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30)
제 999화
231화. 각오(4)
성왕성이 있던 땅은 순식간에 으스러진 뼈처럼 변하고 있었다. 흉측하게 벌어진 틈들 사이로 띠처럼 보이는 날카로운 보랏빛 마기가 솟구쳤다.
수백 줄기였다. 그것들은 마치 손가락처럼 움직이며 덜 벌어진 땅을 거칠게 찢어댔다. 키기긱, 기기기긱-! 어긋난 뼈마디를 억지로 맞추는 듯 소름 끼치는 소리가 들렸다.
얼핏 들여다본 땅 아래는 마치 보랏빛 바다가 펼쳐진 것 같았다.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얼마든지 대상의 정신을 갉아버릴 수 있는, 고통의 바다가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종교쟁이……!’
이미 영원창고가 있던 공간까지 모두 마기에 잠식되었을 게 분명했다. 그건 곧 라니의 생존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의미였다.
성국은, 멸망해가고 있었다.
영토의 7할 이상이 무차별적으로 공격당하는 중이고, 성왕성은 방금 흔적조차 남지 않고 사라졌다.
이제는 설령 이 전쟁이 바멀 연합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할지라도 돌이킬 수 없는 피해인 것이다.
“흑룡 무라칸, 너도 이름값 좀 하는구나? 설마 내 권격을 이렇게까지 막아낼 줄이야. 그래 봤자 성왕성은 가루가 됐고, 감히 네놈들이 포박해둔 지토 님의 육신은 깨어나셨지만.”
지금은 라니의 죽음에 괴로워할 때가 아니다.
무라칸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단단하게 빛나고 있었다. 아직, 성국엔 살아있는 사람이 많았다.
한 사람이라도 더 지켜내야 했다. 무라칸의 임무는 여전히 그것이었다. 진을 두고 성왕성으로 날아온 유일한 이유는 오직 그뿐이었다.
탈라리스는 다시 하늘에 장막을 전개하는 무라칸을 보며 그의 의지를 읽었다. 그녀는 호흡을 고르며 부드럽게 검을 쥐었다.
지친 몸에 부담이 갈 만큼 큰 기술은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 또한 적의 그런 공격을 직접 쳐내지 않기로 했다. 바로 저런 무라칸이 자신을 지켜준다 했으니까.
무라칸은 비델루체에게 숨결조차 한 번 토하지 않고 있었다. 암흑도래나 흑쇄로 공격하지도 않았다. 그는 오로지 동료와 사람들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하고 있었다.
“어머, 비궁주는 분위기가 좀 변했네? 뭐, 비장의 수 같은 거냐?”
“힘의 크기나 권능으로 좌우되는 싸움이 아닌, 순수한 근접전이라면. 이 세상에 나를 이길 수 있는 건 단 한 사람뿐이다.”
“뭐?”
“그러니 무라칸이 오기 전에 내게 치명상을 입혔어야지, 비델루체.”
후웅, 후으으욱-!
탈라리스에게 날아든 자줏빛 광선이 모두 영기 장막에 가로막히고 있었다. 탈라리스는 비델루체의 원거리 견제를 의식조차 하지 않은 채 쇄도하기 시작했다.
‘뭐야, 무라칸이 비궁주를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보호해줄 수 있다고?’
비델루체로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기껏해야 어느 정도 엄호를 해주는 정도가 한계라고 확신한 것이다.
탈라리스가 백 걸음을 넘게 좁히는 동안 비델루체의 광선과 권기는 단 한 번도 탈라리스를 위협하지 못했다.
비델루체는 창성이 아니다.
그렇기에 각오를 끝낸 무라칸의 영기를 뚫으려면, 그 역시 무언가를 걸어야 했다. 오만한 태도와 시선으로는 결코 무라칸의 의지를 훼손할 수 없었다.
시잇-!
어느새 거리를 다 좁힌 탈라리스의 검이 비델루체의 가슴팍을 찔렀다. 비델루체는 즉시 반응하며 주먹을 내질렀고, 사방으로 마기를 폭발시켰다.
탈라리스를 다시 떨쳐내려는 것이다. 그러나 탈라리스는 코앞에서 폭발한 마기조차 피할 필요가 없었다. 탈라리스의 그림자에 스민 영기가 그녀를 보호해주고 있었다.
“흡!”
비델루체가 헛숨을 뱉었다. 분명 거리를 벌렸어야 하건만, 탈라리스는 오히려 더 가까이 붙어서 만빙을 휘두르고 있었다.
