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angmun reincarnation RAW novel - Chapter 176
당문전생 (175)
무한 진인의 방문
“얼마나 다행인고!”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갈외가 파안대소를 터트렸다.
“이 늙은이는 네가 불귀의 객이 될까 봐 노심초사했단다!”
가슴까지 쓸어내리며 제갈외가 웃었다.
“늙은이보다 먼저 가면 벌 받지. 암, 벌 받고말고.”
제갈외의 진심 어린 덕담에 당찬일이 희미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아직은 끊어질 목숨이 아니었나 봐요.”
“당연히 아니지! 이제 시작하는 청춘이 벌써 시들 생각을 하면 쓰나? 혼례도 치르고, 떡두꺼비 같은 자식들도 쑥쑥 낳고, 할 일이 많다!”
이 대목에서 제갈청청의 얼굴이 붉어진 건 왜일까?
제갈외의 일장훈시가 끝나자 남궁천이 몸을 보중하라며 귀한 약재를 선물했다. 약재는 매우 귀한 것이어서 당호민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제갈외와 제갈청청이 당호민의 안내로 서안 지부를 둘러보러 나가자 낙산 사태가 젊은 거지에게 눈짓했다.
“당 소협.”
젊은 거지가 작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우리는 당문에서 사옥정을 하나 이상 빼돌렸을 거라고 생각했소이다. 정마대전에 참가했던 낙화수(洛花手) 대협이라면 능히 그만한 능력이 있었거든.”
낙화수는 당협의 별호다.
“‘우리’란 사천성을 기반으로 하는 구파와 개방이겠군요?”
사천성에 터를 잡은 구파일방은 아미파와 청성파다. 그리고 개방은 발길 닿는 곳이 터이자 보금자리이니 모든 곳이 총타이자 분타다.
“아미파와 청성 그리고 당문은 사천이란 땅에서 불안한 동거를 지속해 왔소. 다행이라면 어느 한쪽으로 힘이 쏠린 적이 없거든.”
무려 육백 년 동안이나 이어진 대치는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그러다 정마대전이 발생하면서 이들의 주적은 마교가 되었다.
“마교를 칠 때는 모두가 한뜻이었지. 그러나 마교를 패퇴시키고 문제가 발생했소.”
이때 낙산 사태가 끼어들었다.
“바로 사옥정 때문이지.”
사실 아미와 청성은 사옥정에 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벽려군이 전달한 사옥정의 위력을 체감하고 사정이 전혀 달라졌다.
“사옥정은 마물이라오. 인간의 능력을 무한히 증폭시키는 마물, 그것이 사옥정이지. 거기다 멀쩡하던 사람의 이지를 앗아가니 이보다 무서운 물건이 어디 있겠소?”
청성에서의 사건을 환기시키며 낙산 사태가 말을 이었다.
“이런 마물을 가뜩이나 기세등등하던 당문이 취한다면 어찌 될까?”
불안정한 균형의 파괴.
“물론 우리에게도 사옥정이 하나 있었소. 그러나 우리 아미와 청성은 마기를 정화하고 나서 사옥정을 사용하자는 입장인 데 반해 당과로 대가주는 그러지 않을 것으로 보였지.”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사람. 그것이 세간에 알려진 당과로의 평이었다.
“마기를 제거하지 않은 사옥정은 제거한 것보다 몇 배 강한 능력을 발휘하오. 물론 나중에는 사용자의 정신을 파괴시키겠지만 당과로란 인간은 차후의 문제는 도외시할 것이라 여겼지.”
그래서 아미와 청성 그리고 개방은 계속해서 당문을 감시했다.
“설마 점혈로 사람을 죽이거나 하지는 않으셨지요?”
“음? 그게 무슨 말이요?”
낙산 사태가 눈을 동그랗게 뜨자 당찬일이 손사래를 쳤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당찬일의 장난스러운 웃음에 낙산 사태가 더는 캐묻지 않았다.
“아무튼 우리는 당문이 사옥정을 적어도 하나 정도는 감추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 일을 계기로 의심을 거두었소.”
당찬일은 낙산 사태와 제갈외 그리고 남궁천과 젊은 거지에게 삼 년 전의 일을 전부 밝히지는 않았다.
이들에게 모든 진실을 털어놓을 이유가 없을뿐더러 사건의 전모가 알려진다면 불필요한 문제가 야기될 공산이 컸다.
그렇다고 거짓을 입에 올리지도 않았다. 공개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된 부분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이들에게 능운비와 진소운을 알릴 필요는 없다.’
