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14)
나의 악당들 414화
64. 안개(1)
또 꿈이다.
근래 들어 꿈을 자주 꾸는 것 같 다. 이 세상에 처음 떨어졌을 때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하루하루가 얇은 빙판 위를 걷는 것처럼 위태로 워서 꿈 없이 깜깜하기만 한 밤이 보통이었다.
요즘엔 나름 적응이 되어선지 쓸데 없는 꿈을 자주 꾼다. 목숨이 왔다 갔다 하고 피로 온몸을 씻어내리는 일상은 변함이 없는데, 마음만 편해 진 모양이다. 어쩌면 이것도 예술가 의 도움이 아닐까.
저번에 꿈을 꿀 때는 구경이나 해 보자는 생각으로 얼마쯤 지켜보았으 나, 오늘은 영 그럴 기분이 아니다. 혼자 사는 자취생 특유의 퀴퀴한 냄 새가 코를 찔러서일까.
“••••••에이씨.”
좁아터진 원룸은 꽤 오랜만인데도 그리움보다 지긋지긋한 감상이 먼저 솟구친다. 그래서 얼른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을 훑어버렸다.
후루릉.
선명하면서도 뿌연 풍경이 팔레트 위의 물감처럼 번져간다. 이렇게 말 을 잘 들을 거면 애초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찾아서 보여주면 좋을 텐 데. 이놈의 꿈은 왜 제멋대로 장면 을 선정해서 개 같은 기억이 떠오르 게 만드는 걸까.
풍경이 흩어지는 와중에 지저분한 현관과 우산이 붙어 있는 방화문 쪽 을 더 힘써서 지웠다. 어째선지 문 을 열고 지원이가 나타날 것 같아서 였다. 마음속으로는 분명 그 아이가 그리운데, 보고 싶지가 않다. 볼 엄 두가 안 난다. 쓸데없는 꿈 때문에 머리가 무거워질까 걱정이다.
“-어,”
그때였다. 눈앞이 완전한 어둠에 잠기기 직전, 뜬금없는 얼굴이 툭 튀어나왔다.
엘렌은 소리 없이 입만 뻐끔거렸 다. 녀석은 두 달쯤 전 꿈을 통해 보았을 때와는 사뭇 다른 차림새였 다. 그땐 분명 어울리지 않는 흉갑 에 조금은 너절한 차림새였는데 지 금은 흰 바탕에 검은 무늬가 복잡하 게 새겨진 화려한 로브에 작은 티아 라를 쓰고 있었다. 거기에 전에 쓰 던 자작나무 완드는 어디 가고, 웬 까만 육척봉을 들고 있었다.
엘렌은 졸린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 다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녀석이 무어라 말을 했지만 아무것도 들리 지 않았다. 이미 꿈은 지워지기 직 전이었고, 내 의식은 현실의 경계까 지 떠오른 뒤였다.
“엘렌.”
내 허우적거리는 손길 너머에서, 엘렌은 크게 입을 뻥긋거렸다. 물 위로 떠오르는 듯한 감각에 몸을 버 둥대면서도 녀석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연분홍빛 입 술을 읽어내었다.
조금만, 기다려, 지금, 가고 있어.
“……아.”
잠에서 깨자마자 입 밖으로 튀어나 온 소리는 차라리 탄식에 가까웠다. 나는 상체만 세운 채 얼마간 멍하니 모포에 앉아 있었다.
천막을 대충 친 탓인지 찬바람이 새어 든다. 벌써 3월 중순인데 새벽 날씨는 아직도 춥다. 문득 아탈란테 의 천막이 그리워진다. 화려한 건 둘째치고, 엄청 아늑했는데.
그 무겁고 부피도 엄청난 짐덩이는 칼날만 너머 오두엔느에 두고 왔다. 병력 한 명 무기 한 점이 아쉬운 판국에 천막 따위를 배에 실을 수는 노릇이었으니까. 물론 오브도르프의 봄이 이렇게 추운 줄 미리 알았더라 면 무리를 해서라도 가져왔을 거다.
