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25)
EP.226)# 6
226 – 발각 # 6
내가 살고 있었던 세상의 머리색은 대체로 단조로웠다.
검은 색, 금색, 갈색, 등등-. 누군가 웃기는 분홍색 머리를 하고 다니면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는 것도 당연한 일.
하지만 이 세상은 온갖 다양한 머리색이 가득했기 때문에 분홍 머리라고 해도 굳이 사람들이 신기하게 생각하진 않았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눈동자나 머리칼의 색감은 내면에 내재되어 있는 마나나, 생명력, 오러 등과 같은 요소에 좌지우지되는 것이라 했으니까.
그 중에서도 위대한 앙그마르 가문의 사람들은 선혈과 같이 붉은 머리를 자랑스러워했다고 들었다.
그들의 머리칼은 뭇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장신구와 보석, 옷감의 색조가 돋보이는 사교회장에서도 단연 돋보일 만큼 아름다웠다고.
덕분에 앙그마르의 공주들은 화사한 장미처럼 어딜 가든 인기가 많았다나.
“붉은 머리라-. 정말 단풍 같구나.”
“……!”
나 태오 가스펠, 아니 태오 앙그마르도 그러한 붉은 머리를 타고 났었다.
하지만 모종의 이유로 뒤틀려 있었던 마력회로 덕분에 밤색 머리칼을 유지하고 있었으나. 언젠가 그것이 모두 붉게 물들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
그래서 특별한 염색을 통해 어떻게든 숨기고 있었는데. 지금 거울을 보니 내 정수리 쪽부터 자라난 머리칼들의 뿌리가 완전 붉어서 정말 단풍 같았다.
…조졌군!
「침착한 상황 판단!
재능 《침착한 사고》에 의해 경험치를 획득합니다.
모든 직업 경험치 + 5」
침착하게 조졌구만!
하필이면 가장 들켜선 안 될 사람에게 이런 꼴을 보여주다니.
뾱-.
그때 아이라가 내 머리칼을 하나 뽑았다. 그리고는 그것을 이리저리 살펴보다가 마침내 혓바닥으로 슥 핥아보기까지 한다.
비위생적인 행동이었으나, 아이라가 하니까 무척 요염하게 보여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그, 그걸 왜 핥으시죠?”
“으응, 마나의 영향이려나. 일정 위계를 넘어가며 체질이 변하는 것이야 흔히 있는 일이니 말이지. 태오, 네 마나는 붉은 모양이야.”
“…그렇습니까?”
“그래, 이렇게나 붉은 마나는 꽤 진귀한데 말이지. 어쩌면 태오야, 네 먼 조상 중에는 위대한 왕 다비드가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위대한 왕 다비드인가.
다비드 앙그마르. 그는 앙그마르 왕국의 시조다.
그에게는 어마어마한 수의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다고 했나. 그래서 앙그마르 왕국의 사람들은 ‘우리가 다비드의 자손이다.’라고 말 한다고.
아이라의 추리는 나름 정확했다.
이 몸은 다비드의 직계, 만마의 왕 솔로몬의 손자니까.
그래도, 지금의 아이라로서는 내가 차마 솔로몬의 손자라는 것까지는 사고를 이끌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하긴, 어떻게 알겠어.
자기가 부리고 있었던 애완동물 같은 반요정이 악독한 마왕의 핏줄이라는 걸.
나도 내가 키우는 개다람쥐 컹컹이가 사실 위대한 우주괴수의 파편이라고 한다면 도무지 믿을 수 없을 게 분명하다.
나로서는 다행이었다만…, 그래도 이 사실을 발각당한 것은 치명적인 일. 나는 재빠르게 침착한 사고와 연기자의 재능을 가동시켰다.
“보기 싫으시다면 원래의 밤색으로 염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니, 오히려 보기 좋구나. 염색은 하지 말고, 앞으로는 그냥 그대로 두렴. 이쯤 되면 가을 즈음에는 화사한 단풍처럼 전부 붉게 물이 들려나.”
후후후-하고 아이라는 기쁜 듯이 웃었다만.
나로서는 웃을 수도 없는 상황이다.
* * *
“즐거운 축제날에 이렇게 또 저를 찾아오실 줄이야. 어디가 아프셔서 오신 건 아닌 것 같은데. 무슨 일이실까요, 태오 님?”
아크 본당의 보건실.
그곳에는 하얀 가운데 붉은 머리를 치렁하게 기른 보건의 칼리라 영애가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크에 심어둔 세작이자 실력 좋은 의사 및 약사로서 나름대로 내가 신뢰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칼리라 아가씨, 여기, 이걸 좀 보세요. 큰일 났습니다.”
나는 칼리라에게 내 정수리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칼리라는 잠깐 당황한 것처럼 입술을 손으로 살짝 가리더니 우후후, 웃는다.
