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195)
나의 악당들 195화
44. 꿈결(5)
예고 없이 찾아온 가을비가 지붕을 두드려댔다. 투두두둑, 기름에 콩을 튀기는 것 같은 소리가 단조롭게 이 어 졌다.
싸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늦가을, 세찬 빗소리는 지붕 아래에 있는 이 들로 하여금 아늑한 감상을 느끼게 해주었다.
덕분에 기스톨 지방 어딘가, 인적 드문 숲속의 주점은 썩 평화로웠다. 몇 없는 손님들은 대부분 주점 구석 에 자리를 잡고 드러누워 잠을 청했 고, 나머지 두엇은 빗소리를 들으며 맥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그러는 와중에 주점의 주인은 분주 하게 발을 옮겼다.
“염병.”
수염이 덥수룩한 노인은 빗물이 새 는 곳에 낡은 나무통을 가져다 두며 나지막이 투덜거렸다.
“지붕을 새로 깐 게 고작 나흘 전 인데 하필 비가 오다니. 환장할 노 릇이군.”
“별 수 있어요? 어차피 비바람 막 으라고 깐 건데.”
맥주가 담긴 참나무통을 굴리며 나 타난 장한이 말했다.
“그리고, 깔면서 보니깐 보통 질긴 놈들이 아니더구먼. 괜찮을 거요.”
“제대로 마르기도 전에 비에 폭삭 젖어버리면 아무리 질긴 억새라도 금세 상한다.”
또 다른 나무통으로 새는 빗물을 받으며 노인은 쯧, 혀를 찼다.
“한 해를 버티려면 이슬에 적시고
볕에 말리고를 보름은 했어야 돼.”
“지나가는 비 같던데, 금방 그치지 않겠어요? 그리고 정 찝찝하면 능선 에 올라가서 억새를 좀 더 베어오지 뭐.”
“괜히 산에 올라갔다가 어떤 괴물 을 만나려고. 날도 추워졌으니 히포 그리프나 곰 인간 같은 놈들이 내려 올지도 몰라.”
“으이그, 우리 아버지는 걱정도 많 으셔.”
장한은 커다란 참나무통을 단번에 바 위로 올리며 작게 낄낄댔다.
“외딴 숲속에서 장사를 하는 양반 이 그깟 곰 인간한테 겁을 먹으면 쓰겠어요, 응?”
“닥치고 네 동생 놈들 뭐 하는지나 보고 와. 가죽이랑 모포 좀 걷어오 랬더니 여태 깜깜무소식이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주점의 문이 열렸다. 그렇게 나타난 것은 세 명의 사내였는데, 하나같이 덩치 가 크고 서로를 닮은 것이 형제들로 보였다.
노인이 세 아들을 보며 무어라 다 그치려던 차, 사내 중 하나가 모포 더미를 빈 테이블에 올려놓으며 입 을 열었다.
“용병들이 오던데.”
“용병들?”
“한 스물쯤 되더라고.”
차남이 그렇게 말하며 작은 방으로 사라지자 바에 서 있던 장남이 미간 을 좁히며 동생들에게 물었다.
“스물이라. 어떤 놈들이든?”
“심상치 않아요. 무장도 괜찮고, 마 술쟁이도 섞여 있는 것 같아.”
삼남은 겉이 조금 젖은 가죽들을 구석에 던져두고 자루가 긴 도끼를 집어 들었다.
장남은 뒤통수를 긁다가 구석에 누 워있는 이들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어이, 손님들! 잠깐 일어나 보셔 야겠는데.”
“……아, 뭔데?”
“웬 용병들이 온대서. 혹시 모르니 깐 잠시 일어나 있으쇼.”
주점에 먼저 와있던 일행은 서쪽에 서 온 상인들이었다. 산맥을 타고 고원을 오가는 이들답게 상인들은 하나같이 무장을 한 터였다.
허리에 검대를 찬 차남이 쇠뇌를 들고 방에서 나올 무렵, 그의 형제들 은 바 뒤에 서 있었다. 도끼며 철퇴 같은 무기들은 잘 숨겨둔 채였다.
