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42)
제 555화
145화. 전조(12)
지위적으로 한참 떨어지고, 나이와 경험에서도 한참 밀리는 약관의 청년에게 속내를 관통당하는 건 분명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다.
하지만 켈리악은 자존심에 상처가 난 것은 드러내지 않고, 미소를 지우며 솔직한 증오만을 드러냈다.
그 깊고 끔찍한 증오는 늪과 같아서 진은 그것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몸이 무거워지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일부러 증오를 드러낸 것은 켈리악이 진을 인정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과연, 지플의 절대자다운 위압감이군.’
증오.
그간의 일들을 돌이켜보면 사실 켈리악은 진을 증오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폭풍성을 떠날 때 지플 추종자들을 죽인 것으로 시작해 테싱에서의 사칭과 그들이 역사를 지운 첸미의 마법을 익힌 것, 안드레이 살해와 마신석 파괴, 콜론 원주민 학살 사건, 암흑마법회를 몰살하고 리올 지플의 유산을 얻은 일, 나침반 탈취, 성국 사건, 서해 전투, 테마르의 무덤들, 망령대 살해, 바르톤 제거, 완타라모 숲, 가이파 군도, 소타 사막, 그리고 지금 이 순간까지도.
진이 회귀 후 해온 모든 일들은, 단 하나도 빠짐없이 그야말로 켈리악과 지플의 앞길을 막아온 역사인 것이다.
키다드 홀을 죽여 그의 마법을 독점한 것도 지플에 간접적인 타격을 주었으며, 아직 켈리악은 모르지만 지플이 그토록 염원하는 발레리아 히스터는 오직 진과만 관계를 맺고 있다.
심지어 베라딘은 진의 영향을 받아 정신 조작에 저항하고 있고 진은 마검 회귀 선언을 통해 룬칸델이 지플과 맺은 굴욕적인 맹약을 전면으로 부정하기도 했다.
지플로서 진을 증오하지 않을 이유가 단 하나도 없었다.
‘바로 이 증오가 당신이 나의 아버지가 닿은, 창성의 영역에 닿지 못한 까닭일 테지…….’
그렇게 진이 켈리악을 꿰뚫어 보고 있듯.
그 역시 진의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었다.
‘걸출, 그 자체로다. 솔더렛이 우리와의 맹약을 어기고 룬칸델에 붙는다면 그건 당연히 시론이나 루나 때문이리라 생각한 세월이 긴데…… 진 룬칸델, 직접 보니 솔더렛이 그 두 사람이 아닌 너를 선택한 이유를 알겠군.’
켈리악은 시론에게 분한 마음마저 들 지경이었다.
평생을 그에게 가려 2인자에 머물렀건만, 다음 세대인 자식들마저 그의 유산을 뛰어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종종 이야기의 탑에서 너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 나의 친인들은 내가 널 마냥 가벼이 여기는 줄만 알더군. 그들도 알아채지 못한 내 증오를 네가 읽고 있으니 조금은 허망하구나.”
“더 유능하고 깊은 사람들을 곁에 두지 그러셨습니까.”
바멀 연합과 검황성의 기사들은 진의 그런 대답들이 모두 기름 앞의 불처럼 느껴졌다.
방금 전에 단 한 번의 공격으로 칼마인을 불구로 만들고, 수 초 내로 검황성 전체를 몰살할 수 있는 힘을 보여준 켈리악을 상대로 지나친 도발을 하는 게 아닐까 걱정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진은 알고 있었다.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한 번 협상을 종용하기 전까지는 절대로 검황성을 치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이다.
‘타협 없이 무조건 무력으로 검황성을 무너뜨리고 하얀 돌을 취할 생각이었다면 애초에 대화를 시작하지도 않았다. 켈리악 지플은 룬칸델과의 전면전을 부담스러워하고 있어.’
시론의 존재, 룬칸델의 저력, 킨젤로의 힘 등, 여러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켈리악 역시 자칫하면 하얀 돌에서 혼돈의 괴물이 깨어날 수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을 테지. 아니, 확실해. 그는 우리 중 누구보다도 하얀 돌의 가치를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가지려는 것이고.’
따라서 켈리악은 최대한 무력 충돌 없이 검황성(사실상 룬칸델)과 협상을 통해 사태를 마무리하고 싶을 터였다.
