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93)
EP.194)휴식 # 3
194 – 잠깐의 휴식 # 3
방문 앞으로 귀쟁이, 아니 엘프들이 여럿 찾아왔다.
그들을 내가 직접 맞이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나는 지금 근육통을 앓아서 꼼짝도 못하는 상황. 그래서 나대신 엘가가 바깥을 향해 물어주었다.
“당신들 누구?”
애매한 반존칭.
그 뒤에 들려오는 대답 또한 질문이다.
━여기, 태오 가스펠 경이 머물고 있는 방 아닌가요?
━웬 여자 목소리가 들리지?
━몰라.
숙덕숙덕.
많은 인원이 문 뒤에 있기 때문인지 한 마디씩만 해도 내 예민한 반요정의 귀에는 금방 웅성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셋? 아니, 넷인가?
“여기 태오 가스펠의 방 맞는데. 당신들 누구냐고.”
문 너머로 의심과 경계의 빛을 세우는 엘가. 으르렁 거리는 목소리 때문인지 약간의 적의마저 느껴졌다.
저렇게까지 경계할 필요가 있나 싶었지만 엘가가 노골적으로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이 세상에서 ‘문을 두드리는 엘프’란 종잡을 수 없고 무례한 존재로 낙인 찍혀있었으니까.
이 세상 사람이라면 문을 열어주니 방 안으로 들어온 여러 엘프들이 이런저런 물품들을 강매하도록 만들었다-라는 이야기를 한 번 정도는 들어봤을 터.
“보험이나 생명수 같은 거 팔려고 온 거면 필요 없으니까 다들 시간 낭비 하지 말고 가. 지금 환자가 쉬고 있어서 안정을 취해야 하거든?”
엘가도 그랬나보다.
다만 엘가의 축객령에도 바깥의 목소리는 나름 평온했다.
━환자? 태오 가스펠이 부상을 입었던 모양이야.
━때마침 나한테 좋은 물건이 있는데. 이 말르카서스에서 온 차가버섯물이면 통증이야 싹 낫지.
똑, 똑, 똑.
엘프들은 집요했다.
“야, 태오, 어떻게 할 거야? 내가 돌려보내 줄까?”
손바닥을 쥐며 으득, 으드득-하고 손을 푸는 엘가. 엘가도 방금 있었던 우리들의 행복하고 은밀한 즐거움을 방해당한 것에 아무래도 분풀이를 하고 싶어진 모양이다.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그렇군.
그러나 나는 큰 문제를 일으키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냥 엘프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고 어떤 상품을 팔려는 건가 싶어서 문을 열어주기로 했다. 얼핏 들린 차가버섯 물이라는 것에 흥미가 있기도 했고. 어쩌면 이 극심한 근육통이 나을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내 의견을 듣자 엘가는 툴툴거리면서 “너 알아서 해라.”라고 흥 코웃음을 쳤다. 그러나 마지못한 느낌으로 문을 열 때.
“당신들, 들어와서 함부로 하면-.”
덜컥, 기이익.
━아, 열렸군!
문이 열리자 다섯 명의 엘프들이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비좁은 방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이 녀석들, 멋대로 한 꺼번에 들어오기는.”
덕분에 무어라 말하려던 엘가는 파도처럼 밀려들어오는 긴 귀의 요정들에 옆으로 떠밀려 벙 찐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와글와글.
나의 좁은 방이 어느덧 가득 몰려든 사람들로 왕왕 찼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왔었던 적은 없었기 때문에 정신 사나움을 느낄 때, 잿빛 트위기 단발에 까만 오피스 정장을 입은 여성 엘프가 내게 인사했다.
“당신이 태오 가스펠 경이군요. 저는 엘븐디너 상회의 대표 데네브라고 합니다.”
차가운 인상. 태가 얇은 안경을 걸친 유리알 너머로 보이는 금빛 눈동자가 날카롭다. 마치 맹금의 그것 같았으니까.
“여기, 제 명함입니다.”
자그마한 종이를 받아들자 화려하게 금박이 칠해진 명함에 이것저것 적혀 있었다. 벨호크 상단, 엘븐디너 상회. 데네브.
그렇군.
얼추 예상하고 있던 대로 이들은 엘프 상인들이었다. 대기업 벨호크 가문에서 파생된 여러 상회들 중 하나라고 해야 할까?
단순한 방문 판매객인줄 알았는데, 산하 상회라고는 해도 대표가 직접 올 정도면 꽤 중요한 이야기가 있겠지.
“저는 태오 가스펠입니다. 이렇게 누워서 맞이하는 것에 우선 사과를 드리겠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저를 찾아오신 까닭은 뭐죠?”
내 물음에 상단의 대표 데네브가 주변을 둘러보며 짝짝-하고 박수를 쳤다.
