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41)
제 555화
145화. 전조(11)
한편, 탈라리스는 내성 가장 깊은 곳에서 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론의 숨소리는 탈라리스조차 집중해서 들어야 할 만큼 미약했다. 처음 그녀가 찾아온 날보다 약해진 것이다.
검황의 강체는 옷과 이불로도 가릴 수 없을 만큼 야위었고, 공기 중엔 짙은 죽음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론.”
탈라리스가 침상에 걸터앉으며 조심스레 론의 마른 손을 붙잡았다.
“네가 그토록 예뻐하는 손자도, 그 아이의 친구도, 너의 기사들도 모두 하이란을 위해 싸우고 있다. 정말 일어나지 않을 셈이냐.”
탈라리스가 벗이라 부를 수 있는 단 두 사람.
시론 룬칸델과 론 하이란. 탈라리스는 그들의 옛 모습을 떠올리며 고개를 저었다.
“하아, 이 한심한 인간들. 네놈들은 어째 강해질수록 내게 실망만 주는군.”
켈리악 지플이 직접 올 수도 있다는 사실은 물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예견한 바지만, 막상 그 위용을 직접 마주하자 사람들은 숨이 턱 막히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함대는 온통 화염의 마력에 가려져 있다. 선두의 기함, 코젝이 손가락 한 마디로 보일 만큼 멀기도 했다.
그런데도 검황성에 있는 이들은 모두 켈리악을 한 걸음 앞에서 마주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압도적인 존재감, 세계제일가의 수장이 이끄는 함대가 서서히 검황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검황성의 기사들 중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나 자신들이 저들과 싸워 이길 수 있으리라 생각하는 사람 역시 아무도 없었다. 어떤 이변이나 기적조차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사기가 떨어지지는 않았다.
다만 조금 걱정이 될 뿐이었다. 승리하지는 못하더라도, 단 한 번의 유의미한 반격조차 하지 못하고 끝나 버릴 수도 있다는 마음에.
“드디어 현세대 지플 가주라는 놈의 상판을 한 번 보겠군.”
무라칸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진도 켈리악 지플을 직접 보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전생에서도, 현생에서도 그의 모습은 오로지 소식지와 가문의 자료를 통해서만 보아왔었다.
“거물 중의 거물이지. 실물이 어떨지 나도 궁금하기는 하군.”
다행히 지플의 본대는 등장과 동시에 검황성을 공격하지 않았다. 아멜라가 우려한 문제는 일어나지 않은 것이다.
지금의 코젝은 지금껏 진이 겪어온 바와 차원이 다른 위력을 발산할 수 있었다.
“루얀 경.”
“말씀하시오, 진 경.”
“룬칸델도 전면전 상황 대비를 끝내놓았을 겁니다.”
“그럴 것이라 짐작은 하였소. 지플이 저리 탐을 내는 물건이면 룬칸델도 가만히 있을 수 없을 테니. 룬칸델이 나서면 하이란 중 일부는 살아남을 수 있겠지만…….”
“일부가 아닙니다. 전체를 살릴 겁니다.”
“그대가 진심이고, 그럴 능력도 있다는 것을 알아. 그러나 우린 소가주를 두고는 절대로 도망치지 않소.”
“그건 나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루얀 경. 다만, 나는 경께 한 가지 약속을 받고 싶습니다.”
“약속?”
“단테를 가둔 혼돈의 봉인은, 그가 혼돈에 저항하고 있기 때문에 발생한 겁니다.”
진은 루얀에게 이곳에 탈라리스가 와 있다는 사실을 알렸다.
그녀가 아까 전 루얀에게는 비궁의 사명과 혼돈의 위험성을 더 자세히 알려주어도 괜찮다고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탈라리스가 루얀이 아니라 진을 배려해서 허락한 것이었다.
한동안 진이 그에 관한 이야기들을 설명했고 루얀은 경청했다.
“……소가주가 하얀 돌의 힘을 이겨내지 못하면, 비궁주조차 혼자서는 어찌할 도리가 없는 괴물이 깨어난다는 것이오?”
“그렇습니다.”
“그럼 소가주는 어떻게…… 아.”
왜 이 이야길 이제 하느냐, 루얀은 그렇게 따지지 않았다.
