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287)
EP.288)우울 # 1
288 – 요정의 우울 # 1
백색 마탑과 거대한 강의 도시 빅 리버를 빠져나온 지 며칠.
길과 마차를 내달리기만 했었던 우리들은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드디어 도착인가.”
도적 떼라도 만나면 어쩌나 싶었던 걱정과 다르게, 산도라를 향하는 길은 상당히 안정적이고 지루했다.
빅 리버에서 도적들이 소탕되었다는 소문이 퍼졌기 때문인지 우리가 달리는 가도에 이렇다 할 강도나 도적떼가 나타나질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기가 산도라…, 거미와 마녀들의 도시….”
미르나가 마차에서 내려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녀의 빨간 눈동자에 펄럭이는 깃발과 첨탑들의 모습이 제법 웅장하다.
산도라는 높고 뾰족한 성탑과 성채가 여기저기 솟은 도시였다.
첨탑의 꼭대기에는 피뢰침처럼 깃발이 꽂혀 있어서 이리저리 바람이 펄럭이고 있었다. 북부 지방에는 이렇게 높은 첨탑들이 가득 있다나.
물론 별 이유는 없고, 북쪽 사람들은 그냥 높은 걸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그런다.
“마녀들이 많네요.”
미르나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보며 감탄했다.
그녀의 말처럼 도시에는 고깔모자를 쓴 마녀들이 잔뜩 있었다. 굳이 마녀뿐만이 아니더라도 칼과 창 그리고 방패나 갑옷 따위로 몸을 무장한 모험가들이 바글바글하다.
그 이유를 보자면 아마 저것 때문이 아닐까.
슥.
나는 고개를 높이 들어올렸다. 그런 나의 눈에 도무지 크기가 가늠되질 않는 거대한 장벽이 저 멀리 굳건히 서있는 것이 보였다.
저것이 대장벽 클라리스인가.
원근감을 무시하는 크기라니.
일찍이 아이라의 심상세계에서 봤던 적이 있었건만.
실제로 보니 그 위용이라고 부를 만한 것은 꿈에 비할 바가 없이 웅대했다. 가까이 가서 본다면 얼마나 압도적일까.
“거미도 많아요.”
와르르르.
미르나가 몸을 떨었다. 그녀의 말대로 산도라에는 거미들이 꽤 있었다. 가게의 처마나 지붕에 매달려 있는 거미들의 크기는 대부분 손바닥만 해서 무시무시했다.
물론 생김새만 저렇게 무서울 뿐이지 이 북부에 사는 거미들은 자신에게 해코지를 하지만 않는다면 대체로 온순하고 사람을 잘 따르는 성격이라고 그랬다.
그것을 증명하듯, 많은 모험가와 마녀들의 어깨에 거미가 한 마리씩 얹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동료 거미들의 뛰어난 직감이 마물과 함정을 대비해주기 때문이라나.
슥.
그때 스텔라가 내 손바닥 정도 크기의 거미를 한 마리 붙잡아 자신의 손에 얹었다. 그 색깔은 아주 새빨간 루비. 몸통도 거미라기보다는 유리세공처럼 반짝반짝 예쁜 녀석이었다.
다리에는 작은 금빛 반지도 끼워져 있다.
「할짝이 – 4번가 잡화상 토드.」
이름과 주인 주소인가?
스텔라가 말했다.
“얘는 사탕 거미네. 꿀과 당분을 모아서 천연 사탕을 뭉치는 거미야. 그렇게 만들어진 사탕은 고가에 팔린다고 해.”
사탕 거미라.
몹시도 요정 친화적인 거미로군.
나는 스텔라의 손에서 거미를 받아봤다. 녀석은 사람을 잘 따르는 건지 내 손바닥 위에 올라가 있어도 얌전히 있을 뿐이었다.
━히오옹…!
괴상한 소리를 내는군.
그때 나는 미르나가 내 손바닥의 거미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걸 눈치 챘다. 그래서 거미를 미르나에게 내밀어 보이며 물었다.
“미르나 아가씨도 손에 올려보실래요?”
“히익…! 싫어요…! 다리 많은 건, 딱 질색이니까!”
머리칼을 곤두세우는 미르나.
미르나는 거미가 싫은 듯했다.
━히오옹….
그 기겁하는 반응에 내 손바닥에 올라가 있던 사탕 거미는 어딘가 축 늘어져서 바닥으로 풀쩍 뛰어내리고는 근처 가게의 개구멍으로 사라졌다.
괜히 미안하네.
* * *
우리는 일단 산도라의 중앙 본청을 향했다.
본청 입구에는 검은 원피스의 하녀가 마치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말했다.
“왕도에서 온 일행들이죠? 백작님께서 며칠 전부터 손님들이 오시길 기다리고 계셨어요.”
우리는 하녀의 뒤를 따라 본청 안으로 들어섰다.
