말하기를, 무라칸 님께선 과거 세계 최강의 존재셨다고 하더군요.”
발카스는 흑왕단장이라는 자리에 있음에도, 보다 격이 높은 이들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간단한 방법들을 잊지 않고 있었다.
처음에 다소 불경한 말투로 무라칸에게 말을 건 것도 의도한 것이었다. 오히려 살짝 기대치를 낮춘 다음에야 대화가 더욱 즐거워지는 경우도 있는 법이니까.
“창공에 한해서는 확실히 그랬지. 나는 사상 최강이자 역대 최고다.”
“오호, 그 용들의 이야기가 과연 사실이었군요. 하지만 어째 지상에는 적수가 있던 것처럼 말씀하십니다.”
“적수, 딱 그렇게 부를 만한 녀석들이 몇 있기는 했다. 누가 더 강한지 명백히 우열을 가릴 수는 없었지만. 끝까지 싸웠으면 내가 이겼을 것 같군.”
“혈기 넘치는 시절이었다면 지금이라도 무라칸 님께 한 번 도전해봤을 겁니다. 강하고 역사적인 존재를 만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니까.”
“뭐…… 내 시대에도 네놈 정도면 끗발이 좀 서기는 했겠어.”
“후후, 과찬이십니다.”
무라칸이 비운 잔을 다시 채우는 흑왕단장. 그는 자신을 지나치게 낮추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우월감을 충족시켜주고 있었다.
‘지금껏 만나본, 최강에 가까운 모든 인간들 중 가장 뛰어난 처세술이로군.’
개인의 무력이라면 발카스 역시 이미 오래전 10성에 다다른 초인이었다.
그런 초인들에게선 보통 이런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었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거나, 보다 강한 사람이나 세력도 자신을 함부로 건드릴 수는 없다는(나를 건들면 너희도 아주 많이 죽어, 라는 식의)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었다.
발카스는 다른 초인들과 분명 다른 점이 있었다. 그는 여전히 중립으로서 거대 세력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줄을 타는 중이었다. 충분히 다른 초인들과 똑같이 할 수 있는 입장인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흑왕단장 발카스 크란은 자신의 단원들을 몹시 끔찍이 아끼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노력하면 단원들이 거대 세력들의 싸움에 의미 없이 희생될 필요가 없다는 게 발카스의 지론이었다.
진은 발카스의 그런 마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 이유가 아니라면, 발카스 정도의 인물에게서 결코 나올 수 없는 태도인 것이다.
‘굳이 우리와 술자리를 시작한 이유가 무엇인지도 알겠군.’
이어 진은 이 술자리의 의미를 깨달아가고 있었다.
분명 이 술자리는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조슈아의 흑기사가 다시 이 응접실을 찾을 때까지 멈추지 않을 터였다.
조슈아가 발카스에게 흑기사를 보내 진과 엮이지 말라는 뜻을 은근히 종용했듯.
발카스 역시 일부러 흑기사에게 셋이 함께 즐거이 술 마시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속내를 표현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일단 네 뜻을 크게 거스르지는 않겠다만, 12기수의 성장 또한 계속 주목할 것이다.
그게 발카스가 조슈아에게 전하려는 메시지였다.
여기까지 생각한 진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단 하룻밤의 만남이지만, 배울 점이 있는 인물이다.’
진도 자연스레 대화에 끼어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대화는 주로 무라칸이 이끌어갔고, 진과 발카스가 추임새를 넣는 식이었다.
무라칸이 생각하는 역대 최고의 무인들, 마법사들, 가장 풍요로웠던 시대, 평화로웠던 시대, 용과 인간의 가장 큰 차이, 삶과 죽음, 사과와 수박, 가장 아름다운 짐승 등.
온갖 주제들이 의식의 흐름을 타고 이어지던 중, 제피린에 대한 이야기가 시작된 것은 오전 열 시 무렵이었다.
“그 이상한 녀석은 대체 어떻게 여기 입단한 거냐? 꼬마 녀석이 말하기로 흑왕단은 세계 최고 용병대라던데.”
“보기엔 좀 어리바리해 보여도 검 쓰는 것 하나는 일품입니다. 심지어 독학을 했다던데, 상당한 천재라고 생각했었죠.”
“뭐? 검을 잘 써? 게다가 천재?”
“오러가 부족해서 그 파괴력을 다 뽐내진 못하기는 합니다. 선천적으로 오러가 잘 쌓이지 않는 체질인 듯 보이기도 하고요. 저도 여러모로 묘하고 이상한 녀석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끼익! 공교롭게도 그 순간 제피린이 응접실로 들어왔다. 어젯밤에 본 도끼검을 똑같이 등에 멘 채였다.
옆에는 아침에 다시 만나기로 한 흑기사가 서 있었다.
후드에 가려 보이지 않았으나, 그는 술판을 보고 불쾌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발카스가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예상치 못한 것이다.
“단장님, 손님 모셔왔습니다!”
“……그래, 제피린. 그런데 오늘 룬칸델 2기수의 손님은 2대장이 직접 모셔오기로 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네가 왔지?”
“앗, 그건 말이죠.”
제피린이 특유의 발랄하고 과장된 몸짓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그리고 진과 무라칸, 발카스는 이어진 풍경에 제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푹!
별안간 제피린의 손이 흑기사의 옆구리를 관통했기 때문이었다.
본래는 가슴을 노렸으나 흑기사가 반응한 덕에 옆구리를 찌른 것이었다.
대체 어느새 자란 것인지 그녀의 보랏빛 손톱은 독 발린 단검처럼 보였고, 흑기사는 피를 토하며 황급히 그녀와 거리를 벌리고 있었다.
“컥, 커헉……!”
“굳이 알 필요 있을까요? 단장님은 이제 죽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