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195)
EP.196)휴식 # 5
196 – 잠깐의 휴식 # 5
미르나와 나는 늦은 오후, 해가 어둑어둑 저문 이후까지 아크 부지 내를 돌아다녔다.
완장을 차게 된 미르나가 너무나도 열심히 선도적인 활동을 펼쳤기 때문에 그 뒤를 보좌하느라 다리가 퉁퉁 부을 정도였다.
활동량 어마어마 하구만. 먹은 거 다 소화됐겠다.
깜빡, 깜빡.
마정석으로 환히 빛나는 가로등 불이 켜지고 커다란 나방들이 그 주변에 달라붙어서 파닥파닥 날갯짓을 할 무렵.
“이제 오늘치의 일이 전부 끝났네요. 이제 내일부터는 나르미가 또 나머지 구역들을 찾아가 살펴보겠죠. 태오 경, 오늘 제 일을 돕느라 고생 많았어요.”
미르나가 드디어 일의 종료를 선언하고 자신이 쥐고 있던 파일들을 탁 소리 나게 접었다.
늘어지게 기지개라도 켜는 게 좋을 것 같아 보였지만, 역시 드레이코 가문의 젊고 완벽한 가주답게 흐트러지는 모습이 없다.
나는 멋쩍은 느낌으로 코를 슥 훑으며 말했다.
“저는 그냥 함께 다니기만 했는데요 뭐.”
실제로 오늘 미르나로부터 “저를 좀 도와주실 수 있을까요?”라는 부탁을 받았지만 막상 내가 한 것은 미르나의 뒤를 졸졸 따라다녔던 것 뿐.
대부분의 일은 미르나가 전부 처리했기 때문에 나야 그냥 이것저것 얻어먹고, 2인으로 즐길 수 있는 것들을 대신 체험해 줄 NPC정도의 역할만 했다.
사실 하루 평범하게 데이트를 했다고 불러도 좋은 수준이었는데 내가 놀랐던 것은 미르나가 자신의 역할을 철저하게 수행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저는 미르나 님이 학생회일을 이렇게 열심히 하고 계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그런가요? 그야, 뭐. 제가 평소에 내색하거나 바쁜 기색을 보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겠죠. 이래 뵈도 학업과 업무, 무엇하나 빼놓지 않고 열심히 하고 있답니다.”
미르나가 자부심 넘치는 태도로 가슴을 폈다. 엘가 정도는 아니지만 미르나 역시 나름 볼륨감 있는 가슴을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무척 보기 좋았다.
그렇군.
아이라나 엘가가 강의도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기숙사에서 쉬거나 재미난 일거리만 찾아서 돌아다녔던 것과 다르게 미르나는 ‘아크의 생도’라는 본분을 철저히 지키고 있는 듯했다.
학생답다는 말이다.
학생 시절에 반장이나 부반장 혹은 회장을 맡아서 깐깐하게 잔소리를 하는 여자애들이 간혹 한 명 쯤 있었는데. 미르나도 딱 그런 타입인 듯했다.
아이라나 엘가도 이렇게 열심히 아크에서의 학창생활을 즐겨줬으면 좋겠는데. 학생일 때는 학생만이 할 수 있는 즐거운 것들도 있으니 말이다.
아니, 그 둘은 그냥 사고치지 않고 얌전히 있는 걸로 만족해야하나….
“으흠.”
한참 생각에 빠져서 아쉬움과 안도를 동시에 느끼고 있을 때 미르나가 기침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무더운 여름 밤, 추위나 감기 때문에 기침을 한 건 아닌 것 같고 아무래도 내게 할 말이 있었던 듯했다.
“요즘 아크에서 가장 유명한 인사를 데리고 다녔다보니, 여러모로 일처리가 수월해졌답니다. 제게 귀한 시간을 내주셨으니 마땅한 답례를 드려야겠네요.”
“답례요?”
답례라는 말에 내 안에 잠들어 있는 요정 구르메 세포들이 우수수 일어나는 게 느껴졌다.
“혹시 황금 멜론입니까?”