비궁주가 외인에게 비궁의 사명을 알리면서까지 사정을 봐주는 것은 단지 진이 이 사건의 중심에 있는 덕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또한 진이 미리 알렸다 할지라도 상황이 달라지는 건 없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지면, 그때는 남은 하이란의 기사들 모두를 퇴각시킬 것이라 약속해주십시오.”
단테가 죽고 혼돈이 깨어나고, 검황성전이 지플과 룬칸델의 회전이 되거나 혼돈 토벌전이 되면 하이란의 기사들은 떠나는 게 옳았다.
양대 가문의 전쟁에 휩쓸려 죽든, 혼돈의 괴물에게 죽든. 그건 개죽음밖에 되지 않으니 말이다.
그럴 경우에도 결과적으로 혼돈이 단테를 죽인 것이니, 싸워서 그 괴물에게 복수를 해야 한다.
루얀은 차마 그렇게 말할 수 없었다. 루얀도 진이 어떤 심정으로 이런 약속을 하자는 것인지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단테의 죽음을 상정하는 일은 그 자체로 진에게 가슴이 찢어지는 일이었다.
“……그리하겠소.”
루얀이 어두운 목소리로 답했다.
하이란에 닥친 운명은 부조리한 것이었다.
단테와 하이란의 긍지를 지키고자 목숨을 걸었건만, 하이란은 하얀 돌의 혼돈이 단테를 집어삼키고 깨어나야만 존속할 수 있는 것이다. 비참하고 끔찍한 존속을.
“대신 그대 또한 한 가지를 약속해주시오.”
“말씀하십시오.”
“혹여, 소가주가 다시 돌아오거든…… 우리가 없을 때 돌아오거든. 단테, 그 아이가 괴물이 되지 않도록 도와주시오.”
상황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루얀은 단테 혼자 살아남고, 하이란이 멸망했을 때를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그때 단테가 상실과 슬픔과 상처에 무릎 꿇고 정도正道를 잃지 않도록, 악귀가 되지 않도록 도와달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그건 친구만이 도울 수 있는 일이다.
“단테는 이미 너무 많은 상처를 받지 않았소.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오. 지금도.”
“단테가 증오에 빠져 나까지 할퀴고 저버리더라도 나는 단테를 놓지 않습니다.”
“그래, 그대는 그럴 사람이지. 그냥 말이라도 하고 싶었소. 하이란이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이 너무 없으니.”
켈리악의 화염은 이제 검황성을 붉게 물들였고, 함대는 전진을 멈추었다. 성벽에 있는 이들은 모두 고개를 들어 함대를 노려보았다.
코젝의 선두에 서 있는 마법사들 사이로, 긴 백발에 새하얀 로브를 입은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었다.
켈리악 지플이었다.
“보호막을 펼쳐라!”
용기사단장 칼마인이 눈을 부릅뜨며 소리쳤다.
벌써 함대를 휩싼 화염으로부터 뻗어진 열기가 검황성 전체로 침투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평기사들로서는 버티는 것조차 버거운 열기였다.
성벽을 이룬 돌들이 벌겋게 달아오르며 열을 토했고, 공기는 폐와 장기를 모조리 녹일 듯이 뜨거웠다.
그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직 제대로 마법을 펼친 것도 아니고, 함대 전체가 이동하고 있는 것도 아니며, 단지 켈리악 혼자 코젝의 선두로 나섰을 뿐인데 벌어진 현상인 것이다.
기사들이 보호막을 펼치며 방어 장비를 발동시켰다. 검황성 전체가 순식간에 푸른 막으로 뒤덮이며 열기를 막아내는 듯 보였다.
하지만 다음 순간, 켈리악이 지플 가주의 전용 지팡이 ‘흐로티’를 한 차례 휘두르자. 검황성을 감싸고 있던 보호막이 그대로 사라져버리는 모습이 이어졌다.
마치 처음부터 펼쳐진 적이 없던 것처럼.
“그저 궁금한 사람이 있어 이야기나 몇 마디 나눠볼까 찾아온 것이니 너무 날 세울 것 없네.”
“성을 녹일 기세로 화기를 내뿜어놓고는 잘도 헛소리를 하는군.”
칼마인의 말에 켈리악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마치 어린애가 악을 쓰는 걸 들어주는 온화한 노인처럼.
