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564)
제 555화
147화. 흑해의 왕, 글리엑(9)
검과 마법, 혼돈이 사방에서 뒤섞이고 격돌하는 가운데 탈라리스가 봉인식을 펼치기 시작한 작은 공간만이 순백의 광채를 발하고 있었다.
꼭 심해에서도 빛을 잃지 않는 진주처럼 보였다.
그리고 탈라리스가 절대 봉인식을 펼치기 시작하자마자, 글리엑은 모든 공격을 그녀에게만 집중했다.
몸뚱어리 전체가 거인들의 공격에 난도질이 되고 있음에도 최소한의 방어조차 하지 않았다.
베이고 터진 혼돈의 검은 살점들은 흑해화된 땅으로 계속 환원되었는데, 그건 인간들이 익히 알고 있는 초재생의 개념이 아니었다.
혼돈의 왕에게 ‘형태’란 최소한의 편리를 위한 한 수단에 불과했다.
글리엑의 실체는 흑해화가 진행될수록 거대해지며 정교해지는 저 몸뚱어리가 아니라, 그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사방에 혼재되어 있는 혼돈의 기운 그 자체다.
이를테면 거인들의 공격은 글리엑에게 실제적인 타격을 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단지 형태를 어그러뜨리고 있을 뿐이었다.
일검에 바다를 가르는 검이 있다 한들, 일격에 하늘을 지울 수 있는 마법이 있다 한들.
바다와 하늘 그 자체를 소멸시킬 수는 없다. 파도가 멈추고, 구름이 사라져도 바다와 하늘은 언제나 그 자리에 그대로 존재하는 법이니까.
글리엑 또한 같았다. 그토록 많은 공격을 받아내면서도, 혼돈은 흩어질지언정 단 한 점도 소멸하지 않고 있었다.
“뭐 저딴 게 다 있어?”
무라칸이 인간으로 변신하며 진의 옆에 섰다. 미샤와 무라칸, 바멀 연합 중 그 둘은 탈출하지 않고 진과 함께하고 있었다.
“야, 마귀. 정말 저거 답이 없는 거냐?”
미샤가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거의 한계까지 지친 상태로 무라칸의 영기를 흡수하며 버티는 중이었다.
“내가 옛 힘을 다 찾으면 어떻게 될 것 같은데, 당장 수술 같은 거 못 하냐? 거 좀 위험하더라도.”
“그런 게 가능했으면 진즉에 했지. 말이 되는 소리를 지껄여라, 제발. 긴장이란 걸 하고 생각이란 걸 하란 말이다. 지금은 진이 말한 방법밖에 없어. 킨젤로, 그들이 수단을 갖고 있어야 한다. 협상에도 응해야 하고.”
“아오, 그럼 넌 왜 남았어? 힘도 다 썼으면서. 아까 애들 빠질 때 빠졌어야지! 상황 꼬이면 나랑 진이 너까지 챙겨야 하잖아!”
“상황은 저게 깨어난 순간부터 꼬일 대로 꼬였어. 일단 나도 지금부터 집중해야 하니까 닥치고 있어 봐.”
미샤가 힘을 대부분 소진하고도 전장에 남은 이유는 다름이 아니었다.
아직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한 가지는 남았기 때문이었다.
비궁의 절대 봉인식.
미샤는 그것을 도울 생각이었다. 그녀도 글리엑이 깨어난 순간 놈에게 대응할 준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비궁의 절대 봉인을 떠올렸던 것이다.
“비궁주, 내가 봉인을 돕겠다. 혼돈의 벽이 두꺼워지고 있으니, 비궁의 봉인만으로는 눈두꺼비가 길을 열기에 벅찰 것이다.”
모트는 테스와 벗이라 할 만큼 격이 높은 존재지만, 또 그렇기 때문에 테스와 마찬가지로 인세에서 본래의 능력을 다 사용할 수는 없다.
게다가 모트는 검황성전이 시작된 후 계속 장거리 차원 이동을 했던 탓에 아직 지친 상태였다.
이토록 짙은 혼돈 속에서는 모트의 차원 이동 능력이 개방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의미. 미샤는 영기로 그 부분을 상쇄시키려는 계획이었다.
“다급해서 미처 그 부분을 생각하지 못했군요. 그럼 미샤 님을 믿겠습니다.”
