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33)
나의 악당들 433화
65. 봄의 절정(8)
하사관이 그리몬스 코발을 도로 독 방에 가둔 뒤 돌아오자, 적기사는 가벼운 투로 명령했다.
“베오크인지 뭔지 하는 새끼 데려 다 가끔 면회라도 시켜줘. 치료 끝 내고, 한- 모레 정도부터.”
간수장 노릇을 하는 하사관은 슬쩍 미간을 좁혔다.
“쓸데없는 사고가 발생할 수도 있 습니다.”
“사고? 무슨 사고? 저 어르신이 손주 목숨 걸고 도박이라도 할까 봐?”
“평범한 노인이 아니잖습니까. 그 는 사령관께서 태어나기 십수 년 전 부터 제국 최고의 검사라 불리던 괴 물입니다.”
포이닉스는 쓴웃음을 지었다.
“방금 못 봤어? 제 손주라도 못 보면 화병 걸려 앓아누울 것 같던 데.”
자신의 비기가 적기사에 의해 펼쳐 지는 광경을 본 노검객은 한순간에 십 년쯤 늙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착각이겠지만, 주름이 깊어지고 어 깨가 쪼그라들며 허리도 굽은 것만 같았다.
또다시 하사관이 무어라 반대하려 던 차 적기사가 손을 들었다. 하사 관이 움찔 입을 다물자, 장갑 낀 손 은 눈썹과 광대를 잇는 자상을 더듬 었다.
방금 전에 베인 상처인데도 벌써 딱지가 앉아있다. 마력이 얼어붙어 혈기를 운용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포이닉스의 넘치는 생명력은 인간을 넘어선 재생속도를 선보였다.
“으, 따가워.”
적기사는 슬쩍 얼굴을 구기며 하사 관을 돌아보았다.
“그냥 하라는 대로 해.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받들겠습니다.”
사령관의 눈치를 살핀 하사관이 조 심스레 입을 열었다.
“용무가 끝나셨으면 지상으로 안내 _99
“아니, 잠깐만.”
포이닉스는 고개를 들어 감방을 쭉 훑어 보았다.
“잠깐 죄수들 면담이나 할까?”
나선식 계단 중턱 즈음에 자리한 감방. 젊은 여인과 어린 소년이 구 석에 앉아있었다.
잔뜩 숨을 죽인 채 창살 너머의 계단을 흘긋거리던 소년이 속삭였 다.
“누나. 그놈이 올라와.”
“ 쉿.”
눈매가 날카로운 여인이 동생을 만 류했다.
“내가 말한 거 기억하지? 보면 안 돼. 눈 감아.”
“으응.”
오비르 가문의 소년은 저기서 계단 을 오르고 있는 적기사가 암흑계에 서 온 존재라고 믿었다. 가문의 역 사가 고대로부터 이어졌다는 전설이 나, 천계의 전사를 시조로 두었다는 신화도 철석같이 믿었다.
그래서 소년은 눈을 꾹 감았다. 적 기사와 눈을 마주쳤다가 마기에 물 들기라도 하면 영영 날개가 돋아나 지 않을 테니까.
“그래, 잘하고 있어. 괜찮아……
여인은 남동생을 뒤에서 껴안고 배 를 토닥였다. 그러다 돌연 숨을 삼 켰다.
저벅- 저벅- 저벅.
느릿하게 이어지던 발소리가 그들 의 감방 앞에서 멈추었다.
“안녕?”
“하읍!”
눈을 감고 있던 소년이 어깨를 크 게 들썩였다. 여인도 덩달아 움찔거 리더니 동생을 더 가까이 끌어안았 다.
“……이름이, 밀롭스랬지? 안 들리
니?”
적기사가 노크하듯 창살을 두드리 자 소년, 밀롭스는 딸꾹질을 해대기 시작했다. 동생이 작은 손으로 입을 틀어 막는 모습에 누이가 용기를 내 었다.
“네놈, 뭐 하는 짓이냐!”
“내가 뭘 했다고? 잠깐 얘기나 하 려고 하는 건데. 들어가도 되지?”
포이닉스가 짐짓 유쾌한 미소를 지 었다. 여인은 도끼눈을 뜨며 씹어뱉 듯 말했다.
“아니. 더이상 다가오면-”
끼이익.
