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43)
제 555화
145화. 전조(13)
“가주님!”
“가주님……!”
하이란의 기사들 모두가 일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강대한 적이 눈앞에서 도사리고 있건만 모두 등을 보인 채 론에게 고개를 숙인 것이다.
전시에 결코 있어선 안 될 일이다. 다만 기사들은 이토록 절망스러운 상황 속에 그가 나타난 것에 믿음과 존경을 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가 있다면, 켈리악 지플이라 할지라도 검황성을 함부로 칠 수 없기에. 기사들은 뜨겁게 복받치는 감정을 간신히 억눌렀다.
저벅, 저벅…….
론이 앞으로 걸음을 옮기자 기사들이 일어서며 다시 자세를 취했다. 따로 기운을 싣지 않았음에도 적과 아군은 그의 발소리를 자신들의 심장 고동 소리처럼 들을 수 있었다.
진은 옆에 선 그에게 묵례로 예를 표했고, 론은 그의 어깨를 한 번 붙잡았다.
“네게 또 빚을 졌구나, 폴 그레이 믹.”
가명으로 자신을 부르는 론의 모습에 진은 미소를 지었다. 어쩐지 론 하이란이라는 불세출의 거인과 아주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언제든 갚아주시리라 믿습니다.”
죽지 마시고 꼭 살아서 갚아달라, 론은 진의 말에 담긴 속뜻을 읽고는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하이란 검성 수장, 루얀.”
그리고는 루얀을 찾았다.
“예, 가주님!”
“답하라. 검황성 총사령관 대행으로서, 켈리악의 조건을 받아들이려고 하였는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루얀은 한 치도 망설이지 않고 답했다.
그녀는 정말로 켈리악의 조건을 받아들일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건 하이란을 위해 싸운 바멀 연합을 배신하는 일이고, 하이란이 스스로를 욕보이는 일이었다.
검황성이 켈리악의 말에 일순 동요했던 것은 다만, 지플이 소가주를 돌이킬 방법을 알고 있다는 사실 그 자체 때문일 뿐이었다.
론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이렇게 답했다.
“잘했다. 그리고 훌륭히 버텼다.”
루얀은 론의 진심이 담긴 평가에 목이 메는 것만 같았다.
자신은 한 게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었다.
론이 일어서기 전까지 자신은 켈리악의 지플을 상대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고, 1차전에서는 소가주가 그렇게 만신창이가 되도록 해준 게 없었다고. 진이 아니었다면 하이란은 진즉에 끝장났을 것이며, 자신은 그저 머릿수를 채우고 있었을 뿐이라고…….
루얀뿐만이 아니라 하이란의 모든 기사들이 같은 마음이었다. 자신들이 더 유능했다면, 검황성이 이렇게까지 우스워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하이란의 기사들이여, 그 마음 또한 나의 몫이다. 그러니 자책을 멈추고, 늦어 죄인인 검황성주의 명령을 받아주도록.”
“……무엇이든 분부만 하십시오.”
“용기사단장 칼마인 아이타.”
“말씀하십시오, 가주님.”
칼마인이 왼팔로 검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그는 직감적으로 론이 어떤 명령을 내릴지 알 수 있었다.
“용기사단은 즉시 검성들을 제외한 하이란과, 하이란을 위해 모인 모든 기사들을 데리고 검황성을 떠나도록 하라.”
칼마인은 그 명령에 반발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벌어질 전투에서, 그나 검성 이하의 기사들은 사실상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게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하이란의 기사들이 지금의 싸움에는 필요치 않다고 할지라도.
‘재건’을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 할 사람들이었다.
론이 의식 불명일 때 그들이 개죽음이라 할지라도 성을 떠나지 않은 건 미래가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미래를 생각할 수 있었다. 반드시, 미래에 대비를 해야만 했다. 가주가, 소가주가 돌아왔을 때 반겨줄 사람들이 필요했다.
“용기사단장 칼마인 아이타, 명을 받들겠습니다.”
함께 싸우다 죽고 싶은 절절한 마음을 억누르며, 칼마인이 론에게 검례를 올렸다.
“론 하이란…….”
