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38)
나의 악당들 038화
10. 지하 4층(3)
수습이 끝난 뒤.
기다란 육척봉(쿼터스태프)을 쥔 루크 씨가 랫맨들의 시쳇더미 앞에 서 주름진 손을 뻗었다.
“Vernut’sya vel pyl’……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루크 씨의 손에서 잿빛 마력이 뿜어졌다.
츠츠츠.
건전지가 다되어가는 손전등이 점 멸하는 것처럼, 잿빛 마력은 흐릿하 게 깜빡거리며 랫맨들의 시체를 갉 아먹기 시작했다. 소멸마법의 1랭크 주문인 ‘쇠락의 손길’이었다.
빛에 닿는 것을 썩히고 분해시키는 강력한 주문이었지만, 게임 속에선 사정거리가 너무 짧아서 극초반 이 후로는 버려지는 스킬이었다.
게임 속에서야 어쨌든, 현실의 루 크 씨가 잿빛 마력을 뿜어내는 모습 은 꽤 의미심장하게 느껴졌다.
장의사를 자청하고 다녔다는 사실 때문일까? 아니면, 강령술사가 시체 를 없애 버리는 게 퍽 이상해서일 까?
랫맨들의 시체가 천천히 사라지는 모습을 말없이 감상하는 나와는 달 리, 내 옆에 서 있던 엘렌은 입술을 비죽거리며 툴툴댔다.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 야? 랫맨 장례식 따위에 이렇게 시 간을 낭비하다니.”
그렇게 말하며 엘렌은 내 쪽을 곁 눈질했다.
혼잣말인 척하면서도 내가 대답해 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하긴, 애당초 다른 사람들의 말은 죄다 씹는 녀석 이니 당연히 내게 한 말이겠지.
나도 상큼하게 씹어주고 싶었지만, 녀석에게 상냥하게 대해주라는 루크 씨의 조언이 떠올라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시체들을 저대로 내버려 두면 다 른 괴물들이 먹고 배를 불릴 수도 있잖아. 없애서 나쁠 건 없지.”
“하, 저게 썩어서 사라지는 것처럼 보여?”
“•••그러면?”
“어떤 사물을 완전히 없애는 건 불 가능한 일이야. 저게 사라지는 것처 럼 보이지? 사실은 보이지 않을 만 큼 작게 나뉘어 흩어지는 것뿐이 야.”
•••맨날 균형이니, 관조니 별 헛소 리만 해대던 녀석이, 질량 보존의 법칙 비스무리한 말을 하네.
근데, 마법사 주제에 저런 말을 해 도 되는 거야? 무에서 유를 창조하 는 게 마법 아닌가?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와중에도 엘 렌은 말을 이었다.
“결국, 저 시체들은 양분이 되어 조그만 생물들을 살찌울 거야. 랫맨 들은 다시 그 생물들을 잡아먹어 새 끼를 깔 테고, 그러면 다시 상황은 처음으로 돌아가는 거지.”
“뭐, 두어 달쯤 시간이 흐르면 그 렇게 되겠지. 근데 우리가 그런 것 까지 신경을 써야겠냐?”
“•••단기적으로 효과가 있다는 거 야? 흥, 그럴 거면 차라리 이럴 시 간에 다른 랫맨들을 죽이는 게.”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고, 그냥 쉬면서 구경할 거리가 생겼다 고 치자. 신기하잖아.”
여전히 납득하지 못한 엘렌은 계속 무어라 툴툴거렸다.
일 처리를 마치고 돌아선 루크 씨 가 엘렌을 발견하곤 너털웃음을 지 었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네, 엘렌 양. 어지간하면 넘어가려고 했는데, 시 체가 워낙 많아서 차마 지나칠 수가 없었거든.”
“말 걸지 말아요, 할아범. 기분 나 빠.”
•••모르는 사람들에겐 마법사다운 오만함으로 비치겠지?
근데 녀석은 완드 받침대이던 시절 에도 이렇게 싸가지가 없었더랬다. 참, 어지간히도 일관된 녀석이군.
나는 짜증을 삼키며 낮은 목소리로 녀석을 질책했다.
