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62)
나의 악당들 062화
17. 포팔루크 카탈라스(2)
저 멀리 시퍼런 불빛이 보인다.
어쩐지 불길하게 느껴지는 색이다.
대학생 시절, 연극동아리 활동을 하며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라는 극을 올린 적이 있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을 만치 유혈이 낭자한 연극이 었지. 그 연극의 가장 끔찍한 장면 을 연출하기 위해 조명에 파란 필름 을 씌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그때 조명이 딱 저런 색이었는데.
•••끙, 어두운 데 오래 있다 보니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드네.
나는 괜스레 횃불을 휘둘러 시뻘건 불티를 흩뿌렸다. 반대편 손으론 칼 자루를 고쳐 쥐며 발걸음을 서둘렀 다.
침착함을 유지하려 노력했지만, 계 단을 오를수록 불길함은 덩치를 불 렸다.
언덕 위에 쌓인 석조건축물을 발견 할 즈음. 나는 이게 단순한 기분의 문제가 아님을 본능적으로 눈치챌 수 있었다.
우우우웅.
그래, 이건 마법적인 감각이 틀림 없다.
마력을 감지하는 게 마법적인 감각 이 아니면 뭐겠냐고. 아마 마력에 점수를 투자해서 이런 게 느껴지나 보다.
불길함이 모양을 갖추어간다.
나는 횃불을 바닥에 비벼 끈 뒤 새 횃불을 꺼내 들었다. 겉 헝겊을 풀어 언제든지 불을 붙일 수 있도록 해두고, 발소리를 죽인 채 마침내 건물의 입구에 이르렀다.
건물은 커다란 벽돌을 쌓아 만들었 는데, 한쪽에 트인 입구는 성문처럼 커다랬다. 나는 벽에 붙은 채 눈만 빼꼼히 내밀어 건물 안을 살폈다.
‘제단’의 풍경은 게임에서 본 것과 비슷하지만 달랐다.
석실 중앙에 자리한 원형의 계단, 절벽을 향해 뚫린 커다란 아치형 창 (窓), 그 근처에 있는 조그만 단(壇) 은 게임에서 본 것과 같았다.
득시글거리는 시체들과 천장 근처 를 배회하는 시퍼런 조명들은, 이곳 에 있으리라 예상치 못한 것들이었 다. 바닥에 흩뿌려진 허연 모래와 핏자국 역시 시선을 끌었다.
하지만, 가장 충격적인 건 따로 있 었다.
절벽을 향한 창 아래에 늘어져 있 는 인영을 발견하고,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엘렌!
눈을 홉뜬 채 벽에 기대어 앉은 엘렌은 얼굴이 희다 못해 창백해 보 였다.
입술에서 흐른 피가 로브를 붉게 적시고 있었고, 평소 즐겨 입는 흰 셔츠 역시 온통 피범벅이었다. 늘어 진 손을 타고 흐르는 피가 똑, 똑 떨어지며 조그만 웅덩이를 이루었 다.
마치… 마치 죽은 사람 같았다. 아 무리 봐도 그렇게 보였다.
눈앞이 아득해지고, 이내 시뻘겋게 물들었다.
가슴을 타고 올라오는 뜨거운 것을 입으로 토해내었다.
“엘렌, 엘렌!” 적막을 깨뜨리는 포효에 방 안에 모여든 언데드들의 시선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그래서 뭐, X발.
횃불과 가방을 내팽개친 뒤, 앞뒤 돌아볼 것 없이 언데드 무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에에엑-”
몸이 물에 불어터진 시체들이 쓰러 지듯 달려들었지만, 어느새 피를 머 금은 펄션은 붉은 검광을 뿌리며 놈 들을 갈라 버렸다.
써컹.
시체들은 적으면 둘, 많으면 서넛 씩 바닥을 나뒹굴었다. 가끔 턱뼈나 갈비뼈 등에 칼날이 걸릴 때면, “끄아압!”
빠각!
또 다른 놈을 베며 뼈까지 박살 내버렸다.
