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345)
EP.346)# 3
346 – 거미 # 3
아이라가 말했다.
“저 녀석, 쓰러트리면 안 돼. 돌이킬 수 없어져. 전부 무너지고, 전부 흘러들어오게 될 거야. 전부, 전부….”
아이라는 우리가 1위의 바엘을 상대하고 있는 걸 말리고 싶은 모양이었다. 대체 어째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아이라의 눈은 제법 맑다.
정신이 돌아온 건지 우리를 기억해낸 건지 확실하지는 않았다만 그 눈에는 확고한 의지라고 할 만한 것이 있었다.
“하지만 아이라 님, 저 녀석을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평생 아이라 님은 마음에 웅크린 저 녀석을 안고 살아가셔야 할 겁니다. 언젠가는 녀석이 목을 조르게 될 수도 있어요.”
어쩌면 최초이자 마지막일 단 한 번의 기회가 될 수 있었다. 만약 이대로 저 괴물을 쓰러트리지 않는다면 잔뜩 상처입고 분노한 거미가 아이라의 마음을 난도질해버릴 수도 있는 일.
그러나 아이라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일. 이제 와서 너에게 도움을 받을 이유도 없어. 저 녀석을 쓰러트린다면, 모든 게 무너질 거야. 장벽도, 사람들의 안위도…!”
“장벽이 무너져요?”
상당히 신경 쓰이는 말이라 나는 일단 갈무리하고 있던 마력을 거두어들였다. 아이라가 말하는 장벽이란 북부를 관통하고 있는 대장벽-클라리스를 뜻하는 것일 터.
문득 내 머릿속에 스쳐가는 것이 있었다.
아이라의 처형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거대한 장벽이 무너지고 마의 군세가 세상을 향해 들이닥쳤던 이야기.
만약 바엘이 모종의 힘으로 그 장벽을 지탱하고 있었고.
아이라가 처형당함으로 그 내면에 깃들어 있던 아르스 노바 바엘이 함께 사라졌기에 벽이 무너진 것이라면 많은 것들이 설명되는 부분이 있었다.
“네가 믿든 믿지 않든 상관없어. 세상엔 저 녀석이 필요해. 그게 내가 짊어진 왕관의 무게. 밝히지 않은 비밀 중 하나….”
“비밀….”
골치 아프구만.
결국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이대로 저 괴물을 쓰러트리면 얼마의 시간 후 장벽이 무너진다.
하지만 이대로 저 괴물을 쓰러트리지 않으면 아이라의 삶은 언제까지고 고통 받겠지. 대를 위해 소를 희생하는 것은 어찌 보면 합리적인 행위였다.
물론 내게 있어서 아이라의 계산법은 잘못 됐다.
때로는 전부보다 나은 하나가 있을 때가 있다.
내게 있어서는 아이라가 바로 그랬다. 지금까지 내가 지키기 위해 애써왔던 그녀가 솔직히 얼굴 모르는 천과 만의 민중들보다 소중하다.
슥.
내 결심을 눈치 챈 것인지 아이라가 내 손을 붙잡았다.
“태오야….”
나 역시 그런 아이라의 손을 붙잡는다.
“내가 말했잖아. 너를 구하겠다고.”
내 말에 아이라는 스르륵 눈을 감았다. 주변의 혼란스러운 상황이 모두 뭉뚱그려지며 세상에 나와 그녀밖에 남지 않은 것처럼 고요해진다.
그녀의 숨결과 향기 부드럽게 흔들리고 있는 머리칼. 젖은 입술과 흘러내리는 물방울들은 무척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이것이 꿈과 거짓임을 알고 있음에도 시선을 빼앗기고 말 만큼.
“…어째서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해주는 거야.”
어째서.
이유를 물어옴에 나는 잠깐 말문이 막혔다.
아니, 사실 답은 알고 있었다.
“그건 내가─.”
그러나 나의 입술에서 나온 답이 아이라의 귀에 들어갈 일은 없었다.
이유인즉슨 강렬한 낙뢰와 불기둥 그리고 얼음의 송곳이라고 부를 만한 것들이 우릴 향해 휘몰아치고 있었으니까.
재빨리 몸을 움직여 공격을 피했다.
고개를 돌려보니 거미와 싸우고 있는 엘가와 미르나의 얼굴과 몸에 부상이 잔뜩 입혀져 있었다.
“이 녀석, 갈수록 날뛰고 있어! 거미주제에 마법까지 쓴다고! 야, 태오! 다음 마법은 멀었냐!”
“촛불은 꺼지기 직전 가장 밝은 법이죠. 이 녀석이 날뛴다는 건, 그만큼 한계가 가까이 왔다는 거에요!”
