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31)
제 999화
231화. 각오(5)
진실을 말하면 더는 힘없는 사람을 죽이지 않겠다.
진은 파엘리토의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진실이라…….”
진이 파엘리토에게 검을 겨누며 호흡을 골랐다. 힘이 거의 다 빠진 탓에 조금만 집중을 잃어도 검이 덜덜 떨릴 것 같았다.
“좋다. 그러나 대답하기 전에 하나 묻고 싶군.”
스아아악-!
파엘리토가 또다시 전장 바깥을 향해 검기를 날렸다. 방금 단테가 있던 숲을 소멸시킨 것과 마찬가지로, 그 검기는 또 겨우 숨은 무고한 이들을 몰살했을 터였다.
“질문은 나만 한다. 방금 네가 헛소리를 한 덕에 또 천여 마리의 벌레가 죽었군.”
진의 뺨에 흐른 눈물이 마르고 있었다. 피와 땀과 재와 눈물이 뒤섞여 짙은 자국이 남았다. 결코 잊을 수 없고, 잊어서도 안 될 고통이었다.
무겁다.
지친 몸이 무겁고, 사람들의 죽음을 막지 못한 죄책감이 무거워서 숨이 막혔다. 진은 눈앞에 있는 파엘리토가 아니라 그 무게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지금 네놈에게 지고 있다, 파엘리토. 그러니 네놈이 무슨 짓을 하든 나는 막을 수 없지. 반대로 너 또한 내 입을 틀어막을 순 없어. 나를 죽이거나, 혀를 잘라내지 않는 한. 하지만 네놈은 그렇게 못 해…… 그러면 허무해지거든.”
사키엘에 대한 집착이 진을 베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파엘리토는 부정할 수 없었다. 그는 사키엘의 죽음을 아직 받아들이지 못했다. 진으로부터 무엇이라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를 들어야만 했다. 듣고 싶었다.
“우린 어차피 둘 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받았다. 네놈은 사키엘을 잃었고, 나는 지켜야 할 사람들을 지키지 못했지. 어쩌면 네 말대로 친구들까지 죽었을 수도 있고. 이제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나도, 우린 이전처럼 살 수 없어. 너와 나를 기다리는 건 승리의 기쁨 따위가 아니라, 죽어서도 잊지 못할 영원한 고통뿐이다.”
서로가 겪을 수 있는 고통은 이미 한계를 지나쳤다. 사람이 느낄 수 있는 슬픔은 분명 한계가 존재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누가 더 많은 걸 잃게 되나, 누가 더 괴로워지는가는 의미가 없었다. 파엘리토는 사키엘을 잃은 시점에 삶의 가장 중요한 의미를 잃었고, 진은 남은 사람들이 다 죽어도 지금과 똑같이 절망할 것이다.
“그러니 내가 몇 마디 묻는다고 그렇게 민감하게 반응할 것 없지 않겠나. 네가 나를 죽여도 사키엘이 돌아오지 않듯, 내가 너를 죽여도 죽은 사람들은 돌아오지 않으니까.”
울컥……!
파엘리토가 입으로 차오른 시커먼 핏물을 내뱉었다. 그를 휘감은 자줏빛 기운도 점점 시커멓게 변해가고 있었다. 심마가 그에게 내재된 마성을 계속 끌어내고 있었다.
사실 파엘리토 본인이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다시 돌아갈 수는 없다는 것을, 설령 진에게 사키엘의 죽음에 대해 어떤 이야길 더 듣게 되더라도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그는 복수의 공허함과 여전한 상실감이 증폭시킨 심마에 결국 잡아먹힐 것이다.
진의 눈에도 그의 미래가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기에, 진은 미래가 두렵지 않았다. 자신이 죽더라도 마성에 잠식된 파엘리토를 누군가는 베어줄 테니 말이다.
진이 전사해도 룬칸델엔 여전히 시론과 루나가 있고, 형제들과 기사들이 있으며 티칸엔 동료들이 있다. 그들 중 누군가는 반드시 자신을 계승할 터였다. 진이 천 년 전 룬칸델의 의지를 계승해오고 있듯이.
그러나 파엘리토의 뒤에는 오로지 끔찍한 고통만을 원하는 심연의 괴물만이 있을 뿐이다. 그 괴물에게 세뇌된 불행한 존재들만이 가득할 뿐이다.
