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Blood Knight's Villains RAW novel - Chapter (98)
나의 악당들 098화
25. 장마(3)
기사들이 아늑한 저택에서 머무는 것과는 달리, 울카르 왕자는 여전히 광장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다.
때아닌 장마로 인해 비가 새는 와 중에도 왕자는 낡은 군막에서 지내 기를 고집했다고 한다.
바로 그 군막에서, 나는 울카르 왕
자와 독대를 하고 있었다.
……나 같은 어중이떠중이랑 독대 를 한다고? 호위도 없이? 이 양반, 진짜 정신이 나갔나?
내가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왕 자는 등받이에 편히 몸을 기댄 채 입을 열었다.
“그 이유가 무엇일 것 같으냐?”
“……네? 무슨 이유 말씀이십니 까?”
“내가 이 군막에서 지내기를 고집 하는 이유 말이다.”
내가 그걸 어찌 알아요. 캠핑을 좋 아하시나?
“……잘 모르겠습니다, 전하.”
“언젠가 떠나야 하기 때문이야. 따 뜻한 벽난로에, 튼튼한 지붕에 익숙 해지면 떠나고자 하는 의지는 꺾이 기 마련이거든.”
사우스하버는 왕자의 손아귀에 떨 어진 지 오래다. 그런데, 여길 떠나 야 한다고? 왜?
내가 아리송한 표정을 짓자, 왕자 는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그래. 성약을 기다리고 있다고?”
“아, 네. 동료가 큰 부상으로 장애 를 얻어서, 그걸 낫게 하려면 성약 이 필요합니다.”
“그런가. 나 때문에 일정이 꽤 지 체되었겠구나.”
왕자는 지하군주에게 왼팔을 잃은 탓에 목제 의수를 끼고 있었다. 팔 꿈치 아래가 완전히 걸레짝이 된 채 뜯어진 탓에, 치료물약이나 사제의 기도 정도로는 회복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
당연히 주교의 치료를 받겠거니 했 는데, 그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아무리 명성 높은 울카르 왕자라도 왕은 아니니 주교에게 이래라저래라 명령을 할 수는 없겠지. 그럼 돈을 내고 치료를 받으면 될 텐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왕자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금화가 넉넉했다면 주교 예하께 치료를 받았을 텐데.”
“어, 돈이 부족하셨습니까? 그럴 수가……
도시를 장악했는데, 고작 금화 천 장이 없다고? 그게 말이 되나?
울카르 왕자는 그답지 않은 차가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 번의 회복기도로는 팔을 재생 할 수 없다더군. 적어도 세 번은 받 아야 한다던가.”
“설마, 금화 삼천 장을 내라고 한 겁니까? 교회에서?”
“왜 아니겠느냐.”
와, 순 도둑놈 같은 새끼들.
우리, 그러니까, 나와 엘렌, 우테콰 이가 사우스하버에 지난 3주간 머무 른 궁극적인 이유는, 엘렌의 다리 때문이었다.
어떻게든 치료를 마치고 싶었거든. 지금까지의 효험을 보아 두세 병만 더 있으면 나을 것 같았고. 그래서 난리가 끝난 뒤, 교회에 성약 제조 를 의뢰했다.
근데 문제는, 울카르 왕자도 크게 다쳤다는 사실이었다.
무려 왕자씩이나 되는 사람이 외팔 이가 된 채 기다리고 있는데 우리 먼저 성약을 달라고 떼를 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는 돈도 많은 양반이 금화를 아낀다고 내심 욕을 했었는데…….
“금화 삼천 장이라니, 욕심도 정도 가 있지.”
내 중얼거림에 왕자가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주교 예하께 말이 불손하구나, 포 이닉스.”
“어, 그게.”
“농담이다.”
어이씨, 깜짝 놀랐네. 성직자 모욕 으로 깜빵이라도 가는 줄 알았잖아.