어제 엘가와 나눠 먹었던 황금 멜론. 그 맛이 입에서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무척 달고 시원해서 맛있었는데. 혹시 잘하면 그걸 또 먹을 수 있지 않을까 기대했던 것도 잠시.
“황금 멜론? 그런 귀한 걸 먹었나요?”
미르나는 금시초문이라는 것처럼 가느다랗게 눈썹을 떨었다. 아무래도 반응을 보아하니 황금 멜론은 아닌 듯했다. 아쉽구만.
내 살짝 실망한 기색을 눈치챈 것인지 미르나가 황급히 말을 덧붙인다.
“으흠, 황금 멜론보다 더 달고 부드러운 것을 드릴 테니까 잠깐 눈을 감아보시죠. 꺼내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것 같으니까.”
“그냥 주시면 안 됩니까?”
“안 돼요.”
미르나의 말은 단호했다. 황금 멜론이 아니면 뭘 주려는 거지?
그리하여 별 수 없이 내가 눈을 스르륵 감았을 때, 무언가 쌉싸름하면서도 시원한 애플민트 향기가 확 느껴지더니 내 입술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츕.
그것이 누군가의 입술이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할 정도로 나는 바보거나 둔감하지 않았다.
내가 지닌 직업 ‘호색한’은 성적이고 야릇한 일에 대해서 여러모로 확률과 지식, 용기를 보정해주는 멋진 직업이니까 말이다.
“그럼, 이걸로 됐죠?”
눈을 뜨자 미르나가 손등으로 자신의 입술을 슥 닦는 것이 보였다. 가로등 아래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은 무척 붉어서 마치 달아오른 홍시처럼 보이기도 했다.
몰래 뽀뽀를 해놓고 부끄러워한다니. 아주 어린 시절, 함께 자라났던 여동생들의 애교가 떠오르는 기분이라 잠깐 행복한 사고에 잠기게 된다.
어린 시절이 좋았지. 그때 일을 떠올리니 어린아이 혹은 반요정의 악동 같은 짓궂은 장난기가 슬슬 발동하는 것 같아서 나는 태연한 표정으로 한 마디 해줬다.
“미르나 님, 값이 좀 모자란데요. 계산이 좀 잘못된 것 같아요.”
“뭐라구요? 모자란다니, 말도 안 돼요. 오히려 제가 거스름돈까지 받아야 하는 상황인데 말이에요.”
“그럼, 제가 거스름돈을 드려야할까요?
나는 한 걸음 떨어진 미르나에게 다가가서 그녀의 허리를 슥 끌어안았다.
그리고는 미르나를 향해 입술을 천천히 다가가는데, 미르나는 마치 포획 틀에 붙잡힌 사슴처럼 버둥버둥 나의 몸을 밀어내려고 했다.
“…누군가 보면 어쩌려는 거죠!?”
“아무도 없잖아요.”
“저기 나방들이 있잖아요? 나방도 눈이 있답니다…!”
뭔 하다하다 나방 핑계를.
다만 그 저항은 강렬하거나 거세지 않았고, 이내 결국 나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허락하고 만다. 츄릅, 츄릅. 이번에는 거스름돈을 확실히 쳐서 혓바닥을 넣어주었다.
과연, 미르나의 입술은 어제 먹었던 황금 멜론만큼 달지는 않았으나 그것 이상으로 부드러운 것이다. 하지만 진짜 부드러운 곳은 따로 있다.
나는 허리를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올려, 미르나의 가슴 바로 아랫부분까지 쓰다듬었다. 그러자 미르나는 파르르 떨며 “흐하앙….”하고 젖은 신음과 같은 소리를 낸다.
“이, 이제 그만.”
슥.
마침내 강한 힘을 담아 나를 밀어내는 아가씨 미르나. 아까보다 더욱 붉어진 눈가는 눈물까지 머금어서 시선을 촉촉하게 만들고 있었다.
“태오 경, 정말이지. 경건함에 대해서 배울 필요가 있겠어요.”
