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02)
EP.203)여름 # 1
203 – 차가운 여름 # 1
아이라가 눈을 뜬 것은 그로부터 얼마의 시간이 지난 뒤였다.
많은 사람들이 호들갑을 떨고, 사제와 치료사를 불러 원인을 파악하기까지 충분한 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있어서는 그 시간들이 유난히 길어서 마치 하루가 엿가락처럼 끝도 없이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
자신의 침대에서 슬쩍 눈을 뜬 아이라는 속눈썹이 긴 눈꺼풀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봤다.
크게 놀라하거나 당황하는 모습도 보이지 않고.
마치 오랜 고향에 돌아온 사람이 그 자리에 그대로 있는 아름드리나무를 바라보며 추억에 잠기는 듯 잔잔한 감상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한참 움직이던 까만 눈동자가 이윽고 나의 시선에 고정되었을 때, 부드러워 보이는 입술을 열고 물어온다.
“내가 얼마나 누워 있었던 거니?”
“한 삼 십 분 정도 되셨습니다.”
“그래. 그렇구나.”
그것으로 우리들의 대화는 잠깐 끝이 났다. 궁금한 게 더 있을 법도 한데 아이라의 입술은 쉬이 열리질 않는다.
반대로 나는 아이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들이 많아서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이라 님, 사제들과 치료사들의 말로는 수면부족이라고 그랬습니다. 덕분에 피로가 누적되어서 잠깐 정신을 잃은 것이라고 했어요.”
“요새, 통 잠을 못 자긴 했지.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강의를 듣거나 해야만 했으니까.”
수면부족 때문에 쓰러졌다는 걸 순순히 인정하는 건가?
사람들 앞에서 마법을 시연하다가 갑자기 쓰러져 정신을 잃은 아이라에게 우리 모두 크게 당황했었다. 어딘가에서 날아온 독침에 목이라도 맞은 건 아닌가 싶었으니까.
그나마 다행인 것은 커다란 병이나 암살의 위협이 아닌 과로, 피로누적 증상에 불과했다는 것.
정신을 잃은 것도 급작스러운 졸음에 가까운 것이라고.
아니, 근데 졸음이라고?
아이라는 하루의 대부분을 잠으로 보내고 있었다. 그런 아이라가 수면 부족이라니. 나로서는 그것 또한 이해할 수가 없어서 조금 머릿속이 복잡해지는 기분이다.
“사람들이 깜짝 놀랐겠구나.”
“어떻게든 얼버무렸으니까 그건 괜찮을 겁니다. 그리고 사람들보다 아이라 님의 건강이 더 중요하잖아요. 수면부족이라니,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말 그대로지. 잠이 부족했던 거야.”
“하지만 아이라 님은, 이미 충분히 잠을 주무시고 계시잖아요.”
걱정 반 의문 반 나의 질문에 아이라는 마치 당연한 소리를 들은 선생님처럼 후후 가볍게 웃었다.
“태오야, 사람마다 먹을 수 있는 양이 다른 것처럼. 잠을 잘 수 있는 양이 다른 것도 당연한 일이야.”
그건 나도 알지. 하지만 그거는 하루 7시간 자냐, 6시간 자냐 등의 오차 범위가 비교적 좁은 편일 때의 이야기다. 아이라는 아무리 못해도 평균 8시간 이상 자잖아.
그런 아이라가 최근 아침에 좀 일찍 일어나서 강의를 듣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눴기로서니 이렇게 픽 쓰러지는 건 좀 문제가 있는 듯했다.
“…그보다, 무척 재미난 꿈을 꿨어. 뜨거운 여름의 뙤약볕 아래로 바다를 구경하는 꿈. 하얀 모래들이 마치 분필가루처럼 깔려있는데. 그 위로 조개나 게들이 놓여 있었지.”
아무렇지 않게 자신이 꾼 꿈을 이야기하는 아이라. 나는 아이라가 대화의 주제를 바꾸려고 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평소라면 못이기는 척 넘어갔을 거다.
하지만 그녀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갑자기 쓰러진 걸 본 이상 나는 이걸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아이라 님, 정밀한 검사를 받아봐야 하는 거 아닙니까? 요즘 계속 길게 잠을 주무시는 것이 무언가 문제라도 있는 게 아닌가 걱정됩니다.”
“나는 여왕이야. 나는 앙그마르의 돌멩이 하나하나까지 알지. 그런 내가 나의 몸을 모를 리가 있겠니?”
그렇게 말하는 아이라는 슬그머니 나의 시선을 피했다.
문득.
나는 아이라가 내게 무언가 숨기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을 품게 됐다. 그녀의 말대로 그녀 스스로가 스스로의 몸 상태에 대해 가장 잘 알겠지.
어째서 그렇게 긴 수면에 잠기게 되는 것인지 말이야.
다만.
그 이유를 내게 말해주진 않을 것 같다. 아이라는 여러모로 나에게는 비밀로 하는 것들이 있었으니까.
이것도 같은 거겠지.
스르륵.
