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31st Piece Overturns the Board RAW novel - Chapter 96
제95화
이번엔 단순히 강해지는 것을 넘어서, 기운이 크게 변한 카루나.
그 기운을 목도한 마그라는 아예 돌이 된 것처럼 굳어버렸다.
팟.
“내가 먼저!”
카렌이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불타는 홍련검이 마그라를 내려찍었다.
콰아아앙-!
“크으으윽!”
그리고 이어, 카루나의 검이 마그라를 짓눌렀다.
콰아아아아아앙-!
“끄아아아악!”
마그라의 발이 땅 아래로 처박히며 정상의 바닥이자 아래층의 천장이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콰지지지직!
불의 제단 대붕괴의 시작이었다.
* * *
마그라의 흐릿한 시야에 유황 해골 병력들이 들어왔다.
“마그라 님! 마그라 님! 어찌 된 일입니까! 정신 차리십시오!”
이 목소리는 마그라가 최근 자주 들었던 목소리였다.
“잔… 도….”
“마그라 님! 정신이 드십니까? 놈들은….”
팟.
파앗.
콰아아앙!
카렌, 카루나 그리고 쟈마드와 강설이 차례대로 무너진 천장 사이로 떨어져 내렸다.
우르르르…
뒤이어, 굳이 성화까지 올라갈 일이 없어진 사람들이 폭삭 무너져 버려 넓어진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스노우맨!”
“다들 멀쩡하네! 자네 덕분에 살았어!”
“이, 이제 어떡하지? 밑에서 트롤들이 올라오고 있어!”
마그라가 비척거리며 일어섰다.
후우웁…
거칠게 숨을 들이켜는 마그라.
그만큼 말을 내뱉는 데에 심력을 쏟아야 했다.
“쿨럭… 자, 잔도….”
“마그라 님! 어찌 되신 일입니까?”
“…문제가 생겼다. 아주 심각한.”
“어떤 문제길래 그러십니까? 방금 충격으로 제단의 중심축이 또 어긋났습니다. 이것만 복구되면 저도 가세를!”
“아니, 이제 중심축이 중요한 게 아니다. 그딴 것쯤은 차라리 부러져버리는 게 나아.”
강설이 마그라를 가만히 기다려주었다. 상황이 어떤 식으로 진행되든 변수는 없었다.
마그라가 침중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곳은 오늘로써 끝났다. 네 계획도 끝이 났으니, 미련 갖지 말고 당장 부족으로 돌아가 연맹에 전해라.”
“네? 그게 무슨… 혹시 저 쥐새끼들 때문입니까?”
마그라가 고개를 흔들었다.
자조 섞인 웃음과 함께 그가 내뱉은 말은 충격적인 것이었다.
“쥐새끼가 아니었다. 오판이었어.”
“예?”
“늙어도 감만큼은 여전하다. 오늘… 난 죽을 것이다.”
“마그라 님! 추가 병력이 도착했습니다! 이제 저들은….”
“닥치고 들어라! 잔도! 병력으로 어찌할 수 있는 게 아니야. 머리가 없는 몸은 고깃덩이에 지나지 않아! 오늘… 난 죽겠지만 내 목숨값으로 인해 유황 해골은 죽지 않아도 된다. 연맹에 전해라. 마그라가 금술까지 사용했노라고. 이렇게만 말해도 늙은이들은 알아서 판단할 것이야. 시간이 없다, 가라. 어서!”
“…….”
“그리고… 반드시 그림자를 기억해라. 이 마그라의 최후가 원통하다면 말이야.”
“마그라 님!”
“그만! 더 할 말은 없다!”
“…감사했습니다.”
마그라가 잔도를 다그치며 앞으로 나섰다.
강설도 이런 경우는 처음이었다. 도망을 치다니.
그리고 정말 잔도는 입술을 깨물고 군말 없이 얼마 남지 않은 병사들을 수습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자, 잡아야….”
“그럴 여유는 없습니다.”
실질적으로 이 인원들이 갖춘 전투력에서 강설이 차지하는 전력이 거의 전부라고 할 수 있었다.
쌍둥이 기사 둘이서 마그라를 상대하고 있고 쟈마드는 강설을 보호해야 했으니, 여기서 싸움판을 키울 여력은 없었다.
고민도 잠깐.
마그라가 후퇴하는 잔도에게서 관심을 끄라는 듯 최후의 불꽃을 피워 올렸다.
화르륵-!
그가 결연하게 말했다.