“그 전에, 우선 이번 경기. 굉장히 잘 봤고. 또 좋은 경기를 보여주신 것에 대한 답례와 보답을 좀 드리고 싶군요.”
곧 사람들이 손에 쥐고 있었던 꽃과 과일 같은 걸 내려놓는데. 덕분에 별 다른 물건 없이 쓸쓸한 풍경이었던 내 방이 조금은 화사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내 눈에 가장 띄었던 것은 유리 혹은 얼음처럼 투명하고 반짝이는 꽃 바구니였다. 내 눈빛을 느낀 것인지 데네브가 요령 좋게 먼저 설명해줬다.
“이건 저희 남쪽 평원에서 재배하고 있는 빙결초입니다. 꽃이 다 피어났을 때 수명은 3개월 정도지만. 항상 냉기를 머금고 있어서 주변이 시원해지거든요.”
“오.”
“태오 경이라면 눈치 채셨겠지만, 여름이 끝나 가을이 오기 전까지는 충분히 아름다움과 시원함을 즐길 수 있다는 말입니다. 여름엔 이만한 선물이 없죠.”
말하자면 요상한 선풍기 혹은 에어컨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내 방이 시원해지기 시작해서 더위로 조금 끈적끈적했던 나의 피부가 산뜻해지는 상쾌함을 느낄 수가 있었다.
“하지만, 저는 지금 당장 가진 돈이 얼마 없는데요?”
물건은 제법 좋아 보인다만 당장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은 얼마 없다. 그리고 있어도 여기저기 들여다 놓는 물품들을 전부 구매하고 싶진 않았다. 비싸 보이잖아.
그러자 데네브가 손가락으로 얇은 안경태를 치켜 올렸다.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건 좋은 경기와 마법을 보여주신 것에 대한 답례입니다. 그냥 받아주시면 좋겠습니다.”
선물이라는 말인가?
이 녀석들과는 초면이다.
초면에 선물을 해온다니. 내가 늘 언급했지만 대가 없는 성의 표시는 없는 법. 그리고 받는 게 있으면 주는 게 있어야 하는 법이다.
차라리 돈 주고 팔았으면 덜 찝찝했을 것 같은데 이렇게 공짜로 준다고 하니까 더 수상하기 짝이 없었다. 초원의 엘프들이란 절대 손해 보는 법 없는 장사를 하기로 소문났었으니까!
“흥-.”
그때 누군가가 커다랗게 코웃음 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려보니 구석에서 이 사태를 팔짱 낀 채 관망하고 있던 엘가가 결국 참지 못한 것처럼 한 마디 했다.
“태오가 어중이떠중이 멍청이인 줄 알아? 너희 엘프들에게 꿍꿍이가 있다는 것 정도는 다 안다 이거야. 얼른 본론을 말하시지?”
“…….”
그 말에 가느다란 눈을 뜨는 데네브.
“이 분은?”
나에게 정체를 물어오는 것 같기에 나는 솔직히 답해줬다.
“에르가네스 폰 리오네스 아가씨이십니다.”
“리오네스 가문의…!”
그러자 깜짝 놀란 것처럼 파르르 떠는 엘프들. 다만 겁에 질려서라기보다는 가벼운 산행에서 산삼 뿌리라도 발견한 기쁨이 묻어있는 듯했다.
“저는 데네브입니다. 여기 명함을-.”
“됐어. 그보다 이제 볼일 다 봤으면 얼른 다들 나가시지? 선물 줬으면 끝난 거 아냐?”
“과연 듣던 것처럼 불같은 성정을 지니신 분이시네요. 좋습니다. 당분간 아크에 머물 것이고, 오늘만 시간이 있는 것도 아니니 지금은 이만 물러나도록 하죠.”
짝짝.
대표 데네브가 박수를 치자 여기저기에 물건을 내려놓은 엘프들이 다시금 방 바깥으로 우르르 몰려 나갔다.
* * *
안 그래도 고요했던 나의 방은 엘프들이 몰려왔다 나간 뒤로 더욱 고요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들이 주고 갔던 이 ‘빙결초’라는 것이 효과가 상당히 있어서 방 안이 서늘하게 시원해 기분이 좋았다. 효과 좋네. 안 그래도 선풍기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야, 이거 봐. 멜론도 있어.”
과일 바구니를 뒤적이던 엘가가 자신의 가슴처럼 커다랗고 동그란 과일을 집어 들었다.
그것은 엘가의 말처럼 멜론이었다. 다만 내가 아는 멜론과 다른 점이 있다면 껍질이 매끄럽고 금빛이라는 정도.
“황금 멜론이잖아? 이거 진짜 비싼건데. 구하기도 어렵고. 나도 일곱 살 생일 때 먹어본 게 처음이자 끝이었거든.”