아이라는 부드러운 이불을 밀치고 일어나 카펫에 발을 디뎠다. 몸에 걸쳐져 있는 하얀 가운의 옷태를 슥슥 정리한 그녀는 곧 커튼을 치고 창문 바깥을 바라봤다.
세상은 아직 밝았다.
이제 막 오후 세 시쯤 됐으니까.
그 여름의 태양이 눈부신 것인지 아이라는 미간을 좁혔다.
“오늘 3시부터 광장에서 사람들과 간담회를 나누기로 되어 있지 않았니? 조금 늦겠구나. 태오야, 나갈 준비를 하렴. 내 옷을 내오도록 해.”
“그건 취소됐습니다. 오늘 일정은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휴식을 취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취소?”
창가에서 볕을 쬐고 있던 아이라가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만을 돌려서 나를 바라보는데. 갸웃거리는 고개에 까만 흑단 머리칼이 어깨와 가슴으로 차르르 흘러내린다.
“감히 누가 이 몸의 허락도 없이 나의 일정을 취소했다는 말이니? 이대로 있을 수는 없어. 지금 이러고 있는 순간에도 세라자데 그 간사한 계집애는 이곳저곳 돌고 있겠지.”
“아이라 님. 오늘은 쉬셔야 해요. 일정들도 전부 제가 취소했습니다.”
“…….”
아이라의 표정이 매우 서늘하게 변했다.
그리고는 나를 천천히 살펴보는데, 어찌나 얼음장과도 같은 시선인지 내 가슴이 고드름에 찔리는 것처럼 따끔따끔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잠시.
흐릿했던 하늘이 맑게 개는 것처럼 아이라의 표정도 조금은 느슨하게 풀렸다.
“태오야,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자주 비추는 게 좋다고 이야기를 한 것은 네가 아니니? 그런 네가 어째서 그런 말을 하는 거니?”
“…그때는 그랬지만, 지금은 또 다릅니다. 아이라 님의 건강에 문제가 생길 수가 있다면, 그런 건 하지 않는 게….”
“그리고. 나의 일정을 멋대로 취소하다니. 그건 어리석은 짓이었어. 결정하는 건 여왕인 나의 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크게 죄를 물었을 거야.”
“…….”
“그럼, 어서 가서 취소했던 일정들을 무르도록 하렴. 아직 늦지 않았으니까.”
“안 됩니다. 오늘은 쉬셔야 해요. 그리고, 앞으로도 계속 쉬셔야 할지 모릅니다.”
“태오 가스펠.”
아이라가 나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것으로 주변 모든 것이 차가운 공기에 휩싸이는 듯하다.
“이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야. 네 여왕의 명령을 지금 듣지 않겠다는 거니? 내가 그런 자들을 어떻게 해왔는지. 네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텐데?”
스륵, 스륵.
아이라의 머리칼이 마치 거미의 다리처럼 사방으로 뾰족하게 곤두서는 것이 보였다.
덩달아 나의 피부는 사이다에 절여지는 것처럼 따끔따끔.
노골적인 투기다.
7위계의 마법사 쯤 되면 주변 단순한 분노만으로도 마나가 이렇게 들끓는 걸까.
슥.
그때 아이라가 가운 아래로 드러난 하얀 다리를 내게로 내밀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태오 가스펠, 네 충성을 보여. 그리고 멋대로 일정을 취소했던 것. 내 말을 듣지 않은 것에 사죄하도록 해.”
아이라의 앞에 네 발로 엎드려서 저 하얀 발에 입을 맞추라는 소리겠지. 개처럼. 순종적인 짐승처럼.
앙그마르의 궁정에 있었을 때에도 늘 했었던 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아이라 님, 발에 입을 맞추라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라 님의 건강을 위협할지도 모르는 일에 대해서는-.”
“쯧.”
작게 혀를 차는 소리가 이 넓은 방에 유난히 크게 울린다. 스르륵. 하얀 가운 안으로 다시 들어가는 다리.
“기어이 선을 넘는구나.”
“…….”
“출신도 모르는 반요정이 감히 앙그마르의 여왕인 내 머리 위에 서서 멋대로 좌지우지 하려고 한다니. 너도 결국 그 정도였어.”
“…….”
“나가라.”
“아이라 님-.”
“나가라. 세 번은 말하지 않겠어. 그리고 다시는─.”
아이라가 무언가 말을 하려는 것 같다가 이내 입술을 달싹였다.
“다시는….”
그건 작은 망설임이었다.
이내 아이라는 그 뒷말을 집어 삼킨 듯 했다만 그 뒤에 있을 이야기는 나의 예민한 요정귀가 없어도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나는 이 넓은 방 안에 아이라를 홀로 남겨둔 채 그저 넓은 복도로 나올 수밖에 없었다.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와중에 가장 크게 도드라지는 것은 허무함이었다.
내가 지금까지 고생해왔던 지난날의 일들이 마치 모래로 만들어진 성처럼 단 한 번의 파도에 휩쓸려서 날아가 버린 기분이라고 해야 하나.