“이 마그라, 최후는 추하지 않게 힘 써보지. 길동무가 되어준다면 좋겠군.”
우직.
우지지직.
그의 쇠약했던 몸이 점차 부풀어 올랐다.
흔적만 남아 있던 근육들이 다시 차올랐고 주름은 어디 갔는지 팽팽한 피부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초열의 마그라가 금단 주술 : 화신(化神)을 사용합니다.]
[초열의 마그라의 신체 능력과 주술력이 극대화됩니다.]
[금단 주술은 시전자의 생기를 그 제물로 합니다.]
찌지지직-!
마그라의 모습은 일전 마주했던 푸르가처럼, 불길을 두른 원숭이처럼 변했다. 이성을 잃은 듯, 흰자위가 드러난 것은 물론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콰아아앙-!
카렌에게 가해진 그의 공격은 아까와는 달리 카렌을 뒤로 밀어낼 정도로 막강했다.
“이 영감탱이가!”
카렌은 의연하게 검을 휘돌려 그의 칼날을 밀어냈다. 그 틈으로 카루나가 불쑥 숨결을 들이밀었다.
캉!
경쾌한 울림.
마그라 또한 카루나의 공격을 쉽게 쳐낸 다음 공세를 그대로 이어갔다.
카아앙!
카앙!
캉!
순식간에 십여 합이 넘는 충돌이 일어났다.
그 과정에서 손해를 본 쪽이 어디라고 딱히 말하기가 곤란할 정도로 백중세(伯仲勢)가 계속됐다.
그때, 제단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콰아앙!
쾅!
마그라와의 격돌이 계속될수록 흔들림은 커져만 갔다. 아마, 잔도가 제단을 떠받치는 것을 멈췄기 때문이리라.
마그라는 어느새 무아지경에 빠르게 빠져들었다.
콰과강!
“더 강하게!”
카아앙!
“더 빠르게!”
카가가가가가각!
카앙! 캉!
참으로 기묘한 싸움이었다.
“타 죽어라! 타 죽어! 히히! 불이야!”
그의 속도는 번갯불과 같았고 힘은 천지를 흔들었다.
가장 완벽한 상태의 카렌과 카루나도 그에게 상처를 입히지 못하고 있었다.
‘아니, 그게 아니다.’
카렌과 카루나는 꾸준히 마그라에게 상처 입히고 있었다. 단지, 마그라가 찔리고 베여도 순식간에 회복할 뿐.
화신 주술이 끝나면, 이변이 없는 한 마그라는 최후를 맞이할 것이다.
그때였다.
콰아아아아앙!
제단 한쪽 귀퉁이가 크게 흔들리더니 제단의 흔들림이 심해졌다.
쩌적…
쩌저저적-!
제단이 실시간으로 붕괴하는 것이었다.
“꺄아아악!”
“다들 꽉 잡아! 떨어지지 않게 해!”
“수레! 누가 수레를 좀 도와줘!”
“잡아! 아빠 손 잡아!”
아비규환 속.
위험한 상황에서 사람들은 마치 한 덩어리처럼 모여들었다.
강설은 이성을 잃은 듯했던 마그라의 동공이 원래대로 맑게 되돌아오자 불길함을 느꼈다.
“피해!”
마그라가 제단이 붕괴하는 그 순간을 노려 최후의 수를 사용했다.
쩌저적…
“큭큭큭… 너무… 늦었다. 너희는 빠져나가지 못한다, 함께 죽자 그림자여!”
치직…
치지직…
[초열의 마그라가 금단 주술 : 도화선을 사용합니다.]
[잠시 후에 폭발합니다.]
치이이이익…
“흐흐… 너희들이 빠져나가기 전에, 불길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이다. 이 제단도… 너희도… 모든 것을.”
휘오오오오오…
마그라는 스스로 거대한 폭탄이 된 것 같았다.
거대한 힘이 그의 몸속에 모이고 있었다. 그가 살아생전 모아왔던 모든 힘이.
“도, 도망….”
“어떻게… 어떻게 해야 해!”
절체절명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긴박한 이 시간.
“사, 살려줘.”
“도와줘, 스노우맨!”
“제발 우리 좀 살려줘!”
“죽기 싫어… 싫어… 엄마.”
사람들은 하나가 되어 강설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가 보여줬던 동화 같던 일화들이, 요그나툰까지 끌려온 이상 절대로 살아남을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주민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살 수 있다고. 포기하지 말라고.
모든 이들의 시선이 강설에게 집중되었다.
