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4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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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악당들 499화
막간. 왕자의 유산(3)
울카르 왕자가 휘하에 들인 기사의 수는 총 스물넷이다. 개중 전쟁 중 목숨을 잃은 자들을 제외하면 열여 섯이 남는다.
은왕자군이 왕국 최대의 군벌로 여 겨진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그리 많 은 수는 아니다. 물론 기사들 개개 인의 기량이 무척 빼어났기에 그 수 만 보고 전력을 얕잡아보는 자는 드 물었다.
다만 그들 사이에서도 기량과 명 성, 입지의 차이는 분명히 존재했다.
일곱 번째 기사인 포이닉스를 기준 삼아, 앞선 여섯은 왕도 그리고 왕 국 중부와 북부에서 울카르를 만났 다. 막 재능을 꽃피우던 왕자를 알 아보고 충성을 맹세한 경우다. ‘고 함치는 파도’ 랭볼트, ‘거대한’ 안키 르, ‘오만한’ 라이암, ‘살무사’ 아리 아드, ‘화가’ 휠테르, ‘새매’ 지젤라 까지. 하나같이 무명이 높은 자들이 다.
포이닉스보다 늦은 열일곱-이제 아홉 명으로 줄어든 기사들은 울카 르가 왕국 남서부에 머물며 군세를 불리던 시기에 합류했다. ‘다이어독’ 오조리, ‘술 취한 검’ 헨드리, ‘빛나 는’ 볼솜 등 나름 뛰어난 기사들이 지만 앞선 여덟과 비교하자면 분명 히 손색이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 따라 아이네스 백작 을 비롯한 영주들이 천막을 떠난 뒤 은왕자의 기사 여섯과 어린 제국후 가 탁자에 둘러앉았다.
디렌츠에 남은 지젤라를 대신해 자 리를 차지한 루얀은, 은근히 모여드 는 시선에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은왕자군이 점령한 땅의 영주가 된 이상, 루얀 역시 한배에 탄 입장이 다. 이를 루얀도, 기사들도 인지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머지 기사들과 전투마법사, 군종 사제, 장교 등이 자리를 조정한 다 음에 포이닉스가 입을 열었다.
“아까부터 말들이 없으시네요.”
그의 까만 눈이 랭볼트, 안키르, 라이암, 아리아드, 휠테르를 차례로 훑었다. 영주들이 떠나며 감정이 정 돈된 건지, 아니면 진짜 전우라 불 릴 만한 자들을 향해서인지 적잖이 누그러진 시선이었다.
“……무슨 말을 하겠소.”
이마에 손을 괴어 얼굴에 음영을 드리운 채, 랭볼트가 입을 열었다.
“경이 우리에게 무엇을 바라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끝났소.”
“랭볼트 경.”
“떠날 것이오. 그리 정했소.”
“어디로 말입니까?”
“오버록으로. 강철함대의 귀환에 합류할 것이오.”
오버록은 왕국 동부, 서던쇼어 지 방의 주도(主都)다.
덧붙여, 서던쇼어의 주인인 얼쇼어 가문이 뿌리를 내린 곳이기도 했다.
“가문을 잇기로 했소.”
“……그게 무슨 말입니까? 랭볼트 경은 차남이라고,”
“형님은 죽었소.”
“ 예에?”
“작년 가을, 아버지에게 강철함대 를 청하러 갔을 때 소식을 들었소. 항해 중 풍랑을 맞아 선박이 난파되 었고, 불어 터진 시체가 되어 돌아 왔다던가.”
처음 듣는 이야기에 포이닉스는 입 만 뻐끔거렸다.
“어, 그런, 유감입니다. 전혀 몰랐 어요.”
“말했잖소. 오비록에 가서야 알았 다고.”
“아••••••
“눈물을 보이시는 어머니와 가신들 을 망설임 없이 뿌리친 건, 오버록 보다 여기에 더 가치 있는 일이 있 어서였소.”
적기사는 침묵했고, 청기사는 나지 막이 말을 이었다.
“이제는 아니지.”
은왕자는 열일곱 어린 나이에 처음 전장에 나섰다. 곤경에 빠진 이복형 제를 구하기 위해 말을 달렸고, 여 섯 번 화살을 쏘아 기수 일곱을 쓰 러 뜨렸다.
그는 감탄한 기사들에게 화살통을 내밀며 이렇게 말했다.
‘내게 주어진 가호와 행운을 모두 담았소. 하나씩 받고 따라오시오.’
화살을 나누어 받은 기사들을 은왕 자를 따라 돌격해 적을 깨뜨렸다.
청기사도 그중 하나였다. 다만 그 는 다른 전우들처럼 승리의 기념품 을 가지고 귀환하지 않았다. 은왕자 에게 화살을 돌려주고, 검까지 바쳤 다.
