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37)
나의 악당들 437화
65. 봄의 절정(12)
크홍-
바이콘은 여전히 힘이 넘쳤다.
신선한 식량 삼아 끌고 온 양을 한 마리 통째로 처먹어서인지, 내가 망루에 올라가 있는 동안 잠시라도 눈을 붙여서인지, 그도 아니면 여정 중 흘려 넣어준 피가 지금껏 효과를 내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바이콘은 평소와 같이 활기 찼고, 여봐란듯이 흉포한 기세를 떨 치고 있었다.
“진정해, 진정.”
놈의 목을 툭툭 두드리며 망루 주 변을 훑어보았다.
근처의 목책 아래에, 이마에 기이 한 백색 가면을 걸친 여인과 판초를 입은 소녀가 나란히 쪼그려 앉아 있 었다. 키도, 인종도, 겉으로 보이는 나이도 비슷한 둘이 도란도란 이야 기를 나누는 모습이 썩 귀여웠다. 하지만 지금은 여유를 부리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뭉치, 이오피야.”
“ 아.”
뭉치와 이오피야가 쪼르르 달려오 자 슬쩍 상체를 숙였다. 그러나 바 이콘이 워낙 덩치가 큰 탓에 가슴을 갈기에 묻고도 눈높이를 맞출 수가 없었다.
“알첸버그의 군대가 왔어.”
“네.”
어린 영혼주술사는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느껴져요. 사악한 마력이 담긴 사
슬들이……
“그러면, 며칠 전에 네가 말한 방 법은?”
“제대로 살펴봐야 할 것 같아요.”
“제대로? 가까이서 한번 볼래?”
칸자이 이오피야는 잠시 고민하다 가 고개를 내저었다.
“저는 마력을 감추는 데 서툴러요. 함부로 나섰다간 요술사들의 경계만 사게 될 거예요.”
“다람쥐로 변신하면 되잖아.”
“그러면 시야가 제한되니까요. 다 른 방법을 써볼게요.”
“다른 방법?” “네.”
소녀는 무언가 결심한 듯 주먹을 불끈 쥐었다.
“포이닉스 님의 눈을 좀 빌려주실 래요?”
“……눈을 빌려달라고? 어떻게? 뽑 아서?”
최근 내 생명력과 혈조술이 상당히 발전하긴 했지만 뽑힌 눈알도 재생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뭐, 테오도라처럼 강력한 권능을 가진 성직자가 조금만 보조를 해주 면 가능할 것 같기도 한데…….
내 생각을 끊은 것은 질색한 얼굴 의 이오피야였다.
“네? 아니, 그게 무슨 끔찍한 말씀 이세요. 저는 그냥 주술을 걸게 해 달라는 뜻이었어요.”
“아, 난 또……. 무슨 주술?”
“말하자면 서로의 감각을 공유하는 주술인데요……. 으음, 설명하자면 기니까 일단 경험해 보실래요?”
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소녀 는 팔을 뻗었다. 펄럭이는 판초 자 락을 따라 캐러멜을 닮은, 싱그러운 향기가 홀러드는 동시에 조그만 손 이 내 이마를 짚어왔다.
“Arkou. omnimao’ti degat, anluc asan—”
부드러운 감촉과 달콤한 체취를 즐 기며 소녀의 주문인지 기도문인지 모를 중얼거림이 끝나기를 기다렸 다. 그리고 이내 이마로 기이한 진 동이 전해지더니 흩어지듯 사지로 퍼져나갔다.
“……어?”
“된 거야?”
“아뇨, 잠시만요.”
이오피야는 당황한 얼굴로 한 번 더 주술을 시도했지만 달라지는 건 없었다.
“……실패예요. 저항이 너무 단단 하셔서.”
“그럼 어떡해?”
“음, 마음을 조금 가라앉혀 보실래 요?”
“……더 가라앉힐 구석이 없는 것 같은데.”