만빙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미약한 한기만을 품고 있었다. 그렇기에 그 자체로는 전혀 피해를 줄 수 없으나, 비델루체를 서늘하게 만드는 건 검 그 자체였다.
‘비궁주의 검이 자꾸 내 예상보다 더 깊이 들어온다. 피했다고 생각하면 닿아 있고, 쳐냈다고 확신하면 허상이로군.’
한없이 예리하다.
비델루체는 탈라리스의 검을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분명 검에 담긴 힘이 자신의 살을 찢고 들어오기엔 한참 부족한 힘을 품고 있는데도, 선뜻 몸을 내어주며 싸울 수가 없었다.
때문에 이제 계속 거리를 벌리려는 쪽은 비델루체였다. 붙어 있으면 어딘가 깊이 베일 것 같고, 거리를 잡고 쏜 원거리 공격은 무라칸이 죄다 막아주니 전투가 답답했다.
‘하지만 어차피 지친 몸은 시간이 지나면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무라칸 역시 언제까지고 비궁주를 신경 쓸 수는 없을 테지.’
다만 시간은 분명 진마계의 편이었다.
막 깨어난 지토의 눈은 아직 형태를 잡느라 이들을 공격하지 않고 있으나, 완성되는 순간 무라칸의 장막을 모조리 찢어버릴 터였다.
‘게다가 파엘리토도 곧 놈들을 죽이고 합류할 테니, 꺼림칙한 수를 둘 필요는 없다.’
길어야 5분.
비델루체가 보기에 지금 무라칸과 탈라리스가 다소 우위를 점할 수 있는 시간은 겨우 그 정도였다. 그 안에 자신이 치명상을 입거나 죽을 일은 절대로 없었다.
“감이 좋구나. 마냥 오만하기만 한 머저리인 줄 알았더니.”
“그래, 분하지? 내가 맞서 싸워주기만 하면 뭔가 될 것 같은데, 그렇게 해주질 않으니. 그나저나, 너희 흑룡은 참을성이 대단하구나.”
탈라리스가 주위를 살폈다.
성왕성 터에 풀려난 지토의 기운이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보랏빛 띠들이 드넓게 펼쳐진 무라칸의 영기 장막 곳곳에 박힌 모습이었다.
무라칸은 신음 한 번 내지 않고 있으나, 비델루체는 그게 얼마나 끔찍한 고통인지를 알고 있었다.
“지토 님의 진기가 온몸으로 파고드는 고통을 용케 버티네. 저건 추후 지토 님이 꽤 오랜 시간 즐기실 것 같군.”
무라칸은 대답하지 않고 계속 정신을 집중했다.
지토의 기운을 피하자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감당하지 않으면 보랏빛 띠들이 향할 곳은 지켜야 할 사람들이었다.
오로지 파괴하고 빼앗고 짓밟으려는 이들을 상대로 무언가를 보호하며 싸우는 건 결국 이런 식일 수밖에 없었다.
적보다 압도적으로 강하지 않다면 계속 불리하게 몰려야만 하는 것이다.
무라칸의 비늘은 한 점씩 흔들리며 떨어지고 있었다. 떨어진 비늘은 모두 보랏빛으로 물들다가 띠의 근원지로 흘러 들어갔다.
지토의 눈은 무라칸의 힘을 빼앗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십여 분 내로 영구적인 손상이 시작될 터.
그건 두렵지 않았다.
또 예전처럼 힘을 잃게 되더라도 다시 차근차근 회복하면 그만이었다. 어차피 이제는 진이 자신의 보호가 없으면 안 될 만큼 약하지도 않으니까.
다만 지금 무라칸을 부담스럽게 만드는 건, 지토의 눈이 형상을 갖추는 일이었다. 지토의 눈이 가진 정확한 힘과 능력을 잘 알지 못함에도, 본능이 말하고 있었다. 그건 분명 위험하다고.
‘기회는 한 번뿐이다. 영기를 완전히 해방하고 진 암흑도래를 펼쳐야 해. 성공하더라도 한 오백 년은 요양을 하게 되겠군.’
무라칸은 결단을 내렸다.
어쩌면 요양을 넘어 천 년 전처럼 긴 잠에 빠져야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게 진이 지키려던 것들을 모두 잃는 것보다는 더 나았다. 무라칸은 그렇게 생각했다.
‘딸기파이여, 작별인사는 어렵겠…….’
무라칸이 거기까지 생각한 순간.
별안간, 하늘로 치솟은 띠들이 끊어져서 추락하는 모습이 보였다. 띠들을 끊은 건 한 자루의 세검, 샤를이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무라칸 님.”