“수백억에 달하는, 자신이 무엇이었는지조차 잊은 사람들.”
“……갑자기 무슨 소리냐.”
“너도 그중 하나다, 파엘리토. 창성에 이른 너조차, 네가 누구인지를 모른다. 네가 무엇을 얻고자 싸우는지를 모른다.”
“내가 원하는 건 분명하다, 진 룬칸델.”
“고통을 새로운 질서로 세우는 것과 사키엘의 복수? 후자는 맞겠지. 하지만 전자는, 정녕 네놈의 의지가 맞는 것이냐? 그건 네가 아니라 지토의 뜻이다.”
“지토 님의 뜻은 곧 진마계의 뜻이다.”
“나는 네놈과 달리, 네놈보다 분명 더 약한데도 그 세뇌를 벗어난 마족들을 만났어.”
“역시, 비셉스가 네게 들러붙은 모양이군.”
“그들은 신념이 있었다. 지토의 마수로부터 가족을 지키고, 동지를 지키고, 삶을 지키려는 신념이. 그리고 너는 한때 그들을 이끌었었다더군. 저항군 수장이었던 너는 타락해서 지토의 도축칼이 되었다.”
“하등한 네놈들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더 높은 세계다. 고통의 질서가 자리 잡은 세상은, 지금처럼 어지럽지 않을 것이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고, 각자에게 맞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지.”
“사키엘도 그렇게 생각했을까?”
처엉! 파엘리토가 검을 내리쳤다. 진은 그의 검을 막은 충격에 일순 튕겨서 비틀거렸다. 파엘리토로서는 땅에 처박을 생각으로 내지른 검인데, 어째서인지 진은 쓰러지지 않고 다시 중심을 잡았다.
무엇이 진을 단단하게 만들고 있는지 파엘리토는 알 수 없었다. 죽음에 대한 각오나 의지 같은 것으로 버틸 수 있는 때는 이미 한참 전에 지난 상태였다.
“만일 사키엘이 진짜로 원했던 게 지토의 질서가 아니라면 어쩔 셈이냐, 파엘리토. 내가 사키엘을 모욕하고 있다느니, 그럴 리가 없다느니 하는 개소리는 하지 마. 너는 한 번이라도 정면으로 사키엘을, 너 자신을, 너와 함께 싸웠던 이들을 바라본 적이 있는 거냐? 그저 지토의 명령 한 마디에 전쟁터로 내몰려 개죽음을 당하는 동족들을 직시한 적은?”
“나는 언제나 그 모든 걸 정확히 지켜보았다.”
“아니, 그간 네놈이 본 건 그저 세뇌에 흐려진 진실일 뿐이다. 다일러스 클라우피노, 그자를 잘 알 테지? 그자는 마지막 순간에 내 검에 찔리며 눈물을 흘리더군. 마치 그때야 뒤늦게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사키엘은 어땠을까? 그녀는 최후에 어떤 마음이었을 것 같나.”
잠시 정적이 흘렀다.
“……다일러스와 달리 사키엘의 마지막은 내가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상실의 장 때문에. 다만 지금 우리 기록 마법사가 전장을 확인하는 중이지. 아마 곧 사키엘이 마지막에 어땠는지 확인될 것이다. 무엇을 생각하며 죽었는지, 누구를 저주하며 죽었는지. 나는 그게, 왠지 지토일 것 같군.”
지토가 원하는 건 단지 인세의 고통만이 아니다.
진마계와 전쟁을 시작한 후, 진은 언젠가부터 그런 느낌을 받고 있었다. 그 괴물은 자신이 부리는 마족들까지도 모두 고통에 파묻히길 원하고 있으리라고 말이다.
그게 아니라면 부하들을 그토록 소모품처럼 사용할 이유가 없으며, 전쟁을 이런 식으로 진행할 이유도 없었다.
그로쉬에 성이 무너지기 전에 파엘리토를 인세로 보냈다면, 인세 곳곳에 더 많은 균열을 풀었다면, 지토 본인이 더 빠르게 나섰다면.
인세는 단 한 번도 승기를 잡지 못했을 것이다. 진은 지토가 전장에 놓은 수들이 결코 승리를 위한 최선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저 모두가 고통에 빠지기 좋은 수로만 보였다.