“엘렌. 그렇게 말하지 말랬지?”
“내가 뭘? 시체 냄새 나는 노인네 라곤 안 했잖아.”
“야! 너 진짜- 후우. 죄송합니다, 루크 씨.”
엘렌 대신 사과를 하며 루크 씨를 돌아보았는데.
“괜찮네. 나 때문에 시간을 지체한 건 사실 아닌가. 미안하네, 다들.”
하며 허허 웃음을 짓는 것이었다.
시체 냄새 운운하는 소리를 분명 다 들었을 텐데… 노인다운 여유로 움일까?
루크 씨의 얼굴을 보니 괜찮은 척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신경 쓰지 않 는 눈치라 내심 존경스러웠다. 나 같으면 쥐고 있는 육척봉으로 정수 리를 찍어버렸을 텐데.
감탄으로 할 말을 잃은 나를 대신 하여 기지개를 켜던 아르날이 너스 레를 떨었다.
“됐어요, 할아버지. *끄으응* 덕분 에 푹 쉬었는걸. 마음 같아선 괴물 만날 때마다 이랬으면 좋겠네.”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구먼.” 횃불을 갈던 그라니아는 어깨를 으 쓱거리며 걱정을 표했다.
“전 루크 씨가 걱정인데요. 이런 곳에 주문을 썼다가 싸울 때 쓸 마 력이 부족해지기라도 하면….”
“그건 걱정하지 말게. 이 나이까지 쌓아온 수련이 마냥 헛된 것은 아니 라 마력은 충분하거든.”
“그러시다면야 뭐.”
당연하지만, 미들월드는 나이 한두 살 차이로 서열을 가르는 세상이 아 니었다.
그렇지만 여느 인간사회가 그렇듯 이 루크 씨 같은 백발의 노인은 존 경의 대상이 되었다.
노인이니까 당연히 공경한다기보다 는, 이 험한 세상에서 노인이 될 때 까지 살아남았으니 무엇이든 특출난 구석이 있는 사람이라 여기는 것이 다. 두 용병들이 루크 씨를 잘 대우 해 주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크겠 지.
근데 돌이켜 생각해 보면, 루크 씨 가 젊은이였더라도 크게 다르진 않 았을 것 같다.
신비하고 강력한 주문을 부리면서 도 항상 겸손하고 친절하게 구는 사 람을 누가 싫어하겠어? 싫어하는 사 람이 있으면 그게 또라이-
“기분 나쁜 노인네.”
•••여기 있었구나, 그 또라이.
“왜 그런 눈으로 봐?”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뭔데?”
하얀 이맛살을 한껏 구기고 있는 엘렌을 보며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하수도 4층은 랫맨들의 영역이었던 걸까?
쉰 마리 가까운 랫맨 무리를 처리 한 이후로는 괴물이 거의 없다시피 했다.
두 시간 넘게 주변을 수색했지만, 괴물이라곤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게 슬슬 긴장이 풀려갈 무렵, 예상치 못한 습격을 받았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천장에서 무언 가 툭 떨어져 내린 것이다.
내 정신은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 했지만.
흥, 철썩!
20점에 이르는 민첩 덕분일까? 포 이닉스 몸은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데 성공했다. 들고 있던 횃불을 휘 둘러 정체불명의 적을 후려쳐 버린 것이다.
“억, 뭐야?”
기함하며 정체불명의 적을 돌아보 니, 놈은 열기에 조금 오그라든 채 튕겨 나가선 벽에 철썩 들러붙었다.
그러곤 엘렌을 향해 꿈틀거리며 기 어가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꾸물럭, 꾸물꾸물.
“저, 저게 뭐야?”
그것은 끈적거리는 점액질 속에서 무언가의 시체를 녹여내고 있었다.
놈은 머리통만 한 크기로 수축되었 다가 송아지보다도 커다랗게 늘어나 며 벽면을 빠른 속도로 기고 있었다.
검은 윤기가 흐르는 젤리 같은 형 상의 괴물-
으, 토 나오게 징그럽다.
“모두 조심하게! 슬라임일세!”
루크 씨의 외침대로, 우리를 습격 한 적의 정체는 슬라임이었다.
