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wordmaster’s Youngest Son RAW novel - Chapter (979)
제 999화
242화. 엘티엇(3)
“제……자?”
“약조를 하지 않았느냐. 진 사람은 상대의 뜻 한 가지를 무조건 따르기로. 하여 너는 방금 이 엘티엇의 제자가 된 것이다. 물론 기준 미달인 너를 가르치는 것은 내게도 참 슬픈 일이지. 하지만 어쩌겠느냐? 야속하게도 인연이 이렇게 닿아 버린 것을.”
“하, 진짜 날 제자로 삼겠다는 것이냐? 엘티…….”
“띠에에엑!”
루나는 연이은 호통에 정신을 차리기가 쉽지 않았다.
“왜, 왜 또?”
“예부터 제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선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감히 스승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있어선 안 될 일이지. 태양신이 죽고 세상에 혼란이 찾아왔다 한들, 지성체라면 꼭 지켜야 할 양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진과 베라딘, 단테는 끅끅 터지려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터질 것 같았다.
‘웃으면 안 돼, 참아야 한다……. 그런데, 정말 엘티엇이 누님을 이런 식으로 이길 줄은 몰랐군.’
사실 진도 루나의 패배를 상정하지 않았다.
내상을 입은 엘티엇이 루나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분전을 보여 주고, 훈훈하게 마무리되는 그림을 예상한 것이다.
“쿨럭! 커헉! 기가 막혀서 내상이 다 도지는군. 넌 스승이 이리 피를 토하는데 손수건 한 장 꺼낼 생각이 안 들더냐? 게다가 내 나이가 몇인데, 어찌 반말이 그리 툭툭 튀어나올 수 있단 말이냐?”
루나가 손수건을 건넸다.
엘티엇이 한참 기침하며 핏물을 토하는 동안, 루나는 정신을 추스르며 그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가장 훌륭한 검은 바람을 닮아 있다…….’
어렵지 않은 말이었다.
바람은 태산을 무너뜨리는 광풍이 될 수도 있고, 매서운 칼바람이 되어 단숨에 상대를 찢어발길 수도 있다.
바람을 닮은 검이란, 당연히 가장 유연한 검일 수밖에 없었다.
어떤 형태로든 바뀔 수 있는.
‘유려함의 극치, 엘티엇은 내게 그런 검을 보여주었다.’
룬칸델의 검은 냉혹하고 파괴적이다.
결전기나 비기 중 유려한 검결이 아예 없지는 않으나, 주류라고 할 수는 없다.
늘 압도적인 힘으로 상대를 찍어누르던 루나에겐 특히 부족한 요소이기도 했다.
그사이에도 엘티엇은 계속 호통을 쳤고, 나머지 일행이 그를 말리고 있었다.
이내 루나는 엘티엇에게 다가가 고개를 숙였다.
“약속은 약속이지. 좋다, 엘……. 아니, 이제부터 스승님으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흥! 드디어 지성체 같은 말을 하는구나. 한 번만 더 실수하면 파문하려던 참이다.”
“한 번 더 반말을 할 걸 그랬군요…….”
“이미 스승과 제자로서 서로를 한 번씩 불렀으니, 돌이킬 수 없게 되었어. 참으로 탄식할 일이지만 어쩌겠느냐.”
엘티엇이 정좌하며 루나를 올려보았다.
“……왜요?”
“절을 해야 할 것 아니냐.”
“절?”
“본디 우리 청명족은 사제의 연을 맺으면 제자가 매일 아침 스승을 찾아와 절을 올리는 게 관례다. 그러나 지금은 시대가 변했으니, 지금 한 번 절을 받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하였다. 인세에서 나름대로 위치가 있는 네 사정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니, 이 사부의 배려를 감사히 여기도록.”
이젠 황당하지도 않았다. 루나는 한숨을 내쉬며 진을 바라보았다.
룬칸델의 기수가 다른 누군가에게 절을 올린다는 건, 반드시 가주나 대행의 허락이 필요한 일이었다.
“엘티엇.”
“왜 부르느냐?”
“루나 누님은 내게 이루 말할 수 없이 소중한 사람이다. 누님이 절을 하면, 그때부터 누님은 진짜로 너의 제자가 되는 것이겠지.”
“그러하다.”