“어머나, 귀여운 단풍 같네요. 모양이 꼭 아기 손바닥 같기도 하고. 후후후-.”
“지금 웃을 때가 아닙니다. 어째서 염색이 이렇게 빨리 빠져버리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저는 묻고 싶은 겁니다.”
“흐응, 그렇군요. 확실히 제가 해드렸던 염료는 귀한 비약과 섞인 마법 염료라 1년은 거뜬히 버티고도 남았을 텐데….”
“분명 문제가 있긴 하다는 거죠?”
“그래요. 잠깐 피를 한 방울 뽑아서 봐도 될까요? 검사를 좀 해 봐야 알 수 있겠네요. 시간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테니까 잠시-.”
칼리라가 내게로 주사기를 내밀었다. 그 바늘이 매우 길어서 순간 덜컥 겁이 나고 만다.
“한 방울만 뽑는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그래도 양이 많으면 더욱 자세한 샘플을 얻을 수가 있거든요. 자, 왼쪽 팔 걷어주시고. 조금 따끔할지도 몰라요.”
따끔-.
“히에…음?”
생각보다 안 아프군. 비명 지를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모기 물린 수준으로 따끔해서 나는 머쓱해졌다.
“주사 놓는 솜씨가 좋으시네요.”
주아압-피를 뽑는 칼리라를 내가 적당히 칭찬하자 그녀는 불길할 정도로 붉은 빨간 눈동자를 초승달처럼 휘어 뜨렸다.
“그래야, 대상이 눈치 채지 못하게 주사바늘을 꽂아 넣을 수 있으니까요. 저희 같은 뒷골목의 처방자들에게는 기본 소양이랍니다.”
그렇군. 더 물어보진 말아야지.
“그럼, 잠깐 앉아서 기다려주세요.”
나는 의자에 앉아 칼리라 영애가 무언가를 뚝딱뚝딱 건드리는 걸 지켜봤다. 의학적 지식이 전무 한 나로서는 봐도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른다.
비커와 플라스크에 내 피가 이리저리 옮겨다니는 것만 알 수 있을 뿐.
“결과가 좀 있으면 나올 거에요. 한 십 분 정도 기다려 보죠.”
대강 일이 일단락 된 것인지 칼리라 영애는 기묘하게 생긴 형광색 차를 내게 한 잔 따라주었다. 후르릅 들이켜니 차보다는 음료수에 가까운 듯하다. 탄산 넣은 레모네이드네.
맛있군.
내가 만족스럽게 잔을 비우자 칼리라가 눈치 좋게 한 잔 더 따라주었다.
“님프나 임프들이 좋아하거든요. 마르마르 양이 특히 좋아하죠. 태오 님도 똑같은 모양이네요.”
“…….”
어쩐지 취향을 들킨 것 같아서 부끄럽구만.
그래서 나는 무안한 마음을 돌릴 겸 물었다.
“님프나 임프들이 자주 찾아옵니까?”
“자주 놀러 와요. 와서 이것저것 도와주기도 하구요. 주변 남성분들로부터 너무 많이 받아서 먹기 힘든 사탕들을 대신 먹어주기도 해요.”
그렇군.
이제 보니 여기저기 소녀들이 좋아할 법한 레이스나 프릴, 인형 재봉도구와 이미 완성된 마루마루, 가루가루 인형 등이 보였다.
임프들과 잘 지내는 모양이구나.
부하직원이 서로 친목을 도모한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
“잘 지내고 계시는 것 같아 좋네요. 그렇지만, 그래도 다들 즐기는 축제 때 이렇게 보건실을 지키고 있으려면 좀 따분하시겠습니다.”
“그건 조만간 교대 할 거라 괜찮아요. 그보다 태오 님,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안색이 좋아 보이시네요. 사람도 많이 변하신 것 같고.”
“제가요?”
“원래 같았으면, 다른 사람이 내주는 차 같은 것은 입에도 대시지 않았을 테니까요.”
“그야….”
그야 칼리라 영애에게는 이제 신뢰가 있었으니까. 다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어딘가 부끄러워서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칼리라가 몇 마디 덧붙였다.
“처음 만났을 때면 몰라도, 지금 태오 님을 보면 그 요승 태오라고는 누구도 믿지 못할 거에요.”
그럼 처음 내 모습은 요승 태오라는 별명과 어울렸다는 말인가.
띵-.
그때 어딘가에서 종이 울렸다.
“이제 결과가 나올 것 같네요. 잠시, 실례.”
칼리라 영애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 내가 변했나.
하긴, 앙그마르 궁정에서 사납게 굴던 나와 지금의 나는 아주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터였다.
그리고 원래 이쪽이 사실 내 원래 성격에 가깝다. 그냥 평범하게, 웃고, 당황하고 열심히 일하다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일반인.
아이라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 아크에 뛰어들었지만.
