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24)
나의 악당들 424화
64. 안개(11)
먼 서쪽의 오브도르프가 그런 것처 럼, 고원도 안개에 뒤덮였다. 아침과 저녁에만 잠시 찾아오는 옅은 안개 였다.
서부 변경을 지키는 요새이자 고원 지방의 주도인 하이캐슬. 그곳의 높 은 성곽 위에서 사방을 돌아보고 있 노라면 꼭 얕은 구름 위에 서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지금껏 하이캐슬에 오른 영웅들 중 이 안개 낀 풍경을 싫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액소드브룩 가문의 첫 변경백이었 던 ‘완고한’ 자크도, 용맹하다 못해 흉포하기까지 했던 ‘기사왕’ 라이오 넬 2세도, 공명정대하기로 이름 높 았던 ‘준엄왕’ 아두미르도 이 풍경 을 즐겼다.
아빌람버스 공작은 아니었다.
“고세인! 고세인은 어디에 있나!”
공작이 내성 하이캐슬에 위치한 영 주관 창가에 서서 마구 고함을 질러 댔다. 그 성난 목소리에 제국기사와 장교와 시종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마법의 로브를 두 른 늙은 마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공작 전하.”
“고세인, 내 몇 번을 말했소! 시간 이 되면 재깍재깍 튀어 나가서 안개 를 죄다 흩어놓으라니까! 저 빌어먹 을 안개 때문에 성벽 경계에 구멍이 라도 생기면 책임질 텐가!”
“송구합니다, 전하. 마법사들의 배 치는 이미 끝난 참이니 안개는 곧 걷힐 것입니다.”
마도사 고세인이 차분한 얼굴로 답 했지만, 공작의 성화는 좀처럼 잦아 들지 않았다.
저녁 안개가 피어오른 지 채 십오 분도 지나지 않아 하이캐슬 둘레에 서 불길이 피어올랐다. 전투마법사 들이 토해낸 마법의 불길이었다. 이 어서 용권풍도 치솟았다. 화염과 돌 풍이 대기를 온통 휘저은 끝에, 일 대를 둘러싸고 있던 안개는 자취를 감추었다.
스트롬 가문에 속한 전투마법사들 에 ‘산상의 린하우’가 파견해 준 파 괴술사들까지 더하여, 마흔 명도 넘 는 마법사들이 주문을 왼 결과였다. 안개를 지우느라 화염구 백오십 개 어치의 마나를 썼으니 낭비도 이런 낭비가 없었지만, 이를 지적해야 할 가신들은 아빌람버스 공작이 화를 누그러뜨린 것에 안도할 뿐이었다.
“회의는?”
“소집 마쳤습니다. 전하께서 행차 하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부아칸 대장의 보고에 안개가 걷힌 도시를 돌아보던 공작이 말없이 돌 아섰다. 그에게 따라붙은 부아칸은 전황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이어갔 다.
“베르밀로 경이 서신을 보내왔습니 다. 일주일간의 격전 끝에 승리해 운파스트의 주요 지점들을 점령했다 고 합니다. 다만 끝내 ‘프릭스 변경 백’이나 그 후계자를 붙잡지는 못한 모양입니다.”
“멍청한 놈 같으니……. 어찌 된 게 내 휘하엔 하나같이 멍청한 놈들 뿐이군.”
베르밀로는 아빌람버스 공작의 가 까운 친척으로, 스트롬 가문의 가병 들을 통솔하는 상급무관이다.
그는 현재 공작가의 가병과 징집병 을 합쳐 이천오백여 명의 병력을 지 휘하여 고원 북쪽에 붙어 있는 지 방, 운파스트를 점령 중이다.
“더 북진하여 파스트까지 공격할지 에 대하여 전하의 의중을 여쭙고 있 습니다.”
“파스트라……. 프릭스를 잡으면 좋겠지만, 파스트까지 치고 올라가 면 웨벨터가 움직이겠지?”
밀라놀 왕국에는 공작위를 지닌 귀 족이 총 셋이다.
