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24
제523화
‘…쟈마드.’
강설은 굳이 꺼내어 살펴보지 않았던 기억에 시선을 보냈다.
시대 전쟁 이후, 쟈마드와는 마주치지 못했다. 그의 소식은 2년이 지난 후, 그가 산의 원신 그아몽을 쓰러트려 원신의 힘을 찬탈했을 때 비로소 알게 되었다.
이후의 교류는 없는 상황.
애초에 쟈마드는 현재, 강설과의 계약에서 해방되었다. 그 자신의 힘으로 위대한 경지에 이르러 속박을 벗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선, 강설도 딱히 더 언급할 가치를 느끼지 못했다.
쟈마드가 속박을 벗어나고자 필사적으로 노력한 것도 아니었고, 그와 쟈마드 사이에 엄청난 원한이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자연스럽게 헤어진 것이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이 있는 것처럼.
강설은 지금 자신의 눈앞에 놓인 길을 걷는 것만 해도 벅찼다. 그의 품을 떠난 다른 소환수들에게 배신감을 느끼거나, 지배욕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아니, 이제 와 생각해 보면 그들과의 관계가 단순히 지배와 피지배의 계약 관계였을까?
“…….”
강설의 표정이 어두워진 것을 눈치챈 카렌이 그의 등을 팡팡 두들겼다.
“카하핫! 찾았네, 드디어. 망할 자식! 정신을 차렸으면 얼른 돌아와야 할 것 아니야!”
“이해할 수 없지만… 뭐,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 바쁠 수도 있지만 말이죠.”
카루나까지 너스레를 떨었다.
마엘이 넌지시 물었다.
“혹시… 그가 아무런 연락을 취하지 않은 겁니까?”
“……마엘.”
강설이 이제는 전과 달라진 쟈마드와의 관계를 설명했다.
“으흠… 그런 사정이 있었군요. 그 또한 자신만의 길을 걷는 과정이라… 하긴, 그의 욕망은 누구도 막을 수 없으니….”
“총동원령에 대해 자세히 말씀해주실 수 있습니까?”
“말 그대로입니다. 부족 연맹의 지배력이 미치는 모든 트롤 부족이 같은 날 한자리에 모입니다.”
“주변국들은?”
“말씀하셨던 2년 전 사건 이후로 모두 외부의 일에 소극적이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원신제를 전후로 하여 긴장 상태에는 이르겠지만 특별한 군사적 행동은 보이지 않겠죠.”
뻔한 이야기다.
국력의 쇠퇴와 2년 전 겪은 재난을 핑계로 부족 연맹의 준동을 무시하는 게 태반일 것이다.
“부족 연맹의 힘은… 변화가 없습니까?”
“쇠락을 말씀하신다면, 결단코 아니라고 말하는 게 옳겠지요. 오히려 연맹의 힘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력합니다.”
“음….”
강설이 말을 아꼈다.
부족 연맹의 힘이 견제 없이 거대해지는 건 대륙에 또 다른 재앙을 불러올 것이 분명했다.
“다만, 그건 힘의 총량을 말하는 것이지 부족 연맹 내부의 사정은 또 다른 듯합니다.”
“…그렇습니까?”
“예, 내분의 조짐이 있습니다.”
“…내분?”
“6대 부족… 아니, 돌풍의 대부족이었던 갈대 바람 부족이 궤멸 상태에 이른 지가 오래되었으니 5대 부족이라 칭하는 게 맞겠군요. 여하튼 5대 부족의 결속력이 생각보다 약해진 모양입니다.”
“…아!”
돌풍을 제외한 5대 부족.
강철 산, 유황 해골, 빙하아귀, 공포 벼락, 높새 날개까지.
강철 산과 공포 벼락을 제외하고는 모두 마주친 전적이 있는 부족들이었다.
그중 몇몇은 꽤 깊게.
“…문제가 생긴 겁니까?”