랭볼트는 무어라 말을 덧붙일 듯하 다가 입을 다물어 버렸다. 마치 어 디로 향할지 모르는 화를 삭히는 것 같은 것 같았다.
이번에는 그의 옆에 앉아 있던 안 키르가 말을 꺼냈다.
“나도 떠나겠소.”
“화이트스톤으로 말입니까?”
“으 ”
M三 안키르의 아버지는 하이캐슬 남동 쪽 어디쯤 위치한 요새의 성주다. 그 역시 랭볼트처럼 후계자로서의 의무가 있는 것이다.
“……그러면 경,”
“전리품을 챙겨주겠다느니 땅을 떼 어주겠다느니 하는 소릴 하려는 거 라면 그만두시오. 그깟 땅뙈기, 금붙 이 얻겠다고 전하를 모신 건 아니니 까.”
은왕자는 열아홉 번째, 스무 번째 생일을 북변의 도시 ‘린네흐’에서 맞이했다. 눈밭을 헤집으며 오크를 죽이는 게 일 년 반 동안의 주된 일상이었다.
그는 군대를 지휘해 일만이 넘는 오크를 죽였다. 거인기사는 은왕자 를 도와 검을 휘둘렀고, 수백의 오 크를 죽였다.
오크가 자취를 감춘 뒤 둘은 북변 을 떠났다. 수레를 셋이나 끌던 거 인기사는 수중에 동전 한 푼 없는 은왕자와 마주쳤다.
‘전리품? 새로 사귄 친구들에게 맡 겨두고 왔소.’
그가 말한 새 친구들이 부모 잃은 아이들임을, 거인기사는 왕도에 이 르러서야 알았다. 그는 술에 취해 은왕자에게 검을 바쳤다.
“그래. 그딴 건 필요 없소.”
안키르는 입을 다물었다. 그에게 무어라 말하려던 포이닉스는 이내 고개를 돌렸다.
분명히 의사를 밝힌 둘을 제외하 고, 나머지 셋은 침묵을 지키고 있 었다. 적기사의 시선이 그중 둘에게 먼저 향했다.
“기껏 받은 작위와 땅을 버리지는 않겠죠?”
지르나의 남작이 된 휠테르는 팔짱 을 낀 채 어깨만 으쓱였다. 운트리 어의 남작이 된 아리아드는 안대 낀 눈을 허공에 향한 채 입을 열었다.
“저는 눈먼 퇴물에 불과하니, 마음 같아선 영지도 작위도 반납하고 고 향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주군께서 내리신 것을 남 에게 함부로 줄 수는 없는 노릇 아 니겠습니까?”
울카르가 기사들에게 작위와 영지 를 내린 건 루얀의 권리를 대신 행 사한 것이었다. 그러니 공식적으로 는 제국후인 루얀이 방백 둘과 남작 둘을 거느린 형세가 된 것이다.
덕분에 아리아드가 은퇴를 하면 성 채 운트리어와 거기에 딸린 장원과 마을들이 모두 야심만만한 루얀에게 돌아가게 된다.
그렇다고 다른 이에게 양도를 해버 리자니 두고두고 불화의 씨앗이 될 게 뻔했다.
더불어, 작위를 받은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그 권리를 포기하는 건 자칫 작위를 내린 울카르와 이를 공 증한 루일릭스 2세에 대한 모욕으로 비칠 수도 있었다.
“그러니 제 여생은 영지와 영민을 지키는 데 쓸 생각입니다.” 아리아드의 말에 건너편에 앉아 있 던 휠테르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고민하는 그를 대신해, 라이암이 불 쑥 입을 열었다.
“내겐 별다른 의무도, 돌아갈 고향 이랄 곳도 없소. 주군을 돕는 일에 전념했을 뿐이라 달리 계획을 세워 둔 것도 없소.”
완고한 인상의 중년인 라이암은 담 담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다만 하나 확실한 건, 우리에게는 그분을 따르던 병사들을 보살필 책 임이 있다는 것이오.”
“라이암 경의 말씀대로입니다.”
한 장교가 그에 호응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카르가 가장 신임하던 장교, ‘왕자의 지휘관’ 해럴드였다.
“기사분들이야 제각기 살아갈 길을 찾으실 수 있겠지만, 병사들은 사정 이 다릅니다.”
머리칼에 슬슬 허연빛이 감도는 지 휘관은 지친 기색을 숨기려는지 얼 굴을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최근 몇 달 새 징집한 병사들은 물론이고, 숙련병과 친병들마저 혼 란스러워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기사분들이 결론을 내리길 기다렸지 만, 곧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무너진다는 건?”