형제들의 아버지이자 주점의 주인 인 노인은 바 앞에 의자를 끌어와 앉으며 막내아들에게 손짓했다.
“키곤, 맥주 한 잔 다오.”
“예, 아버지.”
키곤이라고 불린 앳된 청년은 조그 만 나무망치를 이용해 참나무통에 놋쇠 꼭지를 박았다. 진한 맥주가 주석잔에 차오르자, 그는 넓적한 나 무 막대로 거품을 조금 걷어낸 뒤 노인에게 건넸다.
“크.”
노인이 맥주를 들이켜 단숨에 잔을 반쯤 비울 무렵.
단조롭게 울리던 빗소리가 복잡하 게 변주했다. 묵직한 발걸음들이 섞 인 탓이다.
그러기를 잠시.
덜커덕, 하는 소리와 함께 나무 문 이 활짝 열렸다. 그렇게 나타난 일 단의 무리는 우르르 문지방을 넘다 가 덜컥 걸음을 멈추었다.
“어서 오시게.”
노인은 수염에 맺힌 맥주를 훑어내 며 말을 건네었다.
“어쩐 일로 오셨나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주점에 들어선 것은 여남은 명의 용병들이었다. 하나같이 덩치가 크 고 잘 무장한 이들이었다.
주점에 흐르는 묘한 긴장감에 멈춰 선 용병들은 노인의 여상스러운 인 사에 잠시 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어깨에 쇠도리깨를 짊어 진 말총머리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 다.
“……흐, 멍청한 질문이군.”
그는 사나운 웃음을 흘리며 빈정거 렸다.
“주점에 술 마시고 쉬러 왔지, 무 슨 일로 왔겠소, 노인장?”
“아, 그런가? 손님들이었구먼.”
험악한 인상의 용병들이 눈앞에 우 글거렸지만 노인은 여전히 태연자약 했다.
“허면 어디서 오신 손님들인고?”
“그런 것까지 말해야 하나?”
“오렛사 주점의 규칙이네. 내 소일 거리이기도 하고.”
“닥치고 따뜻한 음식이랑 맥주나 내와. 노인네 소일거리에 어울려줄 생각은 없으니까.”
말총머리 용병의 으르렁거림에 용 병 무리 중 짧은 머리의 여인이 짜 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좀 닥쳐, 프리츠.”
“뭐?”
“투계처럼 꼴리는 대로 싸움을 걸 고 싶거든 제국으로 돌아가서 검투 사 노릇이나 해.”
“……하. 말 다 했냐?”
어지간한 사내보다 덩치가 큰 여인 은 눈을 희번덕대며 입매를 비틀어 올렸다.
“말 다 했다, 이 새끼야. 어쩔래?”
“이 오크 같은 년이.”
다른 용병들이 둘을 말리려던 차, 무리 뒤쪽에서 웬 목소리가 들려왔 다.
“뭐야, 안 들어가고 뭐 해?”
그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주점에 들어섰다.
다른 용병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의 청년은 한 눈에 보기에도 미남이었지만 서늘한 눈매 때문에 어쩐지 냉막한 분위기를 풍겼다.
“아, 좀 비켜봐.”
짜증이 얼마쯤 섞인 말투에 입구에 몰려있던 용병들이 우르르 비켜섰 다. 청년은 앞으로 나서더니 검은 반망토를 끌러 물기를 털었다.
“여긴 마구간지기도 없어? 왜 아무 도 안 나와?”
그렇게 투덜거리는 청년은 광이 나 는 흉갑에 고급스러운 벨트와 길쭉 한 장검를 차고 목이 긴 장화를 신 고 있었다. 어쩐지 범상치 않은 외 모와 차림새에 노인은 신중한 표정 으로 말했다.
“양해해 주시오. 우리 주점은 이름 과 출신을 밝히기 전까지는 손님 대 접을 않거든.”
그 말에 망토를 털던 청년은 떨떠 름한 표정으로 물었다.