하지만 외국의 호사가들은 물론이 고 왕국의 신민들도 공작을 셋이나 떠올리는 경우는 드물었다.
국왕의 후계자에게 주어지는 ‘오펜 의 공작’ 작위를 다른 두 공작위와 비교하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공작 이라고 해봐야 오펜 땅은 여느 백작 령보다 조금 나은 정도였고, 작위가 탄생한 배경도 왕태자의 지체를 높 여주기 위한 것에 불과했기 때문이 다.
오펜의 공작을 제외하면 왕국에 존 재하는 실질적인 공작은 단둘뿐이 다.
그중 하나가 아일란트의 주인인 카 이시스 공작이다. 사실상 작은 왕국 을 다스리며, 세 개의 함대를 휘몰 아 남쪽 대양까지 지배하는 자.
또 다른 공작이 바로 북부의 맹주 인 웨벨터다. 천일전쟁 이후 위세가 조금 줄어들긴 했지만, 그가 왕국에 서 가장 강력한 귀족 중 하나임을 부정하는 자는 없을 것이다.
“웨벨터 공작이 움직일 가능성은 반반이라는 게 저와 참모들의 공통 된 의견입니다.”
“반반? 하,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언이군. 그래서 어쩌자는 겐가?”
“앤트럼과 왕도의 움직임을 면밀히 주시해야 합니다. 상황에 따라 움직 이는 게 옳을 것입니다.”
“일단 알겠다. 회의에서 이야기해 보지.”
아빌람버스 공작이 영주관을 나서 성탑을 향하는 동안에도 부아칸의
설명은 이어졌다.
“현재 고원 내에서 식별되는 적은 일천 가량입니다.”
“지휘관은?”
“가윈 변경백과 오스 백작입니다. 남동쪽의 정착지인 롱데일을 중심으 로 태세를 정비하고 있습니다.”
공작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고작 열여덟, 열여섯 살짜리 애송 이들을 아직도 잡아내지 못하고 있 다니. 내가 대체 언제까지 인내해 줘야 하나?”
“오스 백작은 ‘어린 여우’라는 별 명에 걸맞게 약삭빠르기가 어른 못 지않고, 가윈 변경백은 제 아비와는 달리 전형적인 액소드브룩 가문의 사내라 보통 끈질긴 게 아닙니다. 애송이라고 얕보았다간 괜한 낭패를 볼 수도,”
“쪼다 같은 소리 마라, 부아칸. 놈 들의 능력이야 어쨌든 고작 잡병 일 천이 아니냐? 난 4월이 되기 전에 그 두 애송이의 면상을 직접 봐야겠 으니, 서두르도록 해라.”
“하오나 전하, 안키르의 기병대를 쫓고 아사그를 봉쇄하느라 대부분의 기병 전력을 후방으로 돌린 상황입 니다. 황량한 고원을 무대 삼아 유 격전을 펼치는 놈들을 마필도 없이
뒤쫓는 건 하이캐슬을 빼앗긴 왕국군은 동쪽, 남쪽으로 패퇴하며 청야 전술을 펼 쳤다.
물론 청야 전술이라 해봐야 수확 철을 앞둔 보리밭이나 촌락, 목책 두른 정착지 따위를 불태우는 게 전 부인 어설픈 수준이었다. 문제는 고 원이 원체 황량한 땅인지라 어설픈 불장난만으로도 제국군의 진격로가 죄다 초토화되어버렸다는 사실이었 다. 식량은 물론, 말을 먹일 건초나 불을 피울 땔감조차도 찾아보기 힘 들 지경이었다.
결국 고원을 장악하기 위해 네 방 향으로 나뉘어 진격하던 군세 중 절 반이 보급 문제에 시달리다 하이캐 슬로 복귀했다. 아빌람버스 공작이 아직 여기에 있는 것도 그러한 사정 에서 였다.
진격을 이어간 두 군세가 각각 운 파스트 지방을 점령하고 동쪽의 앤 트럼 지방으로 통하는 길목을 선점 한 게 그나마 아빌람버스 공작으로 서는 위안 삼을 일이었다.