꿈 때문인지, 아니면 간밤에 늦게 까지 칼부림을 한 탓인지 입 안이 까끌까끌하다. 양옆에 곤히 잠들어 있는 여인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조 심스럽게 일어나 물주머니를 들이켰 다. 여전히 혀끝은 건조했다.
“우웅……. 추어. 추어요.”
모포에 누워있던 뭉치가 잠꼬대를 했다. 녀석은 내가 비워둔 자리를 더듬거렸다. 그러다 그 너머의 아탈 란테에 손이 닿자 그대로 들러붙었 다. 색색거리던 아탈란테는 느릿하 게 팔을 들어 뭉치의 조그만 머리통 을 꼭 껴안았다.
헐벗은 미녀 둘이 엉겨 붙는 모습 을 보고 있자니 까끌거리던 게 한결 가신다. 난 우두커니 서서 저 사이 를 파고들까 갈등하다가, 이내 칼 두 자루가 달린 검대를 차고 천막을 나섰다.
“하, 오늘도 지랄이네.”
이 동네는 날씨가 아주 지랄맞다. 정오 즈음엔 나긋한 볕이 쬐다가도 늦은 오후엔 습한 마파람이 불어오 고, 한밤부터 새벽까지는 아직도 겨 울인 양 차디찬 북풍이 불어닥치는 것이다.
가장 엿 같은 건 안개다. 동트기 전부터 피어올라 해가 중천에 뜰쯤 에나 간신히 잦아드는 안개. 얼마나 짙은지 심할 때는 몇십 미터 앞도 안 보일 지경이다. 심지어 오늘은 하늘에 구름도 그득해서 비라도 쏟 아지지 않는 한 온종일 안개가 가시 지 않을 것 같다.
“나리.”
뿌연 여명이 솟는 동쪽을 떫은 눈 으로 바라보는데, 웬 아저씨가 다가 와 군례를 올렸다. 난 잠시 그를 훑 어보다가 입을 열었다.
“가트?”
“고트롭입니다.”
“아, 맞다. 고트롭.”
프로스하펜에서 잡은 포로 중 사지 가 멀쩡한 놈 백 명 정도를 내가 데리고 있게 됐는데, 고트롭도 그중 하나였다. 항만수비대에서 하사관 역할을 하던 놈이라 데리고 있던 병 사들을 그대로 붙여주고 하사관으로 삼았다.
비슷하게 경비대 소속 포로들은 경 비대 부대장이라는 놈에게 붙였다. 쪽수가 제일 많은 성문수비대는 반 으로 갈라 랭볼트 경이 내어준 고참 둘에게 맡겼다.
그렇게 하사관 넷이 이끄는 백 명 조금 넘는 부대가 완성됐으나, 일주 일도 안 되어 팔십 몇 명으로 쪼그 라들었다. 죽거나 다친 놈 얼마에 오는 길에 남겨두고 온 놈 얼마를 빼고 나니 그렇게 되었다.
나름 부하랍시고 데리고 있던 병사 가 열 명 가까이 죽었는데 별다른 감흥이 없다. 스스로 놀라울 정도로 말이다.
다쳤거나 거점 확보에 차출되어 뒤 에 남겨진 병사들이야, 진군에서 열 외된 걸 행운으로 여겼으니 상관이 없다. 반면 데이발 가도를 지키는 두 성-‘운트리어’와 ‘지르나’라는, 별로 크지 않은 요새였다-을 공략 하다 죽어 자빠진 부하들은 아무 잘 못 없이 희생당한 불쌍한 놈들이다. 근데도 아무렇지 않다. 피에 절여지 며 신경도 무뎌진 걸까. 아니면 무 의식중에 정을 붙이지 않으려 애쓴 덕일까.
“보고할 거라도 있냐?”
“예, 부대는 지금-”
“잠깐만, 그전에……. 야, 너. 여기 물 좀 떠와라.”
스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 병 사가 ‘예, 옙!’ 하고 대답하더니 헐 레벌떡 저쪽으로 달려갔다.
