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46)
EP.347)# 4
347 – 거미 # 4
바엘이 말했다.
“이 세상은 천 년에 한 번씩 새로이 형태를 바꿔. 새로운 규칙들이 생겨나고. 쌓여왔던 것들이 해소되는 격변이 일어나지.”
제법 길어질 것 같은 이야기였다.
녀석이 혹 내게 속임수를 걸거나 나를 현혹해 속이려는 것일지도 모르기에 나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다만 바엘은 내 경계심이 어떻게 되었든 이야기를 계속했다.
“이 세상은 본디 요정과 거대한 짐승들의 세상이었지. 거대한 짐승들이 노닐고 요정과 정령들이 작은 웅덩이마다 세상을 노래했다고 해.”
바엘은 지우개로 칠판을 닦는 것처럼 허공에서 손을 움직였다. 그러자 양지바른 다과회의 풍경 위로 새로운 모습들이 덧대어졌다.
보이는 것은 우러러볼 정도로 커다란 크기의 사슴이나 다람쥐. 그리고 그들이 목을 축이는 옹달샘과 그 안에 반쯤 몸을 잠군 채 조잘거리고 있는 요정들이다.
그것이 일찍이 오랜 과거의 모습이라는 걸 나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직 세상이 인간들의 것이 아니었던 때의 이야기.
“하지만 이 세상에도 황혼은 찾아왔지.”
슥슥.
바엘이 손을 흔들자 평화로운 옹달샘의 터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주변 사물들이 불타고 여기저기 비명 지르는 요정들과 죽어가는 짐승의 사체가 바닥에 하나둘 쌓인다.
그 아비규환은 마치 전쟁같이 보였다. 타오르는 열기와 불쾌한 연기 그리고 비릿한 쇠 냄새가 코에 생생히 닿는다.
잔혹한 모습에서 눈을 돌리고 싶어져 인상을 잔뜩 찌푸렸을 때 바엘이 말했다.
“별로 보고 싶진 않지만. 이 광경을 봐두는 게 좋을 거야. 네가 이 세상에 벌이려고 하는 것은 이것과 똑같은 모습이니까.”
“내가?”
“그래. 나는 여왕 아이라가 열쇠일 줄 알았어. 하지만 그 아이의 안에서 세상을 관조하며 알 수 있었어. 마지막 파편은 너야.”
“마지막 파편?”
이해할 수 없는 개념들이 자꾸만 흘러나왔다. 하나를 물어보면 두 가지의 의문이 생겨나는 것이 꼭 신화 속 머리를 재생시키는 뱀 같았다.
어쩌면 바엘의 노림수일 수도 있었다.
나를 의미 없는 선문답으로 이끌어낸 후에 방심한 틈을 타 내 목을 콱 물어버리려는 속셈인 것일 지도.
이 녀석은 솔로몬을 배신했던 녀석이니 나와의 신뢰를 저버린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었다. 애초에 우리 사이 신뢰라는 게 있긴 한가?
나는 이 자리의 주도권을 가져오기 위해 짐짓 냉정히 말했다.
“네 말은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 내가 이해할 수 있게 설명해.”
그에 한숨을 후-작게 내쉬는 바엘.
녀석이 다시금 손을 슥슥 흔들자 불타오르고 있던 열기는 사라지고 다시금 평화로운 야외 다과회의 풍경이 나를 반겼다.
“솔로몬은 님프가 죽은 후 죽음과 삶에 대해 연구했어. 그러다가 마침내 한 가지를 깨우쳤지. 누구도 죽음을 이겨낼 수 없고, 그것은 시대또한 마찬가지라는 걸.”
시대의 죽음.
바엘의 설명에 따르면 마왕 솔로몬은 죽음을 연구하며 인간과 동물뿐만 아니라 이 세상과 시대 또한 수명이 있어서 언젠가 죽음을 맞이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고 했다.
시대의 수명은 대략 천 년.
천 년 주기로 세상은 크게 격변 한다고.
“그게 아까 보여줬던 전쟁이구나.”