“……영 찝찝하단 말이지.”
“무엇이 말입니까, 전하?”
“저항하는 병력이 적어도 너무 적 지 않나.”
회의장 앞에서 우뚝 멈춰선 공작은 미간을 좁힌 채 부아칸을 돌아보았 다.
“하이캐슬이 점령되기 전, 울카르 가 데리고 있던 병력은 3천도 훨씬 넘었단 말이지. 적기사놈이 내 뒤통 수를 치는데 동원한 누데인 종자들 은 처음부터 하이캐슬에 없었고 ……. 거인기사가 끌고 간 기병대를 제하고 전사자의 숫자까지 감해도 최소한 이천오백은 남아야 해. 그런 데 고작 천 명이라니?”
“아군이 하이캐슬을 워낙 급작스럽 게 점령한 탓에 대다수가 흩어지지 않았습니까. 아리아드 경, 아니, 아 리아드 성주도 그렇게 말했고 말입 니다.”
“그래, 그랬지……. 울카르가 없는 울카르 군은 오합지졸에 불과하다던 가.”
“누더기 군대라는 그의 표현이 정 확하다고 생각합니다. 애당초 오든 록, 아비든, 앤트럼 등 온갖 지방에 서 모여든 군대였습니다. 은왕자 개 인의 카리스마로 간신히 바느질했을 뿐, 그가 사라진 이상 누더기 군대 가 갈가리 찢기는 건 당연한 일 아 니겠습니까.”
그가 원하던 대답이긴 했지만, 아 빌람버스 공작은 끝끝내 찝찝함을 털어내지 못했다.
“……오든록과 아비든에도 세작을 보내야겠다. 고원에 파견했던 병력 이 귀환을 하는지 확인하도록.”
“명에 따르겠습니다, 전하.”
“그래. 들어가지.”
한 차례 얼굴을 쓸어내린 공작은 자신만만한 얼굴로 회의장의 문을 열어젖혔다.
하지만 그 반쯤 꾸며낸 당당함은 알첸버그 군의 사령관이자 부왕 버 카드의 후계자, 사벨라드 방백의 첫 마디에 산산조각나고 말았다.
“우리 군은 이만 철군해야겠습니다.”
“……왕자. 지금 뭐라고 했나?”
“송구합니다, 전하. 부왕께서 직접 지침을 내려주신지라 저로서는 감히 거역할 도리가 없습니다.”
회의장에 모인 삼십여 명의 귀족, 기사, 장교, 마법사들은 일제히 숨을 죽였다. 아빌람버스 공작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불을 뿜을 것처럼 일그 러졌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공작이 와락 말을 토해 내기 직전 방백이 얼른 한마디를 보 태었다.
“전군이 일제히 물러나겠다는 건 아닙니다. 남은 노예군단 중 두 개 뒬레티를 영용하신 공작 전하에 대 한 존경의 의미로 남겨둘 테니 부디 유용하게 쓰시길 바랍니다.”
노예군단의 편제상 한 개 뒬레티가 오백 가량이니, 천 명의 병력을 남 겨주겠다는 뜻이었다.
덕분에 아빌람버스 공작은 당장 뿜 어져 나오려던 화를 잠시나마 삼킬 수 있었다. 하지만 소드마스터인 호 프컨 성백과 제국기사들, 부왕의 친 병들, 마법병단 등 알짜들이 모두 돌아간다는 사실은 변치 않았으므로 공작은 여전히 성난 기색으로 따지 고 들었다.
“한창 승승장구하는 중에 철군하겠 다? 조금만 더 진군하면 비옥한 앤 트럼과 기스톨을 손에 넣을 수 있는 데, 대체 왜 이런 어리석은 선택을 한단 말인가?”
“송구하오나 전하, 우리가 원한 건 스트롬 가문이 고원을 차지하여 왕 국과의 국경에서 한 발짝 더 멀어지 는 것이었습니다. 앤트럼이니 기스 톨이니 하는 땅엔 처음부터 욕심이 없었죠.”
“그래서, 목표가 충족됐으니 돌아 가겠다는 건가? 나와는 아무런 상의 도 없이?”
