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34)
나의 악당들 434화
65. 봄의 절정(9)
젤른트리는 제국과 왕국의 국경에 걸쳐 있는 거대한 원시림이다.
왕국민은 이 삼림을 겔란 족들이 사는 숲이라는 뜻으로 젤른트리라 칭했다. 제국민들은 빛 하나 들지 않을 만큼 울창하다는 뜻에서 ‘검은 숲’이라 불렀다.
그 호칭이야 어찌 되었든 젤른트리 가 아주 억센 생명력을 가졌다는 사 실은 변함이 없다. 수백 년 간 몇 번이고 불에 타고, 벌목 당하고, 병 이 돌았지만 여전히 수천 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신비한 숲…….
그러한 젤른트리의 언저리쯤에서, 이마에 금속띠를 두른 젊은 마법사 가 주문을 외웠다.
“세게, 더 깊이, 영원의 바람을. ”
기이한 울림이 묻어나는 목소리와 함께 지팡이 앞에 유백색 기운이 떠 올랐다. 영원계의 요정들이나 쓸 법 한 마력. 유백색 덩어리는 이내 터 지듯 앞으로 뿜어졌다.
쐐액!
경쾌한 마찰음이 들리고, 저 높이 뻗은 아름드리나무의 밑동이 절반 넘게 잘려 나갔다. 두꺼운 몸통이 앞으로 기우뚱 쏟아졌다.
“넘어간다!”
“조심해!”
병사들의 고함이 몇 차례 울리고, 나무가 •꽈드득 부러지는 소리와 함 께 넘어졌다. 흙먼지가 일었다.
“ O 으 ’’
마스터 에포즈는 쿨럭거리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마음 같아선 산들바 람이라도 일으키고 싶지만 그럴 마 력조차 바닥난 상태였다.
“줄- 걸어!”
병사 여남은 명이 쓰러진 통나무에 들러붙어 밧줄을 묶고 끌어대기 시 작했다.
“말 좀 빨리 끌고 오라고 해। 이놈 의 말잡이 새끼들은 한 번 갔다 치 면 돌아오지를 않아!”
웃통을 깐 하사관의 불호령이 떨어 진 것도 잠시, 짐말의 고삐를 쥔 자 들이 후다닥 달려왔다.
말잡이들은 병사들이 내민 줄을 건 네받아 분주히 손을 놀렸다. 이내 짐말의 멍에와 끌채에 줄이 묶이자, 통나무는 울퉁불퉁한 지면을 거칠게 타고 넘기 시작했다.
마스터 에포즈는 어깨에서 흙먼지 를 털어내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조금 쉬다 합시다. 이러다 목책은 반도 못 세우고 기절하게 생겼으 니.”
“예, 쉬십시오. 여긴 죄 엉망이라 앉을 곳도 없으니 저어쪽 바람 잘 드는 곳에서 한숨 돌리시지요.”
하사관은 공손히 대답하고 향긋한 포도주 냄새를 풍기는 물주머니를 건넸다. 그리고 병사들을 돌아보며 빽 고함을 질렀다.
“자, 노는 시간 끝났다! 전원 도끼 들어!”
얼굴이 벌겋게 익은 병사들이 도끼 를 쥐었다. 달짝지근한 물을 들이켜 던 에포즈는 어쩐지 체할 것 같은 기분에 슬쩍 고개를 돌렸다.
“후아……
울창한 수풀 남쪽에는 강과 들이 펼쳐져 있었다.
폭도 깊이도 그리 대단치 않아서 변변한 이름도 없는 강줄기는 따스 한 햇살을 받아 연녹색으로 반짝였 다. 색색의 꽃이 만개한 초지는 바 람결에 흔들거리며 봄 내음을 사방 으로 퍼뜨렸다.
퍽 아름다운 풍경이었건만, 천재마 법사라 불리는 청년은 어째 착잡한 표정이었다. 그는 저 풍경 속에서 조금 다른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북동쪽에서 홀러들어 남동쪽으로 휘어나가는 강은 흔히 ‘죽음의 늪 지’라 불리는 아사그를 지나온 것이 었다. 저 악취를 풍기는 물에 함부 로 입을 대었다간 시름시름 앓다가 언데드로 변해버릴지도 몰랐다.
아름다운 들 한구석에서는 봄 내음 대신 매캐한 탄내를 풍기고 있었다. 진지를 구축 중인 병사들이 방화작 업을 위해 불을 지른 것이다. 만개 한 꽃과 튼튼한 줄기, 싱그러운 잎 사귀가 열기에 오그라들다 마침내 불길에 잡아먹혔다.
마스터 에포즈는 무채색의 시선으 로 며칠 내로 피로 물들 들판을 살 폈다.
울카르 왕자의 심성과 이상에 매료 되어 그 막하에 든지 칠 년. 수련생 티를 숨기지 못하던 어리숙한 소년 은 이제 숙련된 전투마법사가 되었 다.
흩날리는 재를 보며 괜스레 울컥하 던 순수한 감성은 진즉 말라버렸다.
