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12)
나의 악당들 212화
46. 꿈의 주인(2)
머리 땋은 에산나와 ‘벼락도끼 슝 카슬레’, ‘순백의 기사 아치발드’가 땅에 묻힌 뒤 간단한 장례식이 이어 졌다.
뭐, 사실 장례식이랄 만큼 거창한 건 아니었다. 무덤 앞에 모여서 잠 깐 기도를 하는 게 다였거든.
“추모사는 나리께서 하시죠.”
“••••••내가?”
쇠뇌수 기돈이 묵주를 내밀며 고개 를 끄덕였다.
“고향도 없는 떠돌이 용병보단 기 사의 기도가 낫잖습니까. 에산나도 그쪽을 더 좋아할 테고요.”
“딱히 떠오르는 기도문이 없는데.”
“하나도 말입니까?”
“그, 내가 원래 교회랑 별로 인연 이 없어서.”
기돈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벌 렸다.
“왕국의 기사가 할 만한 말은 아니 군요, 나리.”
“왜? 내가 성당기사도 아닌데.”
“교회를 수호하는 건 모든 기사의 의무입니다. 서임식 때 맹세하셨을 텐데요.”
……음,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 었던 것 같다. ‘교회를 수호하고 이 단을 구축하라’였나.
난 울카르 왕자가 이어서 속삭였던 문장을 기억해내고 어깨를 으쓱였 다.
“날 기사로 삼은 분이 그랬는데, 그딴 건 됐으니 약한 자를 지키고 선행이나 하라셨거든. 교회가 약자 는 아니잖아?”
“예에? 그게 무슨 불경한,”
“농담이야, 농담.”
기돈의 얼굴이 굳어지자 난 미소 지으며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묵주는 됐어.”
“……예.”
오묘한 표정으로 묵주를 목에 거는 기돈을 지나쳐, 나뭇가지를 엮어 만 든 엉성한 고리십자가 앞에 섰다.
궁전의 마법사, 초원의 대전사, 발 루인의 공녀, 동방의 암살자, 정령을 품은 소녀, 힘 잃은 흡혈귀, 그리고 열 명의 용병까지.
저마다 다른 색색의 시선이 내게 모여들었다.
“크흠.”
으, 나 이런 거 못 하는데. 경험도 없고 재능도 없단 말이야…….
하지만 무작정 뺄 순 없었다. 기돈 은 물론이고 다른 용병들 역시 내가 나서길 은근히 기대하는 기색이었거 든.
뭐, 용병들이 저러는 것도 이해하 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용병들은 죽음에 발을 걸치고 살아 가는 이들이다. 이런 ‘의식’을 중요 시하는 것도, 그 의식에 명성 높은 기사인 내가 나서주길 바라는 것도 당연한 일이지.
“주여, 여기 죽어 몸을 뉜 이는 에 산나입니다.”
뜬금없이 시작된 기도에 부산스러 운 인기척이 흘렀다.
투구를 옆구리에 끼고, 장갑을 벗 고, 뻬딱하게 짚고 있던 다리를 고 치고, 이어서 두 손을 맞잡는 소리.
“그녀는 신의를 아는 용병이고, 용 감한 전사이며, 믿음직한 동료입니 다.”
난 에산나와 그리 친한 사이는 아 니었다. 하지만 나름 한 달간 함께 여행한 동료였기에 이것저것 할 말 이 있었다.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운파스트의 신실한 농부의 딸이 고, 정의를 위하여 기꺼이 창을 드 는 용사이며, 좋은 술을 마시며 노 래를 부를 줄 아는 북부인입니다.”
아이씨, 역시 어렵네.
난 잠시 마른 입술을 적시며 말을 골랐다.
“……홀로 핀 분꽃에 걸음을 피하 고, 긴 모포 자락을 동료와 나눕니 다. 길에서 수도사를 만나면 동전 몇 푼이나마 헌금을 하며, 거친 욕 을 하거나 사람을 죽인 날엔 저녁 기도를 늘립니다.”