“……어르신이 여기 사장이세요?”
“사장?”
“그러니까, 주인장 되시냐고요.”
“그렇소.”
“ O ” ◎ •
청년은 머리와 어깨에서 빗물을 흝 어내더니 입을 열었다.
“전 아일란트 섬의 라즈일 지방에 서 온 기사 포이닉스라고 합니다. 이 친구들은 제가 고용한 용병들이 고요.”
“……기사 나리셨구먼.”
노인이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려 하 자, 청년은 손사래를 쳤다.
“됐습니다, 그렇게 부르지 마십쇼. 어르신 같이 연세 지긋하신 분께 그 런 말을 들으면 괜히 나쁜 놈이 된 것 같아서.”
노인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말을 한 청년, 포이닉스는 어깨를 으쓱거리 며 말했다.
“하여튼, 이제 됐죠? 보시다시피 오는 길에 비를 꽤 맞아서 좀 쉬고 싶은데요.”
“아, 물론입니다. 다만.” 노인은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을 이었다.
“일행이 모두 들어오시기엔 공간이 조금 좁습니다.”
“……별로 좁아 보이지 않는데요. 족히 서른은 더 들어갈 것 같은데.”
“손님을 한 번에 서른 명 이상은 받지 않는 게 오렛사 주점의 규칙입 니다.”
“희한한 규칙이네요.”
“공간을 협소하게 쓰다 보면 시비 가 붙습니다. 이런 외진 곳에서 시 비가 붙으면 칼부림이 되기 십상이 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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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다가 나리의 일행 중엔 성격이 폭급한 분들이 많아 보이더군요.”
그 말에 포이닉스는 용병들을 돌아 보았다. 험상궂은 얼굴들이 그 시선 을 피해 이리저리 고개를 돌렸다. 썩 우스운 풍경이었다.
“프리츠, 너지?”
“……아닙니다, 경. 저는-”
쇠도리깨를 든 말총머리 사내, 프 리츠가 변명을 늘어놓으려던 찰나 무리 뒤편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걸 어 나왔다.
비단결처럼 고운 흑발과 흑진주 같 은 눈동자, 새하얀 피부와 대비되는 붉은 입술…….
후드를 젖히며 들어온 건 여인이었 다. 아주 아름다운 여인.
노인은 물론이고 그의 아들들, 그 리고 서쪽에서 온 상인들은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절세의 미녀를 보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오크델리’ 산이지?”
“••••••예?”
“치즈 말이야.”
여인은 바 뒤쪽의 선반을 가리켰 다. 정확히 말하면, 선반 중간에 자 리 잡은 커다란 치즈덩이였다.
“……맞습니다. 오크델리 산 치즈 지요.”
“어떤 요리에 쓰는데?”
“롤파이를 합니다.”
“롤파이?”
“예.”
여인이 눈을 가만히 깜빡거리자, 노인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밀가루 반죽을 구워서 거기에 치즈를 올려 녹이고, 볶은 깨와 꿀 을 뿌려서 만듭니다.” 어느새 노인을 지나쳐 바 앞에 선 여인, 헤일라는 은화를 하나 꺼내며 말했다.
“맛있겠네. 하나 부탁해.”
“……음, 아가씨. 이미 말씀드렸지 만, 저희 주점은,”
“아니.”
헤일라는 금화를 한 줌 꺼내어 바 위에 올려놓았다.
“스물두 명, 머릿수에 맞춰줘.”
잠시 네 아들과 시선을 교환한 노 인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 다.
헤일라는 주점의 가장 큰 테이블에 앉더니 포이닉스를 바라보았다. 그 녀는 뭘 하고 있느냐는 듯 눈을 깜 빡였다.
“포이, 여기 앉아.”
포이닉스는 쓴웃음을 지으며 눈썹 을 긁적였다.
새로 온 일행이 모두 자리를 잡으 니 널찍하던 오렛사 주점이 어째 비 좁게 느껴졌다.