“주도권 싸움부터, 예정된 원신제 때문도 있습니다.”
“원신제라….”
“장로회부터 시작해서 분주한 모양입니다. 다시금 그들이 진군하면, 트롤의 시대가 오리라는 말도 공공연히….”
“트롤의 시대가 오면 마엘에겐 좋은 겁니까?”
마엘이 턱을 괴고 생각하다가 빙긋 웃었다.
“좋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역사를 사랑하지 않습니다.”
“하하….”
“더욱이, 이건… 어렵게 구한 정보이긴 합니다만….”
“다른 정보가 있습니까?”
“대부족의 균열이, 사실은 의도된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게 정말입니까?”
이 부분에 대해선, 강설도 짐작 가는 바가 있었다.
‘만약에 쟈마드라면….’
마엘이 담담하게 말했다.
“쟈마드를 중심으로, 몇몇 대부족을 비롯하여 중소규모 부족들이 규합하고 있다는 소문입니다.”
“……역시.”
“쟈마드는 한 번 죽은 몸. 이끌던 부족인 바위 어금니의 잔당은 이미 부족 연맹에 갈가리 찢겨 흡수됐죠. 부족 연맹 입장에서는 쟈마드의 존재를 굳이 받아들일 필요는 없으나….”
“그의 존재감이 필요하겠지.”
“맞습니다. 그는 엄연히 산 원신의 힘을 취했으니까요.”
“아무튼, 그들이 쟈마드를 받아들인다고 공표했나?”
“일단 겉으로는 그렇습니다.”
“끌어들여 죽일 수도 있겠군.”
“하하하! 그것 또한 맞는 말이지요.”
“쟈마드의 대처는?”
“그가 어떤 대답을 했을 것 같으신가요?”
갸웃하며 묻는 마엘.
강설은 피식 웃을 뿐이다.
“받아들였겠지, 그 녀석은.”
“맞습니다. 피하지 않았죠.”
“혹시, 다른 대부족들도 쟈마드의 수상한 낌새를 눈치챘나?”
“의심은 하고 있겠으나… 확신까지는 모르겠군요. 이러나저러나 결과는 같을 것 같기도 하고….”
“쟈마드가 궁극적으로 원하는 게 뭐지?”
마엘은 웃고, 강설은 스스로 답한다.
“…싸움. 녀석은… 막아서는 전부와 싸울 거야.”
“…아마도.”
쟈마드의 의도를 눈치챔과 동시에, 아쉬웠다.
“녀석은 어째서 나를 찾지 않았을까?”
“그거야말로 간단한 질문이군요. 그건… 그 자신의 싸움이기 때문 아닐까요? 당신과는 관련이 없는 일이라 생각했던 것일 수도 있지요.”
“나와는 관련 없는 일이라….”
강설은 곰곰이 생각했다.
만일 일이 벌어진다면.
그날, 쟈마드가 모든 것을 걸고 싸운다면….
“마엘.”
“…….”
“부족 연맹의 위치와 원신제의 날짜, 알 수 있을까?”
“…가실 생각인가요? 아마 그날 그 순간만큼은 판데아 어느 곳보다도 위험한 장소일 텐데요?”
아직은 답할 수 없다.
“…알고만 있게.”
마엘이 피식 웃었다.
“저도 그럼 당신께 말해두기만 하겠습니다.”
* * *
휘오오오오…
장인 오르고가 거대한 불 속에서 한없이 새카만 검을 꺼내어 들었다.
검은 시커먼 불길을 혓바닥처럼 내밀다가 금세 조용해졌다.
철컥-
오르고는 검을 미리 만들어둔 검집에 집어넣은 후 그것을 실로이에게 내밀었다.
“자, 가져가라. 내가 만드는 마지막 물건이니.”
“대단하잖아… 어떻게 이런 힘이….”
“하찮은 재주다. 너 같은 녀석이 이런 곳까지 기를 쓰고 올 만한 힘도 아니고.”
“…….”