짧게 숨을 고르고, 기도를 이어갔 다.
“제 친구 에산나는 선한 자입니다. 그러니 곁으로 데려가 부드러운 옷 을 입히시고, 좋은 술과 음식을 먹 이시고, 평화로운 집을 내리십시오.”
여기 교리에 맞는 말인지는 모르겠 지만……. 뭐, 딱히 시비 거는 사람 은 없겠지.
“제 친구 에산나는 좋은 전사입니 다. 필요하시거든 전사로 부리고, 공 을 세우거든 상을 주십시오. 그리 고……. 어쨌든 행복하게 해주십시 오.”
기도를 마치고 슬쩍 뒤돌아보니, 일행은 아직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내가 눈썹을 긁적거리자, 한쪽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우테콰이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나는 놈을 향 해 인상을 써 보인 뒤 입을 열었다.
“……그, 이상입니다.”
내 바보 같은 마무리에 헤일라가 슬쩍 말을 보태었다.
“에산나가 성전에 이르길.”
“에산나가 성전에 이르길.”
그렇게 짧은 장례식은 끝났다.
쇠뇌수 기돈은 조금 애매한 얼굴이 었지만 다른 이들은 표정이 썩 나쁘 지 않아 보였다.
난 괜히 뻘쭘해져서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 슬슬 가자.”
용병들이 분분히 공터에서 짐을 챙 기는 와중에, 빡빡이 스티드먼이 슬 쩍 다가오더니 씩 미소를 짓는 것이 었다.
“……뭘 쪼개?”
“저도 죽거든 포이닉스 님이 기도 를 해주십쇼. 알아먹기 쉬운 게 딱 제 취향입니다.”
놈이 그렇게 말하며 실실거리자, 나는 오묘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사망 플래그냐, 그거?”
“사망 플래그가 뭡니까?”
“네가 한 말. 그런 불길한 소리하 는 새끼는 꼭 먼저 죽더라고.”
내 단정적인 말에 스티드먼이 표정 이 왈칵 구겨졌다.
“거, 미신 같은 겁니까?”
“미신이라기보단……. 경험을 통한 추론이지. 사실상 정설이야.”
“그럴 리가요. 저는 처음 듣는단 말입니다.”
놈의 표정이 우스워서 나는 낄낄거 리며 놀리듯 말했다.
“어때? 취소할래?
“……무를 수 있습니까?”
“은화 한 닢이면 못 들은 걸로 해 줄게.”
스티드먼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내다가 주머니에서 은화를 꺼내어 건넸다. 나는 은화를 엄지로 튕겼다 가 받으며 놈의 대머리를 문질렀다.
“자, 무른 거지? 그럼 너 죽어도 기도 안 해준다?”
“엑, 그런 게 어딨습니까?”
“억울하면 끈질기게 살아남아. 나 이도 어린 새끼가 죽니 사니 하지 말고.”
머리를 털어 내 손길을 뿌리친 스 티드먼은 얼굴을 구기며 툴툴거렸다.
“……제기, 괜히 은화만 버렸네. 두 고 보십쇼, 그거 아까워서라도 악착 같이 살라니까.”
놈의 푸념에 일행 사이에서 잔잔한 웃음이 흘렀다.
이후의 여정은 썩 평화로웠다.
하긴, 이 좁은 통로에 적이 있어 봐야 얼마나 있겠어. 솔레바와 마주 친 것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고.
우린 꼬박 이틀 간 이동과 숙영만 반복한 뒤 목적지에 도달했다.
“여기가 레이븐즈 클리프인가.”
기스톨 지방의 본성은 바위산을 등 지고 서 있었다. ‘까마귀의 절벽’이 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성벽은 깎아 지른 듯 높았으며, 오랜 풍파를 맞 은 탓인지 촘촘히 쌓인 검은 바윗돌 들은 여기저기 멍이 들어 있었다.
또한 외부의 성벽과 내부의 아성이 서로 접해 있는 특이한 구조여서 얼 핏 보기엔 석재 망루나 성탑을 크게 확대시켜 둔 같았다.