급조한 목책과 엉성한 토루 그리고 그 사이를 잇는 참호를 살피며 ‘저 방어선을 이용해 적을 얼마나 죽일 수 있을까’ 따위의 질문을 속으로 던져보는 게 지금의 그였다.
따앙-
햇살 아래 서서 부드러운 맞바람을 맞던 에포즈는, 청아한 쇳소리에 휙 고개를 돌렸다.
“왜 그리 침울한 얼굴을 하고 있 나?”
“……아, 랭볼트 경.”
‘동부 제일의 검사’, ‘은왕자의 첫 번째 기사’, ‘참철의 기사’…….
숲 어귀에 앉아 눈처럼 하얀 칼날 을 튕기고 있는 기사의 별명들이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좀 피곤 해서……
“그렇군. 이리 와서 좀 앉게.”
“괜찮습니다. 볕을 좀 쬐고 싶어서 요.”
고개를 끄덕인 랭볼트는 날이 좁은 검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다가 다시 칼날을 튕겼다.
따앙-
“피곤할 만도 하지. 그저께 저녁에 도착한 뒤로 쉴 새 없이 마법을 부 리고 있지 않나. 좀 쉬엄쉬엄 하게.”
“걱정 마십시오. 별로 무리를 하는 것도 아니니……
랭볼트와 에포즈는 십 년의 나이 차이를 감안하면 꽤 친밀한 사이였 다. 동료로서 꽤 오래 함께하여 정 을 쌓은 건 물론이고, 애송이 시절 의 에포즈를 사교성 좋은 호인인 랭 볼트가 자주 돌봐주었기 때문이었 다.
“그런데 경은 여기서 뭘 하고 계십 니까?”
“바람을 즐기고 있지. 검도 좀 살 필 겸.”
랭볼트는 칼을 쥔 손을 빙글빙글 돌리다가 미간을 좁혔다.
“혹시 칼에 걸린 주문을 고칠 수도 있나?”
“음, 굳이 말씀드리자면 가능하긴 합니다. 엄청 어렵겠지만. 왜 그러십 니까?”
“칼이 너무 가벼워서 말이야. 영 손에 익질 않는단 말이지……
1미터가 넘는 쇳덩이를 회초리처럼 휘두르는 걸 보아 확실히 칼이 가벼 워 보이긴 했다.
에포즈는 하얀 칼날을 흘긋 살피더 니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포기하고 그냥 적응을 해보십시 오. 그 정도 수준의 마도구면 그랜 드 마스터 급의 부여술사 정도는 되 어야 손이라도 대볼 테니.”
“그런가. 이거 낭패인데.”
“정 안 맞으시면 원래 쓰던 걸 쓰 시면 되잖습니까.”
랭볼트는 콧수염을 매만지며 어깨 를 으쓱였다.
“그게 문제야. 무게만 빼면 나머진 다 마음에 들거든. 그리고, 함부로 칼을 바꿨다가 포이닉스 경이 알면 얼마나 난리를 쳐댈지 모르네.”
“난리라됴?”
“얼마 전부터 포이닉스 경이 그러 더군. 마도구가 너덧 개 정도는 있 어야 검의 달인들을 상대하지 않겠 냐고.”
도시를 점령하며 제국기사와 검호 등에게서 빼앗은 온갖 마도구들을 반강제로 안겨주던 포이닉스가 떠올 랐는지, 기사는 슬쩍 쓴웃음을 머금 었다.
“어쩐지. 마도구라면 질색하시는 경께서 웬일로 그런 반지며 목걸이 를 다 착용하고 있나 했습니다.”
“질색하는 정도는 아닐세. 이 망토 만 해도 마도구이지 않나.”
파도치는 바다를 쏙 빼닮은 망토는 강력한 방어 마법이 걸린 마도구였 다. 당대 최고의 기량을 가진 혈족 에게 주어지는, 얼쇼어 가문의 가보 이기도 했다.
“그저 이런 기물 따위에 의지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 승리가 간 절한 상황이니 어쩔 수 없지.”
그는 마법검을 허공에다 두어 차례 휙휙 그어보았다. 그리고 입맛을 다 시며 칼을 회수했다.
“그런데 랭볼트 경, 여기 계셔도 되는 겁니까?”
“왜, 뭐가 문제인가?”
“다들 방어선 만드느라 바쁘잖습니 까. 뭐, 독려라고 할까, 그런 거라도 해주셔0》……
랭볼트는 방어선을 흘긋 살폈다.
그를 믿고 칼날만을 넘어온 용맹하 고 유쾌한 바다 사나이들.
어린 나가의 명이라면 거리낌 없이 목숨을 내던질 가병들.
구원의 딸에게 신앙과도 같은 충성 을 바치는 누데인족 전사들.
적기사의 공포 어린 위명과 마력에 가까운 매력에 이끌린 항병들.
그렇게 도합 천이백의 병력이 좁다 란 회랑지대에 모여 강을 따라 선을 그어 내리고 있었다.
“……됐네. 저런 곳은 내가 설 자 리가 아니야.”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말 그대로일세. 사람마다 자리가 있는 법이니, 알량한 기사 신분을 믿고 여기저기 함부로 기웃댈 수는 없지 않겠나.”
