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ming the Villainess RAW - Chapter (426)
EP.427)하는 자 # 2
427 – 멈추게 하는 자 # 2
여자는 주술과 언령에 능통했다.
아주 어려서부터 소질을 보인 탓에, 그녀를 시종이자 노예로 구매했던 늙은 주술사는 여자를 향해 이것저것 알려주고 가르침을 주었다.
여자는 마치 메마른 스펀지처럼 가르침을 쭉쭉 빨아들였다.
━기구한 별 아래 태어난 아이야. 너는 이대로 골방에 있기엔 너무나도 큰 그릇이구나.
늙은 주술사는 여자가 자신의 손아귀에 있기엔 너무 커다란 재목이라는 걸 깨닫고 그녀를 교단에 넘겼다.
교단에 소속을 두게 된 그녀는 온갖 환대와 관심 속에서 자라나 마침내 그 톱이라 불릴 수 있는 성황청의 꼭대기에 올랐다.
성녀 프리가 나이트폴.
가장 낮은 노예에서 양떼들의 목자가 된 여자.
성녀가 된 그녀는 이 세상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니게 되었지만. 그녀에게 세상은 여전히 쉽지 않은 곳이었다.
쨍그랑-.
무언가 깨지는 느낌이 생생히 들어 성녀는 하던 것을 멈추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바닥에 잔을 깨트린 시녀가 황급히 고개를 조아리는 것이 느껴졌다.
“죄, 죄송합니다. 얼른 치울 테니….”
“괜찮답니다. 그보다 잠시 나가보셔요. 그리고, 당분간은 그 누구도 이 방 가까이 들이지 말도록 하세요.”
성녀의 나긋하고 다정한 말씨에 시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프리가의 신경은 이제 바닥에 깨진 컵을 향한다.
‘방금 깨진 것은 컵 뿐 만이 아니었어.’
성녀 프리가는 내면에서 무언가 끊어진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이 반요정 태오 가스펠에게 걸어두었던 언령이다.
「절대 문으로 가까이 다가서면 안 된다.」라고 걸어두었던 암시 말이다.
꽤 강한 암시였다. 평범한 사람이었다면 평생 그 암시에 의해 꿀통에 빠진 벌처럼 허우적거리며 살 뿐이었겠지.
하지만 방금 모종의 이유로 그 암시가 깨지고 말았다.
태오 가스펠의 의지가 자신의 암시를 훨씬 상회했다는 뜻이겠지. 그 유약해 보이는 남자에게 그 정도 의지가 있었다니 감탄할 수밖에 없다.
며칠 사막을 헤맨 사람이 물을 참는 것보다 더 강한 의지력이 필요했을 텐데.
“역시 제가 직접 나서야하는 모양이로군요.”
성녀 프리가는 손을 뻗어 근처에 놓인 자신의 지팡이를 붙잡으려 했다.
눈이 보이지 않는 그녀이기에 지팡이는 언제나 오른손을 뻗으면 금방 닿는 거리에 놓여 있을 터였다.
슥.
하지만 프리가의 손에 닿는 것은 지팡이라기에 더욱 두껍고 긴 것이었다. 그것이 사람의 다리라는 걸 눈치 채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질 않았다.
‘이 방에 사람이 있다.’
프리가는 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이지만 바보는 아니다. 사람이 다가오는 걸 느끼지 못했을 리 없다. 만약 그녀의 감지를 벗어나 이렇게 무방비하게 다가올 수 있는 자라면….
“테오도로스.”
“프리가.”
오랜 옛 동기의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 그리움이 사무쳤던 덕분에 프리가는 살짝 미소를 지을 뻔하다가, 이내 서늘히 정색했다.
“그 동안 모습도 보이지 않던 네가, 이곳엔 어쩐 일이지?”
“프리가, 너도 이미 알겠지만. 태오 가스펠이 문으로 향했어. 이제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거야.”
프리가는 고개를 저었다.
“성공할 리 없어.”
“아니, 성공할 걸. 이제 그에겐 사냥꾼이 함께하고 있으니까.”
“사냥꾼.”
프리가는 그 낯선 어감을 다시 입에서 굴려보았다.
“사냥꾼이라.”
역시 익숙해지질 않는다.
“그 사냥꾼이라는 남자는, 대체 정체가 뭐지? 그 남자는, 내가 가진 마음의 눈으로도 아무것도 읽어낼 수가 없었어.”
“그 남자가 누군지 알면 프리가, 너라도 깜짝 놀랄 걸.”
“그래서─.”
