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Assassin Monarch RAW novel - Chapter 127
127화
지젤리드 왕국 밤까마귀 본단.
에런은 칙칙한 지하는 질린다며 밤까마귀 거리에 가장 높은 3층 건물의 옥상에 사무실을 차렸다.
그녀는 등받이가 뒤로 많이 기울어져 있는 의자에 반쯤 누워 피처럼 붉은 와인을 홀짝였다.
“흐음…… 좋아, 좋다. 너는?”
옆에는 같은 모양의 의자에 헤딘이 불편하게 누워 있었다.
“마, 맛없어요. 피인 줄 알았네.”
“이젠 아예 대놓고 피를 탐하는구나, 언데드여.”
“어, 어쩔 수 없으니까. 인정하지 않으면 더 괴, 괴로워요.”
“그래그래. 너…… 나 좋아?”
헤딘은 한 치의 고민도 없이 대답했다.
“조, 좋아요. 가, 가슴 큰 누님 옆에 있으면 내, 내가 나쁜 놈처럼 느껴지지 않아요.”
“음…… 뭐, 칭찬이지? 그럼 나랑 계속 여기 있자.”
그런데 이번에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스, 스승님한테 가야 합니다. 합니다. 약속했습니다. 나, 나 헤딘 기다립니다. 항상, 항상.”
칼 같은 헤딘의 대답에 에런은 미간을 찌푸렸다.
사기적인 살상 능력에, 팔다리 하나쯤 잘려도 붙인 다음에 신선한 고기만 먹으면 다시 새것처럼 아무는 이 소년 한 명만 있으면 뒤가 든든했다.
“그늠의 스승. 스승이 좋아, 내가 좋아?”
“치, 친구가 좋아도 친구. 가족이랑 다릅니다. 내, 내 가족은 스승님과 누님 둘뿐.”
“누님?”
“세실리아 누님.”
“칫, 표독스러운 살쾡이가 뭐가 좋다고.”
설득이 불가하다고 판단한 에런이 입술을 삐죽거릴 때, 까마귀 한 명이 옥상 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무광의 검은 천옷에 얼굴까지 가린 까마귀가 그녀에게 작은 쪽지 하나를 건넸다.
“말씀하신 정보만 걸러서 가져왔습니다.”
“그래, 수고 많았어요.”
까마귀는 허리를 깊이 숙이고는 자리를 벗어났다.
“전의 그 늙은이한테는 저렇게 허리를 숙이지 않았지. 왜 그런지 알아?”
“에, 에런 누님이 더 젊으니까?”
“의식하는 거지, 피의 숙청으로 왕이 됐으니…… 잘 봐 달라고. 반면에 진심으로 나를 왕으로 인식하고 있지 않는다는 의미야. 아마 네가 나한테서 떨어지면 금세 내 목에 칼을 들이댈 거야. 그러니까 안정될 때까지는 네가 내 옆에 딱 붙어 있어야 해.”
헤딘은 웬일로 손을 꼼지락거리며 침묵하다가 늦게 입을 열었다.
“어, 얼마나 있어야 에런, 에런 누님 목이 안 떨어집니까?”
에런은 그의 반응에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한…… 10년?”
헤딘은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냥 목 떨어지세요. 가, 가야겠습니다, 스승님한테.”
“농담이야, 농담. 앉아.”
에런은 그를 간신히 앉히고는 까마귀가 건넨 쪽지 몇 개를 읽었다. 눈빛이 살짝 흔들린다.
[제국 왕궁에 머물러 있던 오크 로드와 마물 군단, 서쪽으로 이동.]“서쪽이면…… 히스잖아?”
이번엔 에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자, 네 스승한테.”
* * *
범죄자들의 도시, 히스.
가브는 바로 장창을 눕혀 피페로의 시체를 살폈다.
눈썹 위부터 벗겨진 가죽의 절단면이 꽤 거칠다. 칼을 많이 사용해 보지 않은 실력이다.
모순이다. 자신이 없을 때 피페로를 상대할 수 있는 자는 케레스 정도가 유일하다.
냉철하게 따지면 그녀마저도 한 수 접고 들어갈 정도의 실력자다.
‘숨어 있는 실력자가 제압하고 다른 자에게 넘겼나?’
히스의 인구가 1만 명이니 그중에 피페로를 이길 실력자가 숨어 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다.
그때 세실리아가 옆에 쪼그려 앉았다.
“심장도 안 뽑았고, 뇌도 그대로 있네요. 상처만 조금 있고.”
그녀가 말하기가 무섭게 피페로의 눈이 번쩍 뜨였다.
-카하악!
놈은 몸 전체가 장창에 꿰여 있어 팔다리를 버둥거렸다.
“허엇!”
“구, 구울이다!”
“일어났다!”
상대가 상대이니만큼 모여 있던 사람들은 물론 세실리아도 한 걸음 물러섰다.
놈은 금세 자신의 몸을 옭아매고 있는 장창을 분지르고 몸을 일으켰다.
-캬, 칵, 캬악!