“스승이란 이유로 누님을 함부로 대하거나, 무시하거나, 지금처럼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 위엄을 깎아내려선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건, 부탁이 아니라 경고다. 룬칸델의 소가주로서 하는.”
“걱정도 태산이구나. 기준 미달이라 할지라도 제자는 제자. 그건 곧 이 엘티엇을 계승할 사람이라는 뜻이지. 내가 제자를 무시하는 건 내 얼굴에 내가 침을 뱉는 꼴이고, 누군가 제자의 위엄을 깎는다면 그건 곧 나의 위엄을 훼손하는 행위다. 단.”
“단?”
“오늘처럼 근처에 제자와 가깝고 편한 사람들만 있을 땐 마음대로 호통을 칠 것이다. 너에겐 소중한 누이겠지만, 내게는 고쳐야 할 게 한둘이 아닌 제자이니 말이다. 호흡부터 뜯어고치는 게 쉬운 일이겠더냐? 그것도 오랜 시간 자기 문제점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칭송만 받으며 살아온 이를. 하긴 네놈도 누굴 제대로 가르쳐본 적은 없을 것 같군.”
이번엔 진이 루나를 바라보았다. 루나는 엘티엇의 뜻을 받아들이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후우, 그럼. 절 올리겠습니다.”
“오냐.”
루나가 천천히 절을 올렸다.
그리고 그녀가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엘티엇의 광심장이 빛나며 한가운데 사람의 형상이 잠시 새겨졌다.
루나의 모습이었다.
“청명족이 가슴에 사람을 새긴다는 게 어떤 뜻인지도 모를 바보천치가, 기어이 내 제자가 되었구나. 자, 이제 다음 의식을 치르러 가야겠군.”
“의식이 또 있습니까?”
“그렇다. 진, 내 형제들의 시신을 어디에 두었느냐?”
“왕성 의료실의 안치소에 모셔 두었다.”
“안내해라, 제자야. 그곳으로 가자.”
안치소엔 황실의 은신처에서 가져온 59구의 청명족 시신이 있었다.
“잠시 나와 제자만 남고 나가 주게.”
두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일행이 안치소 바깥으로 나갔다.
루나는 조용해진 엘티엇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담한 눈으로 형제들이 놓인 관들을 바라보았다.
가슴으로 운다.
인세에서 흔히 사용되는 표현이다.
그러나 루나는 단지 표현이 아니라, 지금 엘티엇이 가슴으로 우는 모습을 직접 확인하고 있었다.
엘티엇의 광심장이 쉴 새 없이 빛나며 그 속에 사람의 형상을 새기고 있었다.
죽은 형제들의 모습이었다.
상이 하나 맺히고 사라지고, 다시 맺힐 때마다 광심장 속에서 뇌기가 눈물처럼 흘러내렸다.
그는 청명의 방식으로 슬픔을 마주하고 있었다.
루나는 묵념을 올렸다.
“……이제 되었다. 형제들을 묻어 주는 건, 언젠가 좋은 날에 하자꾸나.”
“그러시죠.”
“다음엔 돼지머리라도 하나 챙겨와야겠다. 우린 죽은 이들에게 제를 올릴 때, 작은 수인들식으로 돼지머리를 상에 올리고 그 콧구멍에 돈을 꽂아 두는 걸 좋아했지. 그렇게 하면 죽은 이들이 저승에서 그 돈으로 잘 지내리라 믿은 것이다.”
“신기한 풍습이군요. 인세에도 어떤 지역에선 노잣돈을 시신에 올려 주곤 합니다.”
“기억해라, 돼지머리다.”
“예, 돼지머리.”
“총명한 구석도 있기는 하군. 자, 그럼 이제 다시 훈련을 하러 가자.”
“치료부터 받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네 벽을 허물어 주려면 한시가 아깝다. 멜카 놈들이 망했고, 적명족이 다시 부흥했으니 곧 놈들 사이에 투신이 나타날 것이다.”
적명족의 투신.
바멀 연합은 아직 그의 행방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가 대봉인에서 살아남기는 했는지, 그렇다면 어디에 있는지, 어떤 상태인지 등. 아무것도 아는 바가 없었다.