“아무래도 전쟁터니까 본인도 모르 게 긴장하셨을 수도,”
내가 가만히 눈썹을 긁적이자 소녀 는 얼른 말을 이었다.
“어, 그게 아니면…… 제 손을 깊 이 받아들인다는 느낌으로 마음을 비워보세요.”
“애매하네.”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이오피 야의 두 눈을 들여다보았다. 동그랗 고 까만 눈동자를 빤히 바라보자, 이오피야는 괜히 어깨를 움츠리며 눈을 깜빡였다.
“……왜, 그러세요?”
“잠깐 가만히 있어 봐. 눈 깜빡거 리지 말고.”
소녀는 흡하고 숨을 멈추었다. 느긋하게 내려다보기를 잠시. 까만 눈동자 속에서 희미하고 어두운 감 색을 찾아낼 즈음, 나는 입을 열었 다.
“지금 다시 해봐.”
“•…”예? 아, 네.”
이오피야는 허둥거리면서도 얼른 주문을 외웠다.
“reg ’te aka ’ap. ”
휘우웅.
이마로 전해져 온 진동은, 이번에 는 흩어지지 않고 눈과 뇌 사이의 어딘가에 머물렀다.
“오, 됐어요-”
소녀의 목소리와 함께 영문 모를 이질감이 찾아오고, 눈앞이 흐려졌 다. 그리고 언뜻언뜻 바이콘에 올라 타 있는 내 모습이 보였다.
“으, 뭐야.”
순간 균형이 흔들려 바이콘의 고삐 를 잡아챈 사이, 내 이마에 손을 얹 고 있던 이오피야는 풀썩 엉덩방아 를 찧고 말았다.
“에? 이오피야!”
“저, 저 좀……
소녀는 뭉치의 부축을 받으며 말했다.
“라넌, 제 눈 좀 가려주실래요?”
“가려? 눈을?”
“네, 너무 어지러워서- 제 시야는 차단해야 할 것 같아요.”
“이렇게 해‘?”
“맞아요. 고마워요.”
뭉치는 어리둥절해 하면서도 손을 들어 소녀의 눈을 가려주었다. 그러 자 내 눈앞을 흐리던 잔상들이 사라 졌다.
하지만 시각이 차단되었을 뿐, 다 른 감각들은 그대로였다. 미각이나 후각이야 별로 특이할 게 없었다. 하지만 고삐를 쥐고 있는 손에서는 뭉치의 팔뚝이 느껴졌고, 분명 안장 에 얌전히 앉아 있는데 엉덩이가 얼 얼했다.
“……이게, 뭐야? 아아, 아.”
내가 뱉은 소리가 몸 속을 울리는 동시에 저 위에서 들려오는 감각이 란, 생소하면서도 아찔한 것이었다.
“‘동화’의, 아으, 주술이요. 말씀드 린 대로 감각을- 공유한 거예요.”
“이런 거였어? 잠깐, 멀미 날 것 같으니까 좀 가만히 있어.”
영혼주술사의 1랭크 스킬인 ‘동화’ 의 효과는 능력치와 생명력, 마력의 일부를 아군과 공유하는 것이었다. 시전자와 피시전자 모두가 버프를 받는 터라 파티플레이에서는 빼놓지 않고 쓰이는 기술이기도 했다.
근데, 제기랄. 현실에서는 능력치만 조금 오르고 마는 것이 아니었다. 말 그대로 이오피야와 동화되어버리 는 것 같았다.
“흐읍, 후우-”
난 심호흡을 하며 이중으로 느껴지 는 감각에 적응하려 애썼다.
그나마 다행스럽게도 이오피야의 감각은 범상한 수준이었다. 말하자 면 지각의 용량을 그리 많이 차지 않는 것이었다.
진정하고 짧게나마 명상을 했더니 이오피야에게서 전해지는 감각을 걸 러낼 수 있었다. 시야 한구석에 분 할된 화면을 띄워둔 것 같은 느낌이 라고 할까.
“……이제야 좀 적응이 되네.”