“전하께서는 당초 1월 안에 전쟁이 끝나리라고 공언하셨습니다. 부왕께 서 대군을 내어주신 건도 전하의 말 씀을 신뢰해서였습니다. 헌데 벌써 3월이 절반이나 지나지 않았습니 까.”
사벨라드 방백의 공손한 태도에도 공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그를 쏘아 보았다. 속내를 꿰뚫어 보려고 애쓰 는 것 같았다.
“나는 맹우를 위해 충분한 성의를 보였다고 생각하네. 보급도 다 내가 대주었고, 파병에 대한 보상도 충분 히 지급하고 있지. 그런데, 고작 기한 이 지났다는 이유로 철군하겠다니?”
아빌람버스 공작이 낮은 목소리로 엄포를 놓았다.
“이유를 말하게. 정말로 나를, 스트 롬 가문을 맹우로 여긴다면.”
그 말투가 썩 위압적이었기에 사벨 라드 방백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얇은 입술을 적시며 말했다.
“전 이번 전쟁에서 사촌을 잃었습 니다. 부왕께는 저만큼이나 사랑스 러운 조카였죠.”
“그래, 콘라드 경의 일은 나로서도 유감일세.”
“제 자랑이었던 ‘정오의 검’ 콜젠 도 죽었습니다. ‘후퇴를 모르는’ 소 르그도, ‘검은 손’ 오델리디스도, ‘바 위산의’ 하프너도 죽었죠. 하나같이 기량이 절정에 다다른 기사들이었습 니다. 이뿐입니까? 심지어 황제 폐 하의 높으신 호의에도 불구하고 부 왕께 몸을 의탁한 호프컨 성백마저 죽을 뻔하였습니다.” “부왕께서는 물론이고, 저 역시도 이 이상 피를 보고 싶지 않습니다.”
“이 이상 피를 볼 일이 있을 것 같 나? 울카르의 군세는 이미 분쇄되었 고, 아군의 군세는 아직도 만이천은 남아 있네. 후방에서 귀찮게 구는 거인기사와 적기사도 머지않아 황제 께서 처리해 주실 테고……. 설마 늙어빠진 여우를 두려워하는 건 아 니겠지?”
“에아본 후작 말입니까? 설마요. 제가 비록 콘라드만큼 용맹하지는 못해도, 구제 불능의 겁쟁이는 아닙 니다.”
방백이 비릿한 미소를 머금었다.
“다만 사자를 두려워하는 걸 부끄 러워 할 필요는 없잖습니까?”
“……사자? 지금 사자라고 했나?”
“예. ‘누운 사자’가 그 육중한 몸뚱 이를 일으켰다는군요.”
수많은 가문들이 문장에 사자를 새 기고 있지만, 사자를 별명으로 쓸 수 있는 건 대륙에 단 한 가문뿐이 었다. 바로 제오레 왕가다.
그리고 누운 사자가 지칭하는 건, 다름 아닌 ‘자카리스’였다. 자카리스 라이오넬슨 오브 제오레. 밀라놀 재 상이자, 오펜의 공작이자, 곧 왕이 될 사내.
회의실에 모인 이들이 숨을 삼킨 건 당연했다.
“……자카리스가, 그 돼지 새끼가 움직였다고? 그럴 리가.”
아빌람버스 공작도 전혀 예상치 못 한 일인 듯 얼빠진 모습으로 중얼거 렸다. 사벨라드 방백은 슬쩍 비웃음 을 흘리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런, 전하……. 자카리스를 이리 도 굳건히 믿으실 줄은 미처 몰랐습 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무슨 말이라뇨? 설마 전하와 자카 리스의 내통에 관한 것도 모르시고, 현명하신 부왕께서 병력을 칠천이나 내셨겠습니까?”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회의장에 모인 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공작에 게 집중되었다. 다들 ‘내통이라니?’ 하는 묻는 듯한, 의문스러운 눈빛이 었다. 하지만 공작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명예로운 변절자이자 칸츠의 성주 로서 한 자리를 차지한 ‘살무사’ 아 리아드가 초점 없는 눈동자를 잘게 떨었으나, 그에게 관심을 주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 분위기가 재밌는지, 사벨라드 방백은 약간 신난 기색으로 떠들어 댔다.