프리가는 무어라 말하려다 입을 멈추었다. 그의 주변에서 느껴지고 있던 인기척이 없어진 걸 감지했으니까.
이 넓고 황량한 집무실에는 오직 프리가 혼자뿐이었다. 잠깐 감상에 젖었던 그녀는 이내 주변을 향해 말했다.
“하모니, 그걸 가져오도록 하세요.”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
‘내가 직접 나서야 해.’
* * *
동굴 안은 뜨거웠다.
“뜨겁네요.”
아까 전까지만 해도 털옷을 가득 껴입어야 겨우 추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날씨였건만. 동굴 안은 마치 누군가 히터라도 크게 틀어놓은 것처럼 후덥지근했다.
덕분에 우리는 잔뜩 껴입고 있던 털옷을 하나 둘 벗어야했다. 몸이 한결 가벼워져서 활동하기 편했기 때문에 기분은 좋았다만.
후끈후끈-.
역시 이 뜨거움은 아무리 봐도 비정상이다. 문득 아이가 있는 엘가는 어떨지 싶어 고개를 돌려보았다.
“후우….”
제법 숨이 가빠 보인다. 이마에는 줄줄 땀이 흐르고 있는데. 아무래도 평범한 상태는 아닌 것 같아 걱정이 들 때였다.
“리오네스 영애, 잉잉이 안고 있을래?”
나르미가 수통 마개를 뽕-하고 따자 그 안에서 무언가 작고 기묘한 것이 꿈틀꿈틀 부풀며 빠져나왔다.
━잉잉야잉.
그것은 구름을 닮은 마물 클라우드링 잉잉이다. 녀석은 엘가를 향해 다가가 그 품에 인형처럼 얌전히 안겼다.
“시원하네. 한결 낫다.”
━규이잉.
잉잉이 몸은 상당히 서늘했지. 녀석 덕분인지 우리 주변의 온도도 조금은 낮아지는 기분이 들어서 좋았다.
상태가 한껏 호전된 엘가가 말했다.
“그래서, 우리 아까부터 오르막길만 올라가고 있지 않아? 이쯤 되면 산꼭대기에 벌써 도착했을 것 같은데. 대체 언제까지 가야 하는 거지?”
엘가의 말대로 우리는 동굴 안의 오르막을 오르고 있었다. 때로는 동굴 속 절벽을 클라이밍 하기도 해야만 했는데.
벌써 몇 시간 째 걷고 있었기 때문에 산의 정상이라 불릴만한 곳에 도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동굴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애초에 정상으로 갈 게 아니라, 밑으로 내려가야 하는 거 아닌가? 도시는 산보다 아래에 있었으니까 말이야.
다만 사냥꾼과 그 일행들은 묵묵히 걸을 뿐이다.
아이라가 말했다.
“공간이 일그러져 있어. 오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내려가고 있는 도중일 수도 있고. 아니면 뒤로 돌아가고 있는 중일 수도 있어.”
믿기지 않는 이야기였다.
분명 이렇게 오르막을 잔뜩 올라가고 있는데 내려가는 도중일 수도 있다니. 혹시 아이라 특유의 재미없는 농담은 아닐까 싶었는데. 제법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아이라가 한 마디 덧붙였다.
“사실 나도 몰라.”
그냥 해본 말이구나.
덕분에 엘가는 “시시하기는.”하고 쯧-혀를 찼다. 미르나와 나르미도 기대했던 얼굴을 실망으로 물들인 채 “그런 거짓말을 하다니.”라고 혀를 내두른다.
“흐응.”
다만 길게 코웃음 치고 있는 아이라는 제법 뿌듯해 보였다. 자기가 모두를 속였다는 사실이 꽤 재미있었던 모양이다. 거짓말을 싫어하는 아이라가 거짓말을 하다니.
버릇 들면 안 되는데.
그때 스텔라가 말했다.
“어쩌면, 아이라 양의 이야기. 틀리진 않았을지도 모르겠네. 다들 저거 봐봐.”
스텔라가 가리키는 곳에는 송곳니처럼 자라난 종유석이 잔뜩 있었다. 저걸 대체 왜 가리키는 가 싶어서 가볍게 신경을 쓰고 있을 때….
똑, 똑.
종유석에서 흘러내리는 석회수가 기묘한 느낌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그걸 떨어지거나 낙하(落下)하고 있다 표현하는 게 옳긴 할까?
똑. 똑.
그것은 오히려 천장을 향해 부유했다. 그렇다. 땅에서 천장으로 떨어지는 것이다.