사실 지금 켈리악이 ‘협상’이라는 패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지플의 대외적인 위신은 땅에 추락하는 것이었다. 세계제일가가 가문의 용과 마법사, 함대를 그만큼이나 잃고도 싸움이 아닌 협상을 우선하는 건 본래 있어선 안 되는 일이다.
‘무엇보다도 화룡 카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화룡 카둔.
불의 신 쉬누가 빚은 가장 강력한 화룡. 진은 아까부터 카둔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걸 의식하고 있었다.
물론 카둔은 인간으로 변신한 채 함대에 탑승해 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진은 그럴 가능성이 매우 낮다고 판단했다.
‘함대 전체에 엄청난 화염의 마력을 두르고, 모르는 척 검황성 전체에 화기를 뿌리며 위압감을 연출하고 과시한 마당에 최강의 화룡을 보이지 않는 곳에 배치하는 건 이상한 일이지.’
켈리악이 이끌고 온 약 오십 척의 함대 사이사이엔 지플의 용들이 섞여 있었다. 카둔이 그 중심에서 위용을 과시하지 않을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다만 진은 켈리악이 ‘카둔을 데려오지 않은 이유’를 유추하기가 어려웠다.
‘카둔이 없으면 지플의 방공에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아니, 협상을 우선하더라도 전면전을 아예 상정하지 않은 것은 아닐 테니 그건 이유가 안 돼. 그렇다면…….’
불현듯, 진은 또 다른 친구의 이름이 떠올랐다.
‘함대에 카둔이 포함되지 않도록, 베라딘이 무언가 조치를 취했다……?’
정확했다.
베라딘은 현재 자신을 억지로 폭주시키며 카둔의 보호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을 만든 상태였다.
때문에 켈리악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베라딘이 끝장나면 지플이 그간 준비해온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진은 그 사실을 알지 못하지만, 왜인지 카둔의 부재가 친구의 희생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강렬한 느낌을 받았다.
“카둔이 없는 걸 의식하고 있구나.”
그 말에 하마터면 진은 놀란 기색을 드러낼 뻔했다.
“경은 그 화룡의 힘이 있어야 완벽한 화염을 사용할 수 있다고 들었습니다.”
“불을 다루는 마법사를 완벽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수호룡이 아니라 불사조뿐이지.”
피이이이-!
별안간 켈리악의 뒤에 한 마리의 불사조가 모습을 드러냈다. 테스, 마니에르, 생키쉬와 더불어 최강이라 정평이 난 불사조.
‘벨롯’이었다.
과연 마법의 정점에 오른 이의 소환이었다. 벨롯은 그 어떤 문헌에 기록된 것보다도 거대하고 이글거리는 몸집으로 검황성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다.
문자 그대로 불이 가득했다.
바멀 연합과 검황성은 밤하늘을 가득 채운 함대와 벨롯의 불길에, 자신들이 싸워야 할 대상이 지플이 아니라 꼭 불의 신 쉬누 그 자체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지경이었다.
진이 거울과 두 신의 의지를 통해 보여준 리올 지플의 유산보다도 더욱 거대한 불이 그들의 시야를 온통 시뻘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진은 기죽지 않았다.
“왠지, 경이라면…… 나의 불사조가 어떤 존재인지를 알 것 같군요.”
“화염계의 유일신이자 그 모든 불사조의 주인이시지. 하지만 자네는 아직 그분의 힘을 제대로 다룰 수 없어.”
그건 켈리악이 만인 앞에서 진을 인정하는 대목이었다. ‘아직’이라는 표현에는 미래의 가능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지금 당장 제 머리를 폭파해보십시오. 과연 경의 신, 쉬누가 내려준 힘이 테스의 절대 영역을 뚫을 수 있는지 궁금하군요.”
“듣던 대로 자네는 낯짝이 아주 두껍군. 이 나를 상대로 그런 훤히 보이는 허세를 부리다니. 칭찬해줄 만한 용기일세.”
켈리악은 진이 현재 테스를 소환할 수 없다는 걸 알아보고 있었다.
진은 그리고 그가 그 사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소름이 돋았다. 서로 그런 말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으나, 본능적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었다.
“그러는 켈리악 경은 듣던 것보다 더 신중하시군요. 테스를 소환할 수 있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 때문에 내게 공간 폭발을 사용하지 않는 걸 보니.”
“내가 자네 머리를 터뜨리지 않는 게 자네 때문만은 아니라네.”