탈라리스는 미샤에게 비궁과 봉인식을 해본 적이 있느냐 묻지 않았다.
애초에 비궁의 봉인은 그 결을 읽지 못하면 절대로 참여할 수가 없었다.
새하얀 눈 위로 먹이 떨어지듯, 만빙의 기운에 영기가 섞이기 시작했다.
만빙의 기운과 영기는 탈라리스의 예상 이상으로 좋은 합을 보여주었다.
‘과거 선대 비궁주들과 봉인식을 진행한 적이 있나 보군. 이러면 부담이 훨씬 덜하겠어.’
전장이 온통 굉음으로 울리는 가운데, 봉인식이 행해지는 공간엔 스산하면서도 묘하게 듣기 좋은 바람 소리만이 가득 퍼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안전하다는 뜻은 아니었다.
“큭……!”
한창 봉인을 펼치던 탈라리스가 돌연 핏물을 뱉었다.
글리엑의 검과 창, 혹은 혼돈의 기운이 그녀를 친 것은 아니었다. 그 모든 공격들은 거인들과 기사, 마법사들, 그리고 진과 무라칸이 전부 걸러내고 있는 것이다.
“탈라리스 님!”
흑해화된 땅은 글리엑의 육체와 같다. 글리엑은 단순 타격뿐만이 아니라, 아까부터 탈라리스가 서 있는 검은 땅을 이용한 공격까지 행하고 있었다.
검은 땅을 한 겹 덮고 있는 만빙의 단단한 얼음에 가로막히고 있었을 뿐.
방패와도 같은 만빙의 얼음이 조금씩 뚫리고 있는 것이다.
난데없이 땅에서부터 올라오는 혼돈의 사슬과 송곳까지 다른 일행이 막아줄 수는 없으며, 봉인식에 들어선 탈라리스는 완벽한 부동을 유지해야만 했다.
그녀의 발등을 뚫고 시커먼 혼돈의 송곳이 솟아 있었다.
탈라리스는 그런 식으로 글리엑의 공격에 찔려도 대처를 할 수 없었다.
그건 곧 그녀가 혼돈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만빙의 한기가 즉시 송곳과 환부를 얼려버리지 않았다면, 탈라리스조차 그 상태로는 채 10분을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지켜보는 진은 미칠 것 같았다.
그러나 괴로운 기색을 드러내는 건 탈라리스를 방해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진은 이를 악물며 전방에서 쏟아지는 공격들을 쳐내는 일에 전념을 다했다.
그렇게 두 시간이 흘렀다.
만빙은 처음 시작될 때 작은 영역에 퍼뜨린 것과 비교할 수 없이 강하고 거대한 빛을 형성하고 있었다.
완성된 것이다.
탈라리스는 온몸이 혼돈의 송곳에 찔리고 사슬에 묶여 피투성이가 된 상태였다.
‘미샤 님이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지도 모르겠군.’
내내 부동을 유지하던 탈라리스가 처음으로 허공에 떠 있는 만빙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만빙의 빛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옮겨붙었다.
만빙검 마성봉인식
대빙원大氷原
이어 탈라리스가 눈을 뜬 순간.
한순간 전장의 모든 움직임이 멈추었다.
글리엑이 휘두르는 수백 개의 무기들도, 그에 맞서 싸우던 거인들도, 기사와 마법사들도. 모두 비궁의 절대 봉인의 기운에 일순 동작을 멈춘 것이다.
얼음으로 뒤덮인 거대한 벌판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얼어붙지 않은 영역이 없었다.
방금까지 맹렬하게 인간들에게 휘몰아치던 혼돈의 기운은 동결된 채 부서졌고, 탁한 진눈깨비처럼 변해 대빙원 사이를 흩날렸다.
탈라리스는 그 가운데 나무처럼 서서 흰 기운을 퍼뜨렸다. 정면으로 바라보면 눈이 부실 정도였다.
글리엑은 봉인의 기운에 얼어붙으며 깨지고 있었다. 모래성이 무너지듯, 그의 외형을 형성하고 있던 혼돈의 기운들이 흘러내리고 있는 것이다.
흑해의 왕이라는 존재의 속성을 모르는 이들이 보기에는 놈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는 풍경이지만.
이조차 글리엑의 혼돈을 본질적으로 소멸시킨 것은 아니다.
봉인의 시간이 다 되면, 입자로 흩어진 혼돈들은 다시금 글리엑의 외형을 형성할 것이다.
