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264)
나의 악당들 264화
51. 진실, 이별(6)
잠든 엘렌을 침대에 뉘어두고 방으 로 돌아오니 누군가 테이블에 홀로 앉아있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책장을 넘 기고 있는 건 밤하늘처럼 까만 머리 칼을 한쪽 어깨로 길게 늘어뜨린 미 녀 였다.
그믐밤 삭풍이 창문을 흔들어대어 요란한 가운데, 그녀가 차지한 공간 만은 고요하기 그지없다.
그 분위기가……. 음, 과장 좀 보 태서 처녀 귀신 같다. 모르는 사람 이 보면 섬뜩해하겠는걸.
물론 나로선 처음 겪는 상황이 아 닌지라 목을 잠시 긁적이다 침대에 걸터앉을 뿐이었다.
“……책 읽어?”
« O ” 흐.
뻔뻔한 야밤의 방문자, 헤일라는 시선도 주지 않고 간결히 대답했다. 마치 제 방인 양 당당한 태도에 헛
웃음이 나올 것 같다.
근 몇 달간, 헤일라는 내 주요 관 찰 대상이었다.
위협적인 힘을 가진데다가 롱빌에 선 군대를 학살하고 아탈란테와 엘 렌을 붙잡아 인질극까지 벌였으니 주의를 기울이는 건 당연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경계 어린 관찰은 그녀에 대한 인상을 많이 변 화시 켰다.
포이닉스가 가지고 있던 분노 내지 는 증오 역시 상당 부분 희미해졌 다.
위험한 사이코패스쯤으로 여겼던 헤일라는 그리 위험하지 않았으며 사이코패스 같지도 않았다.
그녀가 보이는 무감정한 모습은 유 전적 장애의 발현이 아니라 학습에 의한 모방에 불과하다는 게 내 추측 이었다.
그러니까, 무표정한 얼굴과 차가운 분위기로 인한 편견만 잘 걷어내고 보자면, 헤일라는 그저 평범한 아가 씨였다. 약간 인싸 기질이 있는.
평소 그녀는 도대체 어딜 저렇게 쏘다니나 싶을 만큼 열심히도 돌아 다녔다.
상회 건물이나 조합사무실 등 왕의 기수들이 주둔한 곳을 제집처럼 들 락거리며 정보를 얻거나, 부하 용병 들이 머무는 숙소를 들러 별일은 없 는지 점검하거나, 애꾸눈 시모스나 중장병 데르비쉬 등을 데리고 시장 에 들러 상품을 살피거나, 성문을 오가는 여행객들을 통해 다른 지방 의 소식을 전해 듣거나, 등등.
그렇게 돌아다니다가도 식사 시간 이 되면 꼭 길드홀로 돌아와 얼굴을 비춘다. 뭔가 특별한 대화를 나누거 나 하는 건 아니고, 같은 테이블에 서 식사를 한 뒤 내 근처에 얼마쯤 앉아있다가 다시 어디론가 사라지는 식이었다.
간혹 나와 시간을 많이 보내지 못 한 날이면 지금처럼 잠들기 전에 찾 아와선 삼십 분에서 한 시간쯤 빈둥 거리다가 제 방으로 돌아가곤 했다.
난 그런 헤일라의 모습에서 시골 동네를 누비는 고양이를 떠올렸다.
꼬리를 빳빳이 세운 채 자기 영역 을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플 즈음이 면 저도 모르는 사이 집사로 임명된 인심 좋은 할아버지를 찾아가 애옹 거리는 뻔뻔한 고양이. 도도한 척을 하지만 손을 뻗어 쓰다듬어주면 갸 르릉, 좋다고 울어대는 고양이.
“••••••흐흠.”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웃음을 참 으며, 난 가만히 헤일라를 관찰했다.
양초 너덧 개가 발하는 따뜻한 불 빛이 그녀의 이목구비를 스치며 깊 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하얀 얼굴 반절이 포근한 주홍빛에 물든 와중 에도 붉은 입술은 저 혼자 선명하 다.
시선을 잡아끄는 그 자태를 멍하니 감상하고 있노라면 어느덧 밤은 깊 어간다. 그러면 헤일라는 책장을 덮 으며 ‘갈게. 잘자’ 하고 속삭인 뒤 제 방으로 돌아간다. 그게 일상적인
마무리인데…….
