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36)
제 999화
232화. 각성(5)
* * *
혼돈에 물든 불길이 끝도 없이 치솟았다.
파엘리토를 중심으로 펼쳐진 거대하고 검은 소용돌이는 순식간에 전장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그 힘에 땅이 한 번 더 갈라지며 전보다 더 격하게 용암이 터져 나왔다. 용암조차 혼돈의 소용돌이에 닿으면 바로 식어서 굳으며 재가 되었다.
진은 우선 영기로 펼친 보호막으로 발레리아와 붉은부엉이를 감싸주었다. 이제부터 시작될 ‘처단’은 그녀가 혼자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이 이어질 터였다.
“발레리아, 너는 이제 외지 쪽으로 가서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게 좋겠어.”
“알겠어.”
발레리아가 붉은부엉이에 올라탔다.
창성의 감각은 없지만, 그녀도 파엘리토가 흉신이 되었다는 사실쯤은 알아볼 수 있었다. 그녀 또한 흉신전의 참상을 직접 겪은 사람이니까.
그렇기에 진이 창성에 오른 것을 알고도 걱정이 되었다. 그녀는 진이 지금보다 더 강해진다 할지라도 늘 걱정할 것이다.
“전장에서 빠져나가는 대로 지원을 요청할까?”
진이 뒤돌아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니, 본진에 여유가 남는다면 다 성국 외지로 보내라고 해. 여긴 이제 괜찮으니.”
발레리아가 붉은부엉이에 올라타려는 찰나, 파엘리토의 소용돌이가 사방으로 혼기의 해일을 퍼뜨렸다.
진은 가볍게 검을 휘둘러 자신과 발레리아 쪽을 덮친 혼기를 베어냈다.
영기와 금빛 오러에 휩싸인 검기는 소리도 없이 나아가서 그 거대한 혼기를 횡으로 양단했다.
갈라진 혼기는 쉽사리 수복되지 못하며 부글부글 끓어오르다 폭포처럼 지상으로 쏟아졌다.
이내 발레리아가 전장에서 빠지는 걸 확인한 후, 진은 다시 파엘리토를 쳐다보았다.
“불쌍한 놈…….”
진이 느끼기에.
파엘리토는 살면서 단 한 번 패배했고, 단 한 번 절망했다. 한때 진마계의 희망이었던 위대한 검마는 그 한 번의 절망을 이기지 못해 이토록 흉측한 결말을 맞이한 것이다.
사방으로 쉴 새 없이 혼기가 번지고 있었다.
이미 폐허가 된 땅들과 전투의 여파에 죽어버린 숲과 강들, 바람마저 모두 파엘리토가 발산하는 혼기에 잠식되고 있었다.
그러나 파엘리토의 정면, 진이 서 있는 쪽엔 혼기가 단 한 줌조차 들어서지 못했다. 바위에 가로막힌 물처럼, 혼기는 진을 지나치지 못하고 양옆으로 퍼져댔다.
진의 뒤로는 성왕성이 있다.
그가 없었다면 혼기는 십여 분 내로 성왕성 일대까지 잠식했을 터였다. 그리고 놈은 지토의 눈과 융합을 끝낸 후, 흉신으로서 완전히 각성했을 것이다.
진은 성왕성 쪽에서 지토의 눈과 싸우는 중인 동료들의 기운을 읽으며 정신을 집중했다.
‘그쪽도 이제 문제없겠군.’
무엇이든 벨 수 있다.
이제, 세상에 자신이 벨 수 없는 것은 존재치 않는다.
진은 그 사실을 온몸으로 절감하며 브라다만테에 기운을 둘렀다. 검신이 진동하며 묵직한 공명음이 일었다.
룬칸델 제3결전기
유성우
칼날에 모인 힘을 풀어놓자 일순 전장이 눈부신 빛으로 물들었다. 파엘리토는 혼기 장막을 뚫고 들어오는 빛에 반사적으로 눈을 가렸다.