“해산이지요. 왕자님께서 피땀으로 조련한 군대가 사라지는 것입니 다……. 물론 여러분들이 흩어지는 것으로 결론을 내리더라도 결과는 같겠지요.”
‘은왕자군의 해산’이라는 말에, 군 막의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다. 사방의 천을 젖혀 올린 탓에 회의를 지켜보고 있던 병사들 사이에서는 불안한 수군거림이 퍼져 나갔다.
“용병들은?”
“저희야 뭐.”
적기사의 시선을 받은 ‘방패처녀’ 그라니아는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왕자님이 안 계시니 불안하기야 하지만……. 돈 꼬박꼬박 받는 주제 에 무슨 불만이 있겠습니까.”
“군자금도 다음 주면 끝입니다.”
다음은 울카르의 부관 비슷한 역할 을 하던 길버트였다.
“곧 왕자님이 남긴 재산에 손을 대 야 할 지경인데-”
“개소리, 누구 마음대로?”
안키르가 험악한 얼굴로 으르렁거 렸으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전장에 바친 사내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대 꾸할 뿐이었다.
“제 말이 바로 그겁니다. 대체 누 구에게 물어보고 누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합니까?”
“뭐?”
“왕자님도 안 계시는데, 누가 책임 자냐는 겁니다.”
기사들 사이에서 침묵이 흐르자, 길버트는 두건 아래로 손을 넣어 머 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장교고 하사관이고 한 명도 빠짐 없이 대리자가 다 있는데, 정작 대 장한테는 그런 게 없었네.”
그 툴툴거리는 소리에 답하듯, 등 받이에 몸을 축 늘어뜨리고 있던 랭 볼트가 의견을 제시했다.
“별수 있나. 병사들은 남은 군자금 과 전리품을 나눠준 뒤 해산시키고, 왕자님의 재산은 왕도로 보내는 걸 로 하지.”
“랭볼트 경.”
“뭘 어쩌자는 겁니까, 해럴드.”
늙은 장교가 신음하듯 호명하자, 청기사는 미간을 잔뜩 좁히며 관자 놀이를 눌렀다.
“누군가 왕자님을 대신해 주길 바 라는 겁니까?”
“그분의 유지를 이어야 할 것 아닙 니까.”
“감히 누가 말입니까? 책임감이라 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나? 아니면, 우유부단한 안키르?”
“우유부단? 지금 말 다했나?”
“아니! 아직 시작도 안 했네!”
자리를 박차고 일어선 랭볼트는 꿈 도 꾸지 말라는 듯, 날카로운 시선 으로 동료들을 하나하나 돌아보았 다.
“눈먼 반란군 수과? 제 잘난 맛에 사는 사생아? 친족살해자?”
그는 은왕자의 첫 번째 기사다운 사나운 기세를 흘렸다. 그러나 안키 르나 라이암, 휠테르도 범인과는 거 리가 멀었다.
“그래, 이제 끝났나?”
“둘 다 자중하게! 이게 무슨 추태 인가!”
“하, 아직도 그 헛소문을 믿는 사 람이 있다니.”
세 기사는 안중에도 없는 듯, 랭볼 트는 휙 고개를 돌렸다.
“대체 이따위 족속들이 어떻게 전 하를 대신한단 말이야!”
마지막으로 그의 시선이 닿은 건 포이 닉스였다.
“설마 경은, 너는 가능하다고 여기
는 건 아니겠지!”
“……어, 글쎄요.”
그 미적지근한 반응에 랭볼트의 얼 굴이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피를 즐기는 살인마에, 색마에, 비 밀을 열두 개도 넘게 숨기고 있는 음습하기 짝이 없는 작자가!”
랭볼트가 헛웃음 섞인 중얼거림으 로 고함을 마무리했다.
“그분을 대신한다고? 농담하지 마 시오.”
포이닉스는 떨떠름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랭볼트 경, 몰랐는데 안목이 되게 좋네요. 명치 오목해진 것 같 은데.”
“명치?”
“네. 명치.”
그는 제 말을 증명하듯 명치께를 살살 어루만졌다.
“그리고, 다들 하는 꼴을 보아하니 은왕자군은 제가 맡는 게 좋겠습니 다.”
“……기가 찰 노릇이군. 정말로 경 이 전하를 대신할 수,”
“아, 대신할 수 있다고 한 적 없으 니까 그만 좀 징징대요.”
“뭐라고?”
미간을 좁힌 랭볼트를, 포이닉스는 담담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그만 징징대고, 앉아서 들으시라 고.”
두 기사의 시선이 허공에서 얽혔 다. 그러기를 얼마쯤, 랭볼트의 눈빛 이 상대의 것을 닮아가듯 천천히 가 라앉았다.
“후우.”
그는 푹 한숨을 내쉬며 도로 자리 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