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52)
EP.153)국면 # 6
153 – 새로운 국면 # 6
엘가는 스스로가 열심히 살아왔다고 자부했다.
비록 남들은 자신을 더러 리오네스 가문의 망나니니, 방종 맞은 고양이니 떠들어대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은 대부분 뒤에서 수군거리는 겁쟁이 같은 사람들뿐이었다.
미르나 드레이코 같은 겁쟁이들 말이다.
그런 놈들의 유언비어 따위야 어차피 엘가의 프라이드에 흠집조차 내지 못한다.
어린 나이부터 전장에서 피와 진흙을 몸에 바르며, 왕국의 적들과 열심히 싸우며 살아온 것에 엘가는 자부심을 느꼈으니까.
그런 자신이 반역자의 딸이라니?
사실 아버지와 이사야라는 남자가 얽혀있다고 들었을 때 엘가는 그 사실을 믿지 않았다. 무언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렇게 편지를 보니, 몰락한 왕족을 숨겨주고 있었던 것은 틀림없는 진실이었다.
「언젠가 그는 왕이 될 운명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만들 생각이었지.」
익숙한 필체로 적혀 있는 끔찍한 이야기라니. 엘가의 아버지 라인하르트는 단순히 몰락한 왕자를 숨겨준 것뿐만 아니라 그를 왕으로 만들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반역의 앞잡이다.
이 편지를 미친 사촌 아이라가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그래서 엘가는 다 읽은 편지를 아주 북북 찢어버렸다. 아주 잘게 찢어서 글자 하나 남기지 않았다.
그때 옆에서 함께 편지를 읽었던 반요정이 말을 걸어온다.
“엘가 님.”
문득 엘가는 이 반요정이 방금 있었던 일로 자신을 비난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이 반역자의 딸…! 그런 주제에 여태까지 잘도 어깨를 뻗대고 살았구나…! 너희 리오네스 가문은 이제 끝이야. 재산도 몰수…! 너는 내 노예로 삼아주마…!
물론 그런 말은 안 하겠지만.
그런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게 없다고 해야 할까.
그래서 엘가는 남자가 말을 하지 못하게 틀어막고 싶었다.
“왜, 너 또 이상한 소리 하려고 그러지!”
“아뇨, 이상한 소리가 아니구요. 여기 적혀 있는 것에 따르면 이사야는 실종되었다고 하잖아요. 이사야가 여색을 밝히는 사람도 아니라고 하니 그 후손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확률도 있구요.”
“그, 그게 왜.”
“하지만 만약 세상에 이사야의 아들이나 딸이 있을 경우에 말이에요. 그리고 그 사실을 엘가 님이 알게 되실 경우엔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내가 알게 될 경우에-.”
엘가는 바보가 아니다.
그랬기에 이 남자가 어째서 자신에게 이런 말을 물어오는 지 당연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이 남자는 현 타란테라 왕가를 유지하기 위해 힘쓰는 여왕의 최측근.
그런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남자로서 지금 엘가의 충성심을 시험해 보려는 것이었다. 사상을 검증한다고 봐도 좋다.
그래서 엘가는 짐짓 당연하다는 것처럼 말했다.
“당연히 죽여야지!”
“죽여요…?”
반요정의 반응이 퍽 당황스러워 보인다. 혹시 엘가는 자신의 대답이 너무나도 밋밋했던 것이 아닐까 싶어서 열정적으로 자신을 변호했다.
“그냥 죽이는 것이 아니라, 불에 태워서 끔찍하게…!”
“불에 태워서 끔찍하게…?”
엘가의 대답에 남자의 반응이 점점 미묘해졌다. 무언가를 꺼려하는 것 같기도 하고 겁에 질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것보다 더 끔찍한 방법으로 죽여야 한다고 말을 하는 건가?
엘가는 국가에 대한 자신의 헌신과 귀족으로서의 프라이드를 지키기 위해, 열심히 말을 골랐다. 지금은 무죄를 증명해야만 하는 시간이었으니까.
“만약.”
잠깐 입을 다물고 있었던 반요정이 말했다.
“만약, 그 숨겨진 앙그마르의 정체가 엘가님이 아끼는 사람이나 알고 계시는 사람이었을 경우에는요?”
“뭐?”
“남동생인 리차드 군을 생각해보세요.”
“리차드?”
반요정의 신비로운 목소리에 엘가의 머릿속에는 자신의 남동생이 곧바로 떠올랐다.