이미 적기사는 하사관의 도움을 받 아 창살문을 열어젖힌 뒤였다.
“어, 방금 뭐라고? 못 들었네.”
그렇게 지껄인 포이닉스는 병사에 게서 의자를 건네받아 감방 한복판 에 깔고 앉았다.
애초부터 그에게 양해를 구할 생각 따위는 없었음을 깨달은 여인은 입 술을 잘근 깨물었다.
“당장 여기서 꺼지지 않으면 배를 갈라주지.”
“흐음.”
적기사는 잠시 눈썹을 긁적이더니 질문했다.
“근데 너 왜 반말하냐?”
“……뭐라고?”
“왜 반말이냐고.”
여인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가문과 유파의 원수를 어찌 대해야 하지?”
“어찌 대하긴, 바짝 엎드려야지. 가 문도 유파도 살리려면.”
“감히-”
“감히 같은 소리하네.”
포이닉스는 냉소를 흘렸다.
“그리몬스 같은 어르신도 핏줄 하 나, 검술 하나 지켜보겠다고 저 아 래에 처박혀 개고생을 하고 있는데. 넌 뭐 그렇게 대단하다고 고개 빳빳 이 세우고 있냐?”
젊은 여인은 오비르 가문의 ‘틸로 리아’였다. ‘셀-시드 류’의 대표자로 서 열한 명의 소드마스터 중 하나로 꼽혔던 사내, 탄틸로스의 누이.
“원수에게 목숨을 구걸하지는 않겠 다.”
“그래, 넌 그러던가. 근데 네 동생 은 무슨 죄냐? 그 어린 애가 뭘 잘 못했다고 이런데 처박혀 있어야 해?” “말은 똑바로 해라, 적기사. 우리를 여기 가둔 건 네놈이다.”
“이 아가씨가 큰일 날 소리 하네. 힘도 없는 어린애를 내가 왜 가둬? 네가 헛소리를 해대서 억지로 붙들 고 있는 거 아냐.”
“네 피로 물든 손아귀에 홀로 사로 잡히느니 차라리 나와 함께 있는 게 더 안전하다고 판단한 것뿐이다.”
틸로리아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포 이닉스는 혀를 찼다.
“당최 말이 안 통하는구만……. 됐 다, 어차피 그런 얘기를 하러 온 건 아니니까.”
“꺼져라. 원수와 나눌 이야기 따위 는 없으니.”
열 살은 되었을까 싶은 어린 아이 를 앞에 두고 쌍욕을 지껄이거나 살 기를 흘릴 수는 없었기에, 적기사는 애써 웃으며 말했다.
“그, 잠깐이라도 좋으니 입을 좀 닥치고 제안을 들어보는 건 어때? 말 몇 마디 듣는다고 손해 보는 건 아니잖아?”
젊은 검호는 말없이 그를 노려보았 다. 이를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포이닉스는 다리를 꼬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여기 갇힌 사람이 오십 명인가, 육십 명인가 그래. 한 절반 정도는 검호들이고 나머진 제국기사나 마법 사야. 하나같이 고급인력들이지.”
“이런 전력을 잡아두려니 낭비가 이만저만이 아니야. 굶겨 죽일 수는 없으니 밥은 먹여야지, 누가 탈출이 라도 하면 큰일 나니까 깡 좋은 간 수도 많이 필요하지. 마음 같아선 그냥 풀어주고 싶은데, 상황이 여의 치가 않잖아. 알지?” 아이스보발트가 함락되던 날, 적기 사는 두 명의 소드마스터와 수많은 검호들을 참살했다. 이 지하감옥에 갇힌 자들은 사실상 그때의 패잔병 무리나 다름 없었다.
이를 아는 틸로리아로서는 포이닉 스의 말이 너무나 뻔뻔하게 느껴졌 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풀어주고 싶 다? 네놈이 그딴 소리를 지껄일 줄 은 상상도 못했군.”
“아, 그래? 그럼 무슨 상상을 했는 데?” 그는 턱을 괸 채 피식 웃었다.
“한 번 말해봐. 내 차선책이 네 상 상이랑 얼마나 비슷한지 맞춰보자.”
“……차선책?”
“힌트를 주자면, 네 동생은 안 건 드릴 거야. 애는 죄가 없으니까.”