엘가와 미르나의 상황이 급박해 보인다. 그녀들이 잘 버티고 있다고는 하나 역시 상처 입은 괴수를 쓰러트리기에 결정적인 전투력이 부족해 보인다.
즈우우웅.
그때였다.
아홉 개나 되는 거미의 다리가 기묘한 느낌으로 움직인다. 동시에 녀석의 몸 주변에 붉은 원 형태의 마법진이 떠올랐다.
그것이 형성하고 있는 것은 길고 검은 창.
내가 쏘아냈던 7위계 마법 궁니르.
그것과 똑같은 것을 녀석이 영창하고 있다는 것에 나는 오싹한 소름을 느꼈다. 저것을 맞으면 지금 지쳐버린 엘가와 미르나는 단박에 사그라지고 말 거야.
영창을 막아야 한다.
아니면 궤도라도 틀어야 해.
나는 쭈뼛 솟아오른 머리칼을 억누르며 마력을 쥐어짰다. 하지만 거미 괴물의 마법 영창은 내가 생각하고 있던 속도를 아득히 넘어섰다.
내가 무엇을 손써볼 사이도 없이 녀석이 쏘아낸 창끝이 나를 향해 발사된다. 노리는 것은 엘가나 미르나가 아니라 나였나.
절명.
머릿속에 죽음에 대한 것이 떠오르고 있다. 아무리 재빠르게 방호 마법을 영창 한다고 해도 저 위력을 막을만한 방어력이 내게는 없다.
이대로 실패하고 마는 건가.
분한 마음을 삼키고 있을 즈음, 무언가 나의 등을 강한 힘으로 떠미는 느낌이 났다. 공중으로 붕 떠올랐던 몸이 바닥에 다시 쳐 박혔을 때.
고개를 다시 들어 올렸을 때.
나는 거대한 창에 꿰뚫려 피를 뿜어내고 있는 님프를 발견할 수 있었다.
“…어라, 나, 어째서─.”
녀석은 자신에게 일어난 상황을 미처 파악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나의 등을 밀었던 것도, 자신 홀로 마창을 막아낸 것도 의도한 행동이 아니었을지 모르겠다.
그때 와락 소리 지른 건 엘가였다.
“레오노르…!!!”
그 외침에 나 역시 정신이 번쩍 뜨였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역시 엘가 또한 알고 있었던 것이구나. 이 녀석이 누구인지.
“내, 내 이름, 알려 줬었던가…. 몰라, 기억 안나. 기억 안 나지만 익숙한 목소리…. 꼭 심장을 찾아서, 이 성에서 나가야….”
생명이 쓰러져간다.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차마 그 광경을 볼 수 없었던 건지, 엘가는 두 눈을 차분히 감았다.
짧은 찰나의 순간.
하지만 그 시간은 마치 영원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내 피부에 손톱을 박아 넣고 늘어지는 것처럼 도무지 흘러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슥.
그러다 엘가는 천천히 등을 돌렸다. 처연한 태도로. 어딘가 냉혹함마저 느껴지는 동작이었다.
“━━──!!!”
곧 그녀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소리를 내지르며 거미를 향해 뛰어들었다. 거대한 몸체를 내려치고 짓누르거나 물어뜯기까지 한다.
도무지 인간의 방식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모습이었다만 애도하기보다 복수를 택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엘가다운 행동이었다.
그에 공세를 펼치고 있던 거미가 크게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엘가의 도끼가 내려칠 때마다 아홉 개 남아 있던 거미의 다리가, 하나, 하나 떨어진다.
“…리오네스 영애가, 폭주하고 있어요!”
그 모습에 미르나는 바르르 몸을 떨었다. 드레이코 가의 사람들을 수없이 고난으로 밀어 넣었던 리오네스 광전사들에 대한 이야기가 떠오른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된 이상, 엘가는 누구도 막지 못한다. 자신의 몸이 망가지고 박살나도 행동을 멈추지 않겠지.
“Grrrrrr─!!!”
그 모습이 무척 아름답다고 느껴지면서 동시에 나는 말할 수 없이 큰 슬픔을 느꼈다. 이대로 엘가가 더 이상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진 않았다.
그 방법은 하나.
이 전투를 끝내는 것 뿐.
짝.
나는 손뼉을 치고 감정과 마력을 갈무리했다.
내가 보유한 《침착한 사고》는 이런 상황에 있어서 매우 유용한 도구였기에 슬픔이나 격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마법을 영창 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온몸의 피부가 따끔거리고 관절과 뼈가 삐걱거리는 듯하지만.