당찬일이 생각을 정리하는데 남궁천이 끼어들었다.
“너를 사지로 몰아넣은 백발인은 사옥정을 취한 자였겠지?”
“아마도요.”
잠시 뜸을 들인 당찬일이 빠르게 중얼거렸다.
“적어도 두 개 이상을 품었을 겁니다.”
당찬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낙산 사태와 남궁천이 서로를 바라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하나의 사옥정으로도 청성에서 그 사달이 벌어졌는데 무려 두 개 ‘이상’을 취한 자라면 얼마나 무시무시하겠는가.
침음하던 남궁천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를 찾는 것이 급선무이겠구나.”
* * *
놀랍게도 무한 진인은 혼자서 방문했다. 단 한 명의 수행원도 없이 본인 혼자 당문 서안 지부를 찾았다.
당연히 당인이 그를 맞이했는데 무한 진인은 정도삼강이라는 화산파의 장문인치고는 소탈한 모습을 보였다.
“당문에서 지부를 설립했으니 진작 찾았어야 했는데 늦었습니다. 그래도 섬서에서는 화산, 화산 떠드는데 미련한 소처럼 버티고만 있었어요.”
무한 진인이 고개를 저었다.
만만치 않은 사람이다.
무한 진인의 나이는 올해로 쉰넷. 그가 화산의 장문을 맡은 지 벌써 십오 년이 지났다. 순수 무공을 놓고 본다면 소림의 삼덕 대사에게 뒤지지 않는다는 평가를 듣는다.
한마디로 무한 진인은 나이로 보나 경륜으로 보나, 무공으로 보나, 당인과는 비교를 거부하거늘 시종일관 깍듯한 태도를 견지했다.
정도삼강의 입장에서 당문은 정사 중간의 골칫거리에 불과할 텐데 말이다.
“아닙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지요.”
당인 역시 삼 년 전의 그가 아니었다. 자식이 생사의 기로를 넘나들고 자신의 맡은 지부가 위기에 처하면서 그는 어쩔 수 없이 한 단계 발전했다.
살기 위해서.
이전이었다면 정도삼강이라는 이름 앞에서 위축되었을 것이나, 지금은 다소 여유를 가지고 무한 진인을 상대했다.
“제 자식을 보러 오셨다고요?”
“예.”
무한 진인이 짐짓 인상을 구겼다.
“영식을 해한 자의 정체가 서안부를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백발귀라고 들었소이다. 만약 그자의 소행이 사실이라면 서안부에 터전을 내린 본 파도 묵과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지요.”
무한 진인의 눈빛이 잠시 잠깐 불타올랐다.
“하여 영식께 당시의 상황을 직접 청취하고 싶었소이다. 또한…….”
당인을 바라보며 무한 진인이 넉넉한 웃음을 지었다. 더도 덜도 말고, 보통 사람들이 말하는 넉넉함에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딱 그 정도의 웃음을.
“당 도우의 영식은 본인의 제자와도 노수(路數)를 통해서 교류를 나눈 사이라서 더욱더 정이 가더군요.”
아미에서 벌어진 비무를 말하는 것이리라.
당시 감룡은 이십사수매화검법 가운데 중반의 팔초를 구사했고, 이에 맞서서 당찬일은 궁중 악기의 팔음을 초식으로 승화해서 상대했었다.
지나고 보니 꽤나 멋들어진 승부였지만 당사자들로서는 긴박했던 순간.
“그렇군요.”
당인이 형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는데 밖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찬일입니다.”
“드디어 왔군요. 들어오너라.”
당인이 소리치는 순간 평온하기만 하던 무한 진인의 눈빛이 불꽃처럼 일렁였다.
드르륵.
문을 열고 집무전으로 들어선 당찬일이 당인을 일별하고 무한 진인에게로 몸을 돌렸다.
‘이자가 화산의 장문.’
파―앗!
당찬일의 눈동자가 전각안으로 변하며 무한 진인의 특성을 빠르게 잡아냈다.
표정은 온화하지만 눈동자만은 차디찬 빙정(氷晶)이다. 이런 사람은 표리부동해서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부터 거짓인지 알 길이 없다.
입매는 곱고 매끄럽지만 끝이 위쪽으로 쳐들려진 상태다. 만사를 권태로워하고, 만인을 자신의 아래로 두고 있다는 방증이리라.
무심한 듯 죽은 눈동자에 서린 우수(憂愁).
이것이 근심이나 걱정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다른 이유로 혼탁하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무림인은 표정이나 음성 그리고 기세 같은 일차원적인 특질만으로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다. 눈빛이나 호흡처럼 뒤처진 것들로도 자신을 표현한다.
