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emporarily Closed for Work Reasons RAW novel - Chapter (290)
손을 맞잡은 삼신과 성연이 갈라진 틈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겨우 한 걸음.
하지만, 현실이 환상으로 변하는 데에는 충분하였다.
“우와와!”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성연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지구에서보다 10배는 커다란 초승달빛 아래 마치 동화 속에서나 볼 것 같은 휘황찬란한 궁전이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궁전 곳곳에서는 마치 핑커벨처럼 생긴 작고 귀여운 요정들이 날고 있었다.
“우앙! 요정이다! 너무 예쁘…….”
페어리들을 보며 무심코 예쁘다고 말하려다 성연이가 황급히 말을 삼켰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가까이에서 본 그들은 죄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근육신께서 가라사대! 맑은 정신에 건강한 육체가 깃든다 하셨어!”
“근육! 근유욱!”
게다가 그들 중 일부는 아령검을 번쩍 들고 있는 근육 사내의 거대한 석상 앞에서 솔방울을 엮어 만든 아령과 역기를 열심히 번쩍번쩍 들며 구슬땀을 흘리고 있었다.
뭔가 그동안 성연이가 생각해 왔던 요정의 모습과 뭔가 많이 달랐다.
샤락, 사라락.
그때 그들을 향해 아름다운 요정 소녀가 날아왔다.
성연이의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머리에 황금 꽃으로 만든 화관을 쓰고 있고 공주님 같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 요정 소녀는 성연이의 보물인 바비 인형보다 훨씬 예뻤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다른 요정들처럼 징그러운 근육도 없었다!
사실 드레스로 가려져 그렇지, 요정 소녀의 쩍 갈라진 복근을 보지 못한 것이 성연이에게는 다행이라 할 수 있었다.
요정 소녀는 유일신의 전생에서 용사 일호가 구해 주었던 요정 아기 아란이었다.
시간의 흐름이 다른 신의 탑의 세계에서 이제는 어엿한 페어리 퀸으로 성장했던 것이다.
“앗? 이, 이번에는 삼신 님께서 오셨어요?”
놀라는 아란의 모습에 삼신이 불만 있냐는 듯 붉은 눈을 치켜떴다.
왜? 내가 오면 안 돼?
“호호, 그럴 리가요. 어머, 거기에 귀여운 손님도 함께 오셨네요.”
“파괴.”
응, 우리 조카야. 성연이라고 해.
아란이 놀란 듯 눈을 살짝 뜨더니 드레스를 양손으로 움켜쥐며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위대하고 자비로운 유일신 님의 신혈을 이으신 성연 님. 꿈과 환상의 세계 페어리아에 오신 것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안녕하세요! 요정님!”
성연이도 아란을 흉내 내며 힘차게 외쳤다.
“파괴?”
근데 저건 뭐야? 저런 게 있어서 성연이가 놀랬잖아.
삼신이 손가락으로 근육 석상과 그 앞에서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헬창 요정들을 가리켰다.
그러자 아란이 볼을 발그레 붉히며 말했다.
“후후, 잘 만들었죠? 물론 영겁의 구도자님의 아름답고 웅장한 근육을 따라가지는 못하겠지만요,”
역사가 바뀌어 이번 생에서 영겁의 구도자 일호의 존재는 사라졌다.
하지만, 아란 또한 상급 신의 신혈을 이은 존재였다.
희미하지만 아란에게는 전생에서 그에게 구원받았던 기억의 편린이 남아 있었다.
그때의 기억과 가르침을 떠올리며 아란은 자신의 왕국에 그의 신앙을 부활시켰다.
“근육! 근유욱!”
“근육성전(筋肉盛典) 가라사대! 남자여, 울지 마라! 근손실 일어난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우람한 근육을 가질 수 있다!”
“고민이 있는가? 좋다. 일단 쇠질부터 하고 생각해라!”
열심히 근육성전의 가르침대로 쇠질을 하는 요정들의 모습에.
반짝!
반응하듯 영겁의 구도자의 석상의 이빨 부분이 희게 빛나는 것 같았다.
못 볼 걸 봤다는 듯 삼신과 성연이 동시에 그들을 외면했다.
삼신이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란에게 물었다.
“파괴.”
그래서 왜 부른 거야?
그러자 아란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심각한 얼굴로 말했다.
“신의 탑 89층의 세계수에 이변이 발견되었어요.”
아란이 손바닥을 짝 부딪쳤다.
츠츠츠!
그러자 허공에 이계의 풍경이 비치기 시작했다.
하늘을 꿰뚫을 듯 웅장한 기세로 서 있는, 무지개처럼 신비로운 오색 잎사귀를 가진 아름다운 세계수와.
