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7)
제 8화
3화. 흑룡 무라칸(2)
필사를 해 온 지난 두 달 동안, 사각대는 연필 소리와 이따금씩 들리는 바람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은 적이 없다.
때문에 아직 미닫이문 너머를 보지도 않았지만, 진은 무라칸의 유리관이 열린 걸 직감했다. 진과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누구라도 그것부터 떠올릴 수밖에 없다.
‘아이, 미친. 무라칸이 지금 왜 깨어나는 건데!?’
쿵쾅쿵쾅! 두방망이질을 치는 심장이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느껴진다.
고요하고 안전한 폭풍성의 지하실이 한순간에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마경으로 변한 기분. 오싹해진 등골에서 식은땀이 솟았다.
어쩌면…….
그냥 잘못 들은 거 아닐까?
진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한순간, 한 번 더 딸칵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었다. 옷이 유리관에 쓸리고. 바닥에 누군가의 발이 닿는 인기척이 이어지고 있었다.
천 년 동안 자고 있던 용이 갑자기 몽유병에 걸린 것은 아닐 테니, 필시 목적이 있어 깨어난 것이다.
아니면 마침내 그 긴 잠을 끝냈거나.
‘침착하자, 침착해. 내가 무라칸에게 죄를 지은 건 아니잖아?’
전생에서 무라칸이 깨어났다는 건 들어 본 적이 없다.
이 시기에 무라칸이 깨어나 다시 활동을 시작했다면 진이 몰랐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이건 내 회귀로 인한 변화. 무라칸은 그냥 일어난 게 아니라, 자꾸 지하실을 찾아오는 나 때문에 깬 거야.’
잠자는 용을 잘못 건드렸다가 인생을 종쳤다는 속설은, 대륙 어디에서나 들어 볼 수 있는 흔한 이야기다.
물론, 흔한 이야기인 반면 실제로 용과 엮어 삶이 무너진 인간은 많지 않다. 용은 일반적으로 만나기 무척 어려운 존재니까.
하지만 그 흔한 이야기가 주는 교훈은 바로 이런 것이다.
용은 매우 성질이 더럽다고.
“야.”
흠칫.
낮고 가는 목소리가 미닫이문을 넘어왔다. 진은 그때까지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할 것인지 생각하고 있었다.
혼란스러운 몇 초가 지났다. 다행히 진은 무라칸을 마주할 때 어떤 태도를 보일지 결정할 수 있었다.
‘예의를 갖추되, 뻔뻔하게 행동하자. 만약 무라칸이 나를 공격한다 할지라도…… 수호기사들이 올 때까지만 어떻게든 버티면 돼.’
물론 그건 최악의 경우다.
하지만 그 최악의 경우가 벌어진다 할지라도, 죽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솔더렛의 영력과 마법을 이용하거나, 세 치 혀를 놀리면 시간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순식간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또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무라칸이 적의가 아닌 호의를 보이는 경우도 말이다.
드르륵.
진이 벌떡 일어서서 미닫이문을 열고 무라칸을 마주했다.
매일같이 보던 유리관 속의 흑발 미남이 허리를 꼿꼿이 펴고 서 있었다. 천 년이나 잠들어 있었다곤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탄탄한 몸이 인상적이다.
“루, 룬칸델의 아이가…… 가문의, 수호자를 뵙습니다.”
일부러 말을 더듬고 어눌하게 했다.
천 년 이상 존재한 용에게 어린애의 공포를 보여서 나쁠 게 없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또한 일부러 ‘수호자’라는 단어를 강조했는데, 실제로 룬칸델은 무라칸을 그렇게 표현하곤 했다.
“하!”
무라칸이 코웃음을 쳤다.
“수호오오자? 수호자? 수호자라고 했냐, 방금. 어?”
후우우웅!
그저 말만 했을 뿐인데, 별안간 공기 중의 마력이 진동하며 자그마한 소용돌이를 일으키고 있었다.
“다시 말해 봐, 망할 꼬맹아. 내가 네놈들의 수호자라고?”
순간 검은 연기로 흩어진 무라칸의 몸이, 진의 코앞에 다시 형성되었다.
“혹시 무라칸 님이 아니신가요? 저는 흑룡 무라칸이 룬칸델의 수호자라고 들어 왔어요.”
진이 또박또박 대답하자 무라칸이 눈동자를 끔뻑였다. 더 이상 어눌한 말투를 꾸밀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후, 그래. 빌어먹을 룬칸델 새끼들…… 후손들에게 나를 그렇게 알렸단 말이지. 하하! 이 밤톨만 한 녀석한테 화를 낼 수도 없고. 아주 미치겠네?”
