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cademy’s Weakest Became A Demon-Limited Hunter RAW novel - Chapter (181)
* * *
아스트레앙 가문은 현재 검성 제랄드와 천재 마법사 히스토리아가 결합해 이루어져 있었다.
다만, 그 과정은 아름다운 연애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추악한 성욕으로 점철된 사랑과 전쟁에서 어느 여자가 제랄드라는 남성을 차지하는가, 하는 쟁탈전이 그 배경이었다.
아스트레앙 가문의 가주, 제랄드 아스트레앙은 한때 난봉꾼으로 유명했던 남자다. 지위와 명성으로 항상 양옆에 여자를 끼고 다녔던 호색한이었다.
히스토리아는 제랄드를 사랑했던 여인 중 한 명이었고, 어떻게든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다른 여인들을 몰아냈지만.
그렇다고 이 여자 저 여자 모두 탐했던 제랄드의 과거나 그의 문란한 성품이 바뀌는 것은 아니었다.
메를린 아스트레앙은 그런 아버지를 증오했다.
그의 지위를 고려한다면 몇 첩을 두든 이상할 건 없었으나, 어머니를 놔두고 다른 여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는 걸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으니.
하물며 히스토리아는 체념한 듯 제 남편에게 자제하라고 이를 뿐이었다. 메를린으로선 그저 자신이 정실이라는 이유로 체념한 채 흐지부지하게 넘어가는 어머니가 답답할 노릇이었다.
그렇기에 메를린은 진흙처럼 성욕으로 질퍽거리는 문란한 관계가 아닌, 꽃처럼 아름답고도 순수한 연애를 바랐던 것.
하지만 오로지 검만을 바라보며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황실 기사단이 되면서, 사내놈들이란 게 성욕에 찌든 대화밖에 안 하는 걸 엿들을 때마다 메를린의 바람은 이상처럼 변해 갔다.
순애란 게, 그렇게 찾기 어려운 것이었나. 기사가 된 이후로도 누군가에게 연애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던 메를린에게 순수한 사랑이란 동경할 수밖에 없는 개념이 되어버렸다.
그러니 풋풋한 청춘으로 완연한 아카데미에서 아이작과 루체의 관계가 메를린에게 무척이나 예뻐 보였던 건.
필시 두 사람은 메를린이 꿈꿔왔던 순애를 이루고 있으리라 믿었기에 그랬던 것.
하물며 그런 분이 화이트의 멘토라는 사실에 메를린은 남몰래 기뻐했다.
그런데.
‘왜 하필 그런 모습을 보이신 겁니까, 아이작 공….’
공신제 준비 기간에 아이작과 도로시가 앳된 연인처럼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는 모습을 본 뒤로, 메를린은 현실을 부정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결국엔 아이작도 빌어먹을 아버지, 제랄드 아스트레앙과 비슷한 부류였단 걸까. 상냥한 얼굴로 그 음란한 성품을 꼭꼭 감춰둔 성욕 덩어리였단 말인가…!
…아니, 실례되는 생각이었다. 애당초 메를린 자신이 모르는 오해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경계하지 않을 순 없으리라.
아이작, 그 남자는 겉보기엔 얼굴도 잘생긴데다 성품도 반듯하다. 사춘기에다 신분 격차를 신경 쓰지 않는 스노우화이트라면 그에게 호감을 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메를린은 아이작에게 은근한 경계심을 갖추었다.
낫술과 대검술의 기초 정도는 가르쳐 주는 관계라고 해도, 함께 시간을 보내며 그 성실한 모습에 정을 갖게 되었다고 해도.
아이작이 여자를 밝히는지 아닌지를 따지는 건 별개의 영역이었으니까.
* * *
메를린이 쌀쌀맞은 태도를 보이는 건 충분히 납득이 갔다.
아무리 나와 화이트가 친밀한 사이라고 해도 극과 극인 신분 차이를 무시할 수는 없고, 애당초 녀석의 손목을 잡고 앞장서는 행위부터 문제이기도 했다.
내가 호위 기사였어도 나 같은 놈은 경계했으리라.
화이트를 믿고 그랬을 뿐이지만, 상대가 다른 황녀였다면 지금쯤 내 손목을 날리느냐 마느냐를 주제로 심도 있게 논의했겠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번졌으리라.
그리고….
‘그때 봤구나.’