“부대는 밤새 전장 정리를 마치고 휴식 중입니다.”
고트롭은 내 부하 노릇을 하는 게 썩 기꺼운 눈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시키는 건 어지간히 다 처리해 놔서 나로선 별달리 불만은 없었다. 전리 품을 나눠줘도 시큰등, 전투수당을 쥐여줘도 시큰둥한 놈이 제 부하들 과 관련된 일에는 눈빛을 반짝이는 걸로 보아 그리 나쁜 놈은 아닌 것 같았다.
어쨌든, 그가 말한 전장 정리란 간 밤에 있었던 전투의 뒷정리를 의미 했다. 야음을 노리고 아이스보발트 쪽으로 접근하던 한 무리의 적병을, 기병 스물 몇 기를 데리고 가서 박 살 내고 서쪽으로 쫓아버렸던 것이 다.
어린 병사가 떠온 물동이에 손을 담갔다. 끓는 물을 섞었는지 미지근 하다. 세수를 하고 입을 한차례 헹 군 다음 고트롭에게 물었다.
“그래서? 뭐 좀 건졌어?”
“묵은 곡물이랑 소 몇 마리, 그리 고 병구를 조금 얻었습니다.”
“포로도 몇 명 잡았지? 어디서 온 애들이 래?”
“서북쪽으로 한나절 정도 걸으면 마을이 서너 개 있답니다. 시장의 소집령에 응하느라 거기서 뭉쳐서 내려온 겁니다.”
“역시 징집병들이었군.”
어젯밤의 병사들을 떠올렸다.
한 백오십쯤 됐던가……. 아니, 이 백 명은 넘었던 것 같다. 바이콘이 향사인지 기사인지 모를 시골귀족의 얼굴을 뜯어먹자 꽥꽥 비명을 지르 며 흩어졌지.
위협이 되기는커녕 칼질할 의욕도 안 생기는 농투성이들이었지만, 그 런 놈들도 성벽에 올라 쇠뇌나 장창 을 들고 제대로 된 지휘를 받으면 꽤 귀찮은 적이 된다. 이 사실을 그 간의 경험을 통해 충분히 학습했기 에, 도망치는 이들을 악착같이 쫓아 목을 자르고 등판을 찔렀다.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그 들의 눈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오가던 상인들에게서 적군이 코앞 에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밤을 기다려 몰래 이동했답니다.”
“그래……. 고생했다.”
건성으로 치하의 말을 건네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닷새 전 프로스하펜을 떠날 때만 해도 우리 군은 천이백을 상회하는, 나름 대군이었다. 그러나 북상 중 성채 두 개와 목책 두른 마을 다섯 개를 공략하며 이래저래 수가 줄었 다.
죽거나 크게 다친 게 백 명 조금 안 된다. 오는 길에 넘어온 건 크지 않은 요새와 목책을 두른 마을 정도 였지만, 전투를 벌이는데 피해가 아 예 없을 수는 없었다. 그나마 아탈 란테와 여러 전투마법사가 성문을 부수거나 성벽을 무너뜨리고, 나와 랭볼트 경이 선봉에서 싸우며 사상 자를 줄인 게 이 정도였다.
거기에 더해, 보급로를 지키느라 거점마다 박아두고 온 게 사백 정도 다.
덕분에 저 멀리 안개에 가려진 도 시, ‘아이스보발트’ 앞에 도착한 병 력은 칠백 남짓이 전부였다. 그리고 겨우 이 숫자로 완벽히 둘러싸기엔 아이스보발트는 너무 큰 도시였다.
물론 주요 무역로에 자리를 잡은 도시라 주변은 온통 평지고, 국경과 꽤 멀어서 성벽이 낮고 상비군도 별 로 없으니 공략 난이도가 높지는 않 을 거다.
문제는 도시의 체급 자체가 상당하 다는 것이었다. 인구가 꽤 많아서 징집병을 이천도 넘게 뽑아낼 수 있 고, 대륙 전체에 이름을 날리는 정 도는 아니지만 꽤 명성이 있는 마법 학파의 본산이기도 하며, 용병•모험 가•군인 등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무술 도장도 여럿 있다고 한다.