시원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 이는 모습은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청년의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풍기 는 분위기나 입에 담는 말을 매력적 이지도, 아름답지도 못했다.
“근데 어른들은? 목숨 걸고 배짱을 부렸으면 대가를 치러야 할 거 아 냐. 그 대가가 뭘까? 네가 상상한 걸 말해봐.”
“왜 말이 없어? 어떤 깡패 놈이 아주 재밌는 제안을 했는데, 그것부 터 가르쳐줄까?”
어느새 흉터만 남은 자상을 손끝으 로 매만지며, 적기사는 슬쩍 입술을 적셨다.
“남자는 해적들에게 팔고, 여자는 사창가로 넘기자더라. 너처럼 위험 한 경우는 자칫 탈출해버릴 수도 있 으니 아예 사지를 잘라서 예쁜 몸뚱 이만-”
천천히 말을 이어나가던 포이닉스 는 귀를 틀어막은 채 벌벌 떨고 있 는 소년의 모습을 일별하고 뒷말을 삼켰다.
“……물론 나도 그딴 흉한 짓을 하 고 싶지는 않아. 너도 그런 꼴이 되 고 싶진 않을 테고. 그치?”
틸로리아는 미세하게 떨리는 목소 리로 대답했다.
“원하는 게, 뭐지?”
“아주 간단해. 밥값을 하라는 거 야.”
“••••••밥값?”
“‘코발’은 이미 밥값을 했어. 저기, 지하에 있는 어르신이 나를 위해 고 생을 좀 해주셨거든. ‘호르히우’는 어느 정도 도시가 안정된 다음에 일 을 시작하기로 했어. 호르히우 성당 은 병사들을 위한 무기 훈련소가 될 거야.”
“……멍청한 수도승들이.”
“영리한 거지. 피를 흘리는 것보다 는 땀을 흘리는 게 나으니까.”
포이닉스는 짐짓 목소리를 낮추었 다.
“특별히 대단한 유파에 속한 것도 아니고, 내게 별 원한도 없는 검호 들은 이미 전향했어. 죽을 때까지 이 지하에서 썩느니 내 밑에서 딱 일 년만 칼질하고 풀려나는 게 나으 니까.”
그렇게 전향을 해온 검호는 고작 여덟 명이 전부였다. 그로서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내용이었다.
“우리도 그렇게 하라는 건가?”
“맞아. 여기 갇혀 있는 너희 유파 검호가 총 여섯이니까 그중 딱 세 명만 와서 일해. 아니, 아니지. 전에 그, ‘영체갑주’쓰던 강령술사 있지? 그놈까지 포함해서 네 명. 그럼 나 머진 살려주고, 성과가 괜찮으면 풀 어줄게.”
“개소리.”
그녀는 목소리가 떨리는 와중에도 퍽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나는 셀-시드의 전수자인 동시에 오비르 가문의 딸이다. 원수를 위해 제국에 칼을 겨눌 수는 없다.”
셀-시드 류는 고대제국 시절에 창 안되었다고 알려진 검술로, 고대제 국이 멸망한 뒤 수백 년간 실전된 상태였다.
이를 부활시킨 게 두 사람, 평생에 걸쳐 문헌을 연구한 틸로리아의 증 조부와 아낌없이 지원을 해준 당시 황제 ‘주드빅 대제’였다.
현 황제 루일릭스 2세의 가문인 스담테르크 왕가는 주드빅 대제가 속한 가문인 ‘안타시카 대공가(大公 家)’와 반쯤 원수지간이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제국에 칼을 겨눌 수는 없 다는 게 틸로리아의 생각이었다.
“그럼 다행이네. 우리의 적은 아빌 람버스 공작과 부왕 버카드거든. 미 테르게란트 제국이 아니라.”
“지금 말장난을 하자는 거냐?”
“아니. 살아날 구멍을 만들어주는 건데.”
“살아날 구멍? 하. 그게 탄틸로스 를 죽인 자가 판 것이라면 차라리 불구덩이에 뛰어들 것이다.”
“……뭐, 마음대로 해. 판단은 네
몫이니까.”
마법의 헤드기어를 차고 날아다니 는 도객들. 적기사는 그들이 못내 탐났다.
하지만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는 너무나도 바빴으니까.
결국 포이닉스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면 일단, 동생은 데려갈게.”
“••••••뭐?”
