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a Munchkin RAW novel - Chapter (58)
먼치킨 길들이기 58화
당장이라도 덮칠 것 같았던 유리 천장은 고운 가루가 되어 눈처럼 흩날리는 중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둥근 방어막이라도 씌워 둔 것처럼 키네미아 주위로는 빗방울도, 유리 조각도 들이치지 않았다.
키네미아가 주저앉은 채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살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문득 거리를 둔 곳에 서 있는 기다란 인영이 보였다. 남자는 눈처럼 내리는 유리 조각 속에서 한동안 망연히 키네미아를 응시했다.
괜한 긴장감에 키네미아가 치마를 꽉 움켜쥐었다.
달을 가린 비구름에 사위는 짙은 어둠이 끼어서 남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결계를 쳤다면…….
‘……마법사?’
마법사는 어느 순간 긴 다리로 걷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다가오던 남자의 걸음이 참을 수 없다는 것처럼 빨라진다.
쿵쿵, 키네미아의 심장 소리도 함께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키네미아 바로 앞까지 다가옴과 동시에 어느새 비구름이 달을 지나쳐 갔다. 빛의 길이 열리자 새카만 머리카락 아래로 미형의 얼굴이 드러났다.
새카만 눈동자를 키네미아에게서 한시도 떼지 않은 남자는 그녀보다 머리 하나는 더 있을 정도로 장신이었다.
키네미아는 농염하고 퇴폐적인 분위기의 남자를 마주하며 마른침을 삼켰다.
“…….”
“…….”
망설이듯 몇 번 벙긋거린 그의 입술 사이로 새하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침묵 속에서 그가 아랫입술을 살짝 씹었다.
“나 기억해?”
“……에이얀?”
뜸을 들이던 둘이 동시에 말했다.
제 이름이 불리자 에이얀이 눈을 곱게 접어 웃었다. 안도와 환희가 뒤섞인 목소리가 짧게 답했다.
“응.”
어떻게?
한쪽 무릎을 꿇고 앉은 에이얀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다 제 장갑이 젖은 것을 확인하고는 마력을 끌어 올렸다. 장갑이 화르륵 불타 사라지고 새하얗고 기다란 손이 나타났다.
에이얀은 자그마한 키네미아를 품에 안았다. 아담한 몸이 품에 파묻히듯 안기자 그가 만족스럽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잡았다, 드디어.”
잠긴 듯한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비 냄새에 섞여 시원한 체향이 풍겼다.
‘정말 에이얀인가.’
키네미아는 단단한 몸을 마주 안지도 못한 채 얼떨떨하게 앉아 있었다.
상대는 마지막으로 봤던 소년, 에이얀이 아니라, 키가 훨씬 크고 어깨가 넓고 몸이 단단해진 남자였다.
키네미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에이얀은 이제야 뭍에 나와 숨을 쉴 수 있게 된 것처럼 깊게 숨을 들이켰다.
키네미아는 그의 숨결과 머리카락이 닿아 간지러움에 몸을 움츠렸다. 이에 고개를 든 에이얀이 키네미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댔다.
“보고 싶었어.”
이마를 맞대자 오뚝한 콧대가 닿았다.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한 채로 키네미아가 눈을 깜빡였다.
어떻게 이런 타이밍에 나타났어?
알고 온 거야?
계속 지켜보고 있었어?
언제, 어디서부터?
5년 동안 뭘 한 거야?
왜 그동안 한마디 안부 인사조차 없었어?
분명 에이얀을 만나면 하고 싶은 말이 많았던 것 같은데.
보고 싶었다, 연신 속삭이는 목소리에 목이 꽉 잠긴 것처럼 나오질 않았다.
잠잠해진 빗소리 사이로 바이올린이 긴 음을 흘렸고 이내 잔잔한 선율이 멈추었다.
“보고 싶었어. ……정말 많이.”
질척이는 감정이 느껴질 정도로 진심 어린 말은, 키네미아를 찾으러 사용인들이 몰려나올 때까지 계속되었다.
* * *
한창 물이 올라 있던 중앙 홀은 대공녀를 안고 들어선 한 남자의 등장으로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키가 큰 남자들도 고개를 들어야 할 만큼 장신의 남자는 특별한 행동 없이 그저 존재만으로도 사람들의 시선을 모았다.
관능적인 분위기의 수려한 외모, 느른한 몸짓에서부터 공기를 긴장시키는 듯한 느낌을 주는 남자가 중앙 홀 안을 휘 둘러보았다.
그러고는 곧장 로슬린 공작에게로 다가갔다.
호스트인 로슬린 공작은 창졸간에 나타난, 여러모로 봐도 낯선 인물의 정체를 밝히고 연회를 지속해야 할 의무가 있었으나…… 그 잘생기고 뻔뻔한 낯에 홀린 듯이 입만 다문 채였다.
그때 마탑에 적을 두고 있는 몇몇 마법사들이 에이얀을 알아보고 ‘리카샤가 왜…….’, ‘저 미친 재앙이……!’ 따위를 중얼거리면서 침음을 흘렸다. 마탑에 갓 입성한 마법사라도 ‘에이얀’이라는 세 글자는 인지하고 있었으니까.
5년 전, 마탑으로 돌아온 에이얀은 말 그대로 재앙 그 자체였다. 한시도 쉬지 않고 피바람을 몰고 다닌 것이다.
2차 각성으로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마법을 시전할 수 있게 된 그는 제 적이 될 만한 마법사들을 처리하기 시작했다.
‘마탑을 장악하려는 것이다.’, ‘마탑주 자리를 차지하려 한다.’는 이야기가 돌면서 마탑에 흉흉한 분위기가 조성되었으나, 에이얀의 폭주는 어느 순간 끝을 맺었다.
