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0)
제 55화
19화. 연회(6)
예리하고 단단한 얼음 결정들이 시리스의 칼날을 감싸고 있다.
그저 상대를 죽이기 위한 힘일 뿐이지만, 엔도르마 혈통 고유 능력을 펼친 그녀의 모습은 일순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다.
그녀가 검을 뻗을 때마다 작은 결정들이 깨어지며 빛을 난반사했다.
그물처럼 촘촘히 펼쳐진 냉기의 결정들은 손을 뻗어 만지고 싶을 만큼 영롱하게 빛나지만, 그 자체로 사람을 찢는 흉기다.
크지직!
두 자루의 검이 부딪치자 얼음덩어리가 으깨지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검신을 오러로 휘감지 않았다면 아마 산산조각 부서졌을 것이다.
‘이게 그 소문의 만빙검인가.’
보통은 난데없이 만빙검처럼 희귀한 힘을 마주하면 크게 당황하겠지만, 진은 표정 변화가 없었다.
“아직 놀라긴 일러, 진 룬칸델!”
저기, 난 놀라지 않았는데… 라고 답하기엔 상대의 표정이 너무나 의기양양하다.
진은 대답하지 않고 침착하게 보법을 밟아 그녀의 검격을 피했다. 시리스가 느끼기엔 아슬아슬하고, 진이 보기엔 여유로운 회피였다.
진이 거리를 조절하며 뒤로 물러서자 시리스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넌 내게 그날의 일을 모두 말하게 될 것이다.”
“글쎄요, 저는 방금 원했다면 당신을 벨 수도 있었습니다만.”
영기를 사용할 수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었으니, 거짓은 아니다.
“검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허세 또한 5성에 오른 모양이지?”
시리스가 다시 호기롭게 검을 뻗는다.
순수하게 검술 실력만으로 대결을 해도, 4성이 5성을 꺾는 것도 종종 있는 일이다. 하물며 만빙검까지 사용한다면 질 리가 없는 데다, 실전 경험 또한 자신이 앞선다는 게 시리스의 자신감이었다.
치릿! 치리릿!
시리스의 검이 지나갈 때마다 공기가 얼어붙었다.
확실히 위험한 힘이다. 극한에 이른 만빙검은 바다조차 얼어붙게 만든다는 소문이 괜히 있는 건 아니었다.
“시작부터 비기를 꺼낼 줄은 몰랐군요, 시리스. 아직 가문 비기를 전수받지 못한 저 같은 막내는 서러워서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내 알 바냐!”
진이 이렇다 할 반격을 하지 않고 방어에만 치중하자, 시리스는 자신이 완전히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직선. 아래, 그리고 사선.
매서우면서도 유연한 궤적을 그리는 시리스의 검결. 진은 이리저리 몸을 던지고, 검을 휘둘러 그것을 쳐내기만 할 뿐이다.
밀리는 듯 보여도 모두 기회를 엿보는 작업일 뿐이다. 그리고 모든 공격을 완벽하게 막거나 쳐 내고 있다는 건, 그 자체만으로도 진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입증하는 셈이었다.
잠시 후 시리스 역시 상대가 자신의 생각보다 여유로운 상태라는 걸 깨달았다.
‘5성은 5성이군. 처음엔 급급하게 막는 듯 보였는데, 공방이 이어질수록 진면목이 드러나고 있어.’
천재는 천재를 알아보는 법.
시리스는 자신이 진을 얕잡아 봤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그의 검술은 자신보다 명백히 뛰어난 수준이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야. 만빙검 3식을 펼치면, 이 정도 차이는 얼마든지 메꿀 수 있다.’
만빙검 3식. 엔도르마 혈족이 ‘눈사태’라 부르는 그 기술을, 시리스는 딱 한 번 사용할 수 있었다. 오러와 냉기 소모가 극심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에만 펼치는 기술.
‘체력, 완력에서도 내가 밀리니 길게 끌 필요가 없다. 놈이 내 패턴을 읽고 반격을 시작한 순간, 역으로 끝장을 낸다!’
챙! 챙, 치짓!
정신없이 흘러가던 두 사람의 공방이 차츰 정돈되어 가고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의 검에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길게 끌 필요는 없다.
그건 시리스만의 계획이 아니다. 이제 서서히 전진 보법을 밟기 시작한 진 역시 그녀와 같은 마음이었다.
‘지금쯤 시리스도 격차를 인정하고, 흐름을 깨뜨릴 한 방을 준비하고 있을 거야. 비기를 쓸 텐데, 그게 어느 정도 위력일지는 감이 잘 안 잡히는군.’
