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57)
나의 악당들 357화
60. 겨울의 끝(8)
점심은 케이보르의 선술집인 ‘금화와 노새’에서 준비해 온 치즈 프리터였다.
저민 치즈와 밀가루를 섞어 반죽을 만든 뒤 채종유(菜種油)에 튀긴 것 으로, 유채꿀을 곁들여 간식처럼 먹 을 수 있는 요리다. 도시락으로 먹 기 딱 좋지.
테오도라도 썩 만족한 눈치였다. 만든 지 몇 시간이나 지났음에도 바 삭한 식감이 살아 있어서 놀란 것 같기도 하고.
전날 돼지갈비 수프와 구운 송어 등을 먹으면서 느꼈지만, 주방장의 솜씨가 상당한 모양이다.
한번 영입해 볼까? 헤일라도 꽤 좋아할 것 같은데.
식사를 마친 다음엔 슬슬 걸어서 언덕 주변을 산책했다.
고원답게 푸른 초지는 적고 누런 벌판은 드넓었으며, 사방에는 크고 작은 산이며 언덕 등이 솟아있었다. 눈에 담을 만한 풍경이다.
“백년성이나 왕도에선 저런 산을 찾아볼 수가 없었소. 너른 들판을 달려도 보이는 거라곤 가끔 솟은 성 탑과 보루뿐이었지.”
“어, 왕도 근처엔 강이 흐른다고 들었는데요.”
“테멜 강? 그건 서쪽에 있소. 내가 갈 수 있는 곳은 왕도 남동쪽의 기 마 훈련장뿐이었지. 외숙께서 가끔 데려가 주셨거든.”
“어릴 적부터 말 타는 걸 좋아하셨 나 보군요?”
“음, 토팔에선 그렇지 않았소. 그땐 그저 평범한 귀족 가문의 계집아이 였지. 가끔 오라버니들과 사냥에 나 서긴 했지만 직접 고삐를 잡은 적은 거의 없었소.”
……오라버니 들이라.
그래, 언젠가 군의에서 맥네일 장 군이 그런 이야기를 했었지. 테오도 라의 아버지인 구엘람버스 공작은 독살을, 형제들은 암살을 당했다고.
마른침을 삼키며 슬쩍 살펴보니, 연한 금색의 눈동자는 다만 추억에 젖어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조금이나마 말에 익숙해진 게 다행이었소. 미테르게란트에서 쫓겨나 왕도의 수녀원에 유폐된 이 후부터는 승마만이 유일한 일탈이었 거든.”
말에 애정을 가지게 된 게 그런 이유에서였구나.
그러고 보니 헤일라도 말을 상당히 좋아했다. 안개 속에서 실종되었다 가 살아 돌아온 올토니제를 보고 평 소보다 목소리가 반 옥타브쯤 올라 갔더 랬지.
혹시 말을 좋아하는 건 모든 공녀 들의 기본소양이 아닐까?
그런 잡생각을 할 즈음 우린 우연 히 자그만 연못을 발견했다.
아니, 물이 말라 있었기에 연못보 단 늪지나 물웅덩이 정도였다. 연못 이 얼고 녹기를 반복한 탓인지 개펄 처럼 보이기도 했다.
물론 나와 테오도라의 시선을 사로 잡은 건 진득한 개흙 따위가 아니었 다. 연못가에 자리 잡은 한 무더기 의 꽃이었다.
“……라넌큘러스.”
“라넌큘러스? 저 꽃을 그렇게 부릅 니까?”
“그렇소. 아직 추위가 가시지 않았 는데 이리도 만개하다니.”
하얀 꽃잎이 둥근 모양으로 겹겹이 싸여있다. 겉 부분과 안쪽은 백합처 럼 희지만 그 중간 부분은 벚꽃처럼 연분홍빛을 띠었다.
2월에 접어든 지 사흘, 테오도라의 말대로 아직 겨울인데 이렇게 꽃이 피어 있는 걸 보니 그저 신기할 따 름이 다.
“……아름답군. 그렇지 않소?”
테오도라 공녀는 반쯤 입을 벌린 채 꽃 무더기 앞에 쪼그려 앉았다. 향을 맡는 듯 흐으음, 숨을 깊이 들 이마시는 모습.
덩달아 눈을 감아보았으나 특별한 꽃향기가 느껴지진 않았다. 그러나 은은한 풀 내음은 겨울의 끝을 실감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포이닉스 경.”