“그래, 이제야 좀 이해를 하네. 본디 세상은 천 년 전 요정들의 시대였어. 하지만 매우 이질적인 개념이 그것을 어그러뜨렸지. 지금 그 개념은 지금 신이라 불리고 있고.”
“광염의 신을 말하는 거냐?”
내 머릿속으로 한 손에 랜턴을 나머지 한 손에 소금을 한 움큼 쥔 신상이 떠올랐다. 이 세상에서 신이라 불리는 자는 빛과 소금의 지배자인 광염 신 뿐. 그 외에는 모두 이단이다.
바엘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염의 신. 그건 틀림없는 신적 존재지. 하지만 요정들의 시대까지만 해도 유일한 신과 그가 하사한 마법이란 존재하지 않는 것이었어. 외부의 개념이 이 세상을 변화시킨 거야. 오염시켰다고 해도 좋아.”
“…….”
이런 이야기.
나도 일찍이 들어본 적이 있었다. 요정과 거대한 정령들이 몰락한 것은 인간들이 마나를 깨우치게 되면서라고 했던가.
요정과 정령에게 향하고 있던 숭배가 사그라지며 그들은 힘을 잃고 영락해버렸다고. 그 자리를 새로이 꿰 찬 것은 교단의 신과 마법사들이었다.
“이 번 천 년은 틀림없는 교단의 시대였지. 하지만 이제 그 시기도 얼마 남지 않았어. 이 시대는 곧 종말을 고해.”
“그러니까.”
세상은 천 년 단위로 변화하고 있고. 그 천 년의 주기가 지금 돌아왔다는 걸까?
만약 바엘의 말이 사실이라면 장벽이 붕괴되고 그림자 군세가 들이닥쳤던 것도 그것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일어나지 않을 일이고.
“하지만 내가 막았어. 결국 아이라는 처형되지 않았고. 장벽 또한 무너지지 않고 있었으니까.”
내 말에 바엘은 고개를 젓는다.
“아니, 넌 막지 못했어. 결국 날 쓰러트렸잖아.”
내 마지막 마법이 통했던 건가.
“그래, 난 죽어가고 있어. 죽어가는 와중에 네게 말하는 거야. 내게 남은 건 이 차 한잔 정도의 시간 뿐. 그렇지만 충분한 시간이지.”
슥.
바엘이 테이블 아래에서 무언가를 꺼내 내 쪽으로 내밀어왔다.
“이게 네가 궁금해 하는 걸 거야.”
“이건….”
그것은 갈색 가죽 표지로 포장된 책이었다.
그것을 펼쳐서 뒤적이자 무언가를 만들기 위한 재료와 마법 술식 같은 게 적혀 있는 게 보였다.
당장 겉핥기식으로 읽어봐야 깊게 이해하는 건 불가능했지만 여기저기 적혀 있는 메모와 수정된 흔적들이 오랜 시간 연구하고 노력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솔로몬은 나 바엘을 만들고, 최후에 인간을 만들었어. 우리들은 모두 그 인간을 만들어내기 위한 발판단계일 뿐. 그 인간이 누군지, 너는 알 거야.”
인간.
솔로몬이 만들어낸 인간이라니.
떠오르는 것은 한 명밖에 없다.
“이사야구나.”
“정답. 그는 완벽한 솔로몬의 분신. 왕이 아직 선했던 시절의 영혼과 기억을 나누어 받은 완벽한 복사본. 이제 어째서 솔로몬과 드레이코 가문이 함께 반혼술을 연구했는지 알겠어?”
반혼술이란 영혼을 그릇에 담는 술법을 말한다.
죽은 자의 영혼을 다시 육신에 담아 넣는 것을 목표로 하는 술법.
하지만 솔로몬은 님프를 살리는 데에 실패했다고 들었다. 최후에 와서는 결국 자신의 영혼을 나누어 새로운 그릇에 옮겨 담았다는 걸까.
이사야가 마왕의 아들이 아니었다니. 애초에 솔로몬에겐 아내도 없었고 그의 자녀를 낳을 만한 여성조차 가까이 두질 않았다고 했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아들의 존재. 그에 대한 의문이 여기서 해소된다.