“네 말대로, 욕심에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내 팔 하나 다시 돋게 한다 고 금화를 수천 장이나 쓸 수는 없 지. 그건 정도를 넘는 욕심이야.”
으음. 내가 왕자의 입장이었으면 어땠을까?
‘어차피 내 돈인데, 그냥 눈 딱 감 고 쓰지 뭐’ 하며 팔을 재생시키지 않았을까?
“교회에 성약을 부탁해 둔 건, 미 련 때문이었다. 성약을 주기적으로 마셔둬야 언젠가 재생할 수 있다고 들었거든. 겸사겸사, 이 빌어먹을 환 상통도 해결하고 말이야.”
왕자는 그렇게 말하며, 발밑에서 웬 상자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상자에는 유리병 네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포도주 빛깔의 내용물과 테두리에 흐르는 성스러운 광채. 성약이었다.
이걸 왜 보여주는 거지?
“그런데, 이 성약은 아무래도 내가 아닌 다른 이를 위해 쓰여야 할 것 같더군.”
“••••••예?”
“가져가거라.”
가져가라고? 이걸? 성약을?
“그, 갑자기 무슨 말씀을,”
“내가 마시면 비참함에 젖어 들 뿐 이지만, 엘렌 양이 마시면 기적을 마주할 수도 있겠지.”
……이거, 받아도 되는 건가?
내가 망설이는 기색을 보이자, 왕 자는 한숨을 내쉬더니 품에서 웬 양 피지 조각을 꺼내었다.
“엘렌 양에겐, 시간이 없다.”
“네? 그게 무슨 말씀,”
“라-팔라이스 궁전의 에레나르 라 다칼린. 엘렌 양의 본명이다.”
뭐야, 이 전개는?
“갑자기 무슨 말씀을,”
“간단히 알아보았다. 라다칼린 가 문에서도 대마도사의 피가 가장 진 한 적손이라더군. 몰랐느냐?”
“……알고, 있었습니다.”
“다행이군. 그럼, 그녀가 스승을 살 해하고 도망쳤다는 건?” 왕자의 차가운 눈빛에, 나는 이를 악물며 항변했다.
“그건 누명입니다, 전하. 엘렌은 그 런 짓을 저지를 이유도, 힘도 없었 습니다.”
“그런가.”
왕자는 들고 있던 양피지 조각을 슬쩍 훑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라-팔라이스 궁전 내에서도 너와 같은 생각을 가진 이들이 꽤 있는 모양이야.”
“예‘?”
울카르 왕자는 양피지 조각을 건네 며 말을 이었다.
“마법사들의 궁전에서 추격자가 오 고 있다. 적으면 둘, 많으면 넷이라 는군.”
“추격자……
“너무 절망할 것은 없다. 엘렌 양 이 명백한 살인자였다면, 수십 명의 마법사들이 추격자가 되어 쏟아져 나왔겠지.”
“추격자가 적은 게…… 궁전의 뜻 이 하나로 모이지 않았다는 증거라 는 말씀이시군요.”
“정확하다.”
탁자를 두드린 왕자는, 씩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하지만, 추격자는 피하는 게 좋을 거다. 그들에게 잡혀도, 그들을 해쳐 도 문제가 될 테니까.”
“맞습니다.”
“곧 아일란트에서 배를 탈 것 같다 더군. 아마 닷새쯤 후면 이곳에 도 착하겠지. 최대한 빨리 떠나라.”
나는 추격자들의 동향이 담긴 쪽지 를 살피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전하.”
“ 음?”
“왜, 어째서 저희에게 이런 호의를 베푸십니까?”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던 왕자는, 이내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는 위험에 빠진 사람을 보면 참 지 못하는 성격이다.”
“음, 대답이 부족했느냐?”
“……저는, 왕자님의 진심을 알고 싶습니다.”
“진심이라.”
왕자는 잠시 탁자를 두드리더니,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군 막을 열어젖히더니 하늘을 올려다보 는 것이었다.