놈은 특유의 흡착력을 이용해 천장 에 들러붙은 채 은신하고 있다가 자 신의 밑을 지나가는 나를 노리고 습 격해 온 것이다.
멍하니 걷다가 자신을 향해 덤벼드 는 괴물을 발견한 엘렌. 녀석은 침 착하게 주문을 외우-
“꺄아아악!”
-길 바랬지만, 소름 끼치는 슬라임 의 형상에 빽 비명을 내지를 뿐이었 다.
“슬라임이야! 불꽃화살을 쏴!”
“흐 o 三 o 아 ”
-■ —9 —– I •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얼굴 이 하얗게 질린 엘렌은 뒷걸음질을 칠 뿐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했다.
젠장, 패닉에 빠진 것 같은데.
“으, 미친!”
퉁!
아르날이 이를 악물고 잽싸게 화살 을 쏘았지만,
젠장, 슬라임은 물리 공격이 안 먹 힌다고!
과연, 화살에 맞은 놈은 아무런 타 격도 없는 듯 화살을 매단 채 꿈틀 거릴 뿐이었다.
아니, 타격이 없는 정도가 아니라 오히려 화살을 순식간에 녹여 버리 고 있었다.
으, 슬라임에겐 공포도 안 먹혀서 루크 씨의 주문도 무용지물인데. 속 성마법으로 처리하는 게 제일 쉽지 만, 엘렌이 저래서야….
“엇, 그라니아?”
놈의 공략법을 떠올리며 엘렌에게 달려가던 나는 순간 경악성을 내질 렀다.
일행의 최후미를 지키던 그라니아 가 엘렌의 뒤에서 튀어나와 슬라임 에게 달려들었기 때문이다.
“안 돼 위험-”
내가 그라니아를 채 만류하기도 전 에, 엘렌에게 돌진하던 슬라임은 자 신에게 접근하는 생명체를 발견하곤 고무공이 튕기듯 펄쩍 튀어 올랐다.
w O 으”
—人、•
그라니아는 슬라임의 갑작스러운 도약에 놀란 기색이었지만, 다행스 럽게도 본능에 따라 방패를 들어 올 렸다.
확 펼쳐진 슬라임이 방패를 감싸 안으며 엉겨 붙자 그라니아는 얼른 방패를 내팽개치며 물러났고.
푸르르륵. 슬라임은 괴이한 소리를 내더니 몸 체를 털며 사방으로 산성액을 뿌리 기 시작했다.
“이런 젠장,”
재빨리 고개를 돌린 채 물러난 덕 에 안면을 당하진 않았지만, 그라니 아의 갑옷은 흰 연기를 뿜어내며 녹 아내리고 있었다.
산성액이 특히 많이 튄 왼팔은 가 죽옷까지 녹아내린 뒤 살갗까지 부 글거리고 있었다.
“끄으으윽!”
“그라니아!”
나와 아르날은 횃불을 던지고 화살 을 쏘며 슬라임의 시선을 끌기 시작 했다.
그러는 동안, 육척봉을 내팽개친 루크 씨는 고통에 신음하는 그라니 아를 잡아채어 다급히 뒤로 끌어내 는 데 성공했다.
반쯤 녹아내린 방패를 툭 뱉어낸 슬라임이 재차 꾸물거리며 다가오 자, 나는 이를 악물며 펄션을 뽑아 들었다.
그때, 그라니아를 피신시킨 루크 씨가 다시 앞으로 나섰다.
“Dusha, plot’, plamya!” 힘 있게 쏟아진 세 단어에 루크 씨의 머리 위로 푸른 불꽃이 치솟았 다. 허공에서 일렁거리던 도깨비불 은 루크 씨의 손짓을 따라 슬라임에 게 덤벼들었다.
치이이익
꼬리를 길게 늘인 도깨비불이 호로 롱 소리를 내며 슬라임의 몸체를 휘 감자, 놈은 몸체를 마구 비틀며 속 과 겉을 뒤집어대기 시작했다.
푸르르륵.
메마르며 불타기 시작한 면을 안쪽 으로 숨기고 물기를 머금은 면을 겉 으로 보내며 도깨비불에 저항하는 것이다.