어린 시절부터 아장아장 자신을 따라다니며 누나-하고 따랐던 남동생. 나이 차이가 꽤 나기 때문에 엘가 자신이 업어 키웠다고 해도 좋은 아이였다.
“리차드가 왜.”
“만약 리차드 군이 사실은 피가 이어지지 않은 양자고, 그 정체가 앙그마르의 왕자였다면 어떻게 하실 거죠?”
리차드가 양자였다고?
아니, 엘가는 리차드가 태어난 날을 기억하고 있다. 어머니를 잃은 날이기도 했으니 평생 잊지 못하겠지.
“리차드는 내 동생이야! 앙그마르 같은 거 아니거든! 걔는 금발에 푸른 눈이잖아! 누가 봐도 리오네스 가문의 남아 아니야?”
엘가는 자신의 남동생의 무죄에 대해 열심히 항변했다.
그러자 반요정이 침착한 목소리로 되묻는다.
“아뇨, 그러니까. 그렇게 가정해보라는 것입니다. 만약 엘가 님께 있어서 가장 소중한 가족이나 존재가 반역자라면, 반역 행위를 한 것이면 어떻게 하실 거죠?”
“…….”
엘가는 잠깐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생각을 잘 골라서 말해야겠다고 깨달았기 때문이다. 반요정이 이런 것을 묻는 의도는 너무 투명해서 훤히 그 속이 보일 정도였다.
나더러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묻는 거야.
가족인 아버지가 반역 음모의 가담자였다는 걸 알아차린 지금. 자신의 아버지를 어떻게 할 것이냐-라고 묻는 것이었다.
가족과 의무의 사이를 저울질 하라니.
엘가에게 있어서도 무척 곤혹스러운 질문이었다.
엘가는 앙그마르의 군인으로서 자부심 넘치게 살아왔지만. 평생을 리오네스의 영애로 살아온 몸이었으니까.
슥.
엘가는 반요정의 표정을 슬쩍 살폈다. 이제 막 사춘기에 접어드는 것처럼 어린 소년의 외향을 가진 주제에.
평소에는 얼굴에 걸 맞는 얼빠진 행동들을 일삼는 주제에 이렇게 가끔 날카로운 비수처럼 말할 때가 있다니까.
엘가가 뜸을 들인다고 생각했는지 녀석이 말했다.
“지금 대답을 잘 생각해주셔야 할 겁니다. 언젠가 엘가 님은, 정말 그러한 선택을 강요받게 될 날이 올 거에요. 제가 장담 합니다.”
스르륵.
반요정의 푸른 눈동자가 기이한 느낌으로 빛났다. 그의 입에서 나온 이야기는 마치 필연에 대해 이야기 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미래의 일을 보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때 엘가는 이 반요정이 독사 같은 간신들이 가득한 궁정에서 무어라 불려왔었던 것인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됐다.
요승 태오 가스펠.
과연, 그 미쳐버린 사촌 아이라의 고삐를 쥐고 있던 남자답다.
“선택의 순간이라….”
* * *
나는 확신했다.
언젠가 엘가는 가족과 국가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온다.
당연한 일이다.
언젠가 내가 나의 정체를 짠-밝히며 엘가의 충격 받은 모습을 볼 것이니까 말이다.
그때 되면 엘가는 자신이 돌이킬 수 없는 곳까지 발을 내딛고 말았다는 걸 깨달을 수밖에 없겠지.
물론 그때 쯤 되면 애가 둘은 있을 것이고, 자신의 혈육을 끔찍이 챙기는 리오네스 가문 사람의 특성상 엘가는 자신이 낳은 아이들을 버리지도 못하고 결국 좌절하고 타협할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니까 은근히 기분이 좋았다.
죽인 만큼 낳게 한다.
그것이 바로 군자의 복수지.
하지만 엘가는 내 이야기를 어떻게 이해했는지 조금 생뚱맞은 이야기를 했다.
“지금 충성을 증명하기 위해, 날더러 내 아버지를 쓰러트리라는 말이야?”
“아버지요?”
내 이야기가 라인하르트와 국가에 대한 헌신 사이에 선택을 잘 해라-라고 들렸던 건가? 충분히 그렇게 들릴 수 있었겠다.
문득 이 상황이 내가 원하고 있던 질문의 답과 꽤 비슷한 상황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엘가에게 있어서 라인하르트는 자신의 아버지이자 반동분자가 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나는 남편(예정이지만)이자 반란의 씨앗 그 자체.
엘가가 라인하르트를 대하게 될 태도를 보면 앞으로 나에 대한 태도를 유추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나는 쐐기를 박듯이 말했다.