거친 칼부림에 썩은 체액이 마구 튀며 얼굴에 들러붙었다. 악취를 풍 기는 내장과 시퍼렇게 물든 뇌 따위 가 바닥에 쏟아졌다.
하반신을 잃은 시체가 바닥을 버르 적거리며 손을 뻗어왔다. 발을 들어 머리를 짓밟았다.
퍼석.
역겹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마 치 꿈속의 풍경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렇게 좀비를 서른쯤 베어 넘겼을 무렵, 캉!
손아귀를 타고 올라오는 충격에 퍼 뜩 정신이 든다. 내 참격을 막아선 것은 통짜 쇠로 이루어진 창대였다. 창을 쥔 놈은-
“스켈레톤?”
나는 상대를 자세히 살피는 대신 반사적으로 펄션을 휘둘렀다.
카가각!
창대를 휘감은 칼날이 불똥을 일으 키며 내리그어졌다. 그대로 손목이 나 손가락을 날릴 셈이었지만 펄션 은 단단한 건틀릿에 튕겨 나가고 말 았다.
“이런 미친,”
나는 앞을 막아선 놈의 무장을 확 인하곤 경악성을 삼켰다.
붉은 술로 장식한 황금투구와 붉은 어깨띠를 두른 황금전신갑옷- 그 화려하기 그지없는 복장은 말도 안 되는 존재감을 뿜어냈다.
거기에 양손에 쥔 무기는, 창이 아 니라 삼첨도(三쏘刀)였다. 셋으로 갈라진 날 끝에서는 붉은 연기가 모 락모락 흘러나오고 있었다.
워낙 개성이 뚜렷해서 도저히 몰라 볼 수가 없는 장비들이다. 갑옷은 세트 아이템인 ‘황제의 하사품’, 삼 첨도는 유니크 글레이브인 ‘핏빛 선 봉장’이 분명했다.
이게 대체, 뭔 놈에 뼈다귀 새끼가 이런 장비를?
“그으,”
경악한 것도 잠시, 붉은 연기를 휘 날리며 삼첨도가 내리그어졌다. 그 날카로운 날을 마주한 순간, 핏빛 선봉장의 고정옵션이 떠올랐다.
‘치명타 적중 시 15퍼센트의 확률 로 즉사의 일격 (Vorpal strike) 발 동.’
후웅.
“윽!”
나는 재빨리 몸을 날려 삼첨도를 피하곤 뒤에서 덤벼드는 놈에게 펄 션을 내질렀다.
땅!
본능적으로 뻗어진 찌르기가 웬 방 패에 막히자, 나는 왼손을 뻗어 방 패날을 붙잡았다. 그러곤 있는 힘껏 잡아당기며 펄션을 내리찍었지만, 붉게 물든 칼날은 새하얀 견갑에 튕 기고 말았다.
“그으-”
내 공격을 받아낸 놈은 목젖도 없 는 주제에 낮게 으르렁거리며 철퇴 를 휘둘러왔다. 그 순간, 철퇴가 번 쩍거리며 빛을 뿜었다.
“ Q W
무의식중에 눈을 감자마자 아차 싶 어 얼른 펄션을 당겼다. 그러곤 파 공음이 들리는 방향으로 방어 자세 를 취했고, 쩌엉!
“이런 X팔-”
철퇴를 막아낸 펄션의 칼날이 반으 로 부러져 버렸다!
미친, 이거 나름 레어 아이템일 텐 데-
후웅.
나는 정신없이 물러서며 철퇴를 피 해냈다. 한참을 물러선 뒤에야 놈의 무장이 눈에 들어왔다.
갑옷은 ‘순백’, 투구는 ‘기사단의 충의’, 방패는 ‘잊혀진 십자군’, 철퇴 는 ‘낙성’?
미친, 하나같이 성기사 유니크 장 비잖아!
대체 어떤 또라이가 스켈레톤에 이 런 장비를”.
잠깐, 이거 설마-
“멈춰라.”