턱…
그의 대장간에 침묵이 떠다녔다.
정적.
실로이를 제외한 그 어떤 타인도 주변에 없었다.
“마음이 맞는 형제들을 모은다는 거, 거짓말이지?”
“…혹시, 언제부터 눈치챘을까?”
“사람 보는 눈은 있다. 하나부터 열까지 거짓말만 내뱉는 녀석의 말 따위, 처음부터 믿지 않았어.”
“조금은 신뢰받고 싶었는데… 그래서 있잖아… 궁금한 게 생겼는데?”
끄덕…
오르고가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주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는 실로이의 괴물 같은 기운에도 전혀 위축되지 않고 본 모습 그대로 행동했다.
“그런데도 내게 이걸 건네는 이유가… 뭘까?”
“별 건 아니다. 그냥….”
“그냥?”
“…외로워 보여서다.”
“…….”
실로이의 표정이 굳는다.
줄곧 여유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불쾌하다는 심정이 얼굴에 드러났다.
“그만한 힘을 가졌으니, 내가 보태는 힘이야 없어도 그만이었겠지. 그런데도 날 찾아와 굳이 함께해달라고 한 이유는… 뻔하지.”
“…그만.”
“겁을 내고 있는 거다. 혼자서 걸어야만 하는 길을. 감당하지 못할 거라면 지금이라도 관두는 게….”
“입….”
파아악-!
오르고의 멱살을 움켜쥐는 실로이.
“입… 닥쳐… 뭘 안다고….”
“아니라면 내 착각인가 보군… 내게 검을 가져가서 뭘 할 생각이지?”
“히히… 히히히히….”
그녀가 히죽 웃었다.
“아주 멋지게! 멋지게 죽을 거야! 나는 불사니까.”
“…좋을 대로 해라.”
스윽…
실로이가 멱살을 놓고 뒤돌아섰다.
조금 진정한 듯한 느낌.
“같이 가자, 오르고.”
“싫다.”
“거절할 수 없는데?”
“거절할 수 있다.”
“…강제로 데려갈 생각이라면?”
“푸흐흐흐….”
오르고가 웃었다.
그리고 섬뜩한 말을 내뱉는다.
“시체를 데려가서 뭐 하게.”
“…뭐?”
그 말과 동시에 실로이가 뒤돌았다.
푸우욱…
오르고의 손바닥에 시커먼 단검이 틀어박혔다.
“…왜?”
“나는 세상을 떠났다. 이 힘은, 너같이 위험한 녀석에게 건넬 만한 힘이 아니야.”
“같이 박살 내자고! 가지 마!”
“내 몸이 완전히 굳기 전에 첨언 하나 하지. 너, 내 검을 뽑을 땐 반드시 진심이어야 한다.”
“…….”
“뽑는다면, 진심으로 해. 네 말과 행동처럼 거짓이 아닌.”
“…참견은.”
“꺼져, 이제.”
파직…
파아아아아아앙-!
오르고의 손등을 찌른 단검이 부서지며 기이한 충격파가 퍼져나갔다.
후우우우우우…
충격파는 순식간에 저 멀리 사라지고, 남은 건 돌처럼 굳어버린 오르고뿐.
검고 푸르다는 게 이런 것일까.
그는 스스로 광석처럼 변해버렸다.
“실로이 님!”
“비샤, 됐어. 그만 가자.”
“괜찮으십니까? 그 녀석은….”
“아, 돌덩이가 됐네.”
“부술까요? 그라보라면….”
땅… 땅…
중지를 구부려 두들겨보는 실로이.
“아니, 그라보도 못 부셔 이런 건.”
“그런 게 가능할 리가….”
“하하핫! 아버지의 자식들은 전부 대단해! 눈앞에서 당했잖아? 어쩐다….”
실로이가 조금 울적한 표정으로 뒤돌아보았다.
“조금 외로워졌네.”
“실로이 님….”