마스터 에포즈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랭볼트 얼쇼어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신분의 차이에 구애받 지 않고 사람을 사귀는 한편, 스스 로 귀족이고 기사라는 의식도 선명 한 유형.
천재마법사는 문득 재미있는 생각 이 들었다.
“안키르 경이라면 어떻게 하셨겠습 니까?”
“ o 으
“안키르 경 말입니다. 그분이라면 어찌 행동하셨을까, 해서.” 거인기사의 우렁찬 목청을 떠올린 랭볼트는 픽 웃으며 대답했다.
“쉬지 않고 쏘다니며 마구 고함을 질렀겠지. 직접 도끼질을 하겠다며 소매를 걷어붙였을지도. 그 급한 성 격에 느긋이 앉아 있을 수 있겠나?”
“아리아드 경은요?”
“글쎄. 목책과 토루를 어떻게 하면 더 빨리, 튼튼하게 세울까 고민하며 잔꾀를 짜냈겠지. 얼마 안 남은 머 리가 우수수 빠지는 것도 모른 채 말이야.”
“라이암 경은- 저도 알 것 같습니 다. 어딘가 높은 곳에 올라가 근엄 한 표정을 짓고 있었겠지요.”
“틀림없지. 의심의 여지가 없어.”
에포즈가 운을 띄우지 않았음에도 랭볼트는 썩 유쾌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나갔다.
“휠테르 경은 주변에서 사슴이라도 잡아다 해체를 하고 있었을 테고.”
“지젤라 경은 너무 쉽군요. 매미처 럼 왕자님께 꼭 붙어있었을 겁니 다.”
“그래, 언제나처럼.”
실실 웃던 천재마법사는 이내 모호 한 표정을 지었다.
“포이닉스 경은 어떻습니까?”
“……글쎄.” 랭볼트는 가만히 콧수염을 매만졌 다.
그에게 제일 잘 어울리는 자리는 전장, 그중에서도 가장 치열한 전투 가 벌어지는 곳이었다.
은왕자의 첫 번째 기사로서 그는 언제나 선봉에 섰다. 첫 번째로 적 을 쓰러뜨렸고 첫 번째로 피를 보았 다. 강적들을 숱하게 베어 넘겨 빛 나는 명성을 얻었다.
“포이닉스 경이라.”
언젠가부터 자신의 자리를 포이닉 스에게 빼앗겼다는 사실을 랭볼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고작 스물이 조금 넘은 청년에게 밀려나다니. 그의 혈통이나 내막에 대해서는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만, 분하기 짝이 없는 일인 것은 마찬가 지였다.
하지만 그를 가장 수치스럽게 만든 건 포이닉스가 아니었다. 랭볼트 자 신이었다.
그는 생전 처음 느껴보는 시기심과 열등감에 악몽까지 꾸었다. 잠시지 만 적개심도 품었다.
그런 자신이 랭볼트는 못내 부끄럽 고 수치스러웠다. 동료를 질투하다 못해 증오하다니, 이보다 추해질 수 있을까.
“잘 모르겠군.”
“저도 그렇습니다.”
랭볼트는 뛰어난 검사다. 적의 것 이든 나의 것이든, 힘을 이용하는 방법을 아주 잘 알았다.
내면에서 맹렬히 불타오르고 있는 세찬 불길도 마찬가지였다. 이 맹화 를 잘 다스리고 이끌다 보면 언젠가 자신의 자리도 되찾게 되리라고, 랭 볼트는 굳게 믿었다.
그는 서쪽을 돌아보았다.
포이닉스가 제때 도착하지 못한다 면 하는 수 없이 자신이 그의 빈자 리를 채워야 할 터였다.
“후.”
추하고 어리석은 기대가 한숨과 함 께 흩어졌다.
“느긋하게 기다려보도록 하지. 곧 확인할 수 있을 테니.”
“……시간을 맞추셔야 할 텐데.”
에포즈는 무거운 표정으로 강 건너 동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적들은 이미 사흘 전에 ‘불푸르 트’를 떠났다고 들었습니다. 아마 하루나 이틀 안에,”
“그는 올걸세.”
랭볼트는 시기심과 열등감을 털어 내고, 승리에 대한 열망만을 담아 말을 덧붙였다.
“반드시.”
그의 흔들림 없는 눈빛에 에포즈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참철의 기사와 천재마법사가 불푸 르트와 아이스보발트를 잇는 회랑에 서 대화를 나눌 즈음.
“……이것도 볶아야 되던가.”
아이스보발트 북서쪽의 어느 언덕, 모닥불 위에 주철 냄비를 올린 포이 닉스는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일단 염장 돼지고기는 확실히 볶 았던 것 같은데.”
냄비에 버터를 녹이고 돼지고기를 굽던 그는 양배추를 쥐고 고민에 잠 겼다.
“……모르겠다. 그냥 대충 끓이지 뭐.”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철 냄비에 물 을 콸콸 쏟아부었다. 포이닉스는 콧 노래를 부르며 요리를 이어나갔다. 건너편 언덕에는, 토팔의 이천 군 대가 군영을 펼치고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