강설이 입을 막 떼려 하는 그때,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철그럭.
“아무래도 안 되겠네….”
“…카렌?”
“99점 줄게.”
그것은 회색빛의 기사.
카렌이었다.
“지금 막 다 채웠어, 100점”
강설은 그녀가 했던 적이 있는 말을 떠올렸다.
– 점수를 다 채우면 널 진심으로 섬길게.
곧 마그라의 폭발이 소리를 집어삼켰다.
콰아아아아아아아앙-!
삐이이이이…
그 순간, 카렌이 맹렬히 회전했다.
[카렌이 불의 꽃을 사용합니다.]
[일정 반경 범위 내의 열기를 흡수합니다.]
……
참으로 기이한 만남이었다.
몰락한 제국의 기사가 한낱 그림자 소환사의 손에 의해 깨어나다니. 그것도 아직 그 수준이 한참이나 떨어지는 자에게.
찬탈자들에게 진의 목을 내어준 후, 카렌은 잿더미가 되었다. 너무 큰 분노와 슬픔에 마음이 다 타버렸다.
그런데 어째서, 길고 긴 시간을 지나 그녀는 일어선 것일까.
저 냉혹하게 생긴 인간의 손에 의해서.
여정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여전히, 그녀에겐 살아갈 이유가 없었다.
비록 카루나가 이제는 손닿을 거리에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공허했다.
소환사와의 여행은 그럭저럭, 나쁘지 않았다.
그림자가 되어도 허기는 여전했기에 맛있는 것들을 잔뜩 먹었다. 이전 시대와는 달라진 먹거리들. 맛은 더 세련되었고 자극적이었다.
그래도 지금에 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음식은 소환사가 해준 음식이었다. 모닥불에 둘러앉아 후후 불어가며 스튜를 먹을 때면, 정신이 아득해졌다.
마치 몬트라 제국 깊숙한 곳, 그녀의 처소에서 단잠에 빠졌을 때 꾼 꿈같았다.
꼭, 모험가라도 된 기분.
그녀는 여전히 진의 기사이고 싶었지만, 모험가도 나쁘지 않겠다는 느낌을 그때 처음 받았다.
카렌은 여행 내내 그녀 자신이 방황하고 있다고 느꼈다.
‘방황? 내가?’
그 방황은 무엇과 무엇 사이에서일까.
삶과 죽음.
혹은 진과 소환사에게서.
‘아닐 거야.’
그녀는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부정했다.
영원히 진의 기사이고 싶었다.
그늘 협곡에서의 일이다.
– 날아가도 좋아, 쿠파.
거대한 새의 목을 간지럽히는, 등 돌린 소환사는 신비로운 자였다. 소환사가 한 말에 괜히, 그녀의 마음이 홀가분해졌다.
단 몇 달의 여정일지라도 그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가 가는 곳 어디든, 생명이 있는 곳이라면 그를 원했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흑… 흐윽….
– 구원이다. 이런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날 수가 있나!
그를 기적, 혹은 구원이라 여기는 사람들이 존재했다.
‘내가 보기엔 평범한데….’
모든 눈길이 그를 좇았다.
그 눈길에 괜히, 그녀 자신도 우쭐해졌음은 아무에게도 말 못 한 비밀이었다.
– 영웅들은 게을러. 날 구해주지 않았잖아.
군트가 죽어가며 한 말은, 그녀의 심장에 비수가 되어 박혔다. 아직도 속 좋게 방황하는 그녀를 꾸짖는 듯한 말이었다.
세상이 이런데, 너는 여전히 게으르구나.
‘아니야! 난… 난….’
그녀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힘이 있음에도, 그것을 어떻게 휘둘러야 할지 막막했다.
그런데, 소환사는 달랐다.
무표정한 눈으로 어딘가를 바라보았다. 확신에 찬 듯이, 이 길을 알고 있다는 듯이.
그녀는 그가 부러웠다.
그녀는 흔들림을 더는 주체할 수 없었다.
이미 알고 있었다.
그가 옳다는 것을.
하지만, 또다시 두려워졌다.
이대로라면 진을 잊을 텐데, 그렇게 되면 생애 가장 소중한 기억들이 사라질 텐데.
스윽…
새의 깃털을 어루만지던 소환사가 뒤로 돌았다.
그는 강설이 아니었다.
진이었다.
“그래서, 나를 다시 찾아온 건가? 충직한 기사여.”
“그래, 진.”