말총머리의 용병, 프리츠는 불편한 얼굴로 롤파이를 으적거렸다.
오렛사 주점의 특제 롤파이는 고소 하면서도 달콤한 맛을 냈다.
하지만 프리츠는 그 맛을 편히 즐 길 수가 없었다. 왼편엔 포이닉스, 오른편엔 우테콰이가 앉아 있었던 탓이다.
‘체하겠네, X팔.’
프리츠는 못내 억울했다. 어느 순 간부터 일행의 사고뭉치인 양 취급 당하는 자신의 신세 때문이었다.
‘솔직히 나보다 더한 놈들도 있잖 아? 움베르타와 데르비쉬, 저 두 년 도 그렇고, 기돈도 만만찮은 또라이 인데.’
그가 그렇게 속으로 투덜거릴 무 렵, 한 중년인이 테이블로 다가왔다. 주점에 먼저 와 있던 상인들의 우두 머리 였다.
“잠시 실례해도 되겠습니까,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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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을 우물거리던 포이닉스는 맥주 를 한 모금 들이켠 뒤 되물었다.
“무슨 일이지?”
“전 서쪽에서 온 상인인데, 경께서 듣고 싶을 만한 소식을 가지고 있어 서요.”
“•••••♦앉아.”
“감사합니다.”
뭉치와 모시스 사이에 자리를 잡은 중년의 상인은 웃는 낯으로 입을 열 었다.
“경의 이야기는 익히 들었습니다.”
“내 이야기?”
“아, 저희가 주로 다니는 곳이 서 남부 일대의 항구들이라서 말입니 다. ‘알비브튼’의 ‘비티안’이나, ‘아비 든’의 ‘오두엔느’ 같은 곳이죠. 덕분 에 사우스하버의 소식도 자주 접했 지요.”
그는 자신의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핏빛봉화, 참수자, 붉은 곰, 불의 마 녀 따위의 별명을 늘어놓았다. 상인 의 말이 길어질 기미를 보이자 포이 닉스는 미간을 찌푸렸다.
“하고 싶은 말이 뭔데?”
“아, 그것이. 제가 고원지대를 지나 는 길에 어느 용병대와 거래를 좀 했습니다.”
“용병대?”
“예. 듣자 하니 그 용병대장이 경 과 인연이 있다고 들어서요.”
포이닉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대장의 이름이 뭔데?”
“그라니아라는 분입니다. 혹시 아 실는지요?”
상인의 말에 포이닉스의 눈이 휘둥 그레 졌다.
“그라니아? 북부에서 온, 방패와 칼을 잘 쓰는 그라니아?”
“오, 아시는군요?”
“당연하지. 같이 일도 몇 개 했는 데.”
포이닉스는 반가운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질문을 해댔다.
“그래, 서부로 갈 거라는 이야기는 들었지. 그라니아는 잘 지내나? 아 르날과 파렐, 올가 수녀님은?”
“음, 다른 세 분은 저도 잘 모르겠 군요. 제가 아는 건 용병대의 보급 당담관인 아빌과 대장인 그라니아 님뿐이라서요.”
“아, 그래? 보급담당관이 있다니, 용병대 규모가 꽤 커진 모양이군?”
“물론이죠. 규모로 따지면 울카르 왕자님 휘하의 용병대들 중 한 손에 들 정도니까요. 대원 수가 얼추 백 오십은 될 겁니다.”
“백오십? 그렇게 많이?”
포이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깐. 그럼 울카르 왕자님이 거느 린 용병이 총 몇인데?”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천 명 안팎이라고 들었습니다.”
“••••••뭐?”
상대의 놀란 표정에 상인은 즐겁다 는 듯 말을 늘어놓았다.
“고작 용병 천 명에 놀라시다뇨. 울카르 왕자님께선 란드리 변경백과 다른 귀족들의 군대까지 흡수해서 휘하의 정규군만 2천이 넘습니다.”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엘렌이 작게 입을 벌렸다.
“그럼 다 합치면 군대가 3천이라 고?”