본청. 그러니까 산도라 영주의 성은 매우 오래되고 낡은 고성이었다.
붉은 카펫이나 샹들리에가 아닌 차가운 돌과 석벽 그리고 온도조절이 잘 되지 않는 난로가 활활 타오르고 있는 고성 말이다. 그래서 그런가 여름임에도 매우 날씨가 서늘했다.
“운치 있네요. 왕도의 허례허식 강한 왕성보다는 이쪽이 제 취향이에요.”
미르나는 이 검소하고 소박해 보이는 고성이 꽤 마음에 들은 듯이 보였다. 그녀의 말처럼 운치가 있다고 한다면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다.
다만 북부에 서식하는 온갖 마물의 박제를 보고 있노라면, 밤에 봤을 때는 운치보다 공포스럽지 않을까-하는 괜한 걱정이 들기도 했다.
“레드니 백작님께서는 저기, 응접실 안에 계실 겁니다.”
똑똑.
하녀가 노크를 하자 안쪽에서 부스럭거리는 기척이 들렸다.
━들어 와.
제법 힘이 담긴 목소리에 괜히 긴장이 됐다. 그것은 미르나와 스텔라도 마찬가지였는지 방금까지 이곳저곳을 들여다보고 있던 것을 멈추고 옷차림을 정돈했다.
덜컥, 기이익.
마침내 방문이 열리고 우리는 고성의 응접실 안으로 들어섰다. 그 안에는 타오르고 있는 화로와 돌로 만들어진 듯한 테이블 그리고 책상과 소파 몇몇이 보였다.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우리를 반기는 여성이 있었다.
버섯의 갓처럼 매우 커다란 고깔모자를 쓴 여성으로 뒤로 땋은 까만 머리칼에 2미터는 되어 보일 법한 매우 큰 키, 덕분에 늘씬한 팔다리 그리고 진한 이목구비가 인상적인 여성이었다.
나이는 가늠이 안 된다.
대략 30살에서 40살, 그 사이로 보이는데. 까만 드레스를 입고 있는 그 모습이 어딘가 저승사자나 상복을 떠올리게 만들어서 으스스했다.
키가 크기 때문인지 꼭 죽음의 여신 같다고 해야 할까.
이 여성이 산도라의 영주인 여백작 레드니 아라크네인가.
레드니 아라크네.
항렬을 따지면 아이라 폰 타란테라의 먼 친척쯤 된다고 그랬다.
까만 머리칼과 까만 눈동자, 그리고 미인이라는 속성은 닮았다만.
그것 외에는 아이라와 아무것도 닮지 않았다. 역시 피가 옅은 먼 친척이구나.
“앉으시죠.”
목소리는 중성적이다. 그때 스텔라 벨호크가 나를 향해 작게 속삭였다.
“레드니 백작은 솔로몬과의 전쟁에도 참여했었던 참전용사야. 저렇게 보여도 나보다 나이가 많을 수가 있어.”
“그게 진짜입니까?”
“그렇답니다.”
내 질문에 답한 것은 레드니 백작이었다. 덕분에 나와 스텔라는 숙덕거리는 이야기가 들통 난 것에서 살짝 부끄러움을 느껴야 했다.
다만 시크하기로 소문 난 레드니 백작은 그런 것이야 신경 쓰지 않고 이야기를 진행했다.
“이곳까지 오며 겪었던 사연들이 많겠죠. 여유가 되신다면 좀 듣고 싶네요.”
“음.”
우리들이 어째서 이 산도라까지 왔는지.
또 오는 도중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들이 가볍게 오가고, 이야기를 전부 들은 여백작 레드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생이 많았네요. 하지만 차원문을 막아둔 이유는, 그래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유요?”
내 물음에 레드니가 차분히 설명했다.
“장벽 너머로부터 전이를 시전하려는 시도가 있었어요.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장벽 너머에서 도시로 오려는 것이니 정상은 아니겠죠.”
그 말에 나도 스텔라도 미르나도 답을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장벽 너머에 도사리는 존재들이 도시에 풀려난다면 어떤 참상이 벌어졌을지 상상해보는 것이리라.
“그것뿐만이 아니라도 산도라는 신경 쓸 일이 많아요. 여기저기 마물들이 들끓고 있고. 병사들의 수는 부족하고. 모험가들로 어떻게든 치안을 유지하고 있지만 중과부적이죠.”
여기저기 다들 인력이 부족하다고 아우성이구만. 아마 왕도에서 온 우리에게 앓는 소리 좀 해서 인력과 예산을 보충해달라는 뜻일 터.
그런 느낌으로 한 동안 진지한 이야기가 오갔다. 나로서는 왕성에 이야기를 해보겠다는 상투적인 대답만 할 수 있을 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럼, 공사 중인 비무제의 경기장을 확인해보시겠습니까? 마무리 작업에 들어가 있으니 며칠 후면 완성될 겁니다.”