그런 견지에서 무한 진인의 눈빛은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지만 단 하나의 진실은 드러냈다.
그건 바로…….
‘이 사람은 정상이 아니다!’
소위 말하는 정도삼강의 장문인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이런 눈빛으로 세상을 탐식하듯 응시할 리 없다.
비록 소림과 무당 그리고 화산의 무학이 구파일방 가운데 가장 고강하지만 이들의 장문인 반열에 오른 자라면 무위보다 심적인 수양에 더 치중했을 테니까.
하지만 무한 진인의 눈동자는 도문의 장문인치고 지나치게 어두웠다.
이 세상의 모든 어둠을 한 번 더 씹어서 통째로 삼켜 버리겠다는 듯 그의 눈망울은 주변의 밝음을 자신에게로 끌어당겼다.
“음.”
당찬일이 나지막이 침음했다. 무한 진인이 발산하는 그늘이 그의 목덜미를 낚아채려 들었기 때문이다.
“괜찮으냐?”
당인이 서둘러 당찬일을 부축했다.
“괘, 괜찮아요, 아버지.”
당찬일이 애써 웃자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한 진인이 의자에서 일어섰다.
“제가 영식의 맥을 짚어 봐도 괜찮겠소이까?”
“장문께서요?”
“이래 봬도 소싯적에 기혈을 돌보는 쪽으로는 재주가 있다는 평을 들었소이다.”
당인이 뭐라고 할 사이도 없이 당찬일이 손목을 잡은 무한 진인이 그의 맥을 확인했다.
쿠르르―.
무한 진인의 엄지에서 모호한 기운이 들어와서 자신의 기혈 이곳저곳을 기웃거리자 당찬일이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돌렸다.
뱀 같은 자다.
자신이 아무리 마음을 잘 다스린다고 해도 무한 진인은 자그마한 빈틈을 발견하고 파고들 것이다. 그런 위험은 감수할 필요가 없다.
때로 피하는 편이 상수일 경우도 있다.
지금처럼.
호흡 곤란을 핑계로 무한 진인을 외면한 당찬일이 그가 보낸 기의 전령을 부드럽게 맞이했다.
‘이자는 내 수준을 언젠가의 어떤 상태로 상정했을 거야.’
선입견이란 마물은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작용한다. 무한 진인도 마찬가지. 그 역시 당찬일을 만나러 오면서 부지불식간에 고정관념을 품었을 거다.
츠츠츠―.
당찬일이 자신의 기를 내보냈다.
턱!
당찬일의 기가 무한 진인이 들여보낸 기의 전령과 마주치자 잠시 대치하다 맥없이 흩어졌다.
‘뭐지?’
눈을 감고 당찬일의 기를 견주던 무한 진인이 감룡자를 떠올렸다.
당찬일에게 화룡점정을 빼앗겼다고 술회한 감룡자. 그 말인즉슨 내공으로는 밀리지 않았지만 초식과 깊이에서 두드러진 차이를 보였다는 뜻이다.
고로 당찬일의 내공은…….
‘딱 그만큼이 아닌가?’
삼 년 전의 감룡자와 엇비슷한 내공. 더도 덜도 말고 감룡자의 수준보다 크게 앞서지도, 눈에 띄게 뒤처지지도 않는 정도의 내공.
마치 준비된 것 같은 내공력이라서 무한 진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삼 년 동안 와병했으니 내공이 늘었을 리는 없지. 그렇다고 크게 뒤처졌다면 그자의 손에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테고.’
자신이 예측한 그만큼에서 모자라지도, 넘치지도 않았기에 기꺼워야 하겠지만 무한 진인의 심기는 불편했다.
너무나 정석적이고 너무나 평이한 전개다.
‘설마하니 이 아이가 나의 생각을 넘겨짚을 정도의 심계를 지녔다는 건가?’
무한 진인의 얼음 같은 눈동자에 한 번 더 서리가 내렸다.
‘어디…….’
무한 진인의 엄지에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기의 순례자를 발출했다. 먼젓번의 전령은 예의 있게 행동했지만 이번의 순례자는 황명을 받은 군사처럼 당찬일의 기혈을 무작정 열고 들어왔다.
마치 불심검문 하듯.
그런데 낯설지 않다. 순례자의 기세는 거칠고 야성적이라서 받아들이기 껄끄러워야 마땅했지만 당찬일은 익숙하기 그지없었다.
이 기운은 다름 아닌…….
‘사옥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