“으 ”
이오피야는 여전히 내게서 전해지 는 감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뭉치의 손에 눈이 가려진 채 진지 한쪽에 쌓여 있는 건량 상자에 걸터 앉아선 끙끙거리기만 하는 것이었 다.
“괜찮아? 그 상태로 뭔가 할 수 있겠어?”
“어, 잠시만요.”
이오피야는 감각이 꼬였는지 이상 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고삐를 잡듯 허공을 쥐고, 높은 곳에서 균 형을 잡는 것처럼 몸을 흔들거리고 있었다.
“사실 제가, 말을 정말 좋아하지만, 타는 건 별로 자신이 없어요.”
“……너 지금 앉아 있는데?”
“네, 그쵸? 저도 아는데, 그거랑은 다르다구요.”
횡설수설하던 소녀는 심호흡하며 양손을 활짝 펼쳤다. 그리고 제 배 꼽 앞으로 천천히 손을 모으는 것이 었다.
“후- 됐어요, 이제 가세요. 저는 신경 쓰지 마시구요.”
“엄청 신경 쓰이는데.”
“괜찮다니까요. 제가 포이닉스 님 의 눈을 빌려서 노예들에게 채워진 목줄을 살필 테니, 되도록 상세히 살펴봐 주세요.”
이오피야는 그렇게 말하는 와중에 또다시 슬금슬금 손을 들었다. 허공 에서 엉거주춤 고삐 쥔 자세를 취하 는 것이 썩 미덥지는 못했지만.
“……그래, 뭐. 어쩔 수 없지.”
바이콘을 몰아 높이 3, 4미터 남짓 한 목책을 나섰다.
아빌람버스 공작과 부왕 버카드의 군대는 하이캐슬에서 지겹게도 상대 해 보았다. 덕분에 저 멀리 강 너머 에서 진군해 오는 적의 구성을 한눈 에 알아볼 수 있었다.
제일 먼저 눈에 띈 건 금빛 사슬 갑옷을 입고 두툼한 누비갑옷과 화 려한 서코트를 걸친 일백여 병사들 이었다.
하나같이 몸통만 한 연방패를 들었 는데, 방패엔 녹색 숲과 검은 성채 가 그려져 있었다. 알첸버그 가문의 정예병들이 틀림없다.
다음으로 눈에 띈 건 ‘평화를 사랑 하시는 알첸버그 부왕 전하와 주의 인도를 받는 군대’라는 등신 같은 이름을 가진, 흔히 ‘이교도 노예군 단’이라 불리는 놈들이었다.
노예병들은 늘 그랬던 것처럼 궁수 와 장창병, 방패병 등이 적당한 비 율로 섞여 조를 이루고 있었다. 조 가 아홉 개 모여 백인대를 이루었는 데, 나름 체계적인 편제와 각 백인 대 사이의 일정한 간격 덕분에 규모 를 파악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백인대가 열 개라. 아주 바글바글 하네.”
이교도 노예군단 뒤에는 그들의 짝 이 되는 부대가 따르고 있었다.
일명 ‘청염의 마귀들’이라 불리는 마법병단이다. 마법사라기보단 생체 병기에 가까운 놈들…….
대충 헤아려 보니 오륙십 명쯤 되 는 것 같다. 나머지는 아마 본대에 있겠지.
마법병 개개인의 수준은 전투마법 사들과 비교하기 민망할 정도로 낮 지만, 자신의 생명력을 불사르며 쏟 아붓는 공격 주문은 그 처절함 만큼 이나 위협적인 것이었다.
대개 마법사들이 제 목숨을 소중히 여기고 겁이 많은 것과는 달리, 저 마법병들은 두려움이 없는 목각인형 들이다. 상황에 따라서는 웬만한 마 법사보다 더 쓸 만한 존재들인 것이
-밤눈이 아주 좋으시네요.
“씨X, 깜짝이야!”