“예‘?”
“이 일은 우리 사이의 비밀이오.”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의아함에 돌아보니, 그녀는 눈을 감고 기도를 하고 있었다.
“-온 땅에 온기를 불어넣으시는 주여. 청하노니 여기, 이른 봄을.”
말에서 비롯된 파장에 대기가 떨렸 다. 근래 들어 특히 예민해진 육감 이 마력, 아니, 신성력의 흐름을 더 듬었다.
쩌엉.
황금색 빛의 기둥이 솟구쳤다.
테오도라가 본신에 담고 있는 신성 력은 그리 대단한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차원의 경계, 그 미세한 틈을 비집고 배어 나온 신성력은 허공을 흘러 강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건,”
막대한 양의 에너지가 사방의 대지 를 적셨다. 내가 발을 딛고 선 연못 가는 물론이고, 근처의 호밀밭과 언 덕도 황금빛 서광에 물들어갔다.
이 순간, 자연을 가득 채운 건 마 나가 아니라 신의 손길이었다.
“축토의 의식이오.”
빛이 잦아드는 가운데, 기적의 매 개 역할을 하던 테오도라가 일어서 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경과 내가 함구하면 비밀을 지킬 수 있겠지. 괜찮겠소?”
잔상인지 후광인지 모를 빛을 두른 채 장난스레 미소를 짓는 그녀는, 태피스트리에 수 놓일 만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시금 압도된 나는 입을 헤 벌리고 있다가 고개를 끄덕 였다.
“이만 가야겠소. 빛기둥을 본 사람 이 있을지도 모르니 자리를 떠야 지.”
여신과도 같은 자태에 넋을 잃고 있던 난 무의식중에 꽃 무더기를 돌 아보았다. 봄날의 새벽에 이슬을 맞 은 것처럼 꽃잎이 하나같이 촉촉했 다. 육안으로 봐도 생기가 넘쳐흐름 을 알 수 있었다.
그 생생한 라넌큘러스 가운데, 전 에 보이지 않던 한 송이가 시선을 잡아챘다.
“경?”
“잠시, 금방 가겠습니다.”
연분홍 화사한 빛을 뽐내는 주변의 가족 내지는 동료들에 비해 그 꽃은 키가 절반만 했고, 검은색이었다.
검은색 라넌큘러스. 겉잎은 밤하늘 보다 어둡고 속잎은 우유보다 하얀, 고혹적인 빛깔의 꽃이었다.
돌연변이 같은 걸까, 아니면 품종 이 다른 걸까. 축토를 받은 다음에 야 하늘을 향해 고개를 치켜든 것이 썩 가련해 보인다.
그 꽃을 보고 있자니 떠오르는 사 람이 있었다. 칠흑처럼 검은 복장으 로 백옥처럼 하얀 속살을 숨긴 어린 여인…….
이질적인 외양이, 곧 시들고 말 운 명이 안타깝다.
나는 무의식중에 손을 뻗어 검은색 라넌큘러스를 뿌리부터 꺾었다. 그 리고 품속에 고이 넣었다.
테오도라와의 데이- 아니, 산책을 끝내고 케이보르로 돌아왔다.
“……뭔 소란이지?”
곧장 숙소로 향하려는데, 영주관 주변에 바글바글 모여든 사람들이 웬 난리를 피워대고 있었다. 모르는 척 지나가려 했으나 우물 위에 우뚝 선 중년인의 고함이 내 발목을 붙들 었다.
“케이보르의 일은 케이보르 사람들 이 해결해야 하는 법이오!”
“옳소!”
“아무리 왕자님이라 한들 우리의 영지와 장원을, 그리고 권리를 침해 하는 건 불가능하오! 과도한 의무를 요구하는 것 역시 폭거요!”
“그래, 폭거요!”
“이단은 물러가라!”
군중에서 튀어나온 구호에 소리를 질 러대던 중년인이 주먹을 그러쥐었다.
“그래, 말 한번 잘했소! 이단!”
“이단/”
“왕자님의 요구 자체도 문제일진 대, 하물며 이단의 성기사에게 축토 를 맡기겠다니! 주께서 진노하실 것 이니, 애초에 그 여잘 케이보르에 들이지 말았어야 됐소!” 옆에 서 있던 테오도라가 움찔거렸 다. 괜히 분란에 휘말리기 전에 그 녀를 먼저 숙소로 보내고,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영주관으로 다가갔 다.
“나리!”