“여전히 우물쭈물하는군. 그래야 너지. 고집불통인 건 알아줘야 해.”
그녀도 안다.
지금 진이 보인다는 건, 여기가 현실이 아니라는 얘기였다.
콰아아아아아-!
…렌!
끼긱…
끼기기긱!
현실은 더 괴로운 곳에 있었다.
뜨겁다.
그래서 괴롭다.
한순간이라도 회전을 멈추면 불길이 사람들을 집어삼킬 것이다.
그것이 더 괴롭다.
‘괴로워….’
영웅이란 이런 것일까.
모든 이의 고통을 대신 짊어져야 하는 것.
뿌듯하면서도 동시에 괴로워 정신이 다시금 아득해졌다.
현실에서 멀어지면, 진이 다가왔다.
“어떤 답을 원하지?”
“…진.”
“카렌?”
“…황제는 시대가 만들고 시대는 사람이 만든다며.”
진의 허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다.”
“황제가 탄생하는 새로운 시대라는 거… 그런 걸… 그런 걸 어떻게 아는 거야?”
“그 방법이 궁금한 것이냐?”
“그래.”
진은 곧바로 답을 내놓았다.
“눈을 좇아.”
“눈?”
“눈은 생명의 영혼이나 마찬가지다. 그 눈이 향하는 곳을 기억해.”
“눈이 향하는 곳….”
키리리리리릭-!
여전히 화염을 제압하기 위해, 회전하는 카렌에게 그런 것이 보일 리가 없었다. 분명, 그랬다. 보일 리가 없었다.
그런데 보였다.
‘보여.’
사람들의 눈은 모두 강설에게 향해 있었다.
‘아니, 난가?’
아직 모르겠다.
“답이 되었을까?”
“그래, 진.”
“…카렌.”
“고마웠어, 그동안.”
“카렌.”
화르르륵!
잿빛의 세상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추억을 담은 그림들을 모조리 불태우듯이, 그녀의 세상이 불타올랐다.
끼리리릭…
화아아아아악-!
끼기기긱!
마침내, 그녀의 회전이 멈췄다.
장막이 걷히듯, 먹구름을 청명한 하늘이 밀어내듯 마그라의 불꽃이 카렌의 사라져 버린 검에 모여들었다. 그 모습이 마치 허공을 부여잡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하아… 하아아….”
“카렌!”
“머리칼이….”
그녀의 머리칼이 잿빛에서 붉은빛으로 뒤바뀌었다.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카하하! 아직… 아직 나한테도 태울 게 남아 있었어!”
그녀는 기뻐 보였다.
정적이 흘렀다.
어느새, 과도한 충격으로 중심축이 바로잡힌 것인지 제단의 붕괴는 이미 멎어 있었다.
그녀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소환사여!”
“카렌….”
“저는 여전히 모르겠습니다. 힘을 쥐고도 어찌 휘두를지, 무엇을 베어내야 하는지를.”
“…….”
“하나,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는 듯합니다. 그러니 묻습니다.”
그녀의 미소가 사라졌다.
“제게 그 길을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강설이 답했다.
“얼마든지.”
카렌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몬트라 황가의 수호자 제10위 카렌, 오늘부로 수호자의 자리에서 물러나겠습니다. 그간 감사했습니다.”
화르르르륵…
거대한 불길이 그녀의 손에서 마그라를 향해 치달았다.
[카렌이 홍련참(紅蓮斬)을 사용합니다.]
[힘을 통제할 수 없습니다.]
[홍련참이 향상됩니다.]
“안녕, 진. 난 떠날 거야.”
여전히 카렌의 눈엔 진의 환영이 보였다.
하지만, 진의 환영에 불길이 옮겨붙었다.
마치 빛바랜 사진이 불에 타는 듯이, 그의 환영이 일그러졌다.
그는 웃으며 말했다.
– 날아가도 좋아, 카렌.
환영이 비로소 사라졌다.
치지지지이이이익…
따스한 기운이 제단을 휩쓸었다.
[깨달음! 카렌이 새로운 능력을 깨우칩니다.]
[카렌이 절기 : 노을 그리기를 깨우칩니다.]
[절기 : 노을 그리기가 탄생합니다!]
바야흐로 대 정화(淨化)의 시대.
굶주린 악과 삿된 모든 것들이 불에 타 스러지게 될 것이다.
“커… 커허어억….”
불길에 휩싸인 채 고통에 겨운 비명을 토해내는 마그라.
새 시대의 서막은 어스름 녘의 노을과 함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