한껏 무게를 잡고 강 건너를 살피 던 나는, 귓가를 스치는 목소리에 하마터면 바이콘의 고삐를 잡아챌 뻔했다.
-앗, 죄, 죄송해요. 많이 놀라셨어 요?
“이 오피야?”
-네, 저예요.
“뭐야, 이거. ‘속삭임’ 주문은 당연 히 아니겠고, 주술로 이런 것도 할 수 있어?”
-당연히 평범한 주술로는 안되죠. 영혼을 다루는 것에도 일가견이 있 어야 가능한 재주예요.
짐짓 잘난 척을 하는 소녀의 목소 리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그래서, 내 눈을 통해 보니 뭐가 보여?”
-눈이 워낙 밝으셔서 시야가 확 트인 것 같아요. 이 정도라면 높은 산봉우리에 오르면 모신을 뵐 수 있 을지도,
“갑자기 무슨 엉뚱한 소리야. 노예 들이나 제대로 살펴봐.”
—넵.
난 이오피야의 요청에 따라 강가로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죄송한데, 조금만 천천히 가주시 겠어요? 또 멀미가 날 것 같아서요.
“어떻게 이것보다 천천히 가냐. 기 어가라고?”
저녁달이 비추어 언뜻 형광색이 비 치는 좁은 강과 아군이 지키고 있는 방어선 사이의 거리는 대략 오십 미 터 남짓이었다.
공격 주문을 사오십 미터 이상의 거리로 쏘아 보내는 건 ‘주문강화’ 나 ‘고속영창’처럼 특별한 재주 취 급을 받는다.
그러므로 오십여 미터는 화살은 오 갈 수 있지만 화염구 따위가 오가기 는 어려운 거리를 의미했고, 마법병 들 역시 아무리 강 가까이 붙어도 방어선을 직접 공격하는 건 불가능 했다. 화염구로 목책을 두드리고 싶 다면 화살비를 견뎌내고 강을 넘어 야만 하는 것이다.
“……파괴술사가 별로 없길 바랄 수밖에.”
제국의 유명한 마법학파인 ‘산상의 린하우’에서 수련한 파괴술사들은, 학파 비전의 마법진을 이용해 수백 미터 가까운 거리를 넘어 주문을 날 려댄다. 그 엿 같은 마법진 때문에 롱빌에서 개고생을 했던 기억이 여 태 선명하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검은 얼음’에 슬쩍 손을 얹었다. 이제 강 가에 이르렀으니 파괴술사들은 물론 이고 마법병들의 사거리에도 들어온 것이다.
_우, 우와아.
바이콘이 악취를 풍기는 강물에 코 를 킁킁거리는 동안 천천히 적진을 살펴보았다. 나를 통해 수많은 적병 들의 시선과 적개심 따위를 전해 받 은 탓인지, 이오피야는 떨리는 목소 리로 속삭였다.
-괜찮은 건가요? 조금 물러서시는 게.
“괜찮으니까 살펴보기나 해.”
-……알겠어요. 새로운 주술을 걸 어야 하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혹시 좀 더 가까이서 봐야 하는 건 아니고?”
-네? 여기서 어떻게 더 가까 이…… 아니, 아니요! 이 정도면 충 분해요!
“그래?” 여차하면 강을 뛰어넘어 적진을 한 차례 휘젓고 올 셈이었는데, 그럴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철컥.
나를 발견한 이교도 노예병들은 무 기를 고쳐 쥐거나 시위에 화살을 재 었다. 다만 특별히 공격을 해오지는 않았다. ‘저 미친 새끼가 또 무슨 짓거리를 하려는 거지?’ 하는 눈빛 으로 날 감시할 뿐이었다.
그때였다. 여러 백인대 사이에서 일단의 기수들이 나타나 나를 마주 보고 섰다.
“••••••어라.”
가죽과 판금이 섞인 갑옷과 고풍스 러운 투구, 여기저기 잘리고 그을린 허연 수염이 무척 낯익었다.
“호프컨 성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