“포이닉스. 너는 영웅이다.”
“……제가요?”
나도 모르게 멍청한 목소리로 대답 하자, 울카르 왕자는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너는 영웅이다. 기이한 소문 을 수도 없이 달고 다니지만, 내 눈 을 속일 수는 없다. 너는, 영웅이 다.”
“어, 왕자님께서, 음. 죄송하지만,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착각이라?”
“네. 전 영웅 같은 게 아닙니다.”
먹구름 사이로 얼굴을 드러낸 태양 은, 어느새 서편으로 기울어가고 있 었다. 저 멀리 주황빛으로 물든 수 평선에 눈을 고정한 채, 울카르 왕 자가 말했다.
“그러면, 왜 도망치지 않았느냐?”
“예?”
“너를 해변으로 보냈을 때. 왜 도 망치지 않았느냐? 내가 너를 의심하 고 있는 걸 눈치챘느냐?”
해변으로 보내? 아, 서신을 전하고 사우스하버로 돌아갈 때 말인가?
“어, 절 의심하셨습니까?”
잠시 웃음을 터뜨린 왕자는 대답 대신 또 다른 질문을 던졌다.
“어인족의 마녀를 잡은 날. 왜 혼 자서 소금성에 들어갔느냐?”
“……안에 전우들이 있었습니다.”
“기는 용이 나타났던 날. 왜 도망 치지 않고 끝까지 싸웠느냐?”
도망치고 자시고, 그 새끼가 쫓는 게 나였는데…….
내 망설임을 오해했는지, 왕자는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남색 눈동자가 눈부실 만큼 빛나고 있었 다.
“그 공들을 세우고도, 왜 아무런 보상도 먼저 요구하지 않았느냐?”
도시에 지진이 난 게 나 때문인데, 무슨 염치로 보상을 더 받아…….
“자, 대답해 보아라. 이래도 네가 영웅이 아니란 말이냐?”
“……아닌데요.”
뭐가 그리 웃긴지, 울카르 왕자는 한참 동안 배를 잡고 웃어댔다.
그 커다란 웃음소리에 사람들이 모 여들었다.
기사와 친병들, 지휘관과 하사관들, 왕자를 기다리던 도시의 관리들, 판 석을 갈던 인부들까지. 왕자의 웃음 소리에 이끌려 모여들었다.
한참 동안 이어지던 웃음이 뚝, 하 고 그쳤다. 왕자는 불타는 눈을 들 어 나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 욕심에 끝도 없이 불을 지피는구나.”
“욕심이라니, 무슨.”
“내 호의가 과하다고 생각하느냐?”
“어음, 그게 기분이 나쁘다는 뜻은 아니고……. 그저 이 과분한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뭐, 그런,”
“내가 그 방도를 알려주마. 무릎을 꿇어라.”
단호한 목소리.
“네?”
“용병 포이닉스는 무릎을 꿇어라. 어서!”
낮은 호통. 왕자의 눈빛에 압도된 나는 무의식중에 한쪽 무릎을 꿇었 다.
챙!
울카르 왕자가 검을 뽑아 들자, 물 결치는 칼날을 따라 저녁노을이 산 산이 흩어져 내렸다.
왕자가 뻗은 검의 칼등이, 천천히 내려와 오른쪽 어깨에 닿았다.
“주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교회를 수호하고 이단을 구축하라.”
부드러운 호를 그린 칼등이 왼쪽 어깨에 닿았다.
“사자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왕에 게 충성하고 귀족을 공경하라.”
노을에 물든 칼등이 정수리에 닿았 다. 그리고 이어지는, 선명한 속삭 임.
“나의 이름으로 명하노라. 앞선 모 든 것들을 잊고, 약자를 보호하며 선을 행하라.”
……잠깐만. 이거, 설마?
“용병이었던 포이닉스여, 이젠 기 사로서 일어나시오.”