그때쯤 켈리악이 눈을 가늘게 뜨며 입을 열었다.
“깨어날 줄 몰랐군. 이미 지옥으로 간 줄 알았는데 말이야.”
“자네 동생과 아들들이 잘 지내는 모습을 확인하고 돌아왔지.”
켈리악의 불사조 벨롯은 론이 처음 등장한 순간부터 맹렬한 적의를 드러내는 중이었다. 론은 켈리악과 벨롯을 번갈아 쳐다보며 수염을 쓰다듬었다.
“어쩌면 자네도 곧 그곳으로 갈 수 있을지 모른다니까 꽤 기대하는 눈치더군. 안타깝게도 내게 목과 날개를 베였던 자네의 소환체는, 불사라는 특성 때문에 함께 갈 수 없을 테지만 말이야.”
화아아악!
별안간 벨롯의 두 날개가 부풀어 올랐다. 켈리악의 의지에 따라 검황성을 화염으로 묶으려는 것이다.
순식간에 함선만큼 거대해진 양 날개가 검황성을 앞뒤로 휘어 감았다.
휘감은 동안에도 쉴 새 없이 불을 토하며 부푸는 날개는 당장이라도 검황성을 통째로 녹여버릴 것 같았다.
“내가 자네의 기사들이 도망가는 걸 허락할 것 같던가?”
론은 천천히 허리춤에서 라시드를 뽑았다.
스르릉…… 시야를 온통 채운 짙은 화기 속에서 라시드의 칼날이 검집을 빠져나오는 소리가 유난히도 서늘하게 들렸다.
빛나는 라시드의 검신이 허공을 한 차례 가르며 고요한 파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검으로부터 사방으로 무형無形의 바람이 쏟아졌다.
수만 줄기의 형체 없는 검풍이 천천히 벨롯의 화염을 밀어내기 시작했다.
벨롯은 벌어지는 날개를 죄이며 포효를 내질렀으나, 론은 힘의 충돌이 미친 듯이 격해지는 와중에도 평온한 기색을 전혀 잃지 않았다.
그 순간 켈리악은 불길한 의문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설마…… 론이, 벽을 넘은 것인가……!’
창성.
오직 시론에게만 허락된 초월과 절대의 영역. 일순 켈리악은 론에게서 시론이 닿은 영역을 엿볼 수 있었다.
비록 라시드를 쥔 손은 오랜 투병과 의식 불명으로 인해 차마 그 주인이 검황이라 상상할 수 없을 만큼 파리했고.
몸은 옷으로도 다 가릴 수 없을 만큼 야위게 되었으나.
지금, 검황이라는 업적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빛과 위엄을 드러내고 있었다. 켈리악 지플조차 순간 그가 시론의 영역에 서 있다고 착각했을 만큼!
‘아니, 론은 아직…… 그에게 닿지는 못했다.’
아마 시론을 직접 겪어보지 못했다면, 켈리악은 확신했을 것이다. 론이 결국 창성의 땅에 들어서고야 말았다고.
켈리악이 지금 공포와 무력감에 빠지지 않은 것은 순전히 시론이 세상에 존재하기 때문이었다.
창성은 오직 시론만이 증명한 경지이며, 론이 지금 보이는 힘은 그 증명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 할지라도 몸속에서 천둥이 몰아치는 듯 전율이 치솟았고 이미 등허리에 칼날이 들어온 듯 감각이 싸늘했다.
켈리악뿐만이 아니라 모두가 같은 충격을 받고 있었다. 함대의 용과 마법사들도, 아군도, 멀리서 사태를 주시하고 있는 룬칸델도, 단테의 봉인 앞을 지키고 있는 탈라리스도.
특히 론과 직접 힘겨루기를 하는 불사조 벨롯은, 자신의 날개를 베어냈던 원수가 이토록 강해졌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카하아아악-!]결국 검황성을 휘감은 벨롯의 날개가 활짝 펼쳐지며 찢어졌다.
벨롯은 신음 섞인 괴성을 질렀고, 찢긴 날개의 불들은 우박처럼 지상으로 마구 떨어져 내렸다.
마법의 절대자가 소환한 최강의 불사조는, 그렇게 또 한 번 같은 사람에게 날개가 찢기는 수모를 겪고 있었다.