룬티아가 막 파엘리토의 마기를 뚫고 성국에 도착한 것이다. 그녀는 성국 상공으로 진입하자마자 영기 장막 사방에 꽂혀 있는 띠들을 베어서 떨궈냈다.
괜찮으십니까? 막내는요?
룬티아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어차피 진과 무라칸이 떨어져 있다는 건, 그런데도 무라칸이 진부터 구하라고 소리치지 않는 이유는 하나뿐이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소가주께서 성국을 수호하라 명하신 모양이군요. 실행하겠습니다.”
‘진을 부탁한다’라는 루나의 부탁은, 소가주의 절대적인 명령보다 우선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손이 모자라던 차였다. 혼자 왔느냐?]“예, 그러나 1기수를 비롯한 초인 다수도 본진 방어가 완료되는 즉시 합류할 예정입니다. 제가 베어야 할 건, 저것이겠군요.”
룬티아가 샤를로 지토의 기운이 솟구치는 땅을 겨눴다.
“저기, 친구야? 감히 뭘 벤다고 지껄이는 건지는 알고, 윽!”
만빙이 비델루체의 목을 스쳤다.
“그러는 넌 감히 누굴 상대하고 있는지 잊은 모양이군. 다시 각인시켜주마, 그리고 그건 네 마지막 기억이 될 것이다.”
룬티아는 비델루체와 탈라리스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탈라리스를 믿기 때문이었다. 저런 형태의 근접전이라면 그녀가 비델루체에게 질 일이 없다고.
또한 그들을 살펴볼 여유가 없기도 했다.
지토의 눈을 정면으로 마주한 순간부터, 룬티아 또한 무라칸과 유사한 고통에 휩싸이기 시작한 것이다.
[잠시만 몸을 추스르며 비궁주에게 집중하고 있을 테니, 그때까진 무리하지 말도록.]“알겠습니다, 무라칸 님.”
* * *
“아까, 오랜만에 강해진 기분이 든다고 하였나?”
파엘리토가 쓰러진 진에게 다가오며 말했다.
진은 황급히 몸을 일으켰으나 파엘리토는 어차피 진을 당장 죽일 생각이 없었다. 이미 진과 단테를 끝장낼 수 있는 기회는 여럿 있었으나, 파엘리토는 그들을 계속 살려두고 있었다. 더 고통스러운 마지막을 만들기 위해서.
“여전히 그런 기분은 아닐 테지. 이것이 타고난 운명의 격차라는 것이다, 진 룬칸델.”
파엘리토가 고개를 돌려 잠시 왼편 저 멀리에 시선을 두었다. 단테는 세 번째 천멸참의 충격에 더 멀리 떨어진 어느 숲까지 날아가 기절한 상태였다.
“네 친구는 슬슬 힘이 다한 모양이군. 너도 얼마 남지 않았고.”
파엘리토는 단테가 떨어진 숲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진에겐 막을 여력이 없었다. 검기는 태풍처럼 숲 전체를 휘젓다가 점이 되어 사라졌다.
“단테도…… 헤도 경도, 그 정도론 안 죽어.”
“좋을 대로 생각해라. 하지만 말과는 달리 꽤 보기 좋은 얼굴을 하고 있군. 슬픔이 느껴진다, 너는 사실 그들이 죽었다는 걸 알고 있어.”
실제로 방금 검기가 지나간 후 미약하게나마 느껴지던 단테의 기운이 사라진 상태였다. 숲에 숨어있던 신민들도 전부 목숨을 잃었다. 진은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일처럼 그 모든 걸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진 자신은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나, 그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는 아직 너에 대한 한 가지 해답을 찾지 못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슬퍼하는 것이냐? 단테 하이란과 옛 질서의 파편은 몰라도, 오늘 내가 죽인 다른 인간들은 네게 그다지 소중한 사람들이 아닌데. 너는 아까부터 그들의 죽음에 몸서리치고 있었지.”
“내게는 책임이 있기 때문이다.”
“책임? 아, 힘을 가진 자들의 싸움에 관련 없는 벌레들이 희생될 이유는 없다는 그 대답은 아까도 들었다. 그걸로는 부족해. 네게는, 분명 뭔가 다른 이유가 더 있어.”
파엘리토는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
진을 괴롭게 만드는 그 무거운 감정은, ‘회귀자’로서의 죄책감이었다.
“그러니 이제 진실을 말해라. 그리하면 오늘, 더는 힘없는 벌레들을 죽이지 않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