“엘가 님. 라인하르트님이 이사야라는 남자를 왕으로 세우려고 했던 건 사실입니다.”
“…….”
“이것에 대해 엘가 님은 어떻게 생각하시죠? 가족과 국가. 애정과 귀족으로서의 자존심.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지금, 날 더러 내 아버지를 내치라는 소리잖아.”
“그렇게 들을 수 있겠네요.”
“나는….”
엘가가 주먹을 꽉 쥐었다. 부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을 보면서 나는 그녀의 대답을 얼추 예상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나는 그렇게 못해.”
“그렇게 못한다면?”
“어떻게 아버지를 버릴 수가 있어.”
엘가의 대답은 무언가 포기한 것처럼 초연함이 있었다. 그 결과 침착해보이기까지 했다.
“나는 기사이고 군인이기 이전에 리오네스의 사람이야. 어떻게 가족들을 버릴 수가 있겠어.”
“그 결과 타란테라 가문이나, 다른 사람들과 반목하게 된다고 하더라도요?”
“그래.”
엘가의 대답은 꽤 내 맘에 들었다. 가족들을 우선시 한다는 것은 곧 훗날 나를 선택할 확률도 높아진 다는 것이니까.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서 지우며 담담히 말했다.
“그럼, 이번 일은 일단 비밀로 해드리겠습니다. 라인하르트 공으로부터 왔던 편지나 그 내용에 대한 것은 전부 비밀로 해드릴게요.”
여차하면 요새 멋대로 행동하기 시작하는 엘가를 통제하는 족쇄가 될 수도 있을 터.
그렇게 생각하니 라인하르트의 편지는 내게 꽤 많은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엘가가 찢어버려서 안타까울 뿐.
“너는-.”
그때 엘가가 우물쭈물거리며 말했다.
“너는 어떤데?”
“저요?”
“만약 네 가족이 사람들로부터 욕을 먹고. 손가락질 받고. 그 결과 처형대에 오르거나 화가 난 민중의 손에 찢겨지고. 혹은 국가를 적으로 돌린다고 해 봐.”
“제 가족이요?”
“그럼 너는 어떻게 할 거야. 가족을 버리기라도 할 거야?”
가족을 버린다니.
엘가는 모르겠지만 나는 버려진 사람이다. 유기된 사람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런 내가 가족들을 버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어머니를 기다리며 매일 창문 바깥을 들여 봤던 어린 시절의 내가,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니까.
“저 역시 가족을 버릴 수는 없어요. 엘가님이 제 가족이 된다면, 세상이 엘가님을 욕하고 구박해도 저는 엘가님 옆에 있어줄게요.”
“뭐래, 뭐라는 거야.”
엘가는 내 말에 부끄러움을 느꼈는지 슬리퍼로 바닥을 벅벅 문질렀다.
슥.
그리고는 나를 향해 손을 내밀어온다. 혹시 선물이라도 주려는가 싶어서 손바닥을 봤는데 아무것도 없었다.
“왜요?”
“…손잡자고. 산책이나 하자는 거지.”
“다른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해요?”
“보면 좀 어때. 아이라에게도 당당하게 말해놨는데. 이제 너랑 나 사이에 꼬투리 잡을 건 미르나 밖에 없어.”
맞는 말이다.
나는 약간 불안한 심정으로 엘가의 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천천히 늦은 일요일, 이제 월요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밤거리를 걷기 시작하는데. 마치 나쁜 짓을 하는 것처럼 두근두근거리고 얼굴이 화끈거렸다.
단순히 손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이런 마음이 된다니.
평소 성욕으로 가득차서 엘가의 몸을 안고 있었던 때와는 달리, 무언가 가슴이 뭉클뭉클하고 간질간질해서 영 낯선 기분이다.
엘가도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을까?
나는 슬쩍 엘가의 표정을 살폈다.
엘가 역시 가로등 불빛 아래로 얼굴을 붉힌 채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처럼 입술을 달싹거리고 있다.
마치 부끄러워하는 남녀 아이를 짝지어 손을 묶어 놓은 느낌. 초등학생들의 벌칙게임 같은 산책이었다.
“태오, 네가 날 버리지 않는다고 했으니까 너한테 비밀 하나 알려줄게.”
“비밀요?”
갑자기 웬 비밀.
이제 와서 엘가가 내게 숨겨왔던 비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있나 추측해볼 때였다. 혹시 속옷 안 입고 나왔나? 아냐, 아까 보니까 입었었잖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으려니 엘가가 짓궂게 말했다.
“아냐, 역시 말 안 해 줄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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