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20)
고시생 시련의 탑.
5층에 독서실이 있으나, 그 밑 1층부터 4층까지 당구장, PC방, 만화방, 노래방으로 구성된 상가건물을 이르는 명칭이다.
그중 나는 PC방에 와 있었다.
사람들이 키보드를 거칠게 두들기며 게임에 열중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물론 그들은 모두 회색이었다.
‘특별한 건 없네.’
못 보던 게임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인터넷 뉴스 칸을 살펴도 특별히 눈에 띄는 이슈는 없었다.
포털 사이트 실시간 검색어에도 연예인이나 정치적 이슈만 가득할 뿐.
하늘이 추락하는데도 세상은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검색창에 >메르헨의 마법 기사>라고 검색하려고 했다. 역시나 치이익, 거리며 노이즈가 일면서 검색어가 보이지 않았다.
감각적으로 검색하고 엔터를 누르자, 이번엔 컴퓨터 화면 전체가 노이즈로 뒤덮였다.
섭리와도 같은 무언가가 >메르헨의 마법 기사>에 관한 정보를 극도로 제한하는 것만 같았다.
“아으.”
치사하네, 진짜.
아무래도 인터넷은 별 소용이 없겠다.
◆ ◆ ◆ ◆ ◆ ◆ ◆ ◆
시간이 흐르고, 그동안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아무것도 먹지 않아도 배고프지 않았고, 밤이 돼도 졸리지 않았다.
어느덧 추락하는 하늘은 3분의 1까지 내려온 상태. 시간상 이틀이 지난 참이었다.
나는 맨정신으로 여러 방법을 강구했다.
이 튼튼한 몸으로 자동차에 가볍게 치여보기도 하고, 큰 빙괴를 만들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뿐이었다. 시련을 통과하기 위한 조건은 실마리조차 찾아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
수많은 가설을 세우며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대로변에서, 사람들 틈에 끼어 있으니 돌연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고시 생활. 이 세상이 오로지 나만을 따돌리는 것 같았던, 그때의 풍경. 느낌.
그 시절의 감각이 강하게 되살아나 구토감이 몰려왔다.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황급히 역에 있는 공중화장실로 달려가, 변기에 헛구역질했다.
“하아, 후우….”
가까스로 속을 진정시키고 변기 물을 내린 뒤.
세면대에서 세수하고 화장실을 나섰다.
“…조졌다.”
사람을 넘어 사물까지도.
내 눈에 비치는 모든 것이 점차 흑백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전부 알고 있다. 이것은 사암의 시련일 뿐이다. 내 정신을 갉아먹기 위해 마련된 가짜 세계일 뿐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 느꼈던 감각이 선명히 되살아나니 지랄 맞게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신림동 길을 내달려 원룸에 돌아왔다.
연탄 모양 키링이, 모래시계가, 마리모가, 법학 서적이, 전부 흑백으로 물들어 있었다.
“이든!”
사역마를 소환하려 했으나 묵묵부답이었다.
그제야 나는 내 팔이 회색으로 물들어 버렸다는 사실을 알아챌 수 있었다.
◆ ◆ ◆ ◆ ◆ ◆ ◆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었다.
단지 내 시야에 내비치는 세상이 완전히 흑백으로 뒤바뀌었을 뿐.
마치 컬러 TV에서 옛날 흑백 TV로 바뀐 듯한 광경.
그나마 추락하는 하늘만이 유일하게 제 색채를 잃지 않은 채였다.
어느덧 저 하늘도 반절이나 내려와 있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나는 이 시련의 통과 조건을 털끝만큼도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
“…….”
신림동 길을 걸어 다녔다.
침잠해가는 기분이었다.
하다못해 >메르헨이 마법 기사>를 제작한 회사에라도 찾아가 보고 싶었지만, 법인명을 검색해서 주소를 알아내려 하면 화면에 노이즈가 일어나 버리니 미칠 노릇이었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 만한 점은, 사물은 흑백으로 변해도 만져진다는 점.
구체적인 감촉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그래도, 아직 이 세상으로부터 완벽하게 따돌려지지 않은 건 천만다행이었다.
◆ ◆ ◆ ◆ ◆ ◆
[ 상 태 ]이름 : 아이작
Lv : ???
성별 : ?
학년 : ?
칭호 : ??????
마력량 : 500 / 500
– ?? 회복 속도(??)
하늘이 제법 가까워졌다.
짐작하건대, 앞으로 사흘 안에 이 세상은 멸망하리라.
그러나 내 눈에는 오로지 흑백 풍경만이 내비치고 있었고.
나는 이 시련을 통과할 방법이 무엇인지 여전히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좁은 원룸. 나는 구석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생각하는 중이었다.
어쩌면 좋을까. 대체 어떻게 해야 이 시련을 넘어설 수 있을까.
생각하고 생각하며 주위를 둘러보다가, 문득 책상 위 흑백 달력이 내 눈에 들어왔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닫자, 내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나는 시간이 멈춘 사람처럼 달력을 응시하며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9월 23일.
오늘은 어머니의 기일이었다.
……
꼭 가고 싶은 곳이 있었다.
아무리 가짜 세계라고 하더라도, 츄리닝 차림으로 그곳에 가고 싶진 않았기에 그나마 보기 좋은 차림으로 갈아입었다.
흰 티와 청 재킷, 검은 바지. 물론 흑백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사이즈는 다행히 잘 맞는 편이었다.