대화가 여기까지 진행되자 진의 마음에 약간의 안도감이 스몄다.
‘다행히 꼬마한테까지 인정사정없는 성격은 아닌가 보군.’
그러나 무라칸의 검은 눈동자에 짙게 배인 살기가, 그의 성격을 대변하고 있었다.
아마 아이의 몸이 아니라 28세의 진이었다면 무라칸은 주저 없이 사지 한 군데를 부러뜨리고 대화를 시작했을 것이다.
‘그런데, 대체 이 흑룡이 지금 왜 깨어난 걸까? 내가 여길 들락날락해서 깨어난 건 아닐 텐데. 다른 특별한 이유는… 아, 혹시 솔더렛의 영기 때문인가?’
영기, 혹은 영력.
그림자의 힘.
용이 천 년의 잠에서 깨어나 반응할 만한 것이라면, 그것밖에 없다.
진은 특별한 상황이 아니면 영기를 사용하지 않았으나, 사람들은 느낄 수 없는 은은한 영기가 언제나 몸에 둘러진 상태였다.
‘그러고 보니 신의 계약자들에겐 보통 수호룡이 붙기 마련이지.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면…….’
불의 신 쉬누와 계약하면 불을 쓰는 용들이 호의를 보이고.
바람의 신 멜자이어와 계약했다면 바람을 쓰는 용들이 호의를 보인다.
그건 지플이 룬칸델보다 근소하게 앞선 이유이기도 했다. 지플엔 알려진 것만 해도 백 마리 이상의 용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그러한 맥락에서 해석한다면, 지금 진과 무라칸의 만남은 아주 훌륭한 상황이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확실하진 않다는 게 문제로군. ‘그림자’와 가까운 용에 대해선 나도 들어 본 적이 없으니…….’
현재 지플의 가주 ‘켈리악 지플’은 불의 신 쉬누와 계약되어 있고, 화룡 ‘카둔’과 깊은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었다.
바람의 신 멜자이어와 계약한 지플의 부가주가 풍룡을 부리는 것도 유명한 이야기다. 그런 식으로 용들은 가까운 속성을 찾아가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솔더렛과 용에 대한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전생에서 계약 이후 한창 솔더렛과 대화를 나누던 시절에도, 무라칸에 대해선 듣지 못한 것이다.
‘일단 부딪쳐 보자. 아무래도 나쁜 상황은 아닌 것 같으니.’
무라칸이 정말로 영기에 이끌려 깨어난 것이라면. 진으로선 겁먹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스으으읍…….
스읍!
돌연 무라칸이 좋은 냄새에 취한 강아지처럼, 혹은 실로 오랜만에 담배를 문 애연가처럼 깊은 호흡을 이어 갔다.
“하, 그래. 애가 무슨 죄겠어. 음…… 이 기운을 들이마시니 한결 기분이 나아지는군. 꼬마! 이름이 뭐냐?”
“진 룬칸델입니다, 무라칸 님.”
“그래, 그래. 진이라. 사실 네 이름 따윈 궁금하지 않고. 어쨌거나 네 녀석도 룬칸델이란 말이지? 그렇다면 어서 나를 솔더렛의 계약자에게 안내해라.”
“솔더렛의 계약자요?”
“그래! 이 진한 영기… 필시 계약자가 아니라면 가질 수 없는 것이야. 부디 계약자가 테마르처럼 싸가지 없는 녀석이 아니면 좋겠군.”
테마르 룬칸델.
초대 가주의 이름이다.
진은 하마터면 쾌재를 부를 뻔했다.
아무래도 이번 생은, 작정하고 하는 일마다 잘 풀릴 느낌이었다. 감이 서지 않아 고민하고 있던 문제를, 이렇게 먼저 꺼내 주다니!
‘영기에 이끌려 깨어난 게 확실하다! 게다가, 이 반응은…… 주도권이 내게 있다는 의미나 다름이 없어.’
킁킁, 큼!
무라칸은 이제 진을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눈을 감고 영기를 느끼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진은 잠시 동안 생각했다.
내가 계약자라고 말할까? 아니면, 나는 그런 거 잘 모른다고 말할까? 선택은 전자였다. 전자 쪽이 앞으로 무라칸을 휘두르기에 훨씬 좋은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후자는 여러모로 피곤하다. 모른다고 하면 어른을 모셔 오라 할 거고, 어른을 모셔 왔다간 이 상황을 가문 모두에게 설명해야 하는 불상사를 피할 길이 없다.