다만 지금껏 적명족이 수차례 수세에 몰리면서도 투신을 내보인 적이 없으므로, 당장은 문제가 되지 않으리라고만 인식하고 있었다.
“회의 때 안 그래도 이번 메이실 전투 때 적명족이 힘을 되찾은 걸 확인했으니, 어쩌면 놈들이 앞으로는 투신을 내세울 수도 있겠다는 이야기가 나왔었습니다. 대량의 피를 구했을 테니까요. 스승님은 아예 확신하시는군요.”
“그래, 놈은 살아 있다.”
“어떻게 아십니까?”
“황실이 그를 이용하고 있었다. 세뇌되었을 때 들은 내용이지.”
“직접 보신 건 아니군요.”
“하나 확실하다. 아마 짧으면 일주일, 아무리 늦어도 보름 안에는 나타날 것이다.”
“그렇게 빨리?”
“놈은 뛰어나다. 전성기의 나조차 장담할 수 없을 만큼 강한데, 그보다 더 주목할 점은 통솔력과 지략이지. 고대에 우린 적명족에게 근소하게 밀리는 형세였다. 놈이 있던 까닭이다. 그리고 너는, 내 제자로서 놈을 꺾어야 할 의무가 있지.”
“스승님이 아니어도 우리 연합이 놈을 처단해야 할 이유는 너무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 적명족 투신이라는 자가 어디에 있는지도 아십니까?”
* * *
태양신교 아공간, 두 번째 태양의 사원.
“루크 사제님.”
산나가 루크를 찾았다.
루크는 태양신교의 사제복을 입은 채 태양신의 성상 앞에 무릎을 꿇고 있었다.
성상은 태양신이 현현한 여러 형태를 나타내고 있었는데, 가운데 자리 잡은 인간의 형상이 황금처럼 보이는 한 덩이의 무언가를 들고 있었다.
그건 태양신의 부서진 육신 한 조각이었다. 그 조각에서 입자가 흘러나와 조금씩 루크에게로 스며들고 있었다.
루크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 기도에 열중했다.
‘……그날 이후 지금껏 하루도 쉬지 않고 성상 앞에 기도를 올렸건만, 아직도 상처가 이리 깊단 말인가.’
산나가 루크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등을 덮은 흰 사제복이 온통 시뻘겋게 피로 물들어 있었다.
흘러내린 피가 웅덩이를 만들어 바지도 모두 젖었다.
루크는 두 시간이 지난 다음에야 뒤돌아 산나를 보았다.
“……지금 막, 겨우 뼈가 겨우 붙었소. 확실하오. 진 룬칸델은 창성에 다다를 때, 태양신과 마찬가지로 재생의 의지를 품었소. 그게 이 성체의 힘을 방해하기에 이리 회복이 더딘 것이오.”
“그렇다면…… 정말 이상하군요. 진 룬칸델에게 태양신의 의지가 그만큼이나 깃들었다면, 이미 정상일 수가 없을 텐데. 메이실에서도 그가 태양신께 잠식되려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지 않았나요?”
-일부가 된다는 표현은 부적절한 것 같군. 잡아먹힌다, 혹은 파묻힌다는 쪽이 더 어울리지 않겠소. 그가 태양신께 잡아먹히면, 그때부터 그는 우리와 함께할 수밖에 없소. 설령 그와 우리 모두가 원치 않는다 할지라도.
-일리가 있는 말씀입니다. 오……. 그건 분명 태양신교의 부흥에 도움이 되는 일이에요.
진이 창성에 오른 순간 루크와 산나가 나눈 대화.
그러나 루크의 예상과 달리 진은 태양신의 의지 한 갈래를 품고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소, 없었지. 그 이유가 명확히 밝혀지기 전까지는, 되도록 그와 직접 전투하는 걸 피하는 게 좋겠소. 실로 오랜만에 죽음의 위협을 느꼈군…….”
“휴우. 그렇다면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두 가지쯤이겠군요. 하나는 진 룬칸델이 순리대로 태양신께 잠식되거나, 다른 강적들이 그를 우리 대신 처리하거나. 오르갈, 지플, 가네스토, 적명족 같은 자들이. 이제는 적명족도 기대를 걸 만합니다. 아이란이 말하기를, 그들의 투신. 시마트가 며칠 내로 각성할 것이라 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