중력이 적용되지 않는 것 같은 이 기묘한 광경에 내가 살짝 입을 다물었을 때 스텔라가 말했다.
“어쩌면, 우린 지금 천장에 매달려서 걷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네. 그래서 올라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내려가고 있는 게 맞는 거지.”
과연 일리 있는 이야기다. 역시 스텔라는 눈썰미가 좋구나.
“모르겠고, 잠깐만 쉬고 가자.”
━잉잉야잉.
엘가가 벽에 등을 기댄 채 제법 평평한 종유석 바위에 걸터앉았다. 시원한 클라우드링 잉잉이를 몸에 안고 있어도 역시 일찍 지치는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그에 사냥꾼의 파티원인 여사제 미리암이 혀를 내둘렀다.
“홑몸도 아닌 사람을 이런 곳에 데려오고 말이에요. 세심하질 못하네요. 자꾸만 걸음이 멈추고 있잖아요? 저희보다 뒤쳐져도 몰라요.”
임산부가 힘들어하든 어쩌든 사냥꾼은 신경 쓰지 않은 채 앞으로 나아가겠지. 미리암은 그렇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깐 정비하고 간다.”
다만 사냥꾼은 걸음을 멈춘 채 지니고 있던 짐들을 풀었다.
그에 그의 파티원들은 더욱 놀란 것처럼 눈을 끔뻑였다. 그가 일행을 생각해 걸음을 멈춘다는 건 사실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쯧-혀를 차는 엘가.
“아, 씨. 짐이 되고 싶진 않았는데. 열 받네.”
프라이드 높은 엘가로서는 자신 때문에 다른 사람들의 걸음이 멈춘다는 걸 용납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물론 나로서는 엘가의 건강도 몹시 중요했기 때문에 그녀를 위로하기로 했다.
“그래도 지름길 덕분에 원래 계획보다 훨씬 더 일정을 줄였으니까.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여유롭게 가죠. 그래서, 많이 안 좋으십니까?”
“그런 건 아닌데. 그냥 느낌이 좀.”
그때 여사제 미리암이 “제가 한 번 봐드릴까요?”라며 가까이 다가왔다. 라면과 씻는 비누 등을 제공해주었던 게 꽤 효과가 컸는지 호의를 베풀어오는 모양이다.
역시 사람은 서로 돕고 살아야하는 모양이야.
“치유의 빛이여-.”
여사제 미리암은 손에 기묘한 빛을 머금은 채 엘가의 배에 가져다댔다. 그러자 “나한테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라고 잔뜩 긴장했던 엘가가 표정을 서서히 푼다.
“조금 낫네. 이래서 분대나 파티 중에는 위생병이나 치유사제들이 있어야 한다니까.”
나도 엘가의 말에 동의했다. 내 아내들 중에는 치유에 적성 있는 사람이 없지. 만약 미리암과 만나지 못했다면 꽤 고생했을지도 모르겠다.
슥.
자리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는 엘가.
“그럼 이제 괜찮아졌으니까, 다들 출발하자. 이대로 있을 수는 없잖아.”
엘가가 걸음을 재촉하자 모두들 다시 짐을 추스르기 시작하는데. 오직 사냥꾼만은 자리에서 일어나질 않았다.
그가 말했다.
“조금 더 쉬고 간다. 산모에게는 충분한 휴식이 필요해.”
“……!”
“……!?”
미리암과 르네가 깜짝 놀란 것처럼 서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르네, 방금 들었나요?”
“어, 나도 들었다. 순간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보네.”
“사냥꾼 씨가, 저렇게 배려심 넘치는 말을 하는 건 또 처음 봐요. 세상에,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네요.”
나도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원작의 주인공은 냉혹한 늑대…, 아니 감정 없는 사마귀에 더 가까운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임산부인 엘가를 배려할 줄이야.
원작에 없는 상황을 지나오며 그 역시 많은 것이 변한 걸까? 나는 문득 그가 자신에게 아내와 자식이 있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전부 잊으라고 했지만.
차마 잊을 수가 없었지. 어쩌면 사냥꾼은 엘가를 보며 자신의 아내가 임신했던 순간을 떠올리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야.
슥.
그때 스텔라가 내 옆구리를 쿡 찌른다.
“태오 군.”
“왜요?”
슥슥.
주변 눈치를 본 스텔라가 오직 내게만 들릴 작은 소리로 귀띔 해 온다.
“사실, 예전부터 생각하고 있던 이야기인데. 저 사냥꾼이라는 남자 말이야. 어쩌면 나도 태오 군도 아는 사람일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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