그간의 시간들도 정성들도 모두 무의미해졌다고 생각하니 그저 지나치게 공허했다.
“저기 나오는 군요. 태오 경, 어떻게 됐나요?”
복도에서는 미르나와 엘가가 팔짱을 낀 채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깥으로 나오자 곧 표정을 밝히더니 나를 향해 은근하게 이것저것 묻는다.
“어떻게 됐냐? 아이라는 일어났어? 뭐 어디 아픈 곳은 없데?”
“그렇다고는 하는데요.”
“뭐야, 그럼 다행인 일이잖아. 근데 뭐 이렇게 표정이 어두워?”
방음이 잘 되어있기 때문인지 방 안에서 있었던 일을 복도에서는 알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이걸 어떻게 설명해주면 좋을지 몰라서 망설이게 됐는데. 어차피 그녀들도 머지않아 진실을 알게 될 테니까 그냥 사실대로 말하면 되겠지 뭐.
“저, 잘렸습니다.”
* * *
잘렸다.
모두에게 말하고 나니 현실감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방금까지는 아이라와 나만의 이야기였는데. 그것이 퍼져나가기 시작해서 일어났던 ‘사건’의 취급을 받기 시작했기 때문인가?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의 한적한 교내카페.
엘가와 미르나는 내 이야기를 믿지 않았다.
아이라가 나를 내쫓았다니. 그녀들에게 있어서도 그것은 믿기지 않을 만큼 놀랍고 불가능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야, 뭐 네가 착각하거나 그런 것이겠지. 설마 아이라가 정말 널 내쫓거나 그런 거겠어? 그냥 잠깐 나가서 머리 좀 식혀라-. 그런 거 아냐?”
엘가의 물음에 나는 아이라와의 마지막을 떠올려 봤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도무지 그런 뉘앙스는 아니었어.
그에 옆에 있던 미르나가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는 작은 한숨과 함께 말했다.
“타란테라 여왕이 원래 그런 자라는 건 이미 유명한 이야기 아니었나요? 달면 삼키고 쓰면 뱉고. 제멋대로 하는 망나니에 충신들을 내쫓는 폭군.”
“야, 미르나. 태오가 쫓겨났다는데. 너는 왜 좀 기뻐 보이냐?”
“제가 기뻐 한다구요? 착각이겠지요. 태오 경이 제멋대로인 여왕으로부터 쫓겨나서. 이제 갈 곳 없는 신세가 되었는데. 제가 기뻐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요?”
부채로 얼굴을 가린 채 우후후-하고 웃는 미르나 영애. 그 모습이 꼭 어느 이야기에 나오는 악역영애 같아서 신기했다. 생각보다 잘 어울리네.
지릿.
그런 미르나를 한껏 흘겨 본 엘가가 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야, 아무튼. 뭐, 아이라 변덕이 심한 거 하루 이틀 보는 거 아니잖아. 걔도 지금 정신없어서 자기가 뭔 말을 한 건지도 모를 거야.”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그래.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아이라 걔. 너무 오냐오냐 자라서 혼자 스타킹도 잘 못 신잖아.”
“…….”
“혼자서는 학생 식당에서 밥도 못 먹는 애가 너 없이 뭘 할 수 있겠어? 아마 조금 있다가 금방 또 너 찾을 걸. 일주일, 아니, 삼일이면 충분해.”
엘가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 아이라는 변덕스러운 사람이기 때문에 금방 나를 부를지도 모른다. 다만 미르나가 옆에서 한 마디 했다.
“그렇게 부르면, 또 부른다고 쫄래쫄래 따라갈 건가요? 태오 경, 당신에게도 자존심과 긍지가 있을 거 아닌가요?”
“야, 미르나. 너 듣자하니까 지금 태오랑 아이라 사이를 이간질하겠다는 거야?”
“저는 어디까지나 사실을 말했을 뿐이랍니다. 또, 언젠가 일어날 일이었어요. 변덕에 따라 사람을 내치고. 변덕에 불러들이고. 그런 여왕의 밑에서 몇 년이나 버틴 게 용한 일이죠.”
“…맞는 말이긴 한데. 이상하게 네가 말하니까 짜증나네. 아, 나도 모르겠다.”
엘가는 마침내 포기한 것처럼 뒤통수에 두 손을 대고 등받이에 늘어지도록 기댔다. 숙적 리오네스 영애가 입을 다물자 미르나는 더욱 신이 난 것처럼 말을 덧붙인다.
“그래서 태오 경.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죠?”
“…….”
생각해본 적 없었다.
나의 머릿속은 그야말로 백지처럼 하예서, 지난날까지 세워두었던 계획과 진로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진 기분이었으니까. 실제로도 그랬고.
“만약 갈 곳이 없다면, 저희 별장으로 오시는 건 어떤가요?”
“야, 태오가 아무리 갈 곳이 없어도 너희 별장을 왜 가?”
“여기에는 무척 합리적인 이유가 셋이나 있답니다.”
척.
미르나는 세 개의 손가락을 펴 보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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