목표는 다른 데에 있었다는 것처럼.
한 용기 있는 마법사가 이유를 물었을 때, 에이얀은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저 기분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중앙 홀의 마법사들은 사색이 된 얼굴로 에이얀을 피했다.
반면 마법사들이 공포에 질린 줄도 모르고, 여타 귀족들은 흥미롭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리카샤?”
“정말 리카샤라고? 그 마탑주 후보?”
“그런 거물이 왜 여기에 온 거지?”
“설마 대공녀와 연이 있는 사이인가?”
“세상에나……. 어떻게 리카샤가…….”
상위 마법사, 그것도 리카샤쯤 되는 거물을 볼 수 있는 기회는 많지 않았으니까.
“리카샤가 저렇게 생겼었군요…….”
그를 이리저리 뜯어보던 귀족들 중 누군가가 홀린 듯이 말했다.
굳이 어떻다는 묘사를 덧붙이지 않아도, 그녀가 할 말을 모두가 이해하고 있었다.
리카샤라는 거물에 저런 외모까지 갖추다니, 몇몇은 세상의 불공정함까지 느낄 정도였다.
그런 와중, 막무가내로 안겨 들어온 순간부터 이미 영혼이 반쯤 빠져나간 상태의 키네미아가 에이얀에게 귀엣말을 했다.
그러자 에이얀이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키네미아를 내려놓았다.
키네미아가 로슬린 공작에게로 향하려 하니, 에이얀이 자연스럽게 뒤따르려 몸을 옮겼다.
이를 알아챈 키네미아는 입을 뾰족하게 만들고는 기둥 근처를 검지로 가리켰다. 제 뒤를 졸졸 따르는 강아지에게 저기서 기다리라고 명령하는 것처럼.
“……?!”
대공녀의 내일이 없는 행동에 마법사들이 움찔거렸다.
그러나 마법사들의 절망적인 예상과는 달리, 에이얀은 시무룩해진 얼굴로 터덜터덜 걸어가 기둥에 등을 기댈 뿐이었다.
마법사들은 얼굴을 와락 구겼다. 눈앞에서 믿기지 않는 상황이 벌어졌기 때문이다.
가엾은 마법사들이 서로를 바라보면서 제 눈앞의 사실을 재차 확인하는 사이, 갑작스레 중앙 홀로 날아 들어온 종달새가 마법사들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울프만은 에이얀이 사라지자마자 그를 뒤따른 참이었다. 이내 그가 에이얀의 어깨로 날아가 물었다.
– 벌써 뭔가 한 게냐?
“좀 억울하네요. 아직 아무것도 안 했는데.”
팔짱을 끼고 있던 에이얀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탑 소속으로 보이는 마법사들을 바라보며 싱긋 미소를 짓자 마법사들이 겁에 질려 몸을 휘청거렸다.
“뭐, 원한다면 해 줄 수도 있지만.”
– 키네미아가 좋아하지 않을 텐데.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이었습니다.”
에이얀이 천연덕스럽게 착한 척을 하며 말했다. 그러곤 로슬린 공작에게 양해를 구하는 키네미아에게로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에 울프만은 한숨처럼 말했다.
– 결국 만나러 왔구나.
“말씀드렸잖습니까. 펜던트가 깨질 정도로 위험한 순간에는 지키러 가겠다고.”
이는 키네미아의 곁을 떠나기 전, 에이얀이 울프만에게 내건 거래였다.
울프만이 받아들이자 에이얀은 키네미아에게 준 펜던트에 제 사역마를 담았다. 사역마가 키네미아의 위험을 알릴 수 있도록.
– 대신 제약을 걸었다는 건 잊지 않았겠지.
“자꾸 물으시니 퍽 잊고 싶어지는데, 워낙 뛰어난 머리라 잊을 수가 없어 아쉽습니다.”
에이얀의 능청맞은 대꾸에 울프만이 짐짓 엄하게 말을 받았다.
– 가볍게 생각 마라. 넌 지금 목숨을 거는 거야.
위험한 힘을 가진 에이얀을 그냥 풀어 둘 수는 없는 노릇. 혹시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심장에 걸어 둔 제약이 있었다. 그가 폭주하기 전에 제약이 심장을 옥죄어 죽을 수 있도록.
울프만으로서는 힘겹게 내민 제안이었으나 에이얀은 쉽게 수락했다. 말문이 턱 막힐 정도로 가볍게.
제 제자가 그 정도로 바라는 일을 울프만으로서는 말릴 수도 없었고, 말리는 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울프만이 키네미아에게 별일이 없기만을 바라는 동안 5년은 훌쩍 지나가 있었다.
“언제는 제가 그냥 죽는 게 세상에 도움이라고 하셨잖습니까.”
에이얀이 이죽대자 부아가 치밀었는지 울프만이 부리로 그의 머리를 다다닥 쪼아 댔다.
– 그래, 이놈아! 내 속이 먼저 터져서 죽기 전에 죽어라, 그냥!
웬일로 에이얀은 그의 공격을 얌전히 다 받아 냈다. 어찌 되었건 간에 지금 상황이 흡족한 모양이었다.
이 자식……! 눈을 흘긴 울프만이 그의 어깨에 앉았다.
– 키네미아에게는 말하지 말거라. 괜한 걱정거리일 테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로슬린 공작과 이야기하던 키네미아가 슬쩍 그를 돌아보았다. 새파란 눈동자를 마주하자 에이얀이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스승의 당부가 아니어도 말할 생각은 없다.
5년간 네가 무척 보고 싶어 네가 위험해지길 기다렸던 바람도.
아버지를 두렵게 해 아들조차 버리게 만들었던 힘도, 그가 키네미아를 만나기 위해 걸어야 했던 제약도.
그 어떤 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