귀족 아가씨로 금지옥엽처럼 길러졌던 엘가가 다 감탄할 정도면 상당히 보기 힘든 희소과일이라는 건 확실해 보였다.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더니 이내 작은 목소리로 딴청 피우듯 말하는 엘가.
“내 뱃속의 요정이 이걸 먹고 싶어 하는 것 같은데? 내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아까 전 아이스크림 먹을 때도 저러지 않았나. 그래도 과일과 산모는 제법 잘 어울리는 것 같아서 나는 흔쾌히 허락해주었다.
“드세요. 제가 깎아드릴까요?”
“아니. 내가 알아서 깎지 뭐.”
과도를 꺼내든 엘가가 능숙하게 날붙이를 다루며 과일을 등분했다. 사각사각. 차가운 멜론은 아까 전에 먹었던 아이스크림보다 훨씬 시원하고 달았다.
맛있네.
「님프 친화적인 과일을 먹은 것이다…!
‘반요정’의 직업 경험치를 획득하는 것이다…! + 50.」
내 안의 요정 구르메 세포들이 기뻐하는 것이 느껴졌다.
이것은 몹시도 요정 친화적인 맛으로 내 몸의 잠들고 지쳤던 근육과 신경들이 찬물로 씻은 것처럼 개운해지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근육통이 나아가는 느낌.
그렇게 정신없이 멜론 한 개를 전부 먹었을 때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엘가가 주변을 둘러보며 말했다.
“선물이 정말 잔뜩 들어왔네. 봐, 이럴 줄 알았다니까?”
“이럴 줄 알았다니요?”
“다들 너에게 줄을 대보려고 하는 거야. 5위계 이상의 마법사들은 어디서든 귀한 대접을 받으니까. 약삭빠른 회색 엘프 놈들이 가장 먼저 온 거지.”
그렇군. 엘가나 미르나가 일찍이 대결에서 승리한 내게 많은 이들이 찾아오고 접근할 것이라고 경고를 해주었던가.
바로 앓아 누웠기 때문에 까먹고 있었지만 이렇게 보니 내 결투가 상당한 파급을 불렀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제 조심해야 할지도 몰라 너. 정체 숨기고 있잖아. 유명해졌으니까 분명 네 뒤를 캐보려는 사람도 생길 걸.”
“그렇긴 하겠네요.”
“그래서 언제까지 숨길 거야? 나한테는 알려줘도 되잖아.”
엘가는 침대에 앉아 있는 내 허리춤을 스르륵 끌어안았다. 교태를 부리며 내게서 원하는 것을 얻어가려는 심산인 듯하다.
“이제 너랑 나는 가족인데. 아직 나한테도 숨기고 싶다 이거야?”
엘가는 내가 숨기고 있는 것들이 궁금한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지. 내가 반대의 입장에 있었어도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을 테니까.
하지만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엘가 님, 선녀와 나무꾼이라는 얘기 아시나요? 선녀랑 결혼한 나무꾼이 날개옷을 숨기고 있다가, 아이를 서넛 낳았을 때 비로소 날개옷을 돌려줬다는 이야기요.”
“선녀와 나무꾼? 천사와 사냥꾼 얘기하는 거 아냐? 곰 사냥꾼이 천사의 광륜을 숨겨두고 있다가, 아이 셋 낳은 다음에 돌려줬는데 하늘로 날아 가버렸다는 이야기잖아.”
여기서는 천사와 사냥꾼이라는 이름으로 퍼져 있었나. 다만 내용은 내가 아는 전래동화와 비슷했기 때문에 문제없었다.
슥.
손가락 하나를 들어 올린 내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바로 그것입니다. 진실을 알게 된 엘가님이 힘을 되찾은 천사처럼 하늘로 날아가 버리면 안 되잖아요. 적어도 아이가 넷은 있어야 제가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내가 한 설명이었지만 나름대로 딱 들어맞는 기막힌 이야기였다. 나름대로 완벽한 논리에 엘가는 내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걸 포기하고 몸을 일으킨 뒤에 인상을 와락 찌푸릴 뿐.
“뭐라는 거야, 지금. 말해주기 싫으면 됐어.”
마치 토라진 것처럼 입을 꾹 다무는데. 엘가는 종종 이렇게 어린애 같이 행동할 때가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토라진 것을 풀어주는 건 쉬운 일. 옆구리나 겨드랑이를 손가락으로 간지럽혀주면 된다.
“푸흐흐-! 야, 너 뭐하는 거야 지금. 나 화낸다?”
“엘가님에게 혹시 날개나 깃털이 있나 찾아보고 있는 거에요.”
“야, 너 지금 어딜, 만지, 앙…! 너, 진짜 죽어…!”
시원한 방 안. 엘가와 노닥거렸기 때문인지 아니면 황금 멜론이 효과가 좋았던 것인지 하루 푹 쉬고 나니 컨디션이 좋아졌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