네? 기사요?
왕자의 정중한 목소리에, 나는 떨 떠름한 표정으로 몸을 일으켰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사방에 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왕자의 기사들은 만면 가득 미소를 띤 채 다가오더니 어깨를 감싸고, 등을 두 드려 대었다.
그때 들려오는 랭볼트 경의 목소 리.
“기사가 된 것을 축하하오, 포이닉 스 경.”
포이닉스 경?
황혼이 드리운 광장에 함성이 차올 랐다. 도시의 구원자들이 주종의 연 으로 이어짐을 축복하는 함성.
그래. 날치기에 가까운 서임식을 통해, 난 은왕자의 일곱 번째 기사 가 되었다.
……X팔, 맙소사.
“뭐? 너 미쳤어?”
엘렌이 입을 벌리며 고함을 지르 자, 나는 한숨을 폭 내쉬었다.
“나도 미치는 줄 알았어. 어어- 하 다 보니까 서임식이 끝나 있더라 고.”
“……내가 지금껏 살면서 들어본 소리 중에 최고로 멍청한 소리야.”
……할 말이 없구만. 나도 내가 이 런 멍청한 소리나 늘어놓고 있을 줄 은 몰랐다.
“아니, 다른 귀족도 아니고. 제오레 왕가의, 그것도, 울카르 왕자한테 서 임을 받아?”
“그, 너무 걱정하지 않아도 돼. 종 군을 해야 되는 것도 아니고, 그냥 신분만 기사가 된 거니까,”
“이 얼간아, 그게 그렇게 간단한 일인 것 같아? 울카르 왕자가 적이 얼마나 많은데!”
“야, 목소리.”
막 루게 거리에서 광장으로 접어들 고 있던 차였기에, 엘렌은 얼른 입 을 다물며 주변을 슬쩍 살펴보았다.
나는 그 틈을 타서 얼른 변명을 늘어놓았다.
“야, 그래도, 왕자님이 엄청 많이 배려해 주셨어. 왕자님의 기사라는 걸 항상 밝힐 필요도 없고, 나중에 종군할 마음이 들면 찾아오래. 의무 같은 것도 없다니까?”
“하, 의무가 없어? 제발, 멍청하면 닥치고나 있어.”
“야, 말 좀 예쁘게 안 할래?”
“예쁜 짓을 해야 예쁜 말을 하지! 너, 지금 침 발린 거야, 이 멍청아.”
“침?”
“그래. 다른 귀족들이 못 채가게, 왕자가 너한테 침 발라둔 거라고.”
“……그게 왜 문제야? 나 어차피 기사 노릇 할 생각 없는데?”
“하지만 너…… 그럼 평생 용병질 이나 하면서 인생 허비할 거야?”
“용병이 뭐 어때서? 돈도 잘 벌잖 아.”
내 말에 엘렌은 말문이 막힌 듯 나를 빤히 바라보더니 폭 한숨을 내 쉬었다.
“그리고, 이것도 받았어.”
“뭔데, 이게?”
내가 양피지 두루마리를 건네자, 엘렌은 인상을 찌푸리며 펼쳐 보았 다. 그러더니, 이내 눈을 휘둥그레 뜨는 것이었다.
“……‘라발턴 장원 권리증’? 너, 땅 도 받았어?”
“마을이 2개에, 호수도 딸린 장원 이래. 꽤 넓고, 사람이 삼백 명 가 까이 산다더라.”
“바보야, 이런 걸 무턱대고 받으 면…… 하아.”
엘렌이 이젠 짜증도 안 난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리자, 나는 피식 웃으 며 말했다.
“그거 있으면 마법사 패 검사 안 한대. 귀족이라는 게 증명돼서.”
“……뭐?”
“새로운 영지나 도시에 가도 마음 졸일 필요 없다고. 너 가져.”
잠시 멍하니 나를 올려다보던 녀석 은 입술을 꾹 앙다물었다.