사실 아이라 못지않게 나도 느슨해지고 있었던 것 같다. 궁정이니, 정치니 하는 어울리지 않는 관을 벗어던지니 마음이 한 결 편해져서 그렇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몇 분 기다렸을 때 칼리라 영애가 차트 같은 것을 손에 들고 나타나 음-하고 작게 침음했다.
“음-, 별 다른 문제없이 매우 건강하시네요. 혈당치가 조금 높긴 하지만 이건 님프 계열의 요정 종족 특징이니까 넘어갈 수 있을 정도구요.”
“그렇군요.”
“문제 하나 없이 너무 건강해요. 그래서 문제가 있는 것 같네요.”
문제없이 건강해서 문제가 생긴다니. 이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만 곧 나는 칼리라가 말하는 바의 의도를 이해할 수 있었다.
“너무 건강해서, 신진대사가 활발해져서 머리가 예정보다 더 빠르게 붉어졌다-. 그런 식으로 이해하면 될까요?”
“역시 이해가 빠르시네요. 본디 태오 님의 육체와 마력 수준에는 크게 어긋나는 부분이 있었어요. 하지만 여기 차트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제 적합률이 99퍼센트에-.”
칼리라가 표식을 보여주면서 내게 무어라 설명해줬는데.
아까도 말했다시피 의학에 대한 지식은 전무했기 때문에 그냥 내 몸이 예전보다 더 건강해졌다는 뉘앙스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육과 영의 뒤틀렸던 파장도 올바른 자리까지 잘 찾고 있어요. 자연적으로 돌아오기는 쉽지가 않을 텐데. 아마 급격한 신진대사 증진이 이것 때문일 수가 있겠요.”
그래도 칼리라의 설명을 듣다보면 드문드문 떠오르는 바가 있었다. 육과 영의 뒤틀린 파장이라.
내가 말했다.
“드레이코 가문의 나르미 아가씨로부터 부적 태운 물을 받아 마시긴 했는데. 혹시 그것 때문인 확률도 있나요?”
“음, 성분을 조사해 봐야 알겠지만 드레이코 가문이라면 영과 혼을 다루는 데에 있어서는 따라올 자가 없으니…, 그럴 확률이 높겠네요.”
그렇군.
저번에 나르미가 주었던 비약을 마셔서 머리가 급격히 붉어진 것이구나. 확실히 그때 이후로 내 몸이 지나치게 가벼워지긴 했었지.
건강해지는 건 좋지만, 그로인해 지독한 패널티를 안게 되다니.
“드레이코 가문 하니까 떠올랐는데요. 그러고 보니 리오네스의 아가씨께서 아까 전에 저를 찾아오셨어요.”
“엘가 아가씨요?”
“제게 이것저것 약을 처방받았는데. 어딘가 조금 긴장하고 불안해 보이셨거든요.”
엘가가 이곳에 왔었다니. 내가 알기로 엘가는 가문에서 온 사절들을 만나야 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었다고 했지 않았나? 잠깐 시간을 내서 온 건가-.
문득 나는 엘가가 지금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 * *
자수와 금박이 사자의 모양으로 수놓인 마차. 척 봐도 고급스럽고 화려한 마차가 교단의 도시 그라시아의 도시를 달렸다.
사자의 깃발이라니.
교양 있는 그라시아의 주민들은 저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 줄 알기 때문에, 축제로 바쁜 가도의 주민들이라도 마차의 길을 비켜주기 바쁘다.
그리고 그런 마차에 타고 있는 것은 사자심왕의 거대한 무구 분쇄자-를 이어 받은 장녀다.
그녀는 흔들림조차 느껴지지 않는 마차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고 있다가 마침내 긴 침묵을 깨고 물었다.
“확실한 거야?”
그러자 앞에 앉아 있는 늙고 노련한 리오네스 가문의 총괄 집사 로완이 모노클을 번뜩였다.
“확실합니다. 말씀해주셨던 것처럼 전부 주변인들을 조사해 알아봤습니다. 여기에 조사해둔 것이 다 적혀 있으니 한 번 확인해주시면 될 것 같습니다.”
스윽-.
늙은 집사 로완이 자신의 젊은 여주인을 향해 서류 뭉치를 내밀었다. 그것을 받아 든 엘가는 그 내용물을 슬쩍 엿본 후에 묻는다.
“이 일에 관계되어 있던 관계자들은?”
“아가씨, 걱정하실 것 없이 리오네스의 방식대로, 전부 조용한 곳으로 보냈습니다. 그보다, 놀랍더군요. 예언자 태오 가스펠이 두 명이나─.”
“쉿-. 로완, 말조심해.”
아가씨의 말에 늙은 집사는 입을 다물었다.
다각, 다각-.
이제 그들은 시끄러운 발굽과 바퀴소리에 잠잠히 묻힐 뿐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