오늘은 아닌 모양이다.
깜빡, 깜빡.
책장을 덮은 헤일라는 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느릿한 박자의 깜 빡임에서, 난 망설임을 읽을 수 있 었다.
“……왜? 할 말 있어?”
W O ” “〒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하더니 다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라-팔라이스 궁전. 가지 않는 게 좋겠어.”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궁전에 가지 않는 게 좋겠어.”
예상치 못한 말이라 나도 모르게 미간이 좁혀진다.
“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하겠는데?”
“궁전에 가야 하는 이유가 뭐야?”
“……궁전에서 온 추격자들과 맞서 느라 개고생을 한 게 고작 며칠 전 이야. 가서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앞으로 더 많은 마법사들이 우릴 노 리고 따라붙을 거라고.”
“엘렌만 가면 돼. 너는 문제 해결 에 도움이 안 될 거야.”
단호한 말투에 어울리게도, 날 향 한 헤일라의 시선엔 흔들림이 없었 다.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뭔데?”
질문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는 기 다렸다는 듯 답을 내놓았다.
“첫 번째로, 네 신분이 문제야.”
첫 번째? 하나가 아니야?
“……내 신분?”
“넌 자하카르 공작가의 사람이야.”
헤일라는 평소와 같이 고저 없는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검은 머리카락과 눈동자, 장대한 체구, 뛰어난 무술과 혈조술. 누가 보더라도 자하카르나 발루인을 떠올 릴 만한 요소들이야.”
“그거야, 지금까지처럼 숨기면 되 잖아.”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야. 아일 란트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이 곳에서도 네 정체를 의심하는 자들 이 있어.”
“……뭐? 누가?”
“그리프 남작의 군영에서 흘러나온 이야기야. 울카르 왕자가 아일란트 와 손을 잡은 건 아닐까 의심을 하 고 있겠지.”
이 세상에서 흑발흑안은 나름 드문 것이었다. 키가 190센티도 넘는 거 한은 그보다 훨씬 드물며, 혈조술을 전투에 응용할 수 있을 만큼 강력한 혈조술사는 더더욱 드물다. 그러니 흑발흑안을 가진 거구의 혈기사를 보고 혈조술의 원류인 자하카르와 발루인을 떠올리는 건 지극히 당연 한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히도, 난 사우스하버에 서 평민 용병인 척 행세했다. 전국 구로 명성을 얻은 건 울카르 왕자에 게서 장원과 기사 작위를 받으면서 였고. 그런 이유로 내가 아일란트의 공작가와 연관이 있음을 눈치챈 사 람은…… 적어도 지금까진 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내가 이름을 떨친 지도 벌 써 반년째다. 내 정체를 의심하는 사람이 생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게다가 티린 멜은 아일란트의 부 속섬이야. 궁전의 마법사 중 늙은이 들은 우리 혈족을 한눈에 알아보겠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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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팔라이스 궁전은 국왕에 대한 형식적 신종마저도 굴욕이라고 여길 만큼 독립성이 높은 집단이야. 그런 곳에 네가 함부로 발을 디뎠다간 엘 렌이 오해를 사게 돼.”
“무슨 오해?”
“죄를 씻기 위해, 혹은 권력 다툼 을 위해 외부의 힘을 끌어들였다는 오해. 지지자를 모아야 하는 엘렌의 입장에서는 큰 부담이 되겠지.”
일리가 있는 것 같은데.
내가 팔짱을 낀 채 벽에 등을 기 대는 모습을 보며, 헤일라는 두 번 째 이유를 설명했다.
“원소 학파는 그 구성원들끼리 전 투를 벌이는 걸 철저히 금지해. 궁 전 바깥에서야 이 규율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지만 궁전 내부 에서는 달라. 싸울 일이 없다는 뜻 이야.”
“……구성원들끼리는 그렇겠지. 하 지만, 엘렌이 누명을 벗지 못할 수 도 있잖아?”
“엘렌에겐 고귀한 혈통과 뛰어난 마력, 그리고 증인이 있어. 일 년 만에 귀환한 라다칼린의 후예가 강 대한 마법을 부린다면, 궁전의 그랜 드마스터들은 사이츠의 머리를 쪼개 는 한이 있어도 진실을 알아내려 할 거야. 금지된 방법을 쓸지도 모르 지.”