메를린은 나와 루체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생각해 왔으나.
공신제 준비 도중에 도로시와 함께 있던 내 모습을 우연히 발견한 뒤로 혼란을 느끼는 듯했다. 심리를 읽고 알 수 있었다.
나를 난봉꾼일지도 모른다고 여기고 화이트와의 신체 접촉을 경계하는 것이었다.
별 감흥은 없었다. 새삼스럽지도 않으니까.
나는 내 애정캐들에게 한없는 애정을 느낀다.
내가 사랑하는 애들에게 애정을 퍼붓는 행위에 대고 메를린이 뭐라 생각하든 그게 대수겠나.
“…미안해, 화이트.”
화이트의 손목을 놓자 그녀는 “아.”하고 나지막한 탄식을 흘렸다.
그러나 메를린은 나를 쏘아 보길 멈추지 않았다. 경계심 짙어진 거 봐라.
예상치 못한 살벌한 분위기에 화이트는 당황했다. 그녀는 일부러 억지 미소를 지으며 잔상이 남을 만큼 양손을 빠르게 가로저었다.
“아, 아니에요! 미안하다뇨! 전 아이작 선배가 데려와 줘서 너무너무 기뻤는데요?! 그보다, 저기, 메를린…?”
“…저도 실례했습니다.”
메를린은 화이트를 불편하게 만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녀는 마지못해 고개를 한 차례 숙이고 화이트 옆에 섰다.
나와 메를린은 아무 말 없이 화이트와 함께 경기장 건물을 빠져 나갔고.
화이트는 침잠한 분위기에 어쩔 줄 몰라 어리둥절한 기색을 보였다.
점심을 먹은 이후로도 메를린 아스트레앙은 내내 나를 주시했다.
내가 화이트와 조금이라도 신체를 접촉하려 할 때마다 불쑥 개입해 막아 섰고.
어떤 달콤한 멘트가 튀어나올지 몰라 내 언행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이쯤 되니 부담스러워지는데.’
그나마 이제는 경계심이 분산된 느낌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화이트의 미모에 감탄해 쳐다보는 탓에, ‘성욕에 찌든 무리들’이라고 속으로 으르렁거리는 까닭일까.
오늘 마법학부 1학년 얼굴 간판으로서 한껏 치장한 화이트는 그 미모가 평소보다 한층 빛나는 느낌이었으니.
“화이트 황녀님, 옷이….”
“으앗?!”
돌연 화이트의 등 쪽에서 쩌적, 하고 천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늘씬한 몸이라고 해도 팽팽하게 잡아당겨져 있던 천이 끝내 못 버틴 모양이었다.
“으아앗…!”
화이트는 안 보이는 등을 쳐다보려고 갖은 애를 다 쓰며 발을 동동 굴렀고.
메를린은 마법 주머니에서 얇은 외투를 꺼내 화이트의 어깨에 걸쳐주었다.
“아. 고마워요, 메를린! 아이작 선배, 의상실에 가도 괜찮을까요?!”
“그러자.”
우리는 오르핀관으로 향했다.
오르핀관에 들어서자마자 허리를 구부정하게 굽힌 채 터덜터덜 걷고 있는 대학원생 마르코가 눈에 띄었다. “그어어억….”거리는 그의 눈 밑으로는 며칠 밤을 새웠는지 짙은 다크서클이 내려앉아 있었다.
공신제 기간인데도 저리 바쁜 걸까. 안타깝지만 대학원생이니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그를 지나쳤다.
나와 화이트, 메를린은 1학년 층으로 올라가 의상실에 들어갔다. 공신제 기간 동안 의상실 용도로 쓰이기 위해 마련된 공간이었다.
“여벌이…. 여기 있다. 메를린, 옷 입는 것 좀 도와주세요.”
“네.”
화이트는 옷걸이에 걸린 옷 한 벌을 꺼내더니 메를린과 함께 암막 커튼으로 가려진 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고개를 빼꼼 내밀고 나를 쳐다보는 화이트.
“이 옷, 혼자선 입기 어렵거든요…. 아이작 선배, 죄송하지만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벽에 등을 기댔다. 기다리는 동안 마력기로 마력을 순환하는 데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커튼이 가려지고, 안에서 천이 살결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화이트가 “으그약.”하고 괴상한 신음을 내는 걸 보니 예쁜 옷인 만큼 벗는 것조차 애를 먹는 모양이었다. 메를린도 수월하게 갈아 입히지 못 하는 듯하고.