“컨휘어.”
마침 베테랑 컨휘어를 비롯한 부하 들이 근처에 모여있었다. 난 바이콘 을 울타리에 묶으며 그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뭔 상황이냐?”
“왕자님께서 케이보르 일대의 농지 를 둔전으로 쓰겠노라 공표했습니 다. 저들은 그에 반대하는 무리입니 다.” “……하.”
중세 봉건사회에 농노들이 왕족을 상대로 시위를 벌인다고? 이게 말이 되나?
“저것들 제정신 맞냐? 간땡이가 부어도 정도가 있지.”
지금 울카르가 이끌고 온 기병대는 그의 군세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 깟 정착지를 밀어버리기엔 차고 넘 치는 전력이다. 그걸 저들도 모르지 는 않을 텐데 감히 시위 같은 걸 벌인다고?
“신앙이니 뭐니 하는 게 아무리 중 요하다 해도 그렇지, 목숨을 걸다니.”
“아마 귀족들이 선동을 한 모양입 니다.”
“귀족들이?”
“예. 직접 나서기엔 왕자님이 두려 우니 소작인들을 보낸 거겠죠.”
“참나.”
영주관 앞엔 농노들이 콩나물시루 처럼 꽉꽉 들어차 있었다. 가까운 건물의 창과 옥상, 그리고 골목도 빼곡하긴 마찬가지였다.
대충 살펴도 천 명쯤은 될 것 같 은 엄청난 인파였다. 케이보르의 주 민들만 몰려온 건 아닐 테고, 동쪽 에서 온 피난민들도 섞여 있겠지.
그 규모에 혀를 내두르고 있는데, 마침 왕자의 최측근 친병인 란델이 병사들 몇을 데리고 어디론가 바삐 이동하고 있었다.
“란델 아저씨!”
“아, 포이닉스 경.”
그를 불러세워 상황을 물어보았으 나 별수가 없는 건 마찬가지인 듯했 다.
“왕자님의 명령은 없었습니까?”
“전달받지 못했습니다.”
“네? 그게 뭔 소리예요?” 란델은 굳은 표정으로 답했다.
“주군께선 보아넨 남작과 대면하기 위해 영주관으로 향하셨습니다. 헌 데 보시다시피 인파에 가로막혀 있 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겁니까?”
“일단 부대를 모두 집결시키긴 했 습니다. 허나 전하의 명령도 없이 힘없는 농노들에게 칼을 겨눌 순 없 는 노릇이라……
난 슬쩍 미간을 좁혔다.
“잠깐, 설마 혼자 들어가 계신 건 아니죠?”
“물론 아닙니다. 안키르 경을 포함 한 기사분들을 대부분 데려가셨습니 다.”
“……그나마 다행이구만.”
일곱 번째 기사인 나 이후로 울카 르는 많은 기사들을 막하에 들였다. 덕분에 지금은 왕자를 따르는 기사 가 서른 명도 넘고, 이번에 출정에 대동한 이들은 개중에서도 실력이 빼어난 자들 열 명이었다.
정예기사들과 그 종자들이 붙어 있 다면 울카르가 어이없는 변을 당할 확률은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하다 못해 거대한 안키르 경만 해도 범용 한 기사 너덧은 쉽사리 찜쪄먹을 수 있는 괴물이니까.
“……그래도 마냥 손 놓고 있을 수 만은 없지. 마법사들은 다 어디에 있습니까?”
“마스터 에포즈는 전하와 함께 있 고, 나머지 마법사들은 마스터 리몬 드가 이끌고 오는 중입니다.”
“그, 뭐더라, 그 마도사 할아버지는 요?”
“앤트럼의 오그슐리조라면, 브랜 경이 데려올 겁니다.”
아성을 저택 크기로 축소해둔 듯한 모양새의 영주관과 그걸 둘러싼 군 중들, 그리고 주변을 살펴보다가 입 을 열었다.
“다 이리로 모으십쇼.”
“••••••예?”
“병사들 말입니다. 괜히 퍼뜨려두 지 말고 모이라고 해요. 마법사들도 이쪽으로 오라고 하고.”
“하지만 경, 혹시 난리가 났을 때 저들을 통제하려면-”
“통제는 여기 영주 새끼가 알아서 할 문제고요. 혹시 뭔 일이 나면 저 거 뚫고 왕자님께 합류할 겁니다.”
란델이 아연한 표정을 지으며 망설 이자 난 인상을 찌푸렸다.