“자카리스가 공격을 관망한 건 전 하께서 제시하신 얼마 안 되는 금은 이나 헛된 약속 때문이 아니었습니 다. 두렵기 짝이 없는 동생을 제거 하거나 힘이라도 줄이기 위해서였 죠.”
“헌데 지금, 울카르가 병신이 되었 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의 군세 가 분쇄되어 사방으로 흩어진 상황 입니다. 자카리스가 움직이지 않을 이유가 없지요.”
‘당연한 것 아닙니까?’ 하는 듯한 말투에 아빌람버스 공작은 속이 부 글대는 얼굴로 입술을 몇 번 움찔거 렸다. 그 역경 끝에서, 공작은 끝내 억지 미소를 짓는 데에 성공했다.
“……허허,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지 모르겠군.” “그렇게 말씀하신다면야……. 괜한 말을 보태지는 않겠습니다, 전하.”
사벨라드 방백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자 호프컨 성백을 비롯한 그 의 가신들도 잇달아 몸을 일으켰다.
“저라면 이곳, 하이캐슬만 사수한 채 후방을 정리하겠습니다. 전 황제 폐하께 손을 빌릴 만큼 용감하지 않 거든요. 적기사와 거인기사를 처리 한 값으로 그분께서 어떤 터무니없 는 걸 요구하실지, 저는 상상조차 못하겠습니다.”
“……왕자.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나?” “그러면 어쩌시겠습니까? 황제 폐 하와 자카리스의 대군 사이에서 짓 이겨지는 건 현명한 선택이 아닐 텐 데요.”
가신들을 거느리고 회의장을 나서 려던 사벨라드 방백은, ‘아!’ 하고 중얼대며 공작을 돌아보았다.
“부왕께서 하교하시기를, 이 요새 도시 앞에서 3개월이나 허비한 시점 에서 이미 실패는 정해졌다고 하시 더군요.”
“……날 조롱하고 싶은 겐가?”
“어찌 저 따위가 감히 공작 전하를 욕보일 수 있겠습니까. 그저 상황을 직시하시라 조언을 드리는 것뿐입니 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나겠습 니다.”
사벨라드 방백은 공손히 예를 표한 뒤 떠나 버렸다. 그가 내성을 나설 즈음 저 뒤쪽에서 악에 받친 고함이 들려오자, 방백은 웃는 낯으로 혀를 찼다.
“쯧, 멍청한 작자 같으니.”
“괜찮겠습니까, 각하?”
호프컨 성백이 쉰 목소리로 질문하 자, 사벨라드는 어깨를 으쓱였다.
“안 괜찮을 건 뭐요?”
“공작을 자극해 봐야 좋을 게 없습 니다. 그는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선제후 아닙니까.”
“그랬지. 이번 전쟁 전까지는.”
젊고 간특한 왕자는 실실 웃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수많은 병력에, 물자에, 금을 낭비 한데다 위신까지 땅에 처박혔잖소. 한동안은 제 땅 지키기에 급급해야 할걸.”
호프컨은 세상 물정에 조금 어두운 편이었다. 하지만 그런 그조차도 알 첸버그의 의도를 알아차리는 건 어 렵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게 목적이었군요, 이 전쟁은.”
“하, 성백은 내후년이면 일흔인데 꼭 상처받은 어린애처럼 말씀하시는군.”
“뭐, 아빌람버스의 계획대로 영광 스러운 승리를 거두었어도 좋았겠소 만……. 나로서는 이쪽이 더 마음에 드는 게 사실이오. 미텔탕에 있는 황제도 이리 귀찮은데, 백년성에 있 는 황제라니. 으, 상상만 해도 숨이 막히는군.”
호프컨 성백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검에 평생을 바친 노인이 이해하기에는, 이번 전쟁은 이미 꼬 일 대로 꼬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