“혹시, 혹시라도 일이 잘못되면,”
“그럴 가능성은 배제해야 해.”
“배제, 한다고?”
“일곱 명의 그랜드마스터와 마흔 명의 마스터, 삼백 명의 전투마법사 가 적이라면 우리 일행이 모두 넘어 가도 당해내지 못할 테니까.”
말문이 막힌다. 얼굴을 쓸어내리는 손등 위로 헤일라의 말이 쏟아졌다.
“네가 궁전에 가면 엘렌은 정치적 으로 손해만 볼 뿐이고, 일신의 안 위에도 도움이 안 돼. 게다가 네가 떠나버리면 남은 일행은 구심점을 잃고 흩어지고 말 거야. 세테니오라 수도원은 포기해야겠지.”
“울카르 왕자가-”
“울카르 왕자가 몸을 빼면 제국의 선제후들이 서부를 짓밟을 거야. 왕 자도 그걸 모를 리 없으니 수도원 쪽으로는 유의미한 병력을 보내지 못할 거야.”
뭐, 그래. 이득은 하나도 없고 손 해만 잔뜩 볼 거라는 거지?
난 눈썹을 긁적이다가 한숨 섞인 말을 꺼내었다.
“그래. 네 말 다 이해했어.”
“그러면—”
“그래도,”
말이 끊긴 헤일라는 내 대답을 짐 작했는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난 갈 거야.”
“•••••♦왜?”
“엘렌은 고작 열일곱 살이야. 한 달 뒤면 열여덟이고.”
“열일곱이든 열여덟이든 성인인 건 같아. 정당히 징집할 수 있고, 성혼 하여 새 가구를 이루게 할 수 있고, 서원을 시켜 수도사나 수녀로 만들 수 있는 나이.”
“성인……. 그래, 뭐, 그렇지.”
마른 입술을 적시며 고개를 내저었 다.
“하지만 그건 평범한 애들 얘기고. 엘렌은 십칠 년 동안 궁전에서만 지 낸 녀석이야. 그뿐인가? 부모도, 스 승도, 친구도 없지. 믿을 만한 친척 은커녕 살쾡이 같은 삼촌이 목을 물 어뜯으려 한다고.”
“이르게 찾아온 숙명이고, 지나간 삶의 대가고, 혈통에 주어진 책임이 야. 오롯이 엘렌이 감당해야 해.” “그걸 누가 정하는데?” 냉소를 깊은 한숨으로 지우며 말을 이었다.
“네가 뭐라고 하든 상관없어. 난 그냥, 엘렌을 지켜주고 싶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혼자 아등 바등할 때, 실질적인 도움을 주진 못해도 응원은 해주고 싶어. 무너지 려 할 때 다독여주고, 슬퍼할 때 안 아주고……
흐려지는 말끝을 헤일라는 조용히 지켜보았다.
가슴 깊이 빨려 들어간 숨을 도로 빼내며 마음을 털어놓았다.
“혼자서 감당하지 못할 거야.”
“엘렌은, 내가 필요해.”
깜빡, 깜빡, 깜빡…….
급한 박자를 타던 눈 깜빡임은 침 묵 속에서 점차 잦아들다가, 마침내 멈췄다.
헤일라는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양 눈썹이 조금쯤 당 겨져 미간이 미세하게 패였고, 다물 어진 입가는 가늘게 움찔거렸다. 멈 춘 것 같은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 보니 잘게 떨리고 있었다.
그녀가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물속에서 뻐끔 거리는 것처럼 소리 없이 어물거리 던 붉은 입술은 이내 다시 닫혔다.
헤일라는 숨을 고르는지 잠시 가슴 을 들썩였다. 그리고 툭 말했다.
“이게, 사랑이구나.”
긴 침묵 끝에 뱉은 말이라기엔 조 금 짧았다. 난 그 말을 잠시 곱씹다 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
깜빡. 오랜만에 눈이 깜빡인 순간, 헤일 라는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다. 무표 정한 얼굴을.
“그것도 도움이 안 될 거야.”