“아저씨, 이러고 있을 시간 없어요.”
“하다못해 건물 뒤쪽으로 모이는 게 낫지 않겠습니까? 병력이 모이는 걸 보면 위협을 느낄 텐데.”
“위협적으로 보여야 하니까 이리로 모이라는 겁니다. 칼질을 하는 것보 다야 겁줘서 쫓아내는 게 낫잖아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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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란델이 망설이자, 난 짜증 이 나서 낮게 쏘아붙였다.
“……조금 헷갈리시나 본데, 전 지 금 의견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명령 을 하는 겁니다.”
란델을 포함한 친병들은 울카르 왕 자의 사병이다. 울카르가 부재한 지 금 그의 기사가 명령을 내리는 건 별로 잘못된 일이 아니었다.
뭐, 어중이떠중이 기사가 이런 말 을 하면 씹을 수도 있겠지만 란델의 안색을 보니 그럴 것 같진 않았다.
“……예, 따르겠습니다.”
이래서 사람은 유명하고 봐야 된 다. 명성을 얻으면 권위는 자연스럽 게 따라오는 법이니까.
란델이 병사들을 이끌고 서둘러 사 라질 무렵, 군중을 살피던 말총머리 프리츠가 입을 열었다.
“나리, 뭐하러 기다리십니까? 우리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들어가서 눈에 띄는 놈들 몇 명만 줘패버리 죠. 금방 흩어질 겁니다.”
“기다려. 일단 겁부터 주고 그래도 안 흩어지면 그렇게 할 생각이니까.”
“쯔 ” 으、.
놈은 가래침을 뱉으며 툴툴댔다.
“우리 왕자님, 완전 호구잡혔습니 다.”
“……왕자님이 호구를 잡혔다고?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약자들의 챔피언이니 뭐니, 웃기
지도 않은 별명을 달고 있으니 저렇 게 기어오르는 것 아닙니까.”
딱히 부정할 수 없는 말이다.
하긴, 아무리 귀족과 지주들이 선 동을 했더라도 상대가 에아본 후작 이나 자카리스였다면 저렇게 시위를 벌일 수 있었을까?
당연히 아니겠지. 울카르의 자비로움 에 대한 소문을 믿고 저렇게 간이 배 밖으로 나온 짓거리들을 하는 거다.
“뭐, 나쁘게만 생각할 건 아니지. 그만큼 왕자님의 평판이 좋다는 거 니까.” 힘없는 약자들을 상대로 피를 보는 건 나도 싫다. 인간성이 깎여나가는 기분이니까.
“근데 우린 딱히 평판 같은 거 신 경 안 써도 되잖아?”
하지만 얄미운 놈들을 두들겨 패는 것 정도는 뭐, 별로 어렵지 않지.
“안 그래?”
부하들을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이 자, 다들 낄낄 웃어댔다.
“뭐, 그렇긴 합니다.”
“이미 충분히 조졌으니까요. 이제 와서 착한 척하는 것도 우스워.”
난 놈들을 따라 웃으며, 바이콘의
고삐를 도로 풀고 올라 탔다.
백여 명의 정예병들과 마법사들이 군중과 얼마쯤 떨어진 곳에 모여들 었다.
앤트럼에서 온 부대가 뒤늦게 도착 한 탓에 기병장교 세토와 향사 브랜 에게 한껏 지랄을 하던 난 바이콘을 몰아 선두로 나섰다.
겁을 주겠답시고 별다른 퍼포먼스 를 할 필요는 없었다. 그저 장검의 퍼멀에 손목을 얹은 채 군중들을 돌 아볼 뿐이었다.
“……공격하려는 건 아니겠지?”
“서, 설마. 은왕자의 군대인데.”
“저기 선두에 있는 건 참수자 포이 닉스잖아. 본보기 삼아 열댓 명쯤 목을 날려 버릴지도……
불길한 술렁임이 퍼져나갔다.
목소리를 높이던 자들은 침묵했고, 횃불을 들고 있던 자들은 서둘러 불 을 껐으며, 손에 무기 비슷한 걸 들 고 있던 자들 역시 얼른 쥐고 있던 걸 내던졌다.
효과가 생각보다 좋네.
휘이 잉.
영주관 앞이 그 인파에 어울리지 않는 고요함에 휩싸일 무렵.
철을 덧댄 나무 문짝이 열리고, 드 디어 울카르 왕자가 모습을 드러냈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