“예, 맞습니다. 그쯤 된다더군요.”
“하. 가뜩이나 국왕에게 미운털이 박힌 주제에 그런 대군을 끌어모았 다고?”
“어쩔 수 없었겠지요. 그만큼 급박 한 상황이잖습니까?”
“급박한 상황?”
“아, 소식 못 들으셨습니까?”
상인은 의외라는 듯 눈썹을 들썩이 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직 이쪽으로는 말이 전해 지지 않았겠군요. 당연한 것을.” “대체 그게 무슨 말이야? 소식이라 니?”
포이닉스의 채근에 상인이 짐짓 얼 굴을 굳혔다.
“‘죽음의 왕’ 말입니다. 결국 칼날 만을 넘었습니다.”
“……죽음의 왕이.”
포이닉스가 신음하듯 중얼거렸다.
“죽음의 왕은 아시지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언데드들을 거느린 무시 무시한 강령술사 말입니다.”
“……그래, 알아. 제국을 휩쓸고 있 다는 소식까지는 들었지. 그놈이 기 어코 칼날 만을 넘었다고?”
“예. 제가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에 따르면, 아비든 지방을 점거하고 고 원을 압박하고 있다더군요. 울카르 왕자님과 그분의 군대는 고원에 고 립된 채 외부의 지원을 기다리고 있 답니다.”
상인은 쯧, 혀를 차더니 고개를 저 었다.
“얼마나 급했는지 ‘칼란다리 교단’ 의 홍의주교들에게도 도움을 청하셨 답니다.”
“칼란다리 교단에, 밀라놀의 왕자 가 도움을 청해?” 말총머리 용병, 프리츠가 헛웃음을 터뜨렸다.
“밀라놀은 칼란다리 교단을 이단으 로 취급하잖아?”
“음, 엄밀히 말하면 밀라놀 왕국이 그런 것은 아니지요. 칼란다리를 이 단이라고 선포한 것은 엘 가노어 교 단의 총대주교이지, 밀라놀의 국왕 폐하가 아니시니.”
“독실왕이 총대주교의 발바닥을 핥 아댄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사실 아냐?”
프리츠의 폭언에 상인이 어색한 표 정을 지었다.
“……어, 그, 용감한 분이시군요.”
“용감해? 뭐가?”
“왕국 안에서 그런 말을 하는 사람 이 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게다가 왕의 기수들이 다스리는 영지가 지 척인데……
그 경고 비스무리한 말에 프리츠는 합, 입을 다물더니 슬쩍 주변을 살 폈다. 다행히 이 주점 안엔 근왕파 의 충신은 없는 것 같았다.
“그러면 심해의 제사장인가 뭔가 하는 괴물이 죽음의 왕과 함께 넘어 온 건가?”
“심해의 제사장이요?”
포이닉스의 질문에 상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건 처음 듣는 이름이군요. 어인 족 괴물들을 이끌고 온 건 다른 이 름으로 불리던데.”
“다른 이름?”
“네, 그-”
상인은 잠시 눈동자를 굴리다가 말 을 덧붙였다.
“아, ‘찬송의 마녀’라던가.”
“찬송의, 마녀?”
“예. 천사 같은 노랫소리로 사람들 을 홀려 언데드와 어인족 앞에 목을 내밀게 만든답니다. 아주 무시무시
하죠.”
방금 막 롤파이를 삼킨 마검사 시 모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사람을 홀리는 노래라면, 세이렌 인가?”
“세이렌은 아닐 겁니다.”
상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날개나 깃털은 없다고 들었거든 요. 겉보기엔 멀쩡한 사람, 그것도 아주 아름다운 미녀의 모습을 하고 있답니다.”
“아름다운 미녀?”
상인은 상체를 숙이며 목소리를 낮 추었다.
“예. 그녀의 붉은 머리칼과 초록 눈동자를 보면 누구나 정신을 잃는 다는군요.”
돌연 쨍그랑, 쇠붙이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포이닉스가 돌아보니 포크를 놓친 엘렌이 창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