가브는 왼손을 뻗어 그의 목을 움켜쥐고, 오른손을 그의 가슴에 찔러 넣었다.
강철 같은 손톱이 그의 살가죽을 찢고 들어갔다.
푹- 퍼석!
가브는 검은 손으로 이미 까맣게 변색된 피페로의 심장을 꺼내어 터트렸다.
딱, 딱, 딱.
그러곤 아직 이빨을 부딪치고 있는 그의 목을 향해 검붉은 피가 묻어 있는 오른손을 휘둘렀다.
촤아악-.
목이 완전히 날아가 피페로의 머리와 몸통이 분리되었다.
그렇게, 한 시대를 풍미하던 히스의 삼대장 중 한 명이 비참하게 쓰러졌다.
“주군이 계시지 않았다면 꽤 큰일로 번졌겠네요.”
“음…….”
세실리아의 말대로다. 피페로 정도 되는 구울이 히스에서 설쳤다면 좀비만 수십, 수백 마리가 생겼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히스에서 죽은 사람들이 원한이 강하여 구울로 변하는 경우는 희박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보고도 그냥 방치한 듯했다.
하지만 적어도 피페로의 시체는 이렇게 버려두면 안 되는 것이었다.
케레스가 알았다면 바로 태웠거나 머리와 심장을 부쉈을 것이다.
가브는 이 사람들보다 피페로를 죽인 범인이 왜 그대로 방치했는지 궁금했다.
세실리아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피페로를 죽일 정도로 강한데…… 구울에 대해서 무지할 수도 있습니까?”
“글쎄…… 일부러 저렇게 둘 수도 있고.”
“일부러가 아니라면…… 1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사람이라면 모를 수도 있겠죠?”
가브의 고개가 돌아갔다. 그녀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알기에,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전에 피페로가 힐 아슈 양을 노렸습니다.”
가브는 세실리아와 눈을 마주하다가 시선을 돌려 히스 안쪽을 바라보았다.
* * *
가브는 케레스를 먼저 찾아갔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의 기세에 문지기들은 지레 겁먹고 각을 잡았다.
“오셨습니까, 가브 님!”
케레스의 집무실 앞에서 대기 중인 문지기도 마찬가지였다.
“오셨습니까, 가브 님!”
케레스와 바할의 결투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라면, 가브의 등장만으로도 식은땀이 나고 긴장될 수밖에 없었다.
턱.
눈만 마주쳐도 다리가 풀릴 것 같은 존재, 그가 돌연 멈춰 서서 문지기를 보았다.
문지기는 감히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바짝 얼어붙었다.
“충.”
“예?”
“충성할 충. 앞으로 통일해.”
“예, 예! 알겠습니다! 충!”
“좋아.”
가브는 고개를 끄덕이며 케레스의 집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예상했다시피 케레스도 소식을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었다. 그녀가 알았다면 구울이 되지 않게 바로 불태웠을 것이다.
“날 의심하지는 않겠지요? 내가 굳이 뭐 하러…….”
“알아, 다른 구역 움직임은.”
“일단 지금까지는 없습니다. 원하시면 시간마다 보고해 드리고…….”
“아니다.”
가브는 수긍하고 다음으로 힐 아슈에게 붙어 있으라고 했던 리온느를 찾아갔다.
리온느는 세실리아와 함께 있었다.
“세실리아 선배님이 걱정돼서 복도를 서성이다가…… 너무 피곤해서 잠에 들었습니다. 깨어나 보니 힐 아슈 님이 절 간호해 주고 계셨습니다. 죄송합니다.”
“피곤해서라…….”
아무리 무리했다고 해도 2급 해수가 피곤하다고 아무 데서나 잠이 들 정도로 정신력이 약하지 않다.
세실리아도 같은 생각인지 눈을 마주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리온느가 누군가에 의해 잠든 그사이 무슨 일이 생긴 것이다.
“알았다. 쉬어라.”
가브는 바로 힐 아슈를 찾아갔다.
쿵!
거칠게 문을 열자마자 힐 아슈가 상체를 벌떡 일으키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브 씨! 드디어 오셨군요. 엄청 기다렸……!”
콱-.
가브는 그녀에게 성큼성큼 다가가 두꺼운 손으로 가녀린 목을 움켜쥐었다.
그러곤 품에서 단검을 꺼내어 하얀색 눈동자에 가까이 들이댔다.
“이 검이 보이나?”
“끅, 끄.”
힐은 목을 부러트릴 듯이 조여 오는 가브의 손길에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힘겨워했다.
얼굴이 벌게지고 하얀 눈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리지만 가브는 아랑곳하지 않고 목을 더욱 조였다.
“피페로를 왜 죽였지?”
“나, 날 주, 죽이려 해서…….”
한 번의 발뺌도 없이 인정한다. 가브의 손에 힘이 살짝 풀리자 힐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 래요. 색이 보이지는 않지만, 형태와 냄새, 기운은 더 잘 느낄 수 있어요. 그가 꽃밭이라며 데려간 곳은 여인들의 머리 수백 개가 전시되어 있는…….”