“또한 나는 비셉스들에게 그들 대부분이 지토에게 가족이나 소중한 누군가가 인질로 잡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과연 비셉스의 사람들만 잡혀 있을까? 내가 지토라면 너희의 가족들도 다 붙잡아서 이용했을 것 같은데.”
푸흐흐……! 파엘리토가 웃음을 터뜨렸다.
“비약에도 재주가 있군. 그래, 네 말이 다 맞다고 하지.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달라지는 건 없다. 너는 사키엘을 죽였어. 감히 인간인 네가, 마족 중에서도 특별히 우월한 사키엘 그로쉬에를 죽였다. 이게 바로 내가 질서 없는 세상을 용서할 수 없는 이유다.”
“결국 또 그 미친 운명론으로 귀결되는군. 네놈은 생각하는 걸 멈췄기에 지토의 도축칼이 된 거다. 세뇌를 벗어나지 못한 채 증오의 굴레에 빠져 허우적대는 중이지.”
“이만하면 네놈에게 들을 말은 다 들었다. 진 룬칸델, 이제 네놈이 내게 대답할 차례다. 어째서 다른 인간들의 죽음에 그토록 괴로워하는지, 그만큼 거대한 책임감을 느끼는지…… 말해라.”
파엘리토가 다시 기운을 끌어올리기 시작했다.
이제는, 정말로 진을 끝장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죽이고 심마의 늪이라는 안식에 빠져도 될 것 같았다.
파엘리토는 지토가, 그때 자신을 그 늪에서 꺼내주지 않기를 바랐다.
화아아……!
천천히, 업화의 화염이 다시 진을 감싸기 시작했다.
“예비 기수 시절 키다드 홀을 죽일 때 이후, 이런 말을 하는 건 처음이로군…… 파엘리토, 내가 사람들에게 책임감을 느끼는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한 번 죽었다가 시간을 거슬러 돌아온 자다.
“……뭐라고?”
파엘리토의 눈동자가 커졌다.
회귀, 그런 게 가능하다는 건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파엘리토는 지금 진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는 지금으로부터 24년 전, 아킨 왕국에서 죽음을 맞이했었다. 그때의 나는 지금과 많이 다른 인간이었지. 내 손에 걸려 있는 건, 내가 책임져야 할 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그저 내 개인적인 성공을 위한 삶을 살고 있었다. 막바지에 솔더렛의 선택을 받은 덕분에.”
진이 파엘리토와 눈을 맞췄다.
“전생의 내가 죽은 건 1808년이다. 그리고 지금은 1804년…… 내가 기억하는 그때의 1804년과 지금은, 아예 다른 세상이다. 그땐 글리엑도, 흉신도, 지토도 인세에 등장하지 않았으니까.”
“어떻게 그런……!”
파엘리토는 의심조차 할 수 없었다. 지금 진에게선 그 어떤 불멸자로부터도 본 적 없는 거대한 빛이 일어나는 것 같았다. 도저히 진의 이야기를 거짓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나도 내가 왜 회귀했는지는 모른다. 왜 그게 가능했는지, 왜 하필 나였는지, 왜 나로 인해 그토록 많은 생명이 결정되었는지. 내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삶을 누렸을 텐데. 그때는 분명 세상이 지금보다 덜 어지러웠던 것 같은데, 그런 생각만이 들 뿐이지.”
파엘리토는 심장이 터질 듯 박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파엘리토, 네놈이 그렇게 주장하던 그 운명론대로라면. 내 회귀는 그 어떤 운명보다도 우위에 있다. 내가 회귀하지 않았다면 너도, 사키엘도, 지토도, 진마계의 그 누구도. 인세의 땅을 밟을 일이 없었어.”
파엘리토가 눈을 부릅뜨며 진에게 쇄도했다.
이번에도 그는 진을 죽일 생각으로 바스칼라를 휘둘렀으나, 진은 또 두 눈을 부릅뜬 채 그의 검을 쳐내고 말았다.
“나는 반드시 이 운명을 초월할 것이다. 그러니 너도 세뇌를 극복하고, 본래 네게 주어졌던 운명을 떠올려라, 파엘리토 벨가시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