석실의 구석에서 들려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미친 듯이 덤벼들던 언데 드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췄다.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은 채 목소 리가 들려온 곳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보다 일찍 왔군, 포이닉스
군.” “……루크 씨?”
계단의 그늘에서 모습을 드러낸 이 는, 장의사 루크 씨였다.
“허허, 멀쩡한 모습을 보니 기쁘구 먼. 어디 다친 곳은 없나?”
평소와 같은 말투, 표정, 몸짓이었 지만 낯선 분위기와 낯익은 두 물건 이 루크 씨를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창백한 조명 아래에서 섬뜩하게 빛 나는 청록색 왕관, 금을 꼬아 만든 줄이 치렁하게 매달린 하얀 지팡이. 강령술사 전용 유니크 장비들인 ‘고대 지배자의 왕관’과 ‘쿠르누기아 의 뼈 지팡이’였다.
그래, 내가 ‘시체매너조까’에게 장 비시켜둔 바로 그 물건들이었다.
“…거짓말이었습니까?”
“거짓말? 그게 무슨, 아- 사술을 다루지 않는다는 것 말인가?”
루크 씨는 여유로운 걸음으로 시체 사이를 누비며 말을 이었다.
“나는 미망(逃妄)의 양들을 해방으 로 인도하는 목자일세. 그런 내가 다루는 것이 어찌 사술이겠나?”
“•••x팔, 뭔 개소리야. 엘렌도 네가 죽였냐?”
내 거친 물음에 루크 씨, 아니, 음 습한 늙은이는 혀를 찼다.
“쯧. 용병치고 예의를 차리기에 좋 게 보았건만. 역시 영혼에 걸맞은 저급한 언사로다.”
“혀 놀리지 말고 대답이나 해. 네 가 저렇게 만들었냐고!”
“맞네. 내가 그랬지.”
“이 개X끼!”
내가 고함을 지르며 앞으로 나서 자, 해골병사들이 무기를 디밀었다.
“크윽,”
큭, 하나같이 해골병사에겐 과분한 장비를 두르고 있다. 놈들이 고레벨 영웅들이나 착용할 법한 장비를 두 르고 있는 이유는, 다름 아닌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단상(斷想).
다크월드의 일반 모드 영웅이 사망 하면 약간의 경험치와 장비 내구도, 소지금을 잃게 된다. 그 과정에서 시체가 남기는 하지만 장비까지 떨 어뜨리는 것은 아니다.
반면 하드코어 모드에선 영웅의 사 망 시 캐릭터가 삭제된다. 그 과정 에서 장비들은 증발하는 것이 아니 라 시체에 남게 된다.
그래서 옛날엔 PvP에서 승리한 뒤 장비는 돌려주는 것이 일종의 매너 였다.
그간 쌓아둔 경험치가 모두 날아가 는 손해를 겪었는데, 장비까지 날리 면 게임을 접고 싶어지잖아? 그래서 암묵적으로 생겨난 룰이라더라.
하, 다시 생각해 봐도 진짜 개소리 였다.
고딩이던 난 그딴 말도 안 되는 룰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래서 첫 PvP부터 상대를 죽이고 장 비를 먹어버렸다.
사실 당연한 거 아닌가? 게임에서 먹으라고 시스템적으로 허락해 준 건데, 그걸 왜 돌려줘?
캐릭터를 갈아가며 계속 그 짓거릴 하니까 하루가 멀다 하고 커뮤니티 가 터지더라. PvP 하는 사람도 엄청 나게 줄어들고. 그건 좀 짜증 났지.
하여튼, 한 4년쯤 지나니까 내 생 각에 동의하는 유저들이 늘었는지 매너고 룰이고 다 없어졌다. 장비를 먹는 게 오히려 당연한 일이 된 거 지. 겁나 뿌듯하더라.
근데, 한편으론 좀 아쉬웠다. 내가 장비를 먹어도 상대가 화를 안 내니 까.