[그어, 어어어어!]괴성을 지르는 파엘리토. 그는 본능적으로 몸을 웅크리고 빛이 사라지기를 기다렸다. 빛이 꺼지기 전에는 진의 위치를 확인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파엘리토는 이미 진의 검이 자신을 한 차례 베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허리가 끊어지는 격통에 고개를 들어 올리자, 자신을 가리고 있어야 할 혼기 장막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파엘리토의 시야를 가득 채운 건, 끝도 없이 쏟아지는 황금빛 섬광.
눈을 찌르는 그 섬광들을 피할 도리는 없다. 이미 그를 보호하던 혼기 장막은 모조리 찢겨 겨우 잔해만을 남긴 상태였다.
쏟아지는 섬광을 온몸으로 받아내야만 했다. 그러나 혼돈이 이성을 붕괴시킨 와중에도, 확신할 수 있었다. 저걸 견디면 결코 멀쩡할 수 없었다.
[카아, 아……!]츠아아악, 크즈즈즉-!
온몸이 찢겨나가고 있었다. 섬광이 내리꽂힐 때마다 살이 터지고 뼈가 으스러졌다. 어떻게든 혼기를 퍼뜨려 유성우를 막고 상처를 회복하려 했으나, 하늘은 점점 더 금빛으로 물들어만 갔다.
태양이 떠오른 듯이 환해져만 갔다. 흉신이 된 파엘리토는 물리적 고통을 느낄 수 없게 되었는데도, 계속 비명을 질렀다.
두렵기 때문이었다. 흉신이 되고도 떨칠 수 없는 공포가, 진 룬칸델이라는 인간이 가진 힘이 그를 떨게 만들고 있었다.
저항할 수가 없다.
유성우는 혼기가 재생되는 속도를 아득히 초월해서 파엘리토를 부수고 있었다. 이제 파엘리토의 육신이라고 할 만한 건 구멍이 뚫려 휑해진 상체 일부와 다리 하나뿐.
그마저도 잠시 후 사라질 것이다. 유성우는 결코 마구잡이로 떨어지는 게 아니라, 하나하나 모두 진의 의지를 품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집요하리만치 정확하게, 그리고 남김없이. 유성우는 그렇게 흉신이 된 파엘리토를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 같았다.
금빛 섬광이 멈췄다.
진은 숨도 고르지 않은 채 유성우가 내렸던 땅을 바라보았다. 남은 열기에 끓어오르는 녹은 땅 어디에도 파엘리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진은 그가 아직 죽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혼돈의 의지가 공기 중에 흩어진 입자들을, 파엘리토를 어디론가 날려보내고 있었다. 검은 바람이 도망치듯 진을 지나치는 모습이 이어졌다.
성왕성으로 향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봉인이 풀린 지토의 육신과 하나가 되기 위해.
그러나 진은 급하게 그 바람을 쫓지 않았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파엘리토도, 그를 살리려는 혼돈의 의지도 자신의 손아귀를 결코 벗어날 수 없었다.
진은 검은 바람을 뒤따라 서서히 걸음을 옮겼다. 때때로 바람에서 빠져나온 혼기가 송곳처럼 변해 진을 찔렀으나, 그 몸에 닿기도 전에 분해될 뿐이었다. 그것들은 진에게서 발산되는 기운을 뚫을 수 없었다.
생채기조차 나지 않았다. 그럴수록 검은 바람이 된 파엘리토는 더욱 공포에 질려 미친 듯이 내달렸다. 마치 사람처럼 발을 헛디디는 듯 보이기도 했다. 진이 등 뒤에 있다는 걸 인식할 때마다 움찔하며 구겨지는 것이다.
그쯤, 파엘리토는 조금씩 흉신으로서의 의식을 찾아가고 있었다.
막 개화한 시점엔 아예 이성이 없었으나, 한 차례 소멸의 위기를 겪고 나서야 자아가 형성되었다.
‘지토…… 지토의 눈을 얻어서 도망쳐야 해.’
지금은 비록 온전히 각성하지 못해 발악 한 번 못 하고 압도되는 중이나, 시간만 충분히 주어진다면 분명 자신도 진을 위협할 수 있었다.
어쩌면 위협을 넘어 그를 죽일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힘까지 집어삼켜 세상에 다시 없을 재앙이 될 수 있을 터였다.