시간 좀 걸리겠네.
“그런데요, 아이작 선배. 그….”
이때라는 듯, 커튼 너머에서 화이트가 말을 걸어왔다.
얼굴을 마주 보고 하기 어려운 대화를 꺼내려는 듯했다. 그 화제라면 뻔하지.
“만기일이 내일이네.”
“아. 에헤, 헤…! 그, 그렇죠? 내일이죠?!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구요?!”
선수 쳤다. 화이트는 만기일을 쭉 신경 쓰고 있었으니까. 그녀의 호들갑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채무 만기일이 공신제와 겹쳤다. 화이트는 생활을 유지할 정도로만 겔을 벌어서 아직 빚을 다 갚지 못했다. 거의 다 갚은 것도 아니라서 내일까지 완제할 수 있으리란 희망을 품기도 어려웠다.
설령 이 애가 공신제 때 잘해서 상금을 타더라도, 만기일은 공신제가 끝나기 전에 찾아오고 만다. 그리고 채무를 상환하지 못했을 시 어떤 결말이 들이닥칠지도 알고 있을 터.
화이트가 보기에 나는 단호한 사람이다. 평소엔 친절하고 상냥한 사람이나, 사람 간의 정조차 쉽사리 끊을 수 있을 법한 냉혈한이기도 했다. 물론 당사자인 나는 조금도 그렇게 생각 안 하지만.
“어쩔 생각이야?”
“가, 갚을 수 있어요! 내일 꼭 갚을게요!”
“어떻게?”
아카데미 은행에서 대출받을 생각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화이트는 여전히 하위권 학생. 즉, 불합리한 아카데미 은행에서는 씹고금리 대출 상품만 고를 수 있었다. 펑펑 불어나는 이자를 감당할 수 없겠지.
과다채무는 퇴학의 지름길이다. 특히 화이트 같은 하위권 학생이라면 더더욱. 채무조정? 버티기? 그런 건 고려사항도 못 된다.
황녀라고 남몰래 특혜가 제공될 가능성도 있겠으나, 설령 그렇게 된다고 해도 부채의식을 혐오하는 화이트가 그 특혜를 선뜻 받아줄지는 의문이었다.
그렇다면 값나가는 단련 도구라도 몇 개 팔아보는 게 어떻겠느냐, 라고 제안 하려다 말았다. 그리하면 강해지고자 빚쟁이가 돼 버린 화이트의 다짐이 흐릿해지고 마니까.
“아무튼요! 갚을 수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를 하고 싶었어요. 다 방법이 있거든요!”
제 곁에서 떠나기 위한 마음의 준비 같은 건 하지 말라는 의미일 터. 자기 사람이 떠나가는 게 두려워서.
순수하네. 괜한 죄책감이 느껴질 정도로.
나로선 화이트가 열심히 해 주길 바라서 일부러 만기일을 언급해온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쟤 곁에 있어 줄 거고, 어차피 그래야만 했다. 앞으로의 일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다고 다른 데서 겔 빌리진 말고. 감당 못 할 거야.”
“오…! 그, 그럴 리가요? 아이작 선배도 별말씀을 다 하시네요! 빚 돌려막기는 하나도 생각 안 하고 있었는데에…?! 저 같은 하위권 학생이 아카데미 은행에서 고금리 대출을 받을 리 없잖아요?!”
대출은 언급도 안 했어, 바보야.
이제 만기일을 앞뒀으니 솔직하게 얘기해 줘도 괜찮겠지. 어차피 떠날 생각 없고, 제대로 상환하든 말든 신경도 안 쓰니까.
육체노동 정도면 괜찮을까. 이쯤이면 화이트도 내가 원했던 걸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역치는 갖췄으리라.
얘한테 무산소 운동처럼 힘겨운 일을 시키게 되겠지만,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는 걸 나중에 알게 된다면 분명 납득하겠지.
‘채무를 갚는다’처럼 좋은 명목은 없었다. 나와 화이트가 함께 강해지기 위해서, 라는 좋은 목적도 있고. 그야말로 윈윈(Win-Win)이었다.
나는 잠시 뜸을 들인 뒤, 이야기를 꺼냈다.
