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534
제533화
휘오오오오…
강설이 그림자를 갈무리했다.
이스카와의 싸움은, 원신마저 쓰러트렸던 쟈마드와의 합일은 그의 경지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었다.
낯설었던 감각은 점차 조밀해져 이제는 신체를 움직이는 것과 크게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털썩…
쟈마드가 새까맣게 변한 채로 바닥에 쓰러졌다. 이스카라는 저주를 짊어진 대가는 고통이라는 이름으로 그에게 주어졌다.
미동하지 않는 쟈마드.
그러나 그의 상태가 위험하다거나 생사가 불투명하다거나 등 그런 염려는 되지 않았다.
강설은 쟈마드를 호흡하기 편한 자세로 눕혔다.
그리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많은 트롤의 눈이 그를 향했다.
붉게 충혈되고 광기로 물들었던 눈은 어디로 갔는지, 눈매는 여전히 무서웠지만, 흰자위는 깨끗해졌고 동공 또한 매끈해졌다.
쟈마드 쪽뿐만 아니라, 잔도가 있었던 위치에도 트롤들이 우르르 몰려있었다.
“…잔도.”
“명예롭게 떠난 자여.”
잔도는 그 이름과 그가 남긴 약간의 흔적만으로 숨 쉬었다.
다 타버린 검은 재 말이다.
푸스스스…
검은 재가 흩어진다.
전쟁은 멈추었다.
싸워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기에. 혈신의 지배를 벗어난 순간, 벗어나지 못할 것을 상정한 쪽의 가정은 모두 무의미해진다.
이스카는 다시금 봉인되었다.
선지자를 자처하고 악으로 그들을 이끌던 원신의 지배도 끝이 났다.
오직, 짊어진 자만이 남았다.
새로운 세상이 찾아왔음을 깨달은 혈신의 파벌은 저항을 일제히 멈추었다. 서로 죽일 듯이 싸우고 죽이며 싸웠던 시간들은 오늘부로 잠시 멈출 것이다.
과거는 닫혔고 현재는 맺어졌으며 미래는 열려있다.
이제는, 미래를 준비해야 할 때이다.
철컥…
철컥…
쟈마드가 온갖 유물을 치렁치렁 매달고 말뚝에 메였다.
어째서냐고 묻지 않아도 되었다.
강설도 그 이유를 알았다.
이스카의 공포가 이들에게 남아있는 것이다. 혹시 쟈마드가 이스카의 저주를 견뎌내지 못한다면, 또 다른 재앙이 찾아올 것이기에.
브론이 차분하게 말했다.
“…지켜보는 거다, 우선은.”
* * *
강설은 연맹에서 하루를 넘게 머물렀다. 내전이 어떻게 매듭이 지어지는지, 쟈마드는 언제 깨어나는 것인지를 확인해야 했기에.
쏴아아아아아…
이스카를 쓰러트린 후, 비가 왔다.
비가 대지에 맺힌 피를 전부 쓸어가고 있었다. 이곳에서 살점이 나뒹굴고 뼛조각이 발을 찔렀다는 걸 모두가 기억했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강설은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으며 명상을 취했다. 최근 들어 그러한 시간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도전자의 경지를 그 문턱이나마 잠시 밟아 본 느낌은 생경했지만, 그것이 그가 명상을 취하는 이유의 전부인 건 아니었다.
마음이 들끓고, 오락가락했다.
갈피를 잡지 못할 만큼 혼란스러울 때도 있었고 어쩔땐 어떤 일에 대해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게 되었다.
“…변했어, 확실히.”
사람이 변했다.
뿌리는 그대로였지만, 다양한 성격이 파생된 것 같다는 느낌.
원인이 무엇일까 고민했는데, 의외로 결론은 쉽게 났다.
소명.
말들의 유지를 되찾아갈수록 마음이 묵직해졌다. 이것이 더 나은 상태로의 변화일지 아니면 불안정한 상태로 나아가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아….”
모든 말의 유지를 되찾으면, 어떤 상태가 될까.
단순히, 경지를 말하는 것이 아닌 인간 강설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아마도 지금과는 유의미한 차이를 보이지 않을까? 그럼…
콰르르르르르르르르릉-!
콰아아아아아아아아아앙-!
명상 중, 갑자기 내리친 낙뢰.
불빛이 번쩍한다는 생각과 함께 하얘지는 시야.
“…….”
강설은 빛이 터져 나온 방향을 보고 곧장 몸을 움직였다.
아무래도 불안했다.
불빛이 터져 나온 방향이 쟈마드가 구속된 결계 쪽이었기에.
후우우욱……
후우우우욱……
거친 숨소리가 빗소리를 뚫고 들려왔다. 이미 하루를 꼬박 지새운 대주술사들이 말했다.
“…곤란하군.”
“위험한 상황이야.”
“이스카의 마기가 짙어졌어.”
강설이 결계에 다가가며 자세히 살펴보니, 쟈마드의 몸을 포박했던 사슬 중 하나가 뜯겨나가 있었다.