멈출 수 없다.
이 세상의 부서진 톱니바퀴를 부순다.
8위계.
“장송곡.”
*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햇볕이 드는 방의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커튼이 바람에 휘날리고 있는 것이 거슬려 몸을 일으키니 창문 아래로 양지 바른 곳에 놓인 예쁜 테이블과 찻잔 및 케이크와 쿠키들이 보인다.
거기에 앉아 있는 것은 까만 머리를 가진 여자.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여서 정원으로 나갔다. 여자는 내가 나온 것을 신경도 쓰지 않은 채 그저 자신의 손에 들린 찻잔을 홀짝이고 있을 뿐.
“아이라 님.”
“…….”
“아니, 너는 바엘이구나.”
정답에 근접한 것인지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그 입 꼬리를 귀까지 씨익 울리는 모습이 퍽 괴기하기도 하고 으스스하기도 했다.
“맞아.”
“그럼 아이라 여왕인 척 하는 행세는 그만 두시지.”
“나는 이 모습이 좋아. 예쁘기도 하고. 또 오랜 시간 그 아이와 함께 했기 때문에 정도 들었거든. 아니면 끔찍하게 생긴 거미 모습이 좋니?”
자기도 끔찍하게 생겼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던 걸까?
꽤 의외였다.
그런 내 생각을 읽은 건지 녀석이 말한다.
“나라고 좋아서 그런 모습을 하고 있는 게 아냐. 마음속 깊은 구렁텅이에서, 끝도 없이 몰려드는 부정적 폐수와 쓰레기들을 먹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렇게 될 걸.”
나는 대답하는 것 대신 주변을 둘러봤다.
아까 녀석이 웅크리고 있었던 지하의 검은 폭포와 다르게 이곳은 마치 밝게 빛나는 다과회의 한 장면 같다.
내가 물었다.
“여기는 어디지?”
솔직히 물어보면서도 내가 원하는 대답이 돌아오긴 할까 의문이었다. 하지만 잔을 내려놓은 바엘은 차분한 목소리로 순순히 답했다.
“나의 꿈.”
“너의?”
“너희들도 아이라의 꿈에 들어와 나를 찾았잖아. 하지만 이번에 내가 너를 또 초대한 거야. 말하자면 꿈속의 꿈이지.”
“…….”
“지금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니? 물론 어중이떠중이들에게는 불가능하지. 하지만 나 바엘에게는 가능한 이야기. 불가능한 일을 하기 위해 솔로몬은 날 만들었으니까.”
“그렇지만 넌 솔로몬을 배신했다.”
솔로몬의 배신자는 이 녀석이다. 이 녀석과 전투를 겪어보며 느꼈다.
고위계 마도를 자유자제로 다루는 아르스노바. 그런 녀석이 배신해 적들의 손에 넘어갔다면 제 아무리 10위계에 달했던 솔로몬이라도 쓰러지는 게 당연했을 터.
그에 바엘은 후후 웃었다. 그 모습이 꼭 아이라를 닮아서 이 녀석에게 친근감을 느끼고 마는 내가 싫었다. 이 녀석은 적인데. 친근한 모습으로 날 현혹시키려고 한다니.
녀석이 말했다.
“네 이야기의 반은 맞고 반은 틀려. 나는 솔로몬을 배신했지. 하지만 그가 몰락한 것은 나 때문이 아니야. 그저 그럴 수순이었던 거지.”
“그럴 수순?”
“태오야, 너는 나를 적으로 보고 있겠지. 하지만 아냐. 너의 적은 나도 이 가련한 여왕 아이라도 아니지.”
“…….”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구나. 하긴 그럴 수밖에 없을 거야. 그들이 네 존재를 철저하게 비밀로 했으니까. 동시에 너에게서 모든 이야기들을 철저히 비밀로 했으니까.”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바엘이 나에게 무척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녀석의 이야기를 향해 더욱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내가 뭘 모르고 있는지 이야기 해 봐. 애초에 날 이런 곳으로 불러왔다는 건 그것들을 이야기 해주고 싶어서일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리 없다. 서로 피차 얼굴 보고 차를 마실 상대는 아니니까. 바엘이 말 한다.
“태오야, 운명이라는 것을 믿니? 순리. 흥망성쇠. 새로 태어나 눈부시게 빛나다가 허물어지고, 사그라지는 것.”
“그런 말장난으로 나를 속일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걸.”
“아무렴, 요승 태오 가스펠을 속일 수 있겠어? 하지만 말이야. 내가 말하고자 하는 건 진짜야. 천 년에 한 번. 이 세상은 새로이 형태를 바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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