“이런 냄새나는 곳에 애를 처박아 둘 수는 없잖아.”
“안 돼, 절대로.”
적기사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얼굴 이 하얗게 질린 틸로리아는 남동생 을 뒤로 숨기며 그에게 덤벼들었다.
타닥.
호리호리하지만 잘 단련된 몸을 가 진 여인은 눈 깜짝할 새 바닥을 박 차며 주먹을 내질렀다.
재빠른 공격이었지만, 포이닉스는 옆으로 한 걸음 움직이는 것으로 간 단히 피해버렸다. 그리고 슬쩍 주먹 을 휘둘러 그녀의 콧잔등을 후려쳤 다.
“끄흑,” 틸로리아가 엉덩방아를 찧은 사이, 적기사는 몸을 잔뜩 굳히고 있는 밀 롭스를 안아 들었다.
“O O 흐으 ” • 9 –—’I •
소년이 몸을 벌벌 떨다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놀란 포이닉스가 소년을 달랬다.
“괜찮아, 괜찮아. 아저씨 나쁜 사람 아니니까 울지마. 뚝.”
씨알도 안 먹힐 소리였다. 밀롭스 는 더욱 서럽게 울기 시작했다.
“안 돼, 밀리오-”
포이닉스는 쩔쩔매며 아이의 등을 두드리는 동시에, 비틀대며 덤벼드 는 여인을 세차게 걷어찼다.
빠악!
“커흑, 커허-”
틸로리아의 얼굴은 순식간에 피범 벅이 되었다. 누이의 고통스러운 신 음이 들려오자 소년은 속눈썹을 파 르르 떨기 시작했다.
“에고- 미안해, 미안해. 올라가서 맛있는 거 먹자. 응?”
적기사는 자그만 머리를 품에 묻으 며 커다란 손으로 아이의 귀를 막았 다. 그렇게 동실동실 밀롭스를 달래 는 한편, 틸로리아를 내려다보며 말 했다.
“이 지하에 처박혀 언제 을지 모를 최후의 순간을 기다릴지, 내게 일 년만 봉사하고 가문과 유파를 살릴 지는 오직 네 선택에 달렸어.”
“밀리오. 밀리오를, 내놔.”
“후자를 택하길 기도하지. 이 귀여 운 아이를 천애고아로 만들고 싶진 않거든.”
젊은 검호는 바닥을 긁으며 기어가 손을 뻗었다. 적기사는 그 손을 슬 쩍 피해 감방을 나섰다.
“밀리오는 안 돼. 밀리오만은,”
“아, 맞다. 그리고…… 병사들이 감방문을 잠그는 사이, 포이닉스는 창살 너머에서 미소를 지었다.
“다음에 만났을 때 또 반말하면, 이빨을 모조리 뽑아버릴 줄 알아.”
“밀리오를 돌려줘. 밀리오!”
적기사는 소년을 안아 든 채 지상 으로 사라져버렸다.
이틀 뒤, 새벽.
“서둘러라!”
“해가 뜨기 전에 출발한다!”
삼백여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출정 할 준비를 하던 포이닉스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부하들을 보낼 줄 알았는데.”
“내게는 부하가 없소.”
굳은 얼굴의 틸로리아는 가죽옷 위 에 얇은 흉갑을 걸치고, 허리춤에는 넓적한 도를 찬 차림새였다. 거기에 더해 깃털무늬가 섬세하게 양각된 헤드기어까지, 지하 감옥에서 풀려 나며 돌려받은 장비들이었다.
“오직 가족과 동료들이 있을 뿐.”
“아하, 그래?”
바이콘에 탄 적기사는 웃는 낯으로 그녀의 일행을 돌아보았다.
셀-시드의 새로운 대표자의 곁에 는 유파의 검호 둘과 그녀의 조부와 연을 맺었다는 중년의 강령술사가 서 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증오에 찬 눈빛을 하고 있었다.
“다들 내게 개인적으로 감정이 있 는 모양인데, 그래도 잘해보자고. 열 심히 살다 보면 유파도 살리고, 출 세도 하고…… 운이 따라주면 언젠 가 복수도 하지 않겠어?”
묵묵히 서 있는 이들을 대표하여, 틸로리아가 입매를 비틀며 답했다.
“명심하겠소.”
포이닉스는 더욱 환하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