해자는 물이 말라 바닥을 훤히 드 러낸 채였는데, 그 깊이가 4, 5미터 쯤은 족히 되어 보였다. 폭은 그 세 배쯤 되는 것 같았고.
일행은 해자에 놓인 두꺼운 도개교 앞에 늘어서 있었다. 쇠사슬이 끊어 진 도개교 건너편엔 녹슨 창살문이 보였고, 그 안은 불빛 한 점 없이 어두컴컴했다.
“……하, X팔. 아주 지리겠구만.”
말총머리 프리츠는 혀를 길게 내밀 어 입가를 훑더니 바닥에 가래침을 뱉었다.
“내 눈이 잘못된 건가? ‘어서 와 라. 여긴 지옥이다, 이 뭐만 한 새 끼들아’라고 쓰여 있는 것 같은데.”
“등신, 글도 못 읽는 놈이.”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년아.”
프리츠가 주근깨 미라를 향해 으르 렁거리는 동안 나는 배낭을 내려 투 창을 한 자루 빼 들었다.
그간 하도 험하게 써서 창촉이 조 금 무뎌져 있었지만, 뭐, 상관없지.
옆에 서서 성을 유심히 살피고 있 던 엘렌이 내 행동을 보고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뭐 하는 거야?”
“그냥. 잠깐 확인할 게 있어서.”
내 시선이 향한 건 도개교 건너편 에 놓인 한 쌍의 커다란 조각상이었 다.
검은 피막 날개, 염소의 뿔, 원숭 이를 닮은 얼굴, 날카로운 송곳니, 잔뜩 웅크린 근육질의 몸, 짧지만 날카로운 발톱…….
다른 일행은 그 흉측한 조각상들을 보며 으스스함을 느낄 뿐이었지만.
난 아니었다.
딱 봐도 너무 뻔하잖아, 저거.
“흡,”
짧게 호흡을 마시며 발을 굴렀고, 허리를 튕겨 투창을 집어 던졌다.
콰가각, 하는 소리와 함께 왼편에 앉은 조각상의 목 부분이 깨어졌다. 투창은 그걸로 그치지 않고 한 뼘쯤 파고든 뒤에야 멈춰섰다.
“끄억!”
목에 투창이 박힌 조각상이 뜬금없 이 비명을 지르자 용병들은 식겁하 여 입을 쩍 벌렸다.
“이런 씨, 뭐야 저거?”
“돌조각이 움직인다!”
난 두 번째 투창을 집으며 일행에 게 고함을 질렀다.
“전투 준비, 가고일이다!”
내 소개를 들은 건지, 아니면 동료 의 비명을 들은 건지 오른편에 앉은 가고일이 번쩍 눈을 떴다.
“침, 입자—!”
놈은 기계음 같은 기괴한 목소리와 함께 날갯짓을 시작했다. 놈에게 두 번째 투창을 던졌지만 두꺼운 피막 날개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왼편에서 버르적거리던 가고일 역 시 목에 박힌 창을 뽑더니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었다.
꽤 질긴 놈들이군.
“해자에서 물러나!”
베테랑 컨휘어의 말에 용병들이 서 둘러 뒷걸음질 쳤고, 그 와중에 궁 수 콜과 쇠뇌수 기돈은 잽싸게 화살 을 쏘았다.
“성가, 신!”
콜의 합성궁과 기돈의 중쇠뇌는 철 판을 찢을 만큼 강력했지만, 단단하 고 두꺼운 가고일의 피부엔 손가락 두어 마디만 박혀 달랑거릴 뿐이었 다.
날갯짓으로 화살을 털어낸 가고일 은 칼로 돌벽을 긁는 것 같은 목소 리를 내며 맹렬히 날갯짓했다. 그러 면서 용병들을 향해 추락하듯 날아 드는 것이었다.
“으하-!”
기합인지 웃음인지 헷갈리는 소리 를 낸 우테콰이가 펄쩍 뛰어올랐다.