“……뭐라고?”
“네…… 사랑은 엘렌을 해칠 테니 까.”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슬슬 정수리에 열이 올라 머리칼을 쓸어올리는데, 헤일라가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넌 혈왕의 후손이야.”
“……갑자기 혈왕이 왜 나와?”
“아주 많이 닮았겠지. 네 피를 통 해 느낄 수 있어.”
내가 얼굴을 굳히든 말든 헤일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사람을 죽이며 우월감을 느낀 것 도, 피를 마시며 희열에 떤 것도, 굶주림에 몸을 떨다 밤거리를 헤맨 것도, 그것 때문이야.”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문득, 물기 어린 새까만 눈동자가 어둡게 빛났다. 언젠가 엿본 적 있 는…… 뒤틀린 욕망이 그 안에서 불 타오르고 있었다.
다시 마주친 그 불길에, 나는 벼락 에라도 맞은 듯 그녀를 이해하게 되 었다. 포이닉스의 기억과 그녀를 관 찰하며 알게 된 사실들이 서로 씨실 과 날실처럼 엮여갔다.
“그 혈왕의 피를 온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영리한 헤일라는 아주 어린 시절 스스로가 혈족들과 다름을 눈치챘 다. 어린 그녀는 돌연변이를 드러냄 이 생존에 도움이 되지 않으리라 판 단했다. 그리하여 가풍에 따라 무감 정을 모방했다.
그 과정에서 어린 헤일라는 감정과 욕구가 다름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 로부터 시작된 욕구의 짓눌림은 지 금까지 이어졌다.
“난 할 수 있어.”
그리고, 욕구는 짓누를수록 더 지 독해지고 또 기괴해지는 법이다.
“너와 같은, 혈왕의 후손이니까.”
까맣게 불타오르는 눈빛에, 거기서 느껴지는 광기에 난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엘렌은 아니야. 네 사랑은 엘렌을 해칠 거야. 아니, 이미 해치고 있 어.”
“……개소리 좀 그만해.” “엘렌은 떠났어야 해. 널 이해하지 도 받아들이지도 못할 테니까. 이젠 늦어버렸어. 너에게, 혈왕의 피에 물 들고 있어.”
“그만, 닥쳐.”
“엘렌은 네 보호가 필요한 순진한 소녀가 아냐. 주문 한 마디로 수십 명을 불태워 죽이고, 손짓 한 번으 로 목을 꿰뚫는 전투마법사지.”
“제발!”
벌떡 일어난 나는, 헤일라가 앉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려치려다가 크 게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타이르듯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엘렌 이 죽인 건 도적이나 괴물, 그리고 우릴 노리는 적이었다고. 그런 놈들 을 죽인 것마저 죄고, 타락이라고 한다면 이 세상 사람들은 다-”
“아닌 사람도 있어.”
“-뭐?”
언성을 높여가던 대화가 순식간에 멎었다.
“방금, 뭐라고?”
평소완 달리 마치 취한 것처럼 미 세하게 고양되어 있던 헤일라는 입 을 다문 채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말해.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모두가,”
“모두가?”
“모두가 적은 아니었어. 무고한 사 람도 있었어.”
알 수 없는 불길한 느낌에 난 숨 을 삼켰다. 이대로 헤일라를 내쫓아 버리고 싶었지만, 이미 이야기는 시 작된 뒤였다.
그녀는 담담한 어조로 사우스하버 에서 벌어진, 내가 모르는 끔찍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난 눈을 감지도, 귀를 막지도 못했 다. 그저 뒷걸음을 쳐 침대에 도로 걸터앉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전부 였다.
“이걸 왜, 대체 왜, 지금에야-”
“엘렌을 이해하게 됐거든.”
“엘렌, 을?”
W O ” 흐.
헤일라는 여상스러운 표정이었다. 언뜻, 그녀의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 르는 아이의 그것처럼 보였다.
“엘렌을 궁전으로 보내.”
하지만 눈동자 너머 깊은 밑바닥엔 비틀린 욕망이 가득했다. 또한 막 싹을 틔운 감정이 서서히 세를 뻗어 나가고 있었다.
“우리가 그 아이를 해치기 전에.”
그믐밤 삭풍이 창문을 흔들어대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