사각, 사가각.
동시에 그것을 갉아먹고 있는, 밤처럼 시커멓고 흉측하게 생긴 벌레의 모습이 말이다.
파괴의 그림일기 (2)
세계수(世界樹).
앤트리니아에도 존재했던 신령스러운 기운을 뿜는 나무로, 그 기원은 태고의 창조신이 혼돈만이 존재했던 세계에 처음으로 만들었던 신의 요람에 닿아 있다.
바로 훗날 최상급 신이 되는 ‘한없이 베푸는 풍요’나 ‘소리 없이 기어 오는 악몽’과도 같은 고위 신의 씨앗을 키운 곳.
이런 기원을 가진 세계수가 있는 세계와 그렇지 않은 세계의 극명한 차이는 무엇일까?
바로 신의 유무다.
창조신의 신성을 머금은 세계수가 있는 세계는 새로운 신이 태어날 수 있는 가능성을 품게 된다.
신의 탑의 세계에는 신기하게도 그런 세계수의 씨앗들이 존재했다.
그것들을 발견한 유일신과 그의 분신들은 탑의 세계에서 신도로 삼은 신들과 페어리 퀸에게 그 세계수의 육성을 맡겼다.
사각사각.
지금 저 흉측한 벌레가 세계수를 갉아먹고 있는 89층의 세계는 페어리 퀸이 담당하는 세계다.
페어리 퀸이 양손을 꼭 모으며 삼신에게 부탁했다.
“저것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분명 파괴신의 파편입니다. 저희들이 상대하기에는 너무나 강력하고 위험한 존재. 부디 삼신님께서 나서 주세요.”
삼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쯤이야 식은 죽 먹기다.
마침 배가 고팠는데 잘됐다는 생각을 하며 삼신이 성연이에게 말했다.
“파괴.”
금방 끝내고 올게.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삼신이 세계수를 갉아먹고 있는 파괴신의 파편이 비치고 있는 허공을 향해 손을 뻗었다.
슈욱!
그러자 잠시 후, 삼신이 세계의 경계 너머 89층의 세계수에 도착했다.
성연이가 신기한 눈으로 그것을 보았다.
마치 극장에서 보던 영화 안으로 갑자기 삼신 삼촌이 들어간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끼이에?
갑작스러운 그의 등장에 세계수를 갉아먹고 있던 벌레가 머리를 빤히 들어 삼신을 보았다.
삼신도 놈을 보았다.
흉흉하게 빛나는 두 쌍의 핏빛 눈동자가 마치 거울처럼 서로를 비췄다.
모습은 다르지만, 그 기원은 서로 같은 두 존재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향해 입을 쩍 벌렸다.
고오오!
휘이이잉!
콰콰콰콰콰!
태풍, 아니 그것을 아득히 넘어서는 강풍이 불며 89층의 세계가 통째로 요동치기 시작했다.
서로를 향해 살의와 식욕을 불태우는 삼신과 파괴신의 분신이 대치하는 모습은 마치 두 개의 블랙홀이 서로를 집어삼키려 하는 것 같은 우주적 재해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승자는 결국 삼신이었다.
-끼에에에에엑!
츠츠츠츠!
단발마의 비명을 지르며 검은 연기로 화한 파괴신의 파편이 삼신의 입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꺼어억!”
삼신이 배를 두드리며 검은 트림을 했다.
그 광경을 본 페어리들이 일제히 날개를 파닥이며 환호했다.
“와아아! 삼신님께서 사악한 파괴신을 물리치셨어!”
“근육은 별로 없지만 정말 훌륭한 신님이셔!”
“삼신님 만세!”
그것을 보는 성연이도 덩달아 뿌듯한 기분을 느꼈다.
저 삼촌이 바로 우리 삼신 삼촌이다!
슈우욱!
임무를 끝낸 삼신이 그들이 있는 세계로 귀환했다.
그런데 삼신이 조금 이상했다.
고오오!
삼신의 몸에서 칠흑처럼 어둡고 타르처럼 끈적거리는 기운이 새어 나왔다.
게다가 기분 탓인지, 그의 붉은 눈동자가 평소보다도 더욱 더 흉흉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사, 삼신님? 왜 그러세요?”
페어리 퀸 아란이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삼신이 방금 삼켰던 파괴신의 파편, 채 소화되지 않은 그것이 삼신을 향해 은밀히 속삭였다.
-아이야, 네 끝없는 허기를 채우기에는 나로는 부족하지 않니?
꾸르르르륵!
삼신은 배에서 천둥 같은 배곯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래, 부족하다. 이상하게도 파괴신의 파편을 삼키자 오히려 더 허기가 밀려오는 기분이었다.