그래서, 지난 며칠간 그랬던 것처 럼 무작정 달려들어 성문을 날려버 리고 병력을 밀어 넣는 방법은 쓸 수 없었다. 같은 방법으로 어찌어찌 승리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병력은 반 토막이 날 게 뻔했다.
애초에 아탈란테가 성문을 날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성문이나 성벽을 부술 만큼 강력한 위력의 ‘공허의 구’를 시전하기 위 해서는 시간적인 여유가 필요하다. 그런데 아이스보발트에도 우리의 공 성 방법이 알려졌을 게 아닌가. 도 시에 도사리고 있다는 마법사들이 비전력을 끌어모으는 아탈란테를 보 고도 지켜만 봐줄 것 같진 않다. 이전에야 방패를 든 병사들을 붙이 고 전투마법사들이 엄호하여 시간을 벌었다. 하지만 여러 마법사가 한꺼 번에 공격주문을 쏟아부으면 감당하 기가 쉽지 않을 거다. 원래 마법은 방어가 공격보다 곱절은 더 어려운 법이다.
설상가상으로 안개까지 지랄이다.
물론 안개는 공성에 있어서 방어보 다는 공격에 이점을 준다. 하지만 우리는 단일 지휘체계에 속한 군이 아니라는 게 문제다. 이런 짙은 안 개 속에서 작전을 펼치려면 충분한 회의와 준비가 필요했다.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엊저녁에 아 이스보발트에 도착한 우리는 성문이 보이는 야지에 주둔지를 펴고 기회 를 노리고 있었다. 몇 안 되는 기병 을 풀어 헐거운 포위망을 펼쳐둔 채 로 말이다.
물동이를 머리에 끼얹어 비우고, 머리칼을 털며 아이스보발트 쪽을 돌아보았다.
“……쯧.”
아무리 눈살을 좁혀도 보이는 거라 곤 일렁이는 불꽃 뿐이다. 문루와 성벽 위의 병사들이 든 횃불이겠지.
그 외엔 안개에 가려 아무것도 보이 지 않는다.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 는 걸로 보아, 경계 태세가 꽤 삼엄 함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 안에 성벽을 넘든 잽이라도 치든 해야 하는데, 안개가 너무 짙 어서 병력을 운용할 엄두가 나질 않 는다.
뭐, 실질적인 지휘야 랭볼트 경과 아탈란테 그리고 아이네스 백작의 기사들이 할 거다. 하지만 결정적으 로 ‘돌격 앞으로’를 외치는 건 내 몫이다.
평소에도 그건 보통 부담스러운 일 이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과장 좀 보태서, 안개 때문에 발밑도 안 보 일 지경이다. 성벽을 들이받으라 명 령하고 싶지가 않다. 정확히 말하자 면, 그 명령 직후 돌아올 시선을 감 당하고 싶지가 않다.
마음 같아선 공성전이고 뭐고 다 혼자서 하고 싶다. 몰래 성벽을 넘 어서 한 삼, 사백 명쯤 죽이면 알아 서 겁을 먹고 항복하지 않을까?
뭐, 물론 그 전에 쇠그물을 한 열 두 겹쯤 걸친 채 고슴도치가 되겠 지. 아니면 제국기사나 정예병들에 게 포위당해 주문 세례를 얻어맞고 잿더미가 되든가.
“X발, 쪽수라도 좀 많았으면.” 느긋한 속도로 진군했다면 사상자 를 절반이나 그 이하로 줄일 수도 있었을 거다. 작정하고 속도를 올렸 으면 보급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더 많은 병력을 끌고 올 수 있었을 테고.
하지만 우리의 선택은 이도 저도 아니었다. 최대한 강행군을 이어가 면서도 보급로는 단단히-사실 그리 단단한지는 모르겠다-지켰기 때문 이다.
사실 내겐 선택지도 없었다. 울카 르 왕자의 명령이 그랬으니까.