낙뢰가 저지른 일일까 싶어 브론을 쳐다보았다.
브론은 강설의 시야를 느끼고 선뜻 답해주었다.
“봉인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야.”
“…….”
“아마도 이스카가 쟈마드를 죽일 것처럼 몰아붙이는 것 같….”
그 순간, 쟈마드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크아아아아아아아아아-!”
찢어지듯 갈라지는 목소리.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겁니까?”
“큭큭… 글쎄… 어떻게?”
세상에 하나 남은, 분노를 통제할 수 있는 트롤이 있다면 그건 쟈마드였다.
쟈마드가 분노와 저주를 통제하지 못해 이스카의 봉인이 풀리면 이곳에 모인 이들이 전부 죽는 것은 물론이고 판데아에도 전란이 찾아올 것이다.
지금의 쟈마드를 어떻게 할 방법은 없다. 그가 스스로 이겨내기만을 바라는 게 대주술사들이 선택한 방법이다.
그리고 강설은, 그 방법에 동의한 적 없었다.
찰박…
물웅덩이를 밟으며 강설이 결계 가까이로 다가갔다.
“뭐 하는 짓이냐!”
“결계 안으로 들어서면….”
스으으윽…
브론이 한쪽 손을 들어 대주술사들을 만류했다.
“…지켜보지. 내버려 둬라.”
“으으….”
강설은 쟈마드에게 다가갈수록, 그가 점점 작아진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도리어.
어쩌면, 이곳에 모인 모두는 착각하고 있는 걸지도 몰랐다.
이 모든 걸 오롯이 쟈마드 홀로 견뎌내야만 한다고. 그에게 짊어지길 강요하는 것일지도.
스으윽…
이스카가 풀려날 가능성을 상정한 것인지 대주술사들은 언제라도 봉인을 강화할 수 있도록 자세를 취했다.
“크으으으으으….”
한쪽 팔을 제외하고 나머지 신체가 말뚝에 묶인 쟈마드가 괴로워했다.
그의 침이 비와 함께 뚝뚝 떨어졌다.
콰지이이익…
강설은 그의 사정권까지 다가갔다.
“…엄청나군.”
느껴지는 힘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스카가 악독하게 쟈마드를 몰아붙이는 것 같았다.
강설은 쟈마드에게 접근하는 건 위험하다고 결론지었다. 그리고, 그 결론을 무시한 채로 앞으로 나아갔다.
그렇게, 쟈마드의 코앞까지.
콰르르르으으으응-!
콰지이이익-!
또 한 번 내리치는 낙뢰.
이스카, 혹은 괴로워하는 쟈마드가 유도한 것이 분명했다. 낙뢰는 정확히 사슬과 말뚝을 부쉈다.
그리고 순식간에, 쟈마드는 풀려났다.
“크아아아아아아-!”
쟈마드가 주먹을 뒤로 당겼다.
“위험해!”
“이런….”
대주술사들이 이상을 깨닫고 개입하려는 찰나.
후우욱…
후우우욱…
쟈마드가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강설의 코앞에서 주먹을 멈췄다.
“쟈마….”
빠아아아아아아악-!
그 상태에서 강설의 얼굴을 후려치는 주먹.
아무리 가까운 거리였다지만 쟈마드는 괴물, 당연히 강설은 끈 떨어진 연처럼 두 바퀴를 구른 후에야 자세를 바로잡을 수 있었다.
“퉷….”
혀에서 느껴지는 씁쓸한 피 맛.
강설이 히죽 웃고 말했다.
“그렇다는 거지?”
파아아아아악-!
순간적으로 강설의 신형이 사라졌다. 그리고 쟈마드의 지척에서 나타나 횡으로 발을 후려 찼다.
빠아아아악-!
쟈마드는 막지 않았다.
턱에 정확히 꽂히는 발차기.
쟈마드도 화가 났는지 강설을 노리고 주먹을 계속 휘둘렀다.
후우우우웅…
빠아아아악-!
빠아아아아아악-!
단단한 방어력을 가진 강설조차 골이 울려 시야가 흔들릴 정도의 묵직함.
강설은 정신을 바로 하며 쟈마드가 공격해오는 틈 사이사이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빠아아아악-!
빠아아아아아악-!
묵직함이 쟈마드가 위라면 민첩함은 강설이 위였다.
빠아아악-!
빠아아아아악-!
서로 물러섬 없는 난타전.
살점이 뜯겨나가도 초를 세기 전에 되돌아오는 둘이었기에, 싸움은 처절하게 흘러갔다.
빠아아아악-!
쟈마드의 얼굴이 강설의 주먹에 얻어맞아 크게 돌아갔다.
파지지지지지직-!
순간, 그의 손에 이스카의 주력이 깃들었다.
파아아아악-!
황급히 반대쪽 팔로 그것을 억누르는 쟈마드.
강설은 알았다.
쟈마드는 여전히 싸우고 있다는 것을.
물론, 봐줄 생각은 없었다.