“가자, 비샤. 다음 목적지로.”
“…예!”
스스로 광석이 된 오르고.
그의 단검이 부서지며 흩날린 파동은 분명 누군가에게 전해졌을 것이다.
* * *
쏴아아아아…
“또 소나기야….”
“이번엔 그래도 마차 안이라서 다행이지.”
“그러게.”
마차가 달달 거리며 시골길을 지나갔다. 웃돈을 주지 않았으면, 마부도 거절했을 만큼 깊숙한 시골.
“여긴 왜 온 거야?”
“찾아야 할 게 있어서.”
카렌의 물음에 강설이 답했다.
찾아야 하는 것.
당연하게도 말의 유지다.
강설은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말의 유지를 여유가 될 때 전부 회수할 생각.
정예 기사단으로 유명한 포트라 왕국의 한 지방. 국가와 국가를 넘나드는 통행에 큰 어려움이 따르는 요즘에 차멜리의 신분 보증이 있으니 움직이는 속도가 훨씬 빨라졌다.
‘그나저나 포트라라면… 그 녀석밖에는 없을 텐데.’
그 녀석이라고 표현하는 게 살짝 망설여지는 말.
“어? 그쳤다!”
카렌이 마차가 멈추자 창을 확인하고는 문을 열고 나갔다.
강설도 마부에게 대금을 지불하고 이곳에 자리를 마련할 테니 기다려달라 말했다. 혹시나, 문제가 생겨 이곳을 곧장 떠나야 할 수도 있었으니.
“같이 가, 카렌.”
“빨리 와! 꼭 휴양온 것 같네!”
피식…
주변 풍경은 한적한 시골 그 자체.
그리 크지 않은 경작지를 가지고 저택은 투박하지만 단단한 느낌을 가졌다.
강설의 목적지는 저 별장이었다.
그의 나침반이 분명 저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곳에, 그의 말이 있다.
저벅…
저벅…
저택에 다가가 경계병에게 신분을 증명하자, 곧 정문이 열리며 안경을 쓴 중년 여인이 나타났다.
“어머나, 세상에… 연락을 받지 못했는데… 저희 아버님과 연이 있으셨나요?”
“…그렇습니다.”
바라노아의 교황, 차멜리의 신분 증명이 있는 이상 천하무적. 상대의 의심 없이 관계를 시작한다는 게 심적으로 편안하게 느껴졌다.
문제는…
저 여인이 방금 말한 단어다.
아버님.
중년 여인은 말 그대로 중년이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하고 풍채는 컸으며 나이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런 여인의 아버지라면.
‘…노인이지.’
다다다다다…
안에서부터 뛰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어어… 피, 피하세요!”
“…예?”
“아버님이 가끔… 어엇….”
촤아아악-!
누군가 강설을 향해 들고 온 나무통을 휘둘러 물을 뿌렸다.
스으윽…
스으윽…
카렌과 카루나는 슬쩍 몸을 빼 피했지만, 강설은 피하지 않았다.
그 결과로, 온몸이 젖었다.
정신이 번쩍 드는 차가움.
“이… 이이… 저놈이 날 죽이러 왔다!”
“아버님!”
“분명해! 저놈 눈이 잘못됐어! 내 숨을 거둬가려고 온 놈이야!”
“손님께 이게 무슨… 아버님!”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저택의 사용인들에게 질질 끌려갔다.
“저놈을 집에 들여선 안 돼! 절대로!”
“죄, 죄송해요. 저희 아버님이 낙마하신 후에 정신이 온전치가 않으셔서….”
“하… 하하….”
강설은 웃었다.
노인의 말은 틀린 말도 아니었으며,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을 어느 정도 예측하고 있었기에.
“그럼, 안내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죠.”
강설은 히죽 웃으며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그의 말 필소드.
포트라 왕국의 기사단장을 역임한 실력자.
그리고… 언젠가 낙마하여 문제가 생긴 말.
필소드는 치매를 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