그가 주문하길, 프로스하펜부터 아 이스보발트까지 열흘 안에 장악하는 동시에 이 지방에 아예 깔고 앉을 것처럼 굴라고 했다. 그래야만 이 시기쯤 하이캐슬을 점령하고 승리에 취해 있을 제국군이 오도 가도 못한 채 시간을 허비할 거라나.
병력의 규모 역시 적당한 것이었 다. 앙스트와 오브도르프 두 지방에 퍼진 아군을 모두 합치면 대충 천오 백쯤 된다. 엄청난 대군은 아니지만 아빌람버스 공작이 영지에 남겨둔 봉신들을 움직여 처리하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규모다. 그렇다고 주력 을 돌려세우기도 애매할 테고.
제국군을 이런 애매한 상황으로 몰 아넣으려면 약간 서둘러야 한다.
칼날만을 넘어 프로스하펜에 상륙 한 게 일주일 전이다. 울카르가 계 획한 후속 작전에 타이밍을 맞추려 면 늦어도 사흘 안에는 저 아이스보 발트를 점령해야 하는 것이다.
“외곽 경계는 누데인족이 맡기로 했습니다. 저희는 안개가 걷힐 기미 가 보일쯤 전투 준비를 갖추면 될 것 같습니다.”
“어, 그러자.”
생각에 잠겨 있던 난 대충 고개를 끄덕이다가, 문득 고개를 갸웃거렸 다.
“근데 우리 부대 임무가 뭐냐?”
얼핏 보기엔 상관이 부하에게 임무 를 묻는 게 한심해 보이겠지만, 어 쩔 수가 없었다. 난 매번 선봉에서 칼질하느라 바빠서 병력을 챙기고 운용하는 일은 하사관들에게 일임하 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밀그레스터를 따라 성문을 넘기로 한 것 같습니다.”
“그래……
밀그레스터 백작가의 가병은 랭볼 트 경과 아탈란테가 기대한 것 이상 의 정예병이었다. 바닷가 사내들답 게 거침이 없었고, 명령에 절대복종 했으며, 무기를 다루는 기술도 뛰어 났다.
그들의 주인인 아이네스 백작 역시 그저 머릿수만 채우고 있을 생각은 없는 듯 제 병력을 운용하는 데에 소극적으로 굴지 않았다. 데이발 가 도의 첫 관문인 운트리어 성을 공략 할 때도, 어느 유명 용병대가 방어 중이던 목책을 넘을 때도 선두에 섰 다.
더 놀라운 건, 그렇게 저돌적으로 싸우고도 밀그레스터의 가병 중 사 망자가 고작 여섯이라는 사실이었 다. 대신 급히 징집해 온 농노병들 이 그 예닐곱 배쯤 죽긴 했지만, 신 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병사들이야 잘 싸우겠지……. 결 국 성문이 문제네.”
하지만 그 용맹한 병사들도 성벽 아래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어서야 제 힘을 발휘할 수 없을 터였다.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푹 한숨을 내쉴 즈음이었다. 누데인족 전사들 사이에서 장교 노릇을 하는 하레스 키스 한 명이 달려와 소식을 전했 다.
“……사람이 와? 아이스보발트에 서?”
“Kub, hunapi. 우리 전사가 잡았 습니다. 지휘소에 있습니다.”
‘후나피’는 누데인족 전사들이 나 를 부르는 호칭이었다. 그 뜻이 궁 금해서 아탈란테에게 몇 번 물어봤 는데, 그녀는 항상 대답 없이 웃기 만 했다.
“잡았다고? 그게 무슨-”
질문을 하려다가, 하레스 키스 중 밀라놀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놈은 손에 꼽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잠깐만 기다려, 아탈란테 깨워서 같이 가게.”
“Kub, hunapi.”
“……근데 후나피가 뭔 뜻이냐?” 얼굴이 검게 탄 전사는 말없이 웃 기만 했다.
“됐다, 이 새끼야.”
난 절레절레 고개를 내젓고 돌아섰 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