만빙검을 사용하는 인물과 직접 부딪쳐 본 것은 처음이니, 가늠할 수가 없다.
그래서 진은 자신이 지닌 여러 ‘비기’ 중 가장 강한 것을 고르기로 결정했다.
폭풍성에 있을 때, 수십 권 분량의 비전서는 심심풀이로 읽은 게 아니다. 물론 시리스는 진에게도 비기가 있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지만.
진이 대응책을 결정하기 무섭게 시리스가 과감히 품을 파고들었다. 어깨를 노리고 내지른 종베기가 그녀의 긴 은빛 머리칼을 몇 가닥 잘라낸다.
“끝이다, 진!”
후웅!
돌연 시리스가 딛고 있는 결투장 중심에서부터 작은 눈보라가 형성되었다. 그러나 자연의 그것과 달리 시리스의 눈보라가 품은 날카로운 바람이 닿자, 진의 이마에서 핏방울이 튄다.
바람에 담긴 예기에 베인 것이다. 동시에 셔츠 자락을 비집고 들어온 한기에 목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만빙검 3식, 눈사태!
시리스가 초식을 끝내자 몰아치던 눈보라가 새하얗게 물들었다. 그리고 퍽, 퍽 둔탁한 소음이 일며 얼음 결정들이 터졌고, 그 속에 응집되어 있던 새하얀 오러가 눈처럼 쏟아졌다.
난데없이 한겨울의 설산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 펼쳐졌다. 눈처럼 터진 오러가 시야를 가렸고, 파도처럼 덮쳐 오는 하얀 기운에 숨이 턱 막힌다.
그 사이로, 찰나. 승리를 확신한 시리스의 열띤 얼굴이 드러났다.
그리고 시리스 또한 자신과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는 진을 보았다. 마찬가지로 상대를 이미 꺾었다고 확신한 인간의 상기된 얼굴이었다.
‘뭐지?’
이미 눈사태는 펼쳐졌고, 제아무리 열다섯에 5성에 이른 천재라 할지라도 비궁의 비기를 격파할 수는 없을 터.
께름칙한 감각이 잠시 뇌리를 스쳤지만, 시리스는 이변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간 세계를 오시하는 룬칸델과 지플이 비궁을 정복하지 못한 원동력이, 바로 이 힘이기 때문이었다.
휘청.
순간적으로 모든 힘을 쏟아부은 시리스의 무릎이 꺾였다. 급소를 피해 공격했으니 죽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오늘 이후 룬칸델의 막내는 자신을 두려워하게 될 터였다.
그러나 그녀는 승리의 기쁨을 만끽할 수 없었다.
아직도 백지처럼 물들어 있는 두 사람의 시야를 뚫고, 송곳처럼 튀어나오는 한 자루의 검.
‘뭐라고? 이 무슨!’
시리스가 황급히 무너진 자세를 고쳤다. 하지만 의지만으로는 비기 이후의 탈력을 감당할 수 없다. 그녀는 흐트러진 자세로 다음 순간 벌어질 불확실한 사태를 받아들여야 할 뿐이었다.
시익!
한 줄기 검광이 눈사태를 찢었다.
시리스처럼 신의 권능을 빌린 검이 아니다. 그 검에는 기사라면 누구나 사용하는 가장 보편적인 힘, 오러조차 묻어 있지 않았다.
그저 평범한 강철검의 형태.
시리스는 눈사태를 헤집고 있는 게 바로 그것이란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거짓.”
말!
마지막 한 글자는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지근거리까지 다가온 진의 강철검이 폭발하려고 하기 때문이었다.
카드득! 콱! 강철검이 우그러지고 팽창하는 모습이 느린 화면처럼 선명하게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똑바로 인지하기도 전에, 그보다 더 강렬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꽂혔다.
“숙여요!”
방금까지 검을 겨누고 싸우던 남자의 목소리.
시리스는 그 말에 응할 마음이 없다. 차라리 죽거나 크게 다치는 한이 있더라도, 상대의 아량에 기대어 화를 면하는 일은 패배보다도 더한 굴욕이다.
쾅……!
손가락 한 마디 크기까지 압축된 진의 강철검이 폭발했다.
떨어진 유리판처럼 수천 조각으로 깨진 검신이 전방으로 쏘아졌다. 검 조각 하나하나가 오러로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 눈사태를 찢은 강철검은 휩싸이지만 않았을 뿐, 검신 속에 오러가 꽉 찬 상태였다.