“…….”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함께 했었으면서 아직도 순진한 처녀처럼 반응한다니. 그렇지만 이것은 레이디 미르나만의 매력이고 장점이었다. 덕분에 가끔 안달 날 때가 있지만….
“으흠, 아무튼 태오 경. 저를 사모하는 마음이 뜨거운 것은 알겠지만. 그런 일들은 둘만의 장소에서 성스럽게 해야 하는 것이에요. 아시겠나요?”
“알겠습니다. 그럼 다음에 둘만 있을 때는 괜찮다는 것이겠죠?”
“…그런 이야기가 아니라는 거, 태오 경이라면 잘 알잖아요? 정말이지 아직 정식으로 혼례도 올리지 않았는데.”
미르나와 나의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미르나가 도중에 입을 다물었기 때문인데 나도 딱히 할 말은 없었기에 서로 입을 다문 채 기숙사로 돌아가는 길에 올랐다.
* * *
슬슬 미르나의 기숙사가 보이기 시작하는 때, 먼저 입을 열은 것은 미르나 쪽이었다.
“혹시, 리오네스 영애로부터는 별 다른 일 없나요? 분명, 저와 당신의 아름답고 모두에게 축복받는 결혼을 방해하기 위해 수작을 부릴지도 모르는데…?”
“수작요?”
“막, 유혹을 한다던가 하는 일이죠. 사람을 홀리는 마구니나 몽마처럼, 태오 경을 꼬드겨서 자신의 수족대로 부리려고 할지 몰라요.”
맞다. 미르나와 엘가는 둘 만의 내기를 벌이고 있었지.
내색하지 않았지만 미르나는 내가 혹 자신이 보지 않는 곳에서 엘가에게 유혹당하고 은밀한 일을 벌이고 있지는 않은가 걱정되는 듯했다.
역시 감이 좋아.
다만 여기서 사실대로 말했다간 미르나가 입에서 불을 뿜어내며 노발대발, 아니 나의 목을 베어 언데드로 만들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짐짓 모르는 척 했다.
“글쎄요, 아직까지는 딱히….”
“후, 그렇군요.”
그러자 안심한 것처럼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미르나다. 물론 아주 안심한 건 아닌지 날 의심의 눈초리로 슥 바라보긴 했지만 뭐 어쩌겠나.
이대로 분위기가 어색하게 하루가 끝나는 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대화의 말머리를 붙잡아 반대방향으로 돌리기로 했다.
“그래서, 결혼식은 언제 쯤 올리시려고 생각중입니까?”
“글쎄요. 하지만, 문제가 많기는 해요. 나르미의 허락도 받아야 하고….”
“아. 나르미 아가씨.”
“나르미가 허락해주지 않을 수도 있어요. 제가, 멋대로 귀를 뚫은 걸로 화를 내서 서로 그렇게 싸웠는데. 멋대로 이런 일을 벌인다고 나르미가 알면….”
그랬지.
미르나가 귀를 뚫은 나르미를 향해 화를 냈고 그 결과 서로 피를 볼 정도로 치열하게 다퉜었지. 하지만 사실 미르나는 그보다 더한 일을 먼저 했었다.
그걸 나르미에게 밝혔을 때, 나르미가 얼마나 화를 낼지 미르나는 바들바들 몸이 떨릴 정도로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최악의 경우에, 나르미가 태오 경과 제 결혼 자체를 반대할 수도 있어요. 물론, 어떻게든 설득을 해봐야하겠지만….”
나르미가 반대할 것 같진 않은데. 자매들 간 비밀이 있으니 이렇게 서로 뜻이 어긋나는 경우도 있구나. 가족끼리 솔직한 대화가 중요하다는 걸 드레이코 자매를 보며 깨닫는다.
결혼.
결혼이라.
그러다가 문득 궁금한 게 생겨났다.
“저는 이제 5위계의 마법사인데. 미르나 님과 결혼하는 것에 문제가 없을까요? 고위계의 마법사는 배우자를 고르는 것에 까다롭잖아요.”