가브는 순간이지만 힐의 눈동자에서 공포를 읽었다. 진실이다. 그녀는 진실로 피페로의 행위에 공포를 느꼈던 것이다.
가브는 미간을 좁히며 그녀의 말을 끊었다.
“왜 실력을 숨겼지?”
“이건 내 힘도, 내 실력도 아니에요. 이 힘을 쓰면…… 위험해져요. 나도, 당신도. 그러니까 나 좀 잘 지켜 줘요.”
“그럼 너에 대해 다 말해,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다 말했어요.”
힐은 충혈된 눈으로 가브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다시금 눈물이 맺힌다.
가브는 그녀의 대답에 실망하는 것을 숨기지 않으며 몸을 홱 돌렸다.
문을 열고 나가려는 순간, 젖어 있는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버리시든지요.”
가브는 멈칫했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힐 아슈는 가브가 사라진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벌러덩 누웠다.
아무렇지 않은 듯 표정을 풀어 보지만 심장을 쥐어짜는 것만 같다.
버려지기 싫다.
[버려라. 이것은 내 딸이 아니다.]세상에 처음 나와 한기에 몸을 오들오들 떨 때, 어미의 품에 안기지도 못하고 차디찬 바닥에 널브러졌다.
존귀한 피를 이은 존재가 맹인으로 태어나니 제국의 흉조로 여겨졌다.
왕의 딸이지만 노예의 딸만 못한 삶을 살았다. 없는 사람처럼 살아야 했다. 더 깊고, 더 어두운 곳으로 숨어야 했다.
새로 부임한 궁정 마법사 아민이 오기 전까지는.
[공주님께서는, 스무 살이 되는 해에 제국의 앞길에 큰 축복을 내려 주실 겁니다.]그는 처음으로 자신을 축복의 존재로 대했다.
없는 존재로 취급하던 헤롯 아슈는 아민의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이후로 삶은 달라졌다. 감촉이 좋은 옷을 입고, 맛있는 것을 먹었으며, 햇빛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찾아오는 이는 여전히 궁정 마법사 아민뿐이었다.
힐은 아민을 부모처럼 따랐다.
10년 전 그날, 아민이 준 피를 마시고 잠에 들었던 그날이 아직도 선명하게 떠오른다.
[공주님, 이걸 드시면 눈이 밝아지실 겁니다.] [여기가…… 어디야? 아민? 아민!]그것을 마시고 혼절했다가 깨어났을 때는 어둠만이 가득했다.
아무리 소리쳐도 아무도 오지 않았고, 오로지 어둠만이 존재했다.
믿었던 아민의 배신으로 힐은 깊은 절망과 고통에 허우적거렸다. 죽고 싶었지만 죽지도 못했다.
[Πιάσε το χέρι μου, σου θα φωτιστούν.]‘내 손을 잡아라, 눈이 밝아지리니.’
그때 어둠에서 전능한 힘을 지닌 무언가가 손을 내밀었다.
힐은 그 손을 잡았고, 정말로 색을 구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눈앞에 펼쳐진 세상은 생각과는 달랐다. 대지는 붉었고 하늘은 보라색이었다. 밤은 길고 낮은 짧았다.
그곳은 다른 세상이었다. 아민도, 헤롯 아슈도, 잘난 론 아슈도 없었다.
그곳에 육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힐은 배고픔도 피로도 느끼지 않고 자유롭게 그곳을 거닐었다.
그리고 ‘그’를 만났다.
‘헬레드의 눈’, 두 개의 세상을 보는 능력. 처음으로 자신을 볼 수 있는 존재가 그렇게 불렀다.
힐은…… 그와 돌이킬 수 없는 약속을 했다.
“그때는 여기가 망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니까…….”
버려지기 싫다.
버림받기…… 충분하다.
* * *
히스의 한 민가, 단단히 잠긴 문 안쪽에는 사방이 피로 얼룩져 있다.
바닥에는 집기와 음식이 피와 함께 나뒹굴고 있고, 식탁에는 한 청년이 반듯하게 누워 있다.
청년의 배는 십자로 갈라져 있었다.
으득, 끄드득.
온몸에 피 칠갑을 한 여인이 그 안에 있는 장기를 우악스럽게 끄집어내고는 그곳에 얼굴을 파묻었다.
스스, 스스스-.
그러자 뱀이 기어가는 듯한 소리가 나며 여인의 몸이 말라비틀어졌다.
이내 완전히 빈 껍데기만 남아 바닥에 힘없이 늘어졌다. 마치 살 껍질만 벗겨 놓은 듯이 징그럽고 신기한 광경이었다.
반대로 청년의 몸 안에는 반투명한 파란색의 끈적끈적한 액체로 가득 찼다.
그것이 몸 안에 천천히 스며들자 십자로 열려 있던 살가죽도 닫히고 흉터도 깔끔하게 사라졌다.
청년의 눈이 뜨였다. 그는 잔인한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내가 말했지, 네놈이 아끼는 자의 얼굴로 네놈의 심장을 찔러 주겠다고……. 가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