“영혼을 나누었기 때문에 그의 힘은 현격히 약해졌고. 결국 껍질만 남았던 마왕은 영웅들의 손에 쓰러지게 된 거야.”
가히 신과 같았다던 10위계의 마왕이 영웅들의 손에 쓰러진 것도 이해 됐다. 아무리 네 영웅들이 강했다고 해도 솔로몬을 쓰러트리는 건 사실 불가능했을 터.
만약 마왕의 힘이 절반 아래로 떨어져 있었다면 충분히 일리가 있어진다.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바엘이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어. 그래서 문제지. 그의 비어버린 껍데기에 고여 들고 있는 게 있거든. 지금의 솔로몬은 활짝 열린 문 같은 상태야. 누구도 들어갈 수 있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
“솔로몬이 죽지 않았다?”
내 질문에 바엘이 미간을 찌푸렸다.
“너도 봤을 거 아냐, 북쪽에 뚫린 커다란 균열. 그곳에 봉인되어 있을 뿐이야. 그건 이제 솔로몬이라고 할 수도 없고 마왕이라 부를 수도 없는 존재겠지.”
만약 이름을 붙이자면─이라고 말을 흐리는 바엘. 그러나 녀석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이제 내 알바 아니지. 이름 같은 건 네가 알아서 붙여. 그게 네 어머니의 뜻이었으니까. 그럼 내 이야기는 이제 끝이야. 이제 더는 시간도 없고.”
우르르르르.
주변 모든 게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이 공간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빠르게 무너지고 있다는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다만 나는 이곳에서 아직 더 머물러야만 할 이유를 느꼈다.
“어머니의 뜻이라니.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말 그대로지. 아니면 너 설마, 아직도 꿈에서 깨지 않은 거니? 이제 그만 오랜 잠에서 일어나도록 해. 네가 살아가는 세상이 어디에 있는지 두 발을 직접 딛고 느껴 봐.”
“두 발을 직접 딛고 느껴? 네가 말하는 것들. 너무 난해하고 어려워서 이해하기 힘들어.”
“어차피 꿈이란 게 다 그래. 깨어나게 되면 쉽게 잊어버리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부분들이 있지. 그럼 난 이제 정말 끝이야. 출구는 저쪽.”
슥.
바엘이 가리키는 곳에 작은 문 하나가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어둠 속에 덩그러니 놓여있는 문.
스스스스스.
어둠은 이내 이 다과회장의 모든 것을 잠식해, 테이블을 제외하고는 모두 새까만 흑암으로 덮어버렸다. 덕분에 테이블이 꼭 허공에 부유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다.
나는 일단 어둡고 까만 허공을 걸어 문까지 나아갔다. 하지만 그것을 밀기 전에 뒤에 앉은 바엘의 모습이 신경 쓰여서 발을 떼기가 어려웠다.
내가 고개를 슬쩍 돌리자 녀석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보이질 않았다. 그저 까만 칠흑만이 있을 뿐. 그런 와중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라는 나와 약속했었어. 그 아이의 슬픔도 아픔도 모두 내가 먹어주겠다고 했었지. 덕분에 나는 못된 거미가 되었고. 나를 품은 아이라도 못된 아이가 됐어.”
“…….”
“하지만 나는 이제 없어질 거야. 내가 없어도, 그 아이 주변에는 사람이 잔뜩 있어. 분명 잘 해내겠지. 서툰 것도 많겠지만 미워하지 말아 줘. 나름 정들었거든.”
“바엘. 내가 이대로 문을 닫고 나가면 너는 죽는 거냐?”
“그래. 어차피, 아이라의 마음속에는 내가 있을 곳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어. 어차피 시간문제일 뿐. 이렇게 됐을 거야. 마지막으로 너를 봐서 좋았어, 태오 가스펠.”
“나를?”
“아이라의 마음속에서, 네가 제일 맛있는 부분이었어. 덕분에 까맣고 축축하고 어두운 하수의 폭포에서도, 나는 늘 너를 기다렸으니까.”