파엘리토는. 아니, 더는 파엘리토라 부를 수 없는 존재, 흉신은 그런 희망을 품고 있었다. 당장 싸울 수는 없어도 분명 도망쳐서 시간을 벌 수는 있으리라고 말이다.
놈은 마치 사람처럼 숨을 헐떡였다.
실제로 점점 사람과 유사한 형태가 되어가고 있기도 했다. 바람을 형성하던 입자들이 조금씩 그를 사람처럼 빚어냈다.
이윽고 성왕성 인근에 다다랐을 때, 그는 파엘리토와 흡사한 겉모습을 갖추고 하늘을 올려보았다.
보랏빛 마기가 진동하는 풍경이 보여야 했다. 지토의 눈이 성왕성에 있는 모든 생명을 집어삼키고 포효하는 모습이 보여야 했다.
그러나 흉신의 눈에 들어온 건, 온통 칠흑으로 검게 물들어 경계조차 사라진 하늘과 땅이었다.
영기였다.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흉신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그 어둠을 노려보았다.
‘이게 무슨……!’
그 안쪽에서부터 지토의 마기가 느껴지기는 했다.
그러나 그 마기는 감각을 곤두세워야 겨우 느낄 수 있을 만큼 희미한 상태였다. 영기에 가려졌기 때문인지, 아니면 이미 지토의 눈이 저 안에서 소멸의 위기에 놓인 것인지 얼른 판단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고민할 시간이 많지는 않다.
진이 계속 가까워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곧 그의 그림자가 자신을 완전히 집어삼킬 터였다.
[카아아아!]결국 흉신은 양손으로 어둠을 붙잡아 잡아 찢듯이 길을 열었다. 다만 어둠을 움켜쥔 순간 두 손이 썩은 식물처럼 검은 진물을 쏟아냈다. 조금만 오래 움켜쥐어도 그대로 녹아버릴 것 같았다.
[커억, 헉, 허억……!]물론 팔에만 타격을 받은 게 아니었다. 혼기가 생명에 침투하듯이, 지금 성왕성을 가린 영기도 흉신의 몸과 정신 전부를 헤집어놓았다.
독늪에 빠졌다 나온 것 같았다. 흉신은 휘청거리는 두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곧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곳은 또 다른 사지일 뿐이라는 사실을.
[왔군…… 파엘리토. 아니, 이제 세상에 두 번째로 나타난 흉신이라고 불러야 옳겠어.]흑룡 무라칸.
그가 두 쌍의 날개를 펼치며 나지막이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게다가 그의 앞발 아래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찢어진, 보랏빛 덩어리가 있었다.
지토의 눈이었다.
[뭐, 지토의 눈이 필요해서 온 거냐? 다 뒤져가긴 하는데, 이거라도 넘겨줄까?] [아…….]때때로 그 덩어리는 무라칸으로부터 빠져나가려는 듯 꿈틀거렸으나, 그때마다 앞발에 난 발톱과 날카로운 비늘에 오히려 더 찢어지고 말았다.
저런 지토의 눈과 융합을 시도해봤자 큰 의미가 될 수는 없다. 오히려 지토의 눈을 회복시키다가 남은 힘마저 다 소진될 것이다.
무라칸의 옆쪽으론 비델루체의 시신 옆에서 호흡을 고르는 탈라리스와, 그녀를 부축한 룬티아가 보였다.
처음부터, 흉신이 진을 피해 달아나는 건 의미가 없던 것이다. 진이 여유롭게 놈을 추격한 이유였다.
게다가 진은 흉신을 뒤쫓으면서 그가 마지막으로 취할 행동을 대비하기도 했다.
자폭, 흉신이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수는 그것뿐이었다. 진은 놈의 자폭이 성국의 다른 땅들을 부수지 못하도록, 더는 단 한 사람도 죽이지 못하도록 내내 전장 사방에 보호막을 형성해두었다.
이내 흉신은 소름 끼치는 인기척을 느끼며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이 연 영기 장막 사이로 진이 들어서고 있었다.
흉신은 털썩 바닥에 주저앉은 채 그가 다가오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진의 그림자가 흉신의 머리 위로 드리워지고 있었다.
“이제 그만 사라질 시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