가스불처럼 푸르게 불타오르는 모 습과는 달리, 도깨비불이 뿜어내는 열기는 그리 강력한 편이 아니었다.
루크 씨가 추가로 도깨비불을 더 소환했지만, 슬라임을 죽일 수는 없 을 것 같았다.
내가 횃불로 슬라임을 견제하며 엘 렌의 앞을 가로막을 즈음, 녀석도 놀란 마음을 추스르고 석궁을 겨누 고 있었다.
“불꽃화살! 불꽃화살을 쏴!”
“흐으, 흐우. 아니, 그거론 부족해.”
“무슨 소리야? 부족하다니?”
“스, 슬라임의 약점은 불이지만, * 흐으우* 저 정도 크기면 어지간한 열기론 어림도 없어. 불꽃화살만으 론.”
녀석이 그렇게 말하며 슬링백 안을 더듬거리자, 녀석의 의도를 눈치챈 나는 얼른 석궁을 빼앗아 들었다.
“내가 할 테니 넌 주문 외워!”
“하지만-”
“ 얼른!”
내가 능숙한 손길로 슬링백을 뒤져 붉은 기운이 감도는 병을 꺼내자, 녀석은 안심한 듯 재빨리 주문을 외 기 시작했다.
“Influ-unt flammae.”
주문이 완성되기 직전, 나는 석궁 에 화염병을 잰 채로 슬라임을 겨누 었다. 최대한 어깨를 좁혀서 손잡이 를 고정시키곤 방아쇠에 손을 올린 뒤 녀석의 주문을 기다렸다.
“satus!”
어느새 도깨비불을 집어삼킨 슬라 임이 루크 씨에게 도약하려는 찰나, 엘렌의 손끝에서 비롯된 불꽃화살이 순식간에 놈을 꿰뚫어버렸다.
놈이 불길에 휩싸이자 나는 잽싸게 시위를 당겼고.
퉁.
쏘아진 화염병이 정확히 슬라임의 정중앙에 안착했다. 그런데…….
물컹.
“어?”
“…야, 이 멍청아! 뭐하는 거야!”
미친, 슬라임의 점액질 몸체에 파 묻혀 병이 깨지지 않은 것이다!
김승수, 이 멍청한 놈! 근처 바닥 에 쏴서 깨뜨리거나 불이라도 붙이 고 쐈어야지!
꾸드드, 꾸득. 약해져 가는 불길에 휩싸인 채 슬 라임은 사납게 몸을 비틀며 우리 쪽 으로 덤벼들었다.
그때, 날카로운 고함이 들려왔다.
“물러서!”
소리를 지른 것은 아르날이었다.
눈에 핏발을 세운 채 활시위를 당 기고 있던 그녀는 짧은 정적 끝에 화살을 쏘았다. 절묘한 궤적을 그린 화살은 슬라임을 꿰뚫은 것으로 모 자라.
쨍.
점액질에 뒤덮인 화염병을 맞춰 깨 뜨려 버렸다!
거리가 그리 멀진 않았지만, 불규 칙적으로 움직이는 슬라임을 정확히 맞추다니. 보통 실력이 아니잖아?
어쨌든, 그 결과로 설탕 등이 섞인 화염꽃 기름이 슬라임의 몸체 안에 서부터 터져 나왔고.
화아악.
주황빛 불꽃이 순간적으로 천장까 지 치솟아 올랐다.
그렇게 맹렬한 불길에 휩싸인 슬라 임은 ‘꾸드득, 꾸드득’ 소리를 내며 오그라들기 시작했다.
슬라임은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죽어가기 시작했다. 검은 윤기가 흐 르는 몸체가 녹아내리며 속에서 소 화시키고 있던 내용물들이 주르륵 쏟아져 내렸다.
“으, 우웩.”
그 혐오스러운 모습에 엘렌은 헛구 역질하며 고개를 돌렸다.
으, 무슨 슬라임이 저렇게 징그러 워? X이플 스토리 같은 데서 나오 는 슬라임은 엄청 귀엽게 생겼던데. 이래서 국산 게임을 해야 한다니 까…….
이 세상이 새삼스레 싫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