레드니의 말에 우리는 그녀를 따라 도시 산도라의 중앙에 위치한 경기장을 향했다. 경기장은 콜로세움의 형태로 제법 많은 인원을 수용하기에 적합해 보였다.
“기존에 있던 콜로세움을 조금 더 확장 개조했습니다. 그래서 공사가 빠르게 진행 될 수 있었죠. 행사를 무사히 진행할 수 있을 거라, 거미 여왕에게 말해주세요.”
“알겠습니다.”
그것으로 오늘 하루의 일정은 일단 끝.
아직 점심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이제 짐을 풀고 도시를 구경하든, 휴식을 취하든 해야겠다 생각해 고성에 마련된 방으로 향할 즈음이었다.
“아앗! 이게 누구야!”
어딘가에서 제법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보니 저 낡은 복도에서 나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고 있는 여자애가 보인다.
“동지! 드디어 왔구나!”
“마르마르구나.”
무사히 잘 지내고 있는 모습을 보니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마르마르, 이건 네 선물이야.”
“선물─!?”
나를 향해 다가온 마르마르에게 나는 인벤토리에서 고급 벌꿀 사탕을 꺼내 내밀었다. 예전에 엘프 장로들로부터 두 박스를 받은 그 사탕이다.
“이, 이건…!”
마르마르는 내게서 사탕 박스를 받은 뒤에 그 안의 내용물을 마구 꺼내먹었다.
한 가득 입에 넣은 것도 모자라 두 손으로 가득 쥐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입 안에 견과류를 잔뜩 집어넣은 다람쥐 컹컹이가 떠오르는 모습이었다.
마르마르도 결국 임프의 피는 속일 수 없는 모양이로군.
그렇게 한참 벌꿀 사탕을 정신없이 먹던 마르마르가 문득 최면에서 풀린 사람처럼 텅 비어버린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아앗-! 다른 자매들한테도 주려고 했는데 어느새 다 먹어버렸어!”
“괜찮아, 한 박스 더 있으니까. 그래서, 그동안 잘 지냈어?”
“그래! 다른 자매들도 잘 있어! 지금 발란 교수랑 인근 숲에서 약초 캐고 있을 텐데. 같이 가보자!”
“그래?”
나는 짐을 풀고 마르마르나 스텔라 그리고 미르나 함께 산도라의 성문을 벗어났다. 산도라에서 가까운 거리에는 마녀 숲이라 불리는 숲이 있었는데.
온갖 마물과 이단자들 그리고 강도들이 우글우글거리는 무시무시한 숲이라고 그랬다. 물론 산도라 근처의 숲은 사람들이 산책을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치안이 안정되어 있다나.
“며칠 마차에만 있었는데. 숲에 오니 기분이 좋네요.”
“남부에서는 볼 수 없는 종류의 새들이 많네.”
미르나도 스텔라도 이 마녀 숲이 꽤 마음에 들은 듯이 보였다.
그것은 나 또한 마찬가지. 내 안에 절반 정도 흐르는 요정의 피 덕분인지 이 숲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딘가 낯익은 점이 있었다. 일찍이 아이라의 심상세계에서 봤었던 마녀 숲이라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건가?
솨아아아아-.
찰랑, 찰랑.
그때 불어오는 바람에 나무와 수풀들이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나무들이 머금고 있었던 상쾌한 향기가 사방에 휘몰아친다.
향긋하면서도 동시에 알싸한 냄새가 났다.
찌릿.
순간 내 머릿속으로 무언가 스쳐지나갔던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데자뷰. 혹은 갑작스럽게 플래시백 되는 회상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었다.
━요정나무야. 요정의 친구 같은 나무. 바람이 불면 이렇게 방울이 흔들리는 것처럼 찰랑찰랑 소리가─.
그것은 어느 여성의 목소리였다.
나긋하고 부드러우면서도, 동시에 애정을 담은 목소리. 나는 높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그 잎사귀를 손에 쥐고 이리저리 흔들었던 기억이 났다.
그러나, 내 기억이라고 말하기에는 어딘가 낯선 부분이 있었다.
나 ‘이성음’의 기억이 아닌.
이 육신 어딘가에 새겨진 마녀 숲에 대한 기억이라고 표현하는 게 옳을 것 같다. 이 녀석은 이곳을 와본 적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이 ‘통나무’ 상태로 발견되었던 곳이 바로 북부의 마녀 숲이라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잘하면 이곳에서 과거의 기억과 이사야의 행방에 대해서 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나의 몸은 무언가에 이끌린 것처럼 더욱 깊은 숲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것이 나의 의지인지 이 육신에 깃든 의지인지 나는 구분할 수가 없었다.
“태오 경, 그 이상 깊게 가면 위험한 마물들이 나타날 텐데요!?”
미르나가 나를 만류하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나는 멈출 수 없이 숲을 달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이 너머에, 무언가가 있다. 나를 부르는 무언가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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