켈리악이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 미소 속엔 증오뿐만이 아니라 여유도 함께 배어 있었다.
“진 룬칸델.”
“말씀하십시오.”
“자네는 도망치는 적들을 붙잡지 않겠다고 아량을 베풀었다더군. 나 또한 같은 자비를 베풀도록 하지. 하이란은 지금 즉시 하얀 돌을 내버려두고 검황성을 떠나도록 하게. 그리하면 그 누구도 죽지 않을 걸세.”
화르륵!
켈리악의 손가락에 자그마한 불꽃이 맺혔다. 그는 불꽃으로 허공에 글씨를 썼는데, 그건 오직 쉬누의 계약자만이 다룰 수 있는 ‘불의 인장’이었다.
아울러 지플은 하얀 돌에 잠식된 단테 하이란을 가문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통해 구출하고, 그가 살아나면 반드시 다시 하이란으로 보내겠다고 맹세함이네.
검황성에 선 모두는 그 붉게 빛나는 글씨를 똑똑히 바라보았다.
“이와 더불어 내 조건을 받아들일 시, 지플은 전력을 다해 하이란을 배신한 제국의 황실을 멸망시킬 것이다.”
켈리악이 어떻게 단테의 상태를 알고 있는지에 대해서 고민할 겨를도 없이, 하이란의 기사들은 사태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동요할 수밖에 없었다.
제국을 멸망시켜주겠다는 약속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란의 기사들에게 목숨을 포기하면서까지 지키려던 긍지보다도 더욱 소중한 게 있다면, 그건 바로 소가주의 목숨이었다.
불의 인장을 사용했다는 건, 켈리악이 자신의 신 쉬누를 걸고 맹세한다는 뜻이었다. 켈리악이 내민 조건은 의심할 여지 없는 진심인 것이다.
“지플은 단테 하이란을 살릴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다. 무조건 살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는 없으나, 최소 8할 이상의 성공률은 보장할 수 있지.”
진은 즉시 하이란의 기사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함정입니다. 켈리악 경의 맹세에 분명 거짓은 없으나…….”
하이란이 조건을 받아들이는 순간, 하이란은 지플이 아니라 룬칸델에 의해 멸망할 겁니다. 켈리악 경은 하이란을 룬칸델로부터 지켜준다는 말을 빼놓았습니다.
차마 그 뒷말이 떨어지지 않았다.
지플의 조건을 승낙한 하이란을 치는 건, 룬칸델에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되면 룬칸델은 아무것도 얻는 것 없이 지플이 하얀 돌을 얻어가는 걸 구경해야만 하는 것이니까.
로사가 그걸 가만히 두고 볼 리 없다. 그녀는 검황성과 하이란의 땅이 모두 잿더미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물러서지 않을 인물이었다.
그리고 진이 그런 로사를 가로막는 건.
곧 룬칸델을 향한 배신이 된다.
‘제대로 묘수를 뒀군…… 켈리악 지플.’
객관적으로, 진과 룬칸델은 하이란에게 그보다 좋은 조건을 제시할 수 없었다.
룬칸델은 단테를 살릴 방법을 갖고 있지 않으며, 룬칸델 중에서 단테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오로지 진뿐이었다.
룬칸델은 하이란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말거나, 하얀 돌이 지플에 넘어가지 못하게 막으면 그만인 것이다.
진은 이를 악물었고, 켈리악은 무덤덤한 얼굴로 승리를 확신했다.
켈리악의 시선이 루얀에게 닿았다.
“이제 하이란에게도 나와 대화할 기회를 주도록 하지. 어떤가? 루얀. 검황성에 이보다 좋은 조건은 없다네.”
루얀은 한동안 말없이 켈리악을 올려다보았다.
“하이란은…… 그리고 하이란을 위해 모인 기사들은…….”
이윽고 루얀이 뒷말을 이으려는 순간.
거부한다, 켈리악 지플.
이 땅에 있는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그리고 함께 싸울 수 있기를 가슴이 찢어지도록 염원했던…….
한 거인의 목소리가 조용히, 그러나 웅혼하면서도 깊게 하늘을 울렸다.
이제 막 성벽에 올라선 그 목소리의 주인을, 모두가 돌아보았다.
“감히 그 누가 나를 대신해 하이란과 나의 손주를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건 오직 나에게만 허락된 일이다.”
그곳엔 검황.
론 하이란이 우뚝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