그렇게 되면 날마다 비전서를 필사하는 이 행복한 생활은 안녕이다. 나름대로 기연이라면 기연인 무라칸과의 만남도 말짱 황인 것이다.
화륵.
작은 불꽃같은 영기가 진의 손바닥 위에 번졌다.
“흐읍, 흡! 오오. 점점 정신이 맑아지는…… 어?”
영기를 음미하고 있던 무라칸의 두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계약자는 아무래도 저인 것 같아요, 무라칸 님.”
“너, 너, 너, 너 뭐야. 미친, 이런 미친! 솔더렛이 너 같은 꼬마랑 계약했다고!?”
무라칸이 기겁하며 뒷걸음질을 쳤다. 어지간히 마음이 급해졌는지, 발을 헛디디려는 모습까지 보였다.
“말도 안 돼. 이건 아니라고. 이봐, 솔더렛! 듣고 있지? 드디어 돌아 버린 거냐? 나와서 설명 좀 해 봐!”
무라칸이 그러는 사이, 진은 반대쪽 손에 그림자 뭉치를 하나 더 만들었다.
“아버지께선 이 힘이 세상에 그림자를 드리운 분으로부터 시작된 것이라 말씀해 주셨죠.”
“으어어.”
털썩.
무라칸이 주저앉아 진을 올려다보았다.
한동안 정적이 흘렀다. 진은 이야기를 더 이어 가고 싶었으나, 실시간으로 무너지는 무라칸의 표정을 보니 그럴 수가 없는 분위기였다.
부인, 분노, 의심, 공포, 허망.
무라칸의 표정은 정확히 그 순서로 변하고 있었다.
“이봐… 솔더렛. 장난이지? 이건 아니야. 뭐라도 말 좀 해 봐. 어째서 약속된 천 년의 계약자가, 이런 꼬맹이냐고…….”
솔더렛은 계속해서 침묵하고 있었다.
그의 침묵은 진 또한 계속해서 신경 쓰이는 문제 중 하나였다.
분명 계약했을 때만 해도 친구처럼 자주 대화를 나눴는데, 전생의 그가 죽기 직전부터 지금까지 아무런 이야기가 없는 것이다.
어쨌거나 무라칸에겐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는 용.
다소 더럽고, 괴팍한 성질을 지니고 있어도 수천 년을 살아온 용이다. 통찰력이 있고, 기대하지 않은 결과에도 좌절하지 않는 불굴의 정신력이 있다는 의미다.
무라칸은 빠르게 이 부조리한 상황을 납득했다. 그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하아, 꼬마야.”
“네.”
“아무래도 내가 앞으로 솔더렛과의 약속에 따라 호흡을 맞춰야 할 대상이, 너인 것 같구나.”
용과 호흡을 맞춘다!
그런 이야길 용에게 직접 들었다. 그것도 초대 가주가 쓰러뜨린 흑룡, 무라칸에게.
마법사 시절, 용과 함께 싸우는 대마법사들의 소문을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설렜던가.
단숨에 코끝이 뜨거워질 지경이다. 터질 듯 상기되려는 얼굴을 도저히 주체할 수 없어, 진은 자연스레 고개를 숙여 버렸다.
“저, 호흡을 맞춘다면 어떤.”
“후우… 자세한 이야길 해 주기엔 네가 너무 어려. 지금 정신도 없고.”
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솔더렛의 계약자에게, 솔더렛의 친구로서. 정식으로 다시 소개하지.”
후우웅…….
묵직한 바람 소리가 나자, 공기 중에 형성된 시커먼 기운이 무라칸의 몸을 감싸기 시작했다.
용의 본모습으로 변신하는 것이었다. 무라칸을 파묻어 버린 검은 기운이 구름처럼 퍼져 나갔고, 이내 지하실을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흑룡이 진의 시야를 가렸다.
[나는 무라칸. 솔더렛의 대리자이자, 그의 친우이며, 그림자로 빚어진 첫 번째 존재의 마지막 후손. 천 년의 약속에 따라 오늘부터 나는 너와 함께할 것이다. 이름을 말하라.]방금까지의 다혈질 청년은 찾아볼 수 없는 웅혼한 목소리.
“진 룬칸델입니다. 룬칸델의 열셋째, 가장 나중에 난 자식입니다.”
진이 떨리는 가슴을 겨우 억누르며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