먼 과거에 위명을 떨친 검술명가, 아틸라의 결전기, ‘칼날 폭풍’이라 불리는 기술이었다. 아틸라가 룬칸델에 의해 멸망한 현재는 마땅한 기록조차 남아 있지 않은, 말 그대로의 비기.
현재까지 진이 터득한 폭풍성 지하실의 비기 중 가장 강력한 것이다. 만빙검을 사용한다고는 하나 본질적으로 4성인 시리스가 결코 감당할 만한 파괴력이 아니었다.
‘이런!’
시리스의 만빙검을 너무 높게 평가한 것일까, 아니면 아틸라의 비기가 예상보다 더 뛰어났던 것일까.
진은 칼날 폭풍을 펼친 걸 후회하고 있었다. 피하지 못한다면, 시리스는 반드시 죽거나 불구가 될 위력인 것이다.
진은 시리스가 죽을까봐 속이 타고.
시리스는 상대의 아량을 받아들여 살아남고 싶다는 본능을 억압하기 위해 이를 악문.
그런 1초가 지났다.
‘아!’
‘아…….’
칼날 폭풍이 사그라지자마자, 두 사람이 동시에 속으로 외쳤다.
한 사람은 안도감에서 비롯된 것이고, 한 사람은 굴욕감에서 비롯된 소리 없는 탄식이다.
시리스는 진의 말을 따라 몸을 숙였다.
“괜찮습니까?”
진이 자루만 남은 검을 바닥에 내던지고 시리스의 어깨를 붙잡았다. 그녀는 충격이 큰 듯, 멍한 눈동자를 하고 있었다.
검을 쥔 이후, 그녀 인생에서의 첫 패배였다.
‘내가… 목숨이 아까워서, 다치는 게 두려워서. 몸을 숙였다고? 이 시리스 엔도르마가?’
승리의 직감이 패배의 확정으로 뒤바뀐 순간, 그녀는 분명 칼날 폭풍을 피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자신은 적의 아량에 기댈 만큼 나약한 인간이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자존심이 강하고, 명예가 목숨만큼 중요하다 할지라도. 아직 열다섯 어린애에 불과했다. 생존에 대한 본능적인 욕망을 억누르기엔 너무 어린 나이였다.
“후우, 하마터면 당신을 죽일 뻔했어요. 미안합니다.”
시리스가 괜찮은 걸 확인한 진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한 한동안 대답하지 않는 시리스의 속마음이 또렷하게 보였다. 어떻게 말해 줘도 소용없는 열패감에 사로잡혀 있을 게 분명했다.
‘나도 참, 그래봤자 애인데 그냥 적당히 져줄 걸 그랬나.’
살아온 세월로 치면 자신은 이미 마흔을 훌쩍 넘었다. 하마터면 치기 어린 소녀를 죽음으로 내몰 수 있었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아찔했다.
게다가 어쩌면 차후 적수, 혹은 좋은 동료가 될지도 모르는 인물이 아닌가.
진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며 할 말을 정리했다.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똑같은 상황이었다면, 나라도 피했을 겁니다. 그리고 당신 역시 내게 숙이라고 소리쳤겠죠. 그러니 더 말하지 않겠습니다.”
어차피 위로가 될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자신이 굳이 애써 그녀를 위로해야 할 입장도 아니고.
그렇게 정리한 진이 뒤돌아서 걸음을 옮겼다. 이럴 땐 차라리 혼자 있도록 도와주는 게 더 나았다.
“진 룬칸델.”
어느새 눈빛을 되찾은 시리스가 진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깐 사이에 큰 내면의 변화를 겪은 듯, 깊은 눈빛이었다.
“아까 내가 벤 이마에서 아직 피가 흐르고 있어.”
진에게 몇 걸음 가까이 다가온 시리스가 품속에서 작은 손수건을 꺼냈다.
그러곤 묵묵히 진의 이마를 훔치고, 그 위에 치유 송진을 발랐다. 마미트에서 진의 정강이에 발라 준 것과 똑같은 송진이었다.
“이걸로 네가 살려 준 목숨 값을 대신하겠다.”
“자신의 목숨 값을 너무 하찮게 생각하는 거 아닙니까? 비궁의 유일한 후계가 지닌 가치를 고작 치유 송진에 빗댈 수는 없을 텐데요.”
“동냥 받은 목숨이니까 치유 송진도 잘 쳐준 셈이야. 이제부터 다시 비싼 인물이 될 테니, 그때는 내가 너를 살려 줄 수 있으면 좋겠군.”
함께 결투장 문밖을 나선 순간, 시리스가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그리고 오늘 우린 처음 만난 사이가 된 거야.”
“어쨌거나 내기는 제가 이겼군요. 내일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