“아, 전장은 오랜만이라 그건 미처 신경 쓰지 못했군. 치워주도록 하지.”
그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처럼 열기가 사라졌다. 화염의 마력은 여전히 함대를 감싼 채 이글거리고 있으니, 켈리악의 힘은 분명 마법을 넘어 권능의 영역에 닿아 있었다.
“그리고 노파심에 하는 말인데, 이 이상 내 대화를 방해하지 말게. 마음만 먹으면 자네들 정도는 수 초 내로 몰살할 수 있으니. 내가 배려한 만큼 자네들도 나를 배려하게.”
“켈리악……! 우릴 어디까지 능멸할 셈이냐!”
그렇게 소리친 사람은 성벽 왼편에 서 있던 지휘관 골로였다. 1차전 당시 비전투 인원과 백성들을 대피시킨.
그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소리친 것이 아니었다.
단지 온몸을 옭아매는 위압감과 공포에 저항하려다 무의식적으로 악을 쓴 것이었다.
“말귀가 어둡군.”
경지에 이른 무인들은 이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를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막을 수단이 없었고, 위험을 알릴 시간도 없었다.
또한, 그들의 직감은 틀렸다.
퍽
공간 폭발.
켈리악 지플의 마법이 펼쳐졌다.
하지만 그 대상은 골로가 아니었다. 모두가 골로가 터져 죽을 줄 알았지만, 켈리악의 마법이 해한 것은 바로 칼마인 아이타였다.
칼마인의 어깨에서 폭발이 일어났다.
그 폭발은 칼마인의 오른팔을 완전히 앗아갔다. 폭발에 찢기며 튕긴 오른팔은 이어진 공간 폭발에 흔적도 없이 흩어져버렸다. 쥐고 있던 검이 돌바닥에 떨어지는 허망한 소리만이 남았다.
“커헉……!”
“단장님!”
“칼마인!”
용기사들과 검성들이 동시에 소리치며 칼마인에게 다가가려 했으나. 켈리악은 그들의 얼굴 바로 앞에 일제히 공간 폭발을 터뜨리며 움직임을 제지했다. 마지막 경고라는 듯.
그리곤 이렇게 말했다.
“배려는 여기까지네.”
검황성에 있는 이들 대부분은, 태어나 그보다 더 오싹한 목소리를 들어본 기억이 없었다.
무서우리만치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왔다. 켈리악은 오 초쯤 기다리며 아무도 미동이 없는 걸 확인하고는, 진과 눈을 맞췄다. 이루 말할 수 없이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말이다.
‘진 룬칸델.’
‘켈리악 지플.’
눈동자에 담긴 켈리악의 위엄에 진은 피가 식고 뼈마디가 아려오는 것 같았다. 그는 이제껏 진이 겪어온 초월적인 인물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기운을 갖고 있었다.
부드러우면서도 강하고 무디면서도 날카로우며 가볍되 무겁고, 온화한데 악하다.
켈리악 지플이라는 인물의 느낌을 진은 그렇게 정의했다.
‘왜 켈리악을 직접 본 사람들이 그를 신이라 비유하는지 알 것 같군.’
단언컨대 이루 말할 수 없이 충격적인 인물이었다.
‘하지만, 왜 켈리악이 2인자인지도 알겠어.’
신적이면서도 오묘한 켈리악의 분위기, 그리고 그 미소 속에 감춰진 한 가지 감정이 엿보이기에, 진은 그가 시론의 뒤에 서 있는 이유를 통찰했다.
그렇기에 진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주었다.
“날 증오하고 있군요, 켈리악 지플 경.”
자신의 앞에 있는 사람이 켈리악이 아니라 시론이었다면, 지금의 진으로서는 결코 그의 감정을 읽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아버지는 자신 따위에게 증오라는 지극히 인간적인 감정을 품지도 않을 위치에 있는 존재였다. 자신이 어떤 식으로 자극하더라도, 아버지는 노여움 이상의 감정을 결코 갖지 않을 터였다.
설령 자신이 지플로 태어나 룬칸델의 모두를 죽였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그것이 드러나던가?”
켈리악이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예, 경께서 방금까지 보여준 신적인 힘이 빛바래게 느껴질 만큼.”
진은 그렇게 대답하며 미소를 지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