“꼭 겔로만 갚을 필욘 없어. 책임질 방법은 많아. 굳이 겔이 아니어도 몸 쓰는 일이라면….”
차락! 돌연 커튼이 열어 젖혀지며 담녹색 포니테일 머리의 호위 기사, 메를린이 툭 튀어나왔다.
‘쟨 왜 튀어나와?’
당황스럽네. 커튼 안쪽에서 “메를린?!”하고 화이트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으나, 메를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잰걸음으로 내게 다가왔다.
섬뜩한 눈빛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아났다. 뭐야, 무서워.
“메를린, 어디 가세요?! 저 오, 옷이…!”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그란, 화이트 황녀님을 지키고 있어. 무슨 일 생기면 즉시 보고해라.”
메를린은 내 손목을 낚아채고는 의상실 구석으로 끌고 갔다. 그녀의 갈색 매 사역마, 그란은 허공에 소환되더니 화이트 곁으로 들어가며 부리로 커튼을 착 가렸다.
쿵. 다짜고짜 메를린은 나를 구석에 몰아넣더니, 내 머리 옆으로 손을 뻗어 벽을 박력 있게 짚었다.
“후우.”
고개를 푹 숙인 채 깊게 한숨을 내쉬는 메를린. 얘는 얘대로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니 고충이 많아 보였다.
의아해하는 척이라도 할까.
“메를린? 갑자기 왜…?”
“아이작 공. 화이트 황녀님께서 아이작 공에게 지신 빚은 저 또한 몹시 무겁게 느끼고 있습니다. 이 또한 화이트 황녀님께서 극복하셔야 할 사회 경험인 거겠죠.”
메를린은 슬픈 얼굴로 혀를 찼다.
“그런데 역시, 당신도 똑같은 수컷이었군요. 제 생각은 틀리지 않았어요. 화이트 황녀님을 잘 가르쳐 주시는 데다, 비록 기초뿐이었지만 나름 무기술을 가르쳐 드린 입장에서 당신에게 정을 품고 있었는데….”
“지금 무슨 말씀을…?”
“시치미 떼지 마십시오…!”
메를린은 고개를 번쩍 들더니, 흥분해서 소리 지르려다 목소리를 확 낮추었다.
“빚을 몸으로 갚으라는 건, 분명 그렇고 그런 일이잖습니까…?!”
내 말을 자기 맘대로 끊고서 뭔 말이냐.
“화이트 황녀님의 선함과 책임감을 이용해 사욕을 채우려는 건, 아이작 공이라도 용납 못 합니다.”
여전히 커튼 안쪽에선 화이트가 “메를린…?”하고 내 눈앞에 있는 호위 기사를 애타게 찾고 있었다.
메를린은 공신제 준비 때 나와 도로시의 모습을 본 뒤로 머릿속 내 이미지에 큰 변화를 겪었다. 순애 아이작이 호색한 아이작으로 변해 버렸지. 그 두 인식의 차이는 극과 극이다.
그 탓에 화이트가 채무를 상환하지 못했을 때 내가 불건전한 제안을 하리라는 가능성까지 고려했고, 내 말을 듣자마자 자기 생각이 들어맞았다고 판단해 곧바로 나를 몰아세운 것이었다. 어이없는 착각이었다.
내가 하렘 좋아하는 사람은 맞지만, 호시탐탐 화이트의 몸을 노려온 짐승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나저나, 얘는 멋대로 오해하고 사람을 몰아가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기분이 썩 좋지 않았다.
일부러 눈을 반개하고 날이 선 어투로 말했다.
“뭐라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럼 내일까지 메를린이 대신 갚을래요?”
“그건….”
화이트는 자신이 벌인 일은 자신이 책임지기로 다짐했다. 여기서 메를린이 대신 빚을 전부 갚는다면, 화이트가 개고생을 하며 자기 다짐을 관철해왔던 걸 모욕하는 꼴이 된다.
그 사실은 메를린이 누구보다도 가장 잘 알고 있을 터. 아니, 애당초 갚을 수 있는지부터 의문이네.
“메를린, 밖에 무슨 일 있어요…? 저, 이 옷 혼자서 못 입는데에…!”
메를린은 화이트의 애절한 목소리에도 반응하지 않았다. 그저 나와 눈을 마주할 뿐이었다.