또한, 탈라리스는 봉인의 결과가 전혀 만족스럽지 않았다.
‘제기랄, 엘로나 지플을 봉인하던 힘을 한 번 더 끌어오면서까지 펼쳤건만. 정녕 이게 한계란 말인가……!’
대빙원은 분명 제대로 펼쳐졌다.
그러나 글리엑을 완벽하게 봉인하지는 못했다.
탈라리스의 시선은 대빙원의 저 너머, 검은 별처럼 남아 있는 한 사물을 향하고 있었다.
하얀 돌이었다.
모든 혼돈이 얼어붙어 으깨진 가운데, 글리엑을 깨운 그 저주스러운 돌은 검게 번질거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모두가 느끼고 있었다.
하얀 돌이 혼돈을 퍼뜨리며 대빙원에 균열을 일으키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탈라리스가 예견했던 사흘이라는 시간이 의미가 없어지는 대목이었다.
길어야 이틀, 짧으면 하루.
탈라리스는 자신이 봉인을 유지할 수 있는 시간이 그 정도에 불과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모트의 능력 덕에 그 안에도 킨젤로의 본회를 다녀올 수는 있다는 것이었다.
“이틀이나 하루, 그것밖에 시간이 없습니다. 미샤 님, 길을 열어주십시오.”
보오옹-!
만빙에서부터 모트가 빠져나왔다. 미샤가 허공에 식을 맺자 영기가 차원문처럼 둥근 통로를 형성했다.
모트는 즉시 그 통로가 이계설원을 열기 위한 보조 역할이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스탐과 옥타비아가 모트의 등으로 올랐다. 켈리악은 불의 인장으로 룬칸델과 지플의 임시 동맹을 알리는 글을 형성해 옥타비아에게 주었다.
“비궁주, 눈두꺼비가 수인들의 땅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시간이 필요하오?”
로사가 물었다.
“모트의 지금 상태로는 세 시간에서 다섯 시간 정도는 필요할 것 같군.”
“스탐이 최대 열두 시간 내로 돌아오지 않으면 협상이 결렬된 것으로 판단하면 되겠군. 무운을 빌겠소, 스탐 경.”
“가주 대행께서도 조심하십시오.”
모트가 빠져나가자 영기의 통로가 닫혔다.
그리고 론은, 봉인이 시작된 이후에도 계속 하얀 돌로 달려들어 라시드를 휘두르는 중이었다.
스컥-!
하나 론의 검은 돌의 결계에 가로막혔고, 그는 튕겨지면서도 멈추지 않고 연신 결계 위로 검을 휘둘러댔다.
차마 아무도 론을 말리지 못했다. 그는 되살아난 이후 그저 육신이 멈출 때까지 싸우려는 악귀가 된 것 같았다.
칼날과 결계가 부딪치는 소리가 마치 론의 한 맺힌 포효처럼 들렸다.
* * *
탈라리스의 말대로 모트는 다섯 시간이 지나서 수인들의 땅에 도착할 수 있었다.
지옥도 그 자체에서 고통받고 있는 이들과 달리, 킨젤로와 수인들의 땅은 평소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킨젤로는 그들이 헤매지 않고 곧장 본회로 올 수 있도록 미리 수인들의 땅 전역에 단원들을 배치해둔 모습까지 보여주었다.
스탐과 옥타비아는 도착하자마자 마주친 적랑족들의 안내를 따라 킨젤로의 본회로 향했다. 묘인족이 지은 것 같은 미로가 형성되어 있어 본회로 향하는 길을 외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룬칸델과 지플 측은 지금 흑해의 왕을 일시적으로 봉인한 상태이며, 우리가 참전하지 않을 시 그를 포기하고 전 병력을 이곳으로 보내겠다는 말씀이시군요?”
킨젤로의 대표로 나와 스탐과 옥타비아의 제안을 듣고 불의 인장을 확인한 건 바로 제피린이었다.
“그렇소.”
제피린은 한동안 눈은 웃지 않고, 입꼬리만 올린 채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음, 다소 무례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뭘 몰라도 너무 모르시는군요.”
“무슨 의미지?”
“여러분께서는 정말로.”
혼돈의 다섯 번째 왕으로부터 도망쳐서 우리를 치는 게 가능할 것 같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게 뒷말을 잇는 제피린은 미소를 지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