깝죽거리던 놈들을 썰어버리고 농 락하고 싶은데, 키보드만 두드려선 제대로 약 올릴 수가 없잖아?
그래서 생각해 낸 게 바로 강령술 사를 이용한 ‘박제’다.
강령술사가 만드는 해골병사는 녹 슨 철검과 낡은 버클러로 무장하고 있다. 스킬에 점수를 투자하면 장비 가 조금 나아지긴 하지만 그래 봤자 쇠투구에 강철검, 타워실드가 한계 다.
장비를 착용시켜 줄 수는 없냐고?
그런 건 데스나이트, 둘라한 같은 고오급 언데드에게나 가능한 일이 고. 해골병사 같은 하급 언데드에겐 어림도 없다.
근데 한 가지 예외가 있다.
루팅을 안 한 시체를 해골병사로 만들 때다. 이 경우엔 시체가 떨군 아이템을 그대로 장비한 채 해골병 사가 일어난다.
사실 이건 트롤링에 가까운 짓거리 다.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 장비를 회수할 수 없다는 점.
해골병사의 장비를 해제시키는 건 시스템적으로 불가능하다. 또, 해골 병사가 죽더라도 뼛조각만 흩뿌릴 뿐 아무런 장비도 남기지 않는다.
이것 때문에 강령술사를 할 때는 루팅을 먼저 한 뒤 강령술을 쓰는 버릇을 들여야 했다. 안 그러면 아 이템을 다 날리니까.
둘째. 효율이 떨어진다는 점.
해골병사는 착용한 장비를 100퍼 센트 활용하지 못한다. 장비에 달린 액티브 스킬도 못 쓰고, 스탯 보너 스도 못 받는다.
물론 공격력, 방어력, 저항력 같은 전체적인 스펙이 오르긴 하지. 근데 그래 봤자 ‘턴 언데드’ 한 방이면 가루가 되는 뼈다귀인걸.
어쨌든, 나는 이 재밌는 상황을 활 용해 건방진 도전자들을 농락하기 시작했다.
고레벨 캐릭터를 한낱 해골병사로 일으키며 장비를 증발시켜버리는 퍼 포먼스는 한동안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궜다.
그땐 정말 재밌었는데….
그 유희의 결과물이 내 목줄을 죄 고 있다.
날 둘러싼 열다섯의 해골병사가 무 기를 들이밀었다. 하나같이 날 열받 게 했던 놈들의 흔적이다.
“••••••썩을.”
‘그래 봤자 뼈다귀’라고 하기엔 놈 들이 갖춘 장비의 수준이 너무나 높 았다. 최소 60, 최고 90레벨에 이르 던 생전의 영웅들과는 비교할 바가 못 되지만, 지금도 충분히 위협적이 다.
사실, ‘충분히’가 아니라 ‘극도로’ 위협적이지. 난 놈들에게 흠집도 못 내겠지만, 놈들은 내 갑옷을 두부처 럼 갈라 버릴 테니까.
“자, 진정하게. 나도 자네를 해치고 싶진 않으니.”
저 새끼가….
달래듯 지껄이는 루크를 보니 눈깔 이 뒤집힐 것만 같다. 나는 놈을 노 려보며 씹어뱉듯 말했다.
“X이나 까 잡숴, 이 틀딱아.”
“•••뜻 모를 소리를 하는군. 대화의 기본은 서로에 대한 배려와 이해일 세.”
“이해하게 해줄 테니까 이리 와봐. 아가리 찢어서 딱딱거리는 거 고쳐 줄 테니까.”
“흐음.”
혀를 차며 턱을 쓰다듬는 루크는 평소와 같은 태도였다. 전에는 연장 자의 여유로움으로 보여 내심 존경 스러웠지만, 지금은 그저 목을 뽑아 버리고 싶었다.
“아, 이게 좋겠군.”
루크는 그렇게 말하며 품속에서 무 언가를 꺼내 들었다.
“엘렌 양의 명줄을 잠시 붙여둘 테 니, 자네를 설득할 기회를 주게.”
«…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