반응을 지켜보았다. 오해는 금방 풀 생각이지만, 제 오해대로 섣불리 사람을 몰아가는 이 녀석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궁금하기도 했다.
메를린은 내 눈을 피하고는 분한 얼굴로 말을 이어갔다.
“…기분이 바뀌었다는 듯이, 변제일을 늦춰 주시거나 채무액을 탕감해주실 수는 없겠습니까?”
음. 겨우 그런 정도라면 화이트의 다짐에 누가 되지 않도록 적당히 구슬릴 수 있는 모양이었다.
어쩌라고.
“제가 왜요?”
“외부인이라 제게 허락된 겔은 없지만…. 저라도 괜찮으시다면, 조금쯤은… 손대게 해드릴 순 있으니까요.”
그간 아카데미 생활과 기사단 생활로 자신이 남자한테 먹히는 외모라는 걸 메를린은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말할 줄은 몰랐는데.
제 몸에 손 닿는 정도는 용인해주겠다는 얘기인가. 남자라면 이런 제안에 혹하리라고 생각하는 거구나.
메를린은 수치심으로 달아오른 얼굴을 가리고자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참 가지가지 한다.
“하아.”
나는 한숨을 푹 내뱉었다. 메를린은 슬쩍 눈을 치켜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전 메를린 몸엔 관심 없어요.”
“뭐?”
아, 잘못 말했다. 눈빛 살벌해지네.
얼른 정정했다.
“오해하신 것 같아서 하는 말입니다. 화이트한테는 마력 순환을 돕게 만들 셈이었어요. 꽤 힘들긴 한데 서로한테 도움 되는 일이니까, 그걸로 빚을 퉁 칠 생각이었습니다.”
“예…?”
메를린은 당황했다.
“전 화이트한테 이상한 마음 품어본 적 없습니다. 그동안 매일 봐 오면서, 나름 무기술도 배우면서 저도 메를린한테 정이 들었는데…. 절 그렇게 생각해 오셨을 줄은 몰랐네요.”
“아, 아이작 공…?”
“조금…, 실망했습니다. 아쉽기도 하고.”
일부러 눈을 내리깔고 애잔한 표정을 짓자, 메를린은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어쩌지, 하고 곤란해 하며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하는 얼굴이었다.
기세를 타고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말을 왜 그 따위로 합니까? 뭐 자기 몸이면 닳지 않는다, 같은 이상한 생각이라도 하시는 거예요, 지금?”
“아, 아니, 요….”
“앞으로 제 앞에선 비슷한 말도 꺼내지 마십쇼. 목숨 걸고 화이트 곁을 지키는 역할이라도, 그게 메를린의 가치를 깎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어린이를 가르치는 선생 같은 어투로 훈계했다. 화이트를 가르치다 보니 이런 말투가 익숙해졌나 보다.
충격에 빠졌는지 당황한 얼굴로 몸을 부들부들 떠는 메를린.
벽을 짚은 메를린의 팔을 슬쩍 내렸다. 그녀의 팔이 맥없이 허공에서 진자 운동을 했다.
…예상치 못했지만, 얼떨결에 마음의 빚 하나 적립했다.
메를린은 내게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고 싶은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이쯤이면 분위기 풀어도 괜찮겠지.
“알겠죠, 메를린?”
“예에….”
맥 빠지는 대답이네.
이제 됐다. 나는 곧바로 굳은 표정을 풀고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좋습니다. 없던 일로 생각할게요. 화이트 곤란해 보이는데, 어서 가보세요.”
“…….”
“메를린?”
“…죄송합니다, 아이작 공. 이걸로 괜찮으실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제 목을 벨 수 있는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그런 기회는 필요 없을 듯했다.
자책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괜찮다고 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메를린은 후우, 하고 슬픈 한숨을 내쉬었다.
메를린은 등을 돌리고 다시 커튼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커튼 안쪽에서 “화이트 황녀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하고 사죄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메를린? 갑자기 왜 그래요?!”
커튼 안쪽에서 별 이야기가 오고 갔다. 메를린은 방금 전 나와 했던 이야기를 얼버무렸고, 자책을 빠르게 끝마쳤다.
……
“지금부터 제블렘의 꽃, 최대 규모의 경기! ‘아크볼 레이스’를 시작하겠습니다!!”
메르헨 아카데미에 울리는 진행자 여학생의 목소리.
아크볼 레이스가 시작되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