그 목소리는 어딘가 쓸쓸했다.
처음엔 녀석을 향한 증오와 원망밖에 없었지만. 녀석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러한 마음은 어느덧 없어졌다. 나를 향해 무르다고 표현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원래 그런 취향이다.
나쁜 것들을 좋아하고, 못된 것들을 사랑한다. 만약 그들에게 단 하나라도 동정할 만한 구석이 있다면 아주 깊숙이 빠져버린다.
아이라의 때도 그랬고 엘가나 미르나르미 자매의 때도 그랬다. 악당과 악녀에게 빠져버리고 마는 사람이라니. 인간으로서 괜찮은 걸까.
“안녕, 어린 왕자. 마지막으로 이야기해서 즐거웠어.”
그 마지막 작별 인사에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일찍이 장벽 너머에서 오랜 시간을 살아왔던 요정을 만났던 때.
그때 녀석은 큰 거미를 찾아가라고 했었다. 녀석이 내가 궁금해 하는 것을 답해줄 거라고. 이제 보니 그 큰 거미는 바엘이었다.
우리들의 만남은 예정되어 있었던 걸까?
모르겠다.
“바엘, 나랑 같이 가자. 나는 개다람쥐 한 마리를 이미 키우고 있긴 한데. 작은 거미 한 마리 정도면 더 키울 수 있어.”
나는 허공에 보이는 어둠을 그러모았다. 머릿속에 떠올리는 것은 아까 전에 읽었던 솔로몬의 수기다.
육신을 만들고 그 안에 영혼을 집어넣는 법. 복잡한 생물이라면 쉽지 않겠지만 작은 소동물 정도면 나도 흉내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스윽스윽.
나는 까만 어둠을 모아 손바닥 크기의 거미 모양으로 종이를 접은 후에 아직 이 어둠 어딘가에 있을 바엘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안으로 들어와. 여기 어둠 속에서 혼자 사라지는 것보다는 초라하지만 이 종이 거미가 더 아늑할 거야.”
내 적당한 설득에 어둠 속에서 무언가가 바르르 떠는 감각이 느껴졌다.
“너 바보야? 나는 너희들을 상처 입혔어.”
“나도 널 죽이려 했잖아. 피차 마찬가지야. 또 내 마음엔 빈틈이 많으니까. 네가 웅크릴 구석도 많을 거야. 가끔은 맛있는 감정들을 먹어도 돼. 내 감정들은 정말 재미있을 걸.”
“너는 바보구나.”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는데.”
“하지만 바보인 건 나도 마찬가지 인 것 같아. 아이라가 어째서 너를 믿는 건지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네. 그럼─.”
─그럼 어디 나를 잘 길들여 봐.
스스스슥.
무언가 내가 만든 종이거미를 향해 휘몰아치는 느낌이 들었다.
얼마 뒤, 종이거미는 종이로 만들어진 앞다리를 좌우 번갈아 움직였다. 마치 자신의 새로운 몸을 시험해 보려는 모양새다.
━히오옹…!
맘에 들었다는 뜻일까?
여러 짐승들 언어는 잘 알아들었는데 이 종이거미의 언어는 모르겠다.
나는 그런 녀석을 내 안 주머니에 잘 집어넣었다. 종이거미가 안주머니에서 사부작거리는 느낌이 들어서 간지러웠을 때 나의 눈앞으로 글자들이 떠올랐다.
「바엘 : 고위 영창주문. 대가를 바쳐 마도 전반에 걸친 이해와 지식의 습득이 증가한다. 술자의 위계가 높아질수록 그 영향이 증대된다.」
「심연을 바라보다!
직업 : 소마왕의 레벨이 상승합니다.
소마왕 Lv. 3 → Lv. 4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보기 시작했습니다.」
좋아.
얼핏 예상하고는 있었지만 이번 일로 나 역시 7위계에 도달할 수가 있었다. 이제 남은 것은 이 문을 열고 꿈에서 깨어나는 것 뿐.
덜컥, 기이이이익.
마침내 나는 긴 어둠 속을 빠져나가 빛으로 나아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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