마치 지옥도의 아귀가 된 것처럼, 그 허기는 지금도 점점 커져 가고 있었다.
파괴신의 파편이 키득거리며 삼신의 시야에 비치는 걸 더듬이로 가리켰다.
-저길 봐. 먹을 게 아주 많구나. 하나같이 맛있어 보이지 않아?
삼신을 향해 환호하는 페어리들.
특히 그중 페어리 퀸 아란은 중급 신의 신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탐나는 먹이였다.
“사, 삼신님?”
삼신의 살기를 느꼈는지 아란이 파르르 날개를 떨며 뒷걸음쳤다.
삼신이 자신의 배 속에 있는 파괴신의 파편에게 물었다.
저것들을 잡아먹으면 배고픔이 가실까?
-호호호! 그럼, 물론이지. 먼저 저것들을 먹고 지구로 돌아가서 너와 같은 다른 분신들과 본체까지 전부 먹어 치우렴. 그럼 이 지옥 같은 허기를 달래는 건 물론이고, 너는 모든 세계에서 오롯이 빛나는 절망이 될 수 있단다. 유일신과 다른 분신들 따윈, 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너야말로 위대한 태고의 파괴신의 신혈을 이은 진정한 신 중 신이니까!
-자, 일단은 저 거슬리는 페어리들부터 시작하자구나.
꾸르르르륵!
꿀처럼 감미로운 음성과 미칠 듯한 허기를 참지 못한 삼신이 페어리들을 향해 입을 쩍 벌렸다.
“유, 유일신 님! 영겁의 구도자시여! 저희들을 지켜 주소서!”
불길함을 느낀 페어리 퀸 아란이 다급히 자신의 신성을 끌어 올렸다.
츠츠츠!
그러자 눈부신 황금 광휘가 보호막을 치듯 종족들을 감쌌다.
고오오오!
하지만, 삼신의 입안에 잠재한 시커먼 어둠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아란의 신력을 꺼뜨리고 블랙홀처럼 그들 모두를 빨아들이려 했다.
꼬옥!
그 순간, 삼신의 동작이 갑자기 멈췄다.
핏빛으로 빛나는 삼신의 눈동자가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작은 여자아이, 성연이를 담았다.
흥분했는지 볼까지 발갛게 물든 성연이 삼신의 손을 마구 흔들며 외쳤다.
“와! 삼신 삼촌, 너무 머시써! 꼭 영화 속 히어로 같았어!”
신기했다.
성연이를 보고 있자니 신기하게도 미칠 듯한 허기와 파괴의 충동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삼신이 조심스레 물었다.
“파……괴?”
정말…… 멋있어?
다른 삼촌들보다도?
“응! 삼신 삼촌이 제일 머시써!”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환하게 웃는 성연의 모습은 마치 보석처럼 아름다웠다.
눈이 부실 정도로.
삼신은 생각했다.
자신이 수천 년의 시간 동안 유일신과 함께 이 신의 탑을 오른 것은 이런 성연이의 미소를 다시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삼신이 성연이를 살짝 손으로 밀었다.
“삼신 삼촌?”
“파괴.”
위험하니까 잠시 물러나있어.
파직! 파지직!
삼신의 눈에 신력이 집중되더니 시뻘건 스파크가 일기 시작했다.
구구구구궁!
동시에 요정의 세계, 페어리아가 지진이라도 난 듯 사납게 요동쳤다.
“허억!”
페어리 퀸 아란이 기겁했다.
삼신의 눈에 깃든 파괴 광선에는 능히 한 세계를 파괴하고도 남을 압도적인 힘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자신들의 세계인 페어리아에 향한다면 모든 것이 끝이다.
하지만, 아란의 우려와는 달리 삼신의 필살기인 파괴 광선이 향한 곳은 그들이 아니었다.
스스스…….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본 삼신의 눈에 파괴신의 파편, 흉측한 벌레의 모습 대신 인간 여성의 모습으로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존재가 비쳤다.
분명 미인이라고 할 수 있었지만, 삼신은 그녀가 벌레의 모습일 때보다도 지금이 더 추악하다고 느꼈다.
그녀, 나락의 화신이 살포시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어머, 안 통하네. 너희끼리 싸우는 걸 보고 싶었는데 아쉽네. 역시 이 시나리오는 무린가? 뭐 괜찮아. 이건 사소한 여흥이었으니까. 진짜는 이거란다.”
나락이 허공에 손짓했다.
“자, 보렴.”
스스스스!
그러자 어떤 풍경이 그들 앞에 비치기 시작했다.
-끼에에엑!
-캬오오오!
-크르르르!
굶주린 짐승들의 흉포한 울음이 우주에 진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