바람은 그리 쌀쌀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덥지도 않았다.
나는 전철을 타고 납골당에 도착했다.
유리 캐비닛 안에 작은 유골함 하나와 꽃다발, 그리고 사진이 든 액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사진 속에 담겨 있는 건 멋쩍은지 어색하게 웃고 있는.
누구보다도 사랑스러운 여인의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네.”
엄마.
기억을 더듬어 보면, 나는 참 멍청한 새끼였다.
공부하겠다고 스마트폰을 꺼놓고 책에만 정신이 팔려서, 한참 나중에야 어머니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말았으니.
내가 등장하는 재미없는 극에서 고시 생활이란 하나의 모놀로그였다.
세상에서 고립되어 가는 감각.
책 속에 파묻힌 채 나 혼자 별 지랄을 다 떨어대며 기약 없는 미래를 향해 달려나갈 뿐이었으니.
그나마 허무하게 흘러가는 시간은 내가 앞으로 나아갈 힘을 되찾을 수 있게 도와주었지만.
고시에 합격하는 순간까지도 어머니의 별세 소식을 들었을 때 느꼈던 감정이 나아질 일은 없었다.
사법연수원 입소식을 마치고 임명장을 든 채 나는 납골당을 찾았다.
엄마 아들 정말 굉장하지 않느냐고, 웃으면서 소식을 전하려고 했다.
하지만 막상 어머니 사진을 보니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아서, 나는 이곳에 주저앉아 한참을 말없이 울기만 해야 했다.
눈을 감았다. 잠시, 조용히 심호흡했다.
다시 눈을 뜨고, 오랜만에 보는 어머니 사진을 더욱 선명히 머릿속에 담아내고서.
나는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납골당을 나서고 덜컥거리는 전철을 타고 신림동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전철 창문을 통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이 가까워져 있었다. 처음과 비교하자면 3분의 2는 내려온 듯했다.
바위 마력이 내비치는 아름다운 빛깔이 무척 선명히 내보였다.
죽음이 다가온다.
이 지독한 풍경이, 무게추처럼 나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나마 [얼어붙은 영혼]의 효과가 나를 차분하게 만들어 주었으나, 그것만으로 해결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 ◆
신림동에 도착하자 육교로 향했다.
나는 난간에 팔짱을 올린 채, 차들이 시끄러운 소음을 내며 지나다니는 도로를 묵묵히 바라보았다.
흑백 풍경.
돌아보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고시 생활, 내 눈에 비쳤던 풍경은 원래 이토록 칙칙했으니까.
“…….”
나는, 나를 잃어선 안 됐다.
그래서 오른손에 [서리불꽃]을 일으켰다.
어째선지 마력량이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으나, 미약하게나마 [서리불꽃]을 일으켜 유지하는 건 충분히 가능했다.
화염처럼 이글거리는 냉기 마력 또한 흑백으로 보였다.
아무런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으나, 그 냉기 화염을 보고 있자니 아직 내가 살아 있다는 실감이 났다.
시간이 흐르고.
마력이 다 떨어져 힘을 다한 성냥처럼 [서리불꽃]이 얌전히 사그라들었다.
그동안 열심히 생각해봤지만, 역시 이 시련을 어떻게 통과해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서리의 시련 때처럼 갑자기 악신이 부활해 세계가 멸망한다면 모를까.
여기선 그저 나 혼자만 고립되어 가고 있을 뿐이었으니.
그렇다고 해도, 나는 조금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좌절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욱 각오를 다질 뿐이다.
내가 꽃이라면, 오물로 가득한 수렁에서도 기어이 피어날 것이었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뜨고서 감정을 가다듬고 조용히 발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리, 나는 의지를 불태웠다.
그때였다.
육교 난간에 무언가가 부딪쳐 턱, 하는 둔탁한 소리가 났다.
동시에 차라라랑, 하고 이 세상에서 들려선 안 될 청아한 소리가 들려왔다.
“……?”
발을 멈추고 뒤쪽으로 고개를 돌려 소리가 들린 난간 쪽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나는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흑백으로 물든 세상에서, 형형색색의 별 무리를 일으키며 유일하게 반짝이는 소녀가 있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건지 난간에 착지한 자세. 그녀의 끝부분만 묶인 연보랏빛 머리칼이 잠시간 붕 떴다.
“어이쿠.”
그녀는 마녀 모자를 손으로 푹 눌러 날아가지 않게 고정하고는.
난간에서 폴짝 뛰어내려 내 쪽을 향해 마주섰다.
그러더니 뺨에 홍조를 띠고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어 보였다.
“드디어 찾았다.”
그 순간 평정심이 사라지고, 가슴속이 북받쳐 올라 내 얼굴이 종잇장처럼 일그러지려 했다.
그러나 숨을 가다듬고 깊게 내쉬어, 나는 가까스로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을 수 있었다.
“선배….”
내게 한없이 빛나 보이던 사람이, 내 시야에 내비치고 있었다.
“회장. 너 찾느라 누나 완전 힘들어 죽는 줄 알았다구? 자, 기회를 주지! 어서 이 누나를 위로해 주지 않으련?”
자기 가슴께에 손을 올리고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도로시.
어떻게 그녀가 내 눈앞에 나타난 건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 도로시 하트노바 ]Lv : 183
종족 : 인간
속성 : 바람, 바위, 별빛
위험도 : X
심리 : [ ★☆★☆랑☆★☆★☆★ ]
그녀가 진짜라는 사실을 알아채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