제 반만 한 덩치의 인간이 덤벼오 자 가고일은 송곳니를 비죽 내밀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꽈광!
바위끼리 부딪치는 거대한 소리가 공기와 자욱한 안개를 찌르르 떨쳐 울렸고,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괴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던 조각상이 산산이 박살 나버렸다.
“어으, 젠장! 조심해!”
“방패 들에”
크고 작은 돌조각이 우수수 떨어지 자 용병들은 서둘러 방패를 들어 머 리를 가렸다.
그 와중에 중검사 움베르타와 퉁퉁 한 에손은 투구로 돌덩이를 받아내 며 머리를 부여잡았고, 헤일라는 붉 은 반지를 하나 소모하여 ‘별의 방 패’를 넓게 펼쳤다.
그 은빛으로 번쩍이는 반구 아래에 서, 엘렌이 시동어를 뱉었다.
“Lumfere!”
완드에서 솟구친 화염구가 가파른 곡선을 그리며 쏘아졌다.
“그으,”
목에 투창을 박은 채 뒤늦게 날아 오른 가고일은 강맹한 기세가 담긴 화염구를 보고 허공에서 휘릭, 회전 했다.
화르르, 쾅/
제 속도를 못 이긴 화염구는 가고 일에 그을림만을 남긴 채 검은 성벽 을 들이받으며 폭발했다.
“크하아-”
목이 창에 꿰뚫린 채 잘도 웃어대 던 가고일은 뒤이어 날아온 은빛 탄 환에 왼 날개를, 투창에 오른 날개 를 꿰뚫리고 말았다.
하지만 놈은 끝내 추락하지 않았 고, 허공에서 급히 날갯짓을 하며 균형을 다잡았다.
그때, 엘렌 옆을 지키고 있던 뭉치 가 앞으로 쏘아져 나갔다. 녀석은 한 번의 도약으로 2미터 가까이 뛰 어오르더니,
“켁! 이런 씨-”
건장한 체격의 여인, 중장병 데르 비쉬의 머리를 즈려 밟고 재차 도약 하는 것이었다.
허공에 뜬 녀석은 제 발등을 밟으 며 솟구치는 묘기, ‘연(燕)’을 선보 이며 비틀거리고 있는 가고일 앞까 지 뛰어올랐다.
그리고, 손잡이에 옥색 비늘을 감 은 운검을 벼락같이 휘둘렀다.
비정상적으로 예리한 칼날은 새까 만 돌을 나무토막처럼 갈라버렸고, 머리통을 잃은 가고일은 땅에 추락 해버렸다.
“우, 우와-”
“미친, 저걸 베다니.”
감탄하는 용병들 사이로 착, 멋지 게 착지한 뭉치는 천천히 고개를 들 더니,
“……아, 아으.”
하고 울먹거리며 칼을 놓아버렸다.
“뭉치야?”
“아, 아파요.”
다시 보니, 녀석은 손아귀가 시뻘 겋게 물들어 있었다. 돌을 베는 저 항력이 상상 이상으로 강했던 모양 이다.
찡찡거리는 뭉치를 달래며 성을 돌 아보다가, 나는 문득 떠오른 생각에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엘렌. 저거 보여?”
내가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엘렌의 빗나간 화염구가 틀어박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
“뭐. 놀리기라도 하려고?”
“아니, 그게 아니라.”
나는 일행을 돌아보며 눈썹을 긁적 였다.
“다들 저기 봐.”
w……2”
“저 성벽, 깨질 것 같지 않냐?”
내 물음에 용병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베테랑 컨휘어가 헛웃음을 터 뜨리더니 입을 열었다.
“나리, 설마……
“굳이 우리가 들어갈 필요가 있을 까? 딱 봐도 들어가면 안 될 것 같 이 생겼는데.”
괴상한 표정을 짓는 일행을 무시하 고, 나는 엘렌을 향해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자, 네가 힘 좀 써봐.”
가라, 걸어 다니는 캐터펄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