빠아아아아아악-!
주먹이 양팔이 봉쇄된 쟈마드의 턱에 제대로 꽂혔다.
쟈마드가 얼굴을 흉악하게 일그러트리며 강설에게 달려들었다.
“크아아아아!”
빠아아악-!
빠아아아악-!
빠아아아아아악!
뼈를 부수겠다는 각오로 후려치는 양쪽. 이 싸움은 쟈마드와 강설이 치른 싸움 중 손에 꼽는 졸전일 것이다.
뻐어어어어억-!
강설의 틈을 노린 올려 차기에 턱을 얻어맞고 뒤로 넘어가는 쟈마드의 신형.
파아아앗-!
강설이 재빨리 주먹을 움켜쥐고 쓰러진 쟈마드를 덮쳤다.
후우우우우우우우웅-!
파아아아아아아아아앙-!
강설의 주먹이 쟈마드의 얼굴 앞에서 멈추었다.
비를 맞은 쟈마드는 초췌해 보였다.
“아아….”
“…쟈마드.”
“강설… 이제 좀 정신이 드는군.”
쟈마드의 눈에 초점이 돌아왔다.
긴장한 상태로 상황을 엿보던 브론이 한숨 쉬었다.
“…한고비는 넘겼군.”
* * *
이후의 모든 일은 모두 쟈마드의 바람대로 진행되었다. 쟈마드는 정신을 차리는 대로 이스카의 기운을 다잡는 데에 모든 시간과 노력을 쏟았고 며칠 내에 안정화되었다.
충격적인 것은 그 이후에 벌어진 그의 행보다.
결론만 말하자면, 쟈마드는 추방되었다. 아니, 스스로를 추방하기를 원했다.
그것은 받아들여졌고, 쟈마드는 자신의 뜻을 존중해준 대주술사들에게 감사를 표했다.
모든 것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느낌이 왔다. 쟈마드의 생각 역시도.
동이 트기 전 이른 아침, 쟈마드는 강설에게 자신을 찾아와달라고 말했다.
쟈마드는 연맹이 내려다보이는 산에 올라 그 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이 자리에는, 강설과 쟈마드뿐이었다.
쟈마드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그 산만 한 덩치를 어설프게 가린, 후드가 달린 로브를 입고 있었다.
“그래, 이쯤 되면 해보고 싶었던 건 다 해본 셈인가?”
강설이 그를 찾아왔음을 알고 너스레를 떠는 쟈마드. 강설은 천천히 나아가 그의 곁에 앉았다.
“왕이 되고 싶다고 하지 않았나?”
“꿈은 꿈일 뿐이지. 왕이 되는 건 무리다. 이 꼬락서니를 해서는…. 지금에 와서는 막연하게 생각했다고 느껴지는군.”
양팔을 벌리는 쟈마드.
“내가 왕이 되면, 동족이 자유로워지겠지.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모든 건 그 때문이었던 건가.”
“그래… 나는 이스카의 자리를 대신하고자 했던 게 아니야. 지배하고자 한 적도 없다. 단지….”
그는 서서히 동이 터오는 하늘을 눈에 담았다.
“증명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무엇을?”
“우리가 가치 없는 존재들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해낼 수 있다는 것을.”
쟈마드는 그가 원했던 삶을 살았다.
“강설, 나는 떠날 거다.”
역시나, 생각대로다.
“…어디로?”
“글쎄… 여기만 아니라면 어디든 상관없겠지.”
“앞으로는 무엇을 할 생각이지?”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 있다.”
“의문?”
그는 이레귤러다.
“아직은 말할 수 없다. 언젠간 답에 가까워진다면… 그땐 말할 수 있겠지.”
뭐가 됐든, 강설은 쟈마드의 생각을 존중했다.
“돌아올 건가?”
“…언젠간 돌아올지도. 답을 찾지 못한다면 영영 떠돌아다니겠지만.”
“연맹이 너를 필요로 할 텐데.”
“내가 짊어진 건 우리의 어둠이자 저주다. 그늘은 어딘가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해. 너무 가까우면 도리어 그들의 햇빛을 가려버린다.”
“…….”
“그들은 해냈어. 볕을 쬘 자격이 있다.”
쟈마드.
그렇다면 너는.
네가 해낸 것은.
강설은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쟈마드라는 사내에게 이러한 말은 튕겨 나갈 뿐이다.
“강설.”
“…….”
“네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스으윽…
쟈마드가 벌떡 일어났다.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우리가 조금 더 일찍 만났다면 나는 지금보다 나았을까?”
“만약은 없어.”
씨이이이익…
쟈마드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었다.
“…강설, 그 어디에 있든 해답을 찾게 된다면 네게 돌아가마. 너도 날… 형제로 생각한다면.”
쟈마드가 투박하고 거친 주먹을 내밀었다.
툭…
강설이 그 주먹에 훨씬 작은 주먹을 부딪쳤다.
“언제든, 형제여.”
[어쩐지 중대한 선택을 내린 것 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