심지어 론은 아직 단 한 차례도 검을 휘두르지 않았다.
그저 론이 검을 뽑아 기운을 드러낸 결과가 이렇다는 사실을, 지플의 본대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벨롯은 작아진 날개를 움츠렸다 펴기를 반복하며 미친 듯이 원한을 드러냈고, 켈리악은 보이지 않는 검풍 한 줄기가 자신의 목을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강해졌군, 론 하이란.”
“누워서 놀고만 있지는 않았다네.”
“하얀 돌의 힘인가?”
“놈을 꺾고 있는 하이란의 힘이지.”
진은 론의 의미심장한 말에 주목했다.
-이건 혼돈을 거부하는 것에서 비롯된 결계다. 네 친구, 론의 손자는 지금 자신의 내면 속에서 혼돈과 싸우고 있어. 그러니 내가 아직 사명을 이행할 이유는 없다.
단테가 혼돈과 치르고 있는 내면의 전쟁은, 그가 하얀 돌의 목소리를 따라 론이 품고 있던 하얀 돌을 본인이 직접 소유한 후부터 시작되었다.
당연하게도 그전까지 하얀 돌의 혼돈과 싸우고 있던 것은 론 하이란이었다.
론은 그 치열하고 끔찍했던 긴 싸움을 통해 새로운 경지를 이룩한 것이다.
‘놈을 꺾고 있는’ 하이란의 힘.
그 말이 의미하는 바는 다름이 아니었다.
‘하얀 돌의 혼돈은 론 경을 이기지 못하고 단테를 유혹했다. 혹은 론 경에게 패배하고 단테에게 옮겨갔다.’
어쩌면, 단테 역시 론처럼 하얀 돌과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도 있다는 기대감이 들었다. 친구가 놈을 떨쳐내고 다시 돌아올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어차피 자네와의 싸움에서 내가 지면, 후퇴한 나의 기사들도 결국 죽음을 맞이하게 될 터. 그러니 어떻게든 날 이길 각오를 하고, 내 기사들은 그냥 보내주는 게 어떻겠나? 그쪽이 후에 역사가들이 이 싸움을 기록할 때도 더 보기 좋을 것 같은데 말이야.”
켈리악은 론의 도발에 별다른 기색을 드러내지 않았다.
“역사의 기록이라…… 재미있는 이야길 하는군. 어차피 승자의 뜻에 맞춰 기록될 테지만. 그렇게 해서 자네의 면이 선다면, 방해하지 않도록 하겠네.”
“오늘은 자네와 내가 만난 이래 처음으로 말이 통하는 날이군.”
켈리악이 흐로티를 흔들어 허공에 새겨진 불의 인장을 지웠다.
“기사들이여!”
론은 뒤돌아 아직 자신을 향해 있는 하이란의 기사들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하늘을 흔들고 있었다.
그러자 기사들이 일제히 검례하며 이를 악물었다. 눈물을 참기 위해.
“이 몸, 검황성주 론 하이란.”
론도 천천히 기사들을 향해 검례를 올렸다.
그건 검황성주로서 부하들의 예를 받아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끝내 하이란을 배신하지 않은 이들에게 늦은 죄인으로서, 더 낮은 사람으로서 올리는 진심이었다.
“하이란을 위해 하이란을 떠나는 그대들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경의를 표함이네.”
뼈가 끊어지고 살가죽이 벗겨지는 것보다 더한 고통을 참으며, 하이란의 기사들은 단 한 사람도 빠짐없이 눈물을 참을 수 있었다.
지금 울면 이것이 정말 마지막일 것 같기에 참을 수 있었다.
칼마인이 검을 내리자 기사들이 따라 검을 내렸고, 론은 계속 검례를 유지했다.
“……하이란! 전원 나와 용기사들을 따라…… 퇴성하겠다.”
칼마인의 지휘에 따라 기사들이 모두 퇴성하고, 그 뒷모습이 후문 저 너머의 무너진 절벽을 지나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지고 나서야.
론은 검례를 풀고 다시 전장을 돌아보았다. 온통 적들로 가득한 황량한 전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