“저도 마도의 길에 몸을 담고 있는 몸이라, 그런 건 괜찮아요. 그리고 애초에 남성 마법사들에 대해서는 제약이 많이 없는 편이구요.”
그런가. 남성 마법사들은 위계가 높아도 결혼에 딱히 제약이 없다 이거구나.
확실히 나와 같은 5위계의 탕아 카심은 여러 여성들을 만나고 아내로 삼았다고 했다. 그놈은 지금도 이 아크 어딘가에서 이국의 여성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아니, 이건 별로 알고 싶지 않았는데.
아무튼.
어느덧 잡담을 나누다 보니 우리들은 미르나의 방 앞에 도착했다.
그녀가 방 안으로 무사히 들어가는 걸 확인하고 있을 때, 미르나가 방문을 살짝 열더니 그 문틈 사이로 한 마디 했다.
“오늘 고마웠어요. 마루마루 인형도.”
“나중에 기회가 되면 진짜 축제 기간 때 함께 놀러 가보죠.”
“그건, 기회를 봐서요.”
역시 깍쟁이답게 한 번에 오케이 하는 것이 없구만. 하지만 미르나는 충분히 그럴 자격이 됐다. 드레이코 가문의 젊은 가주면 이런 식으로 튕겨도 인정이지.
그리하여 마침내 기이익-하고 문이 완전히 닫히는가 싶었는데.
“결혼을 하게 된다면, 언젠가 이렇게 헤어지는 일 없이 같은 집으로 들어가서, 함께 쉬고 그러게 되겠죠?”
문틈 사이로 들려오는 미르나의 질문은 나름 당연하면서도 풋풋한 연애적인 감성을 담고 있었다.
과연, 생각해본 적 없었는데. 결혼을 하게 되면 함께 살게 될 테니까 이렇게 문 앞에서 헤어지는 일도 웬만해서는 일어나지 않겠지.
“잘 가요…!”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쿵-하고 문이 닫힌다. 덕분에 나는 이제 나의 골드 티어 기숙사로 혼자 돌아가게 됐는데. 그 길이 유난히 길었다.
여자친구들을 데려다 준 남자들은 다 이런 기분을 느끼려나. 아니, 보통 돌아가는 길에는 또 핸드폰을 통해 전화하고 메시지를 주고받고 하겠지.
다만 이 세상엔 휴대폰처럼 편리한 게 없었다.
그래서 돌아가는 길에 미르나와 대화를 나눌 수 없이, 그저 혼자 밤하늘에 떠오른 별을 보면서 감상에 잠길 뿐.
지금 미르나는 뭘 하고 있을까? 방에 들어왔으니 애플민트 향이 나는 세안 도구들로 깨끗이 샤워부터 하려나?
모르겠다. 다만, 방금 헤어진 미르나가 뭘 할지 궁금한 마음이 드는 게 어딘가 우스워서 나는 그냥 혼자 웃었다. 함께 살게 되면 이런 생각도 없어지겠지.
결혼이란 뭘까?
솔직히 한 구석에 몰아둔 과제거리처럼 외면하고 있어서 진지하게 고민해본 적은 없었는데. 이렇게 보니 생각할 거리들이 무척 많았다.
덜컥, 기이익.
마침내 내 방에 도착한 나는 문을 열고 서늘하게 시원한 내 방 안에 들어섰다.
━컹컹-!
“너 먹을 건 안 사왔어.”
━크르릉…!
열심히 챗바퀴를 돌리고 있던 개다람쥐 컹컹이가 나를 반겨주지만. 그럼에도 한기가 감도는 방 안은 어딘가 쓸쓸한 것이다.
“아, 빙결초를 꺼내두고 왔었구나.”
차가운 얼음꽃을 내놨다보니 하루 종일 방이 차가워졌던 모양이다. 그것을 냉장고 안쪽으로 잘 집어넣으며 문득, 누군가 내 방에서 관리를 해줬더라면 어땠을까 궁금해졌다.
누군가 내 방에 함께 살았다면.
언젠가 나도 일을 끝내